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인연 (8/17)
  • 6. 인연

    “어!”

    -소리 지르려고 전화했어?

    차주원과 히트 사이클을 보내고 며칠 지나지 않아, 대본 연습을 하던 서이연은 문득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냥 그랬다. 차주원에게 전화를 시도한다는 행위 자체를 하고 싶은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런 작은 용기를 내고 싶은 날.

    그러나 신호 연결음이 끊기더니 갑자기 차주원의 낮은 목소리가 귀로 흘러들어와, 이연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 아니, 전, 무님…… 일어나 계셨네요.”

    -여덟 시에 자진 않지.

    “네에…….”

    -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귓불을 긁었다. 이연은 괜히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귀를 쓸었다.

    “아, 저, 대본 연습하고 있었는데…… 전무님 생각이 나서요.”

    차주원과 히트 사이클을 보낸 후, 이연은 며칠 동안 꽤 달콤한 기억 속에서 허우적대야 했다. 다정하게 자신을 얼러주던 그의 목소리라든지, 볼과 목에 쉬지 않고 닿던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 거센 성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안정적으로 감싸오던 그의 페로몬 같은 것들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래서 전화했어?

    “네에…….”

    -이제 페로몬은 정상인가?

    “네, 그때, 전무님이 잘, 어…… 돌봐 주셔서…….”

    -그래.

    “…….”

    -…….

    “전무님, 저, 한 번씩 전무님한테 전화 걸어도 돼요?”

    -네가 하고 싶으면.

    “귀찮지 않으세요?”

    -글쎄. 오늘은 괜찮은데.

    이연은 그의 대답이 너무나 기뻤다. 뒤이어 성급하게 점심 메뉴에 대한 말을 꺼낸 것도, 기쁨이 주체가 되지 않아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이 먼저 나간 것이었다.

    “저, 오늘 전무님 카드로 짜장면 먹었어요.”

    그와 자신의 일상을 나누고 싶었다. 먼저 나누면 그의 일상 한 조각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잘했어.

    “탕수육은 안 먹었어요. 다 못 먹을 것 같아서요. 혼자는 다 못 먹잖아요.”

    -다음엔 같이 먹자고?

    “네? 전무님, 짜장면 드세요?”

    이연은 차주원의 물음에 깜짝 놀랐다. 같이 먹었으면 하고 말한 건 아닌데, 아니 물론 같이 먹으면 정말 좋겠지만, 그가 먼저 이런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항상 도도한 모습만 보이던 그였기에…….

    -먹을 순 있지.

    “아, 그럼 같이 먹어요…… 전무님이랑 같이 먹고 싶어요.”

    -……그러든가.

    “헤헤.”

    -…….

    “요즘 회사 일은 바쁘세요?”

    -안 바쁜 날을 꼽기가 더 힘들지.

    “정장 입고 하루 종일 일하면 힘들 것 같아요…….”

    -정장?

    “네. 전무님 정장 엄청 꼿꼿하잖아요. 주름도 없던데…… 그거 하루 종일 입고, 일까지 하면…… 많이 갑갑할 것 같아요.”

    -글쎄. 적응돼서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저도 정장 입고 일해보고 싶기는 해요! 이때까지 정장 입어야 하는 역할을 맡은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카드로 사면 되잖아.

    “네…… 전무님, 그런데, 저한테 정장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머리두…… 전무님처럼 그렇게 다 넘겨보고 싶은데…….

    -……실제로 봐야 잘 어울리는지 아닌지 알지.

    “하긴, 그렇죠? 다음에 한번 그렇게 입어볼까 봐요.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이연은 무릎에 고개를 묻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팔을 파닥거리기도 했다. 그와 전화를 이렇게 오래 하는 것 자체가 처음인 데다, 대화가 물 흐르듯 진행되고 있었다.

    -……대본 연습 계속해야지.

    다시 핸드폰을 귓가에 대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전무님 바쁘시죠. 그런데 저희 언제 또 만나요?”

    이연은 전화를 끊기 싫어 괜히 말을 걸었다.

    -곧.

    “네…… 전무님 그럼 저 전화 끊고 연습할게요…… 전무님 푹 쉬세요.”

    -그래.

    “…….”

    -…….

    “안녕히 계세요…….”

    -어.

    “…….”

    -…….

    이연은 통화 너머 그의 기척에 집중한 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정지해있었다.

    “…….”

    -서이연.

    “네?”

    -끊어, 이제.

    “네…… 빨리 보고 싶어요.”

    -…….

    “끊을게요…….”

