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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1. 동거 제안 (10/17)

외전1. 동거 제안

“뭐야, 형. 사귀고 싶은 거 아니라며.”

“응?”

이연은 빈정거리는 얼굴을 한 채 팔짱을 낀 차도윤을 올려다보았다. 멋들어진 정장을 입은 그는 오늘 평소보다 훨씬 성숙해 보였다.

“좋아만 하는 거지, 안 사귈 거라며.”

“전무님이랑?”

“그럼 누구겠어요. 형 오늘 누구 옆에 딱 달라붙어서 들어왔는데.”

“아…… 전무님이, 초대해주셨어. 기부하고 싶으면 기부도 하래. 나 기부하고 싶어서 왔어.”

“지금 기부가 문제예요? 내일 세원 장남 결혼한다고 1면 도배되게 생겼는데.”

“전무님이, 결혼을? 왜, 왜……? 왜 그런 기사가 나는 거야?”

“하…….”

차도윤은 처진 눈매 한가득 불안함을 담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서이연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대한민국 정재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모두 모인 연말 자선행사에, 세원 후계자 차주원이 처음으로 파트너를 끼고 참석했다. 베타도 아닌 오메가를. 그런데 난리가 안 나는 게 이상하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무도 차주원에게는 말을 붙일 엄두를 못 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서이연 주위에 서서 말 걸 타이밍만 노리고 있는 사람이 수십 명이었다. 차도윤은 저 멀리 장관과 인사하고 있는 차주원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러려고 부른 거지…… 왜 귀한 몸께서 굳이 전화까지 하셨나 했네. 서이연의 보디가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강제로 불려온 차도윤이 샴페인을 들이켰다.

“형. 언제부터 사귄 거예요.”

“누구랑 누구랑?”

“……형이랑 차주원.”

“아, 전무님이랑 나랑 아직 사귀는 건 아니야. 내가 들이대는 중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차도윤이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서이연의 입에서 또 어떤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흘러나올지 흥미진진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확실하게 사귄다고 말한 건 아니어서…….”

“그럼 뭐라 그랬는데.”

“아, 나는 엄마 아빠만큼 전무님 사랑한다고 그랬고, 전무님도 나 사랑한다고 해주셨어.”

“…….”

“……내가 먼저 사귀자고 해도 될까……? 네 생각은 어때?”

“확실히…… 아직 사귀는 건 아닌 것 같네요.”

“응…….”

“…….”

씨발, 그건 사귀자는 게 아니라 프러포즈지. 둘 다 연애 한 번도 안 해봤어? 뭐 하는 거야…… 아니, 서이연은 그렇다 쳐도 차주원 저 새끼는 뭔데. 씨발, 나한테 그런 고백 했어 봐, 당장 집부터 합친다. 그다음 날 바로 혼인신고야…… 결혼식은 발리 바닷가에서…… 신혼여행은…….

“씨발…….”

갑자기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차도윤을, 이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도윤아 그런데, 곧 전무님 생일이잖아. 생일잔치는 어디서 해?”

“생일잔치…… 저 새끼가 그딴 걸 왜 해요. 사람 많은 거 제일 싫어하는 새낀데.”

요즘 초등학생들도 생일잔치란 단어는 안 쓰겠다…… 차도윤은 서이연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아…… 그래? 나 요즘 생일 선물 고민하고 있어. 너는 뭐 줄 거야?”

“선물을 왜 줘요. 차주원이 없는 게 뭐가 있다고.”

차주원이 전화 한 통으로 구할 수 없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은데 선물까지 줄 필요가 있나. 그러나 새로운 샴페인을 집어 든 차도윤은 순간 이연의 난처한 표정을 발견했다.

순식간에 풀이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서이연이 샴페인 잔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이놈의 입…… 차도윤은 이연에게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형이 주는 거면 뭘 줘도 좋아할 거예요.”

씨발…… 차도윤은 자신이 드라마에서나 나올 이런 진부한 대사를 입 밖으로 뱉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고마워 도윤아…….”

그러나 그 말에 살짝 미소 짓는 이연의 얼굴을 눈에 담자,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커다란 눈이 접혀 반달모양으로 휘자, 더 귀여워진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차도윤이 입을 열었다.

“형. 그런데…… 나이 많은 사람이랑 만나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어?”

“아니 그냥. 뭐. 잠자리도 그렇고…… 연하가 밤일은 더 잘하잖아.”

“응?”

서이연은 차도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장 속에 숨겨진 진의 따위는 파헤칠 의지도 없는, 아니, 어떻게 사람의 말속에 숨겨진 진의 같은 게 있을 수 있냐는 듯한 순진한 눈이었다.

“하아…… 아니다. 형, 이때까지 제일 오래 사귄 사람이랑 얼마나 사귀었어요.”

일 년이든 이 년이든, 차도윤은 기회를 노리며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아…… 나 누구랑 사귀어 본 적 없는데…….”

이연이 작게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부끄러워하는 이연의 모습에, 차도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

씨발…… 차주원 이 날강도 새끼가…… 저 하얀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걸 봤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다. 눈치는 밥 말아 먹은 서이연에게 애인이 있었을 리가 없지. 주변에서 아무리 작업을 걸어도, 절대 단순한 호의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도윤이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무슨 얘기 해.”

“전무님!”

어느새 다가온 차주원이 이연에게 살짝 미소 지었다. 이연은 값비싼 정장 차림에 샴페인을 손에 들고 있는 차주원의 모습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왕자님 같아…… 이연은 볼이 발갛게 물드는 것도 모르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맹목적인 눈이었다.

“지루하지 않아?”

“아뇨! 구경할 거 많아서 너무 재밌어요. 샴페인도 맛있구…….”

“다행이네.”

“야. 나는 안 보이냐?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 되지 않냐.”

아무리 배다른 동생이어도, 이런 큰 행사에 제 오메가 보디가드나 하라고 부르는 형이 어딨는가. 그리고 어떻게 연애 경험도 없는 순진한 오메가를 꼬셔 이렇게 공식적으로 제 것이라 못 박을 수가 있는가.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차도윤은 차주원의 치밀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고맙다.”

“…….”

차도윤은 진심이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들어있지 않은 건조한 얼굴로 고맙다는 말을 태연히 내뱉는 차주원을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서이연의 어깨를 감싸고 발코니로 사라지는 꼴이라니. 주위 시선은 신경도 안 쓰나. 너 내일 결혼 스캔들 날 거라고. 예전에는 사진 한 번 찍힌 걸로 신문사를 고소하네 마네 거리더니…… 너 같은 소시오패스도 이연이 형 앞에서는 별수 없구나. 꼴 좋네.

“……씹.”

씨발. 꼴이 너무 좋아서 욕이 자꾸 나온다. 차도윤은 손에 쥔 샴페인 잔을 다시 한 번에 비운 뒤, 위스키를 찾아 바 쪽으로 향했다.

“전무님!”

서이연은 아무도 없는 발코니로 나오자, 바로 차주원의 허리에 양팔을 감았다. 향수 냄새 밑으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그의 체향을 킁킁거려 보기도 했다. 차주원은 자신의 가슴팍에 딱 달라붙어 있는 아기 매미를 즐거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머리 이렇게 하니까 색다르네.”

차주원은 쉼표 모양을 한 이연의 앞머리 끝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전무님 머리 해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어울릴 것 같아서, 반만 올려봤어요. 저 예뻐요?”

“하하. 어. 예뻐.”

“…….”

순순히 예쁘다는 말이 돌아올지 몰랐던 이연이 순간 흠칫 굳었다. 놀란 표정을 정리할 정신도 없었다. 그에게 마음을 고백한 후부터, 차주원이 이상할 정도로 다정했다. 진짜로 사귀자고 말해볼까…… 이연은 그의 품에 고개를 묻고 한참을 콩닥거리는 마음을 진정한 후에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전무님, 저 얼마 기부할까요?”

“하고 싶은 만큼 해.”