    -그래.

    “…….”

    -…….

    달칵-

    아쉽기만 한 짧은 통화였다. 한 번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평소보다 더 낮은 목소리를 매일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한참 고민하던 이연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매일 전화하면 되지…… 해보고 안 받으면 안 받는 거니까…… 안 받아도 괜찮아. 그래도 받으면 통화할 수 있잖아.

    그렇게 이연은 매일 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입에서 이제 그만하라는 말이 언젠가 나올 것 같아서, 하루라도 전화를 하지 않으면 하루를 낭비한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통화는 보통 짧게 끝나고는 했지만, 길게는 몇 시간 동안이나 이어지기도 했다. 서이연은 졸음기가 묻은 목소리를 숨겨보려고 했지만, 차주원은 언제나 그를 기민하게 눈치채고 전화를 끊었다. 그럴 때면 이연은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또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저 이제 일어났어요…… 전무님은 어제 몇 시에 주무셨어요?]

    [전무님, 저 촬영장이에요. 씩씩하게 잘하고 올게요!]

    [저 오늘은 족발 사 먹었어요. 남은 족발은 냉장고에 넣어놨어요. 내일 먹을 거예요. 막국수는 같이 안 샀어요. 다 못 먹을 것 같아서요.]

    [(사진) 가래떡 사 먹었어요. 찹쌀떡두요.]

    이런저런 문자를 보내면, 차주원은 ‘새벽에.’, ‘그래.’, ‘맛있었겠네.’, ‘많이 좀 사.’ 등의 답신을 보내왔다. 대부분의 답장은 ‘그래’였다. 이연은 차주원의 낮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로 그 두 글자가 읽히는 것을 상상하며 살포시 미소 짓고는 했다.

    그와 연락을 자주 하게 되며, 이연의 마음속에 얹혀 있던 불안감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이전에 크게 촬영을 망친 일이 있었음에도, 드라마 촬영을 순조롭게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이연은 차주원과의 따뜻한 잠자리가 감명 깊고 단단한 위로가 되었다 생각했다. 다음 촬영에서 김정식을 마주하더라도, 그가 또다시 못된 말을 퍼부어도, 멋지게 연기를 해내리라 결심도 했다. 그리고 그럴 자신이 있었다. 제 곁에는 저를 믿어주는 후원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이연은 김정식이 드라마에서 하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건강 문제로 하차한다는 얘기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자세한 사항은 공개하지 않는 데다가, 이미 촬영을 진행하던 드라마에서 하차한다니…… 이연은 김정식을 다시 만나게 되면 꼭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자신이 부족해 보이는 건, 사람이라 실수해서 그런 거지,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저번에 들은 말에 대해서는 사과받고 싶다고.

    “이번엔 제대로 얘기하려고 했는데…….”

    한숨을 푹 쉬는 이연의 눈매가 처져 있었다.

    “이연 씨, 대기실에 이연 씨 손님 왔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뻗어 나가기도 전에, 조연출이 이연을 불렀다. 이제껏 한 번도 지인이 촬영장을 찾은 적은 없는데…… 사장님이 찾아오기라도 하신 걸까. 다음 촬영까지 두 시간 정도가 비어 있음을 확인한 이연은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이연이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도윤아!”

    “형.”

    그날 함께 술을 마신 이후로 간간이 문자만 주고받던 차도윤이었다. 이연은 그와의 일로 차주원에게 혼났던 것을 굳이 차도윤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촬영 준비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그와 만남을 여러 번 미루기만 했다.

    “어떻게 왔어……!”

    “형 바쁜 것 같아서. 놀러 와봤어요. 내 친구도 배우거든. 이 근처에서 촬영 있대서요.”

    “아…….”

    이연은 차도윤이 자신을 보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랜만에 그를 만나 반갑기는 했지만, 그와 저녁 한 번 먹었다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차주원과의 관계가 얼마나 틀어졌었는지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차도윤은 안부를 물어왔지만, 이연은 자꾸만 떠오르는 그날 밤의 기억 때문에 도통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기에, 이연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도윤아, 혹시…….”

    서이연이 쩔쩔매며 말을 늘였다.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차주원에게 그날의 일을 말했는지. 말했다면 어디까지 말했는지.

    그날, 차주원은 커다란 얼음이 깨져 날카로운 파편이 이리저리 튀는 것같이 화를 냈다. 그리고 그 파편은 아직 이연의 가슴 속에 깊은 불안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차주원은 분명 차도윤과 자신이 스킨십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기색이었지만,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차도윤의 강제였다고 말하라며 무섭게 다그쳤을 뿐.