“전무님은 얼마 하시는데요?”

“이십억.”

“……네?”

이연은 순간 이십만 원을 잘못 들었나 했다. 억……? 천만 원 곱하기 십 곱하기 이십……? 그게 도대체 얼마야…….

“그만큼이나 해도 돼요? 안 잡혀가요?”

“하하하.”

놀란 이연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내뱉은 말에, 차주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저는, 오백만 원, 하려고 했는데…….”

“장소혜 출연료였나.”

“네…… 처음 조연으로 출연한 거라, 기부하고 싶어서…….”

이십억이라는 단위를 듣고 나니 괜히 오백만 원을 기부하는 게 민망해졌다. 나한테는 큰돈인데…… 전무님한테는 껌값이려나…….

괜히 민망해진 이연이 난간에 팔을 괴고 서 있는 차주원의 새끼손가락에 검지를 걸었다. 깍지를 끼기에는 부끄러워서 소심하게 갈고리를 건 검지가 작고 하얬다.

이연의 검지를 가만히 바라보던 차주원이 속삭이듯 그의 이름을 부른 건 한참 후였다.

“이연아.”

“네……?”

이연은 괜히 차주원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요즘에는 그가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볼이 빨개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 성을 떼고 부르시는 거야…… 너무 좋잖아…….

“혼자 사는 거, 외롭지 않아?”

“아…… 외로워요. 그런데 요즘에는 전무님 집에 자주 놀러 가서, 전보다는 훨씬 안 외로워요.”

“하하. 놀러 오는 거였어?”

“……? 네…… 저희 같이 놀았잖아요.”

“그러게. 재밌게 놀았네.”

차주원의 올라간 입꼬리를 바라보느라 발갛게 익어버린 이연의 볼을 차가운 겨울바람이 식혀주었다. 이연은 새까만 밤하늘에 박힌 별빛 아래 서 있는 차주원이 참 아름다워 보인다 생각했다. 하늘색과 그의 검은 정장의 색이 같았다.

차주원이 물끄러미 저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몇 번을 열리다 닫힌 그의 입에서 차분하지만 확신이 가득한 물음이 새어 나온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우리 같이 살까.”

“……네?”

이연은 숨을 들이쉬는 법도 잊고 입을 벌렸다.

“놀러만 오지 말고, 같이 살래.”

“…….”

이연은 지금 차주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커다란 눈만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같이 사는 건, 가족끼리 그러는 건데…… 가족…… 전무님이랑, 같이 살면,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잠들 수 있다는 건가……? 저녁도 같이 먹고, 같이 씻고, 산책도 하고? 전무님 같은 예쁘고 도도한 사람이랑……?

“……전무님…….”

“응.”

“같이, 같이요?”

“어.”

“같은, 집에서 사는 거요?”

“하하. 어.”

“같이, 같은 침대에서 잠도 자구요?”

“응.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저녁도 같이 먹고, 집에 들어오면 잘 다녀왔다고 인사도 하고.”

이연은 아무런 말도 바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조여왔다. 뜨거워지는 눈두덩이를 무시하며 애써 울음을 누르려 노력하고서야, 더듬더듬 대답할 수 있었다.

“……저는, 저는 너무…… 너무 좋아요…… 전무님이랑 꼭, 같이 살고 싶어요…… 흐윽.”

“왜 울어.”

차주원이 울먹이는 이연을 품에 가뒀다.

“같이, 사는 건, 이제 못 할 줄 알았어요……흐으.”

“…….”

“가족이 없으니까, 저는 아무도 없어서…… 그래서…….”

“이연아.”

“흐으, 네에…….”

“사랑해.”

“흐으…… 저도요…… 저도, 전무님 많이, 사랑해요…….”

이연은 차주원의 품에 안겨들며 웅얼거렸다. 작은 오메가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고, 순한 체향을 들이마시는 차주원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눈꼬리를 휘며 웃는 그의 얼굴에서, 더는 티끌만큼의 불안도 찾을 수 없었다.

3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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