    “왜요, 형.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무슨 일 있는 건 아닌데…….”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해해.”

    차도윤은 부산스레 꼼지락거리고 있는 서이연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화들짝 놀란 이연은 손을 빼내려 했으나, 차도윤은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왜요. 빼고 싶어?”

    “도윤아, 우리, 이럼 안 돼…….”

    서이연은 손을 빼내려 낑낑거리면서도, 울먹한 눈을 들어 차도윤에게 애원했다. 그리고 차도윤은 그런 서이연을 재밌다는 듯 내려다보며 말했다.

    “차주원이 알았구나.”

    “…….”

    다른 손으로 차도윤에게 잡힌 손을 빼내 보려 하던 이연의 행동이 멈췄다. 입술이 잘게 떨려오는 것이 느껴짐과 동시에, 시야에 겹쳐진 두 개의 손이 보였다. 그때도 이랬다. 차도윤이 자신을 잡고 놔주질 않아 키스까지 해버렸다. 그래도 형인 자신이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차주원의 체념한 듯한 얼굴과 그만하자고 말하던 그의 낮은 목소리만 생각하면, 이연은 아직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듯했다. 그는 잘게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고 말했다.

    “도윤아…… 네가, 네가 말했어? 전무님한테?”

    이연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내가 그런 것 같아요?”

    차도윤은 서이연의 커다란 눈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눈동자에 시선을 두며 물었다.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전무님이 다 알아…… 다 알고 계셨어…….”

    서이연이 차오르려는 눈물을 꾹 참고 말했다. 이연의 울먹거리는 표정을 보자, 호선을 그리고 있던 차도윤의 입꼬리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

    “형. 괜찮아요?”

    “응?”

    “차주원이 알았다며. 그 새끼가…… 가만히 있었어요?”

    “……응. 그냥, 조금 혼나고, 화해했어.”

    “조금 혼나고?”

    “응…….”

    “그게 뭔데. 자세히 말해봐요.”

    “이제 화해했으니까 괜찮아…….”

    “맞았구나.”

    “도윤아.”

    “때릴 데가 어딨다고 때려, 그 새끼는.”

    차도윤이 서이연의 손을 거칠게 놓으며 등을 돌렸다. 이연이 한숨을 내쉬는 차도윤을 쫓아가 그 앞을 막았다.

    “맞은 거 아니야!”

    “……하.”

    “왜 내 말은 안 믿어줘?”

    아예 자신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 그의 모습에, 이연은 조급함을 느꼈다. 자꾸만 바보 같은 행동으로 형제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믿어요.”

    차도윤은 서이연의 절박한 말에 어쩔 수 없이 무심한 믿음 한 조각을 들려주었다.

    “형 믿어도 돼, 도윤아.”

    서이연은 동그란 눈을 맞춰오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당당하게 어깨를 편 소동물 같아 보여, 차도윤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진짜 귀여워.”

    이연은 환하게 웃는 어린 동생이 더 귀엽다고 생각하며 살포시 웃었다. 덩치는 크지만 확실히 나이가 어린 티가 나는 동생과 이야기하다 보니, 괜히 더 힘을 줘 얘기하게 된다. 이것도 물론 그가 형 대접을 해주니 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멋대로 키스해서 미안해요, 형.”

    차도윤이 이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린 치기로 물들었던 얼굴에 이연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이연의 하얀 얼굴을 샅샅이 훑는 눈동자가 혹시 있을지 모를 상처를 찾고 있었다.

    “나도 술에 많이 취했었어…… 우리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

    이연은 차도윤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풀이 죽은 듯한 그의 모습에 절로 손이 갔는데, 생각보다 어깨가 높은 곳에 있어 팔을 거의 일자로 들어 토닥여야 했다.

    “앞으로? 형, 평생 차주원 스폰 받을 거예요?”

    “어……?”

    그러나 서이연은 생각지도 못한 차도윤의 물음에, 그의 어깨를 토닥이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건 아니잖아. 차주원 스폰 끝나면 나한테 와요.”

    “무, 무슨…….”

    “스폰하는 거 어려워요? 투자금이라고 돈 몇 푼 쥐여주면 되는 거 아니야?”

    서이연은 조금 전 사과를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눈빛을 한 차도윤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나는, 난, 전무님이랑…… 계속 이렇게 지내고 싶은데…….”

    “이렇게 지내는 게 뭔데. 결혼이라도 할 거예요?”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좋아한다며.”

    “좋아, 하는데…… 전무님은 임자도 있을 거고…… 난, 난 그냥…….”

    임자라니, 차도윤은 서이연의 단어 선택에 또 한 번 감탄해야 했다. 요즘 찍고 있는 게 사극은 아닐 텐데.

    “임자는 무슨. 그 소시오패스랑 누가 결혼을 해준다고.”

    “아, 아닌데……. 소시오, 패스…….”

    서이연이 자신 없는 목소리를 뱉었다. 차도윤은 동정을 담은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푹 쉬며 그의 통통한 볼을 잡아 늘였다.

    “형. 정신 똑바로 차려요. 응?”

    “으으……?”

    “그러다 잡아먹혀.”

    “으으, 나 저!”

    이연이 볼을 놔달라며 웅얼거리자, 차도윤이 씨익 웃으며 말랑한 볼에서 손을 뗐다.

    “나 갈게요, 형. 촬영 잘하고, 또 연락해요.”

    “으응…… 도윤아, 잘 가. 친구 잘 만나고…….”

    “응. 잘 있어, 형.”

    차도윤이 손을 팔랑거리며 사라지자, 이연은 발개진 듯한 볼을 매만지며 소파에 풀썩 앉았다. 생각에 잠긴 듯한 앳된 얼굴이 심각했다.

    차주원과 결혼할 사람…….

    그의 스폰을 받게 된 이후, 이연은 한동안 차주원의 이름을 매일 매일 검색했었다. 대부분은 회사와 관련한 기사들이었지만, 딱 한 번 다른 재벌가 자제와 스캔들이 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당연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차주원은 다른 재벌가의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고. 그리고 단순하게도, 그 이후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냥, 좋아만 하면 되니까…….”

    이연이 작은 다짐을 중얼거렸다. 차주원과 애인 사이가 되거나 하는 건,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그저 그가 부드럽게 만져주는 게 좋고, 그의 페로몬이 좋고, 보기 드물지만 시원한 미소도 좋고, 체향과 섞인 묵직한 향수 냄새도 좋고, 커다란 몸으로 안아 주는 것도 좋고, 힘들 때 곁에 있어 주는 것도 좋다.

    그냥 그 사람 자체가 좋은 거지, 애인이 되고 싶은 건 아냐.

    서이연이 차주원과의 부드러운 키스를 떠올리며 볼을 붉혔다.

    달칵-

    “이연 씨, 감독님이 찾으세요.”

    “네, 바로 갈게요!”

    이연은 달콤한 상상을 멈추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전력을 쏟아야 하는 전쟁터로 씩씩하게 발을 디뎠다. 후원자가 마련해준 소중한 기회에 보답하기 위해.

    *

    “와!”

    이연은 차주원의 연락을 받고 폴짝 뛰었다. 항상 날짜와 호텔 방 번호만 덩그러니 오던 문자에, 식당 이름으로 보이는 장소가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녁…… 전무님이랑 저녁!”

    자신이 매일 자신의 저녁 메뉴를 차주원과 공유했기 때문일까,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싶다 중얼거렸기 때문일까. 이연은 차주원이 먼저 제안해준 저녁 약속에 기뻐 어쩔 줄 모르며 몸을 흔들었다.

    온몸으로 한바탕 기쁨을 표출하는 의식을 치르고 나서는, 서둘러 핸드폰으로 장소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항상 그와 만나는 호텔에 위치한 중식 레스토랑이었다. 메뉴를 살펴보니 일반적인 중식당처럼 짜장면과 탕수육, 짬뽕도 있었지만, 한 번도 먹어본 적 음식들이 더 많았다.

    “짜장면이…… 비싸네…….”

    그러나 음식 가격을 확인한 후에는, 기뻐서 한껏 올라가 있던 이연의 어깨가 천천히 처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고급 호텔 식당이라 그런지, 일반적으로 사 먹던 짜장면 가격의 네다섯 배는 되는 것 같았다.

    “탕수육도…… 비싸네…….”

    차주원과 함께 먹는 저녁이니, 탕수육도 시켜서 나눠 먹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그의 의견을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가격에 대한 걱정도 곧 머릿속에서 흩어졌다. 전무님과 함께 저녁이라니. 항상 호텔에서 만나서 섹스만 했는데…… 히히, 이연은 작게 웃으며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 굴렀다.

    “데이트다~ 데이트~”

    이연은 한참이나 전무님과의 데이트라는, 방금 직접 만든 노래를 흥얼거리며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했다.

    “도도하고 새침한 남자랑 데이트~ 탕수육! 동파육!”

    이연의 뽀얗고 가는 다리가 오랫동안 침대 위에서 살랑거렸다.

    *

    차주원과의 약속 당일, 먼저 도착한 이연이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자리는 전면 유리창 너머 아름다운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프라이빗 룸이었다.

    이연은 또 유리창에 이마를 붙인 채 한참 동안 야경을 감상했다. 잠시 후 도착한 차주원은 발개져 있는 그의 이마를 보고 피식 웃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차주원은 다 못 먹을 걱정 따위 하지 말고 먹고 싶은 것을 모두 주문하라 일렀다. 이연은 그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짜장면과 탕수육을 주문했다. 그러다 이연은 문득 그가 짜장면 파일지, 짬뽕 파일지 궁금해져서 그가 메뉴판을 넘기는 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값비싼 정장을 입고, 커다란 메탈 손목시계를 찬 그는 누가 봐도 지위가 높은 기업인의 모습이었다. 이연은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올린 그의 머리를 보며, 아무리 상상을 해 봐도 저 머리가 제게 잘 어울릴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과연 나도 그처럼 섹시해 보일 수 있을까. 괜히 이런 얼굴로 저런 머리를 해봤자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턱시도 입은 남자애같이 보이진 않을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나 평화롭게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잠시였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기 위해 룸 안으로 들어오고 차주원이 주문을 읊기 시작했을 때, 이연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무심하게 메뉴를 넘기며 열 가지도 넘는 음식을 줄줄 읊었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차주원의 주문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연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울상을 지었다.

    어떡해…… 여기 엄청 비싼데…… 아무리 재벌이라도, 이건 아니잖아…….

    주문이 끝나고 룸 안에 둘만 남게 되자, 이연이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전무님…… 저, 저, 저는…….”

    “왜. 또 뭐.”

    차주원은 또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눈썹을 축 늘어뜨린 이연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저는, 돼지가 아닌데요…….”

    “뭐?”

    서이연이 돼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안다. 그는 인간이 아닌가. 차주원은 그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구겼다.

    “아니, 저는, 다 못 먹을 것 같아서…… 전무님은 다 드실 수 있으세요?”

    “왜 다 먹어야 하는데.”

    “네?”

    “못 먹어봤던 거 먹어 봐.”

    이연이 차주원의 발상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만 봐요?”

    “어. 항상 다 못 먹을까 봐 안 시켰다며.”

    “아…… 그래도, 너무 비싼 것 같은데…….”

    “네가 계산하려고?”

    “아, 저도 전무님 사드리고 싶어서 오늘은-”

    “내가 준 카드로 하면 되겠네.”

    “전무님이 주신 카드로요?”

    “어. 네가 사, 오늘은.”

    “전무님 카드로 사는 게 제가 사는 거예요?”

    “카드 내는 사람이 너잖아. 그럼 네가 사는 거지.”

    “아…… 근데 저도 돈 받았는데…… 이제 돈 있어요…….”

    “어. 알겠는데, 내가 준 카드 쓰라고.”

    “그럼, 그러면 이거 진짜 데이트 같은데…….”

    순간, 이연이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을 그만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데이트?”

    이연은 순식간에 굳어버린 차주원의 표정을 바라보며, 또 바보같이 실수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래서 사람은 주제를 알아야 한다. 차주원이 들어오기 직전까지 전무님과의 데이트 노래를 부른 것이 화근이었다.

    “아…… 전무님, 근데, 이거, 이거는 무슨 요리예요? 이름이 꽈배기 같은 거요. 아까 메뉴에 있었는데…….”

    이연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부산스레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아까 여기 있었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열심히 종이를 넘기는 이연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아, 이거요! 꿔, 꿔바, 로우. 이거 뭐예요?”

    “서이연.”

    차주원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메뉴판을 가리키는 이연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춰왔다. 이연은 가까이서 풍기는 그의 묵직한 향수 냄새에, 숨을 내쉬는 것을 멈추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높은 콧날이 가까이 다가오자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네…….”

    “진정해.”

    “네에…….”

    “데이트…… 뭐, 비슷하지.”

    차주원이 의자에 천천히 등을 기대며 말했다.

    “정말요?”

    “섹스까지 한 두 사람이 같이 저녁 먹는데, 데이트에 가깝지 않나.”

    차주원의 말투는 무심하기 짝이 없었으나, 이연은 얼굴 위로 퍼지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 맞아요. 저희 섹스도 엄청 많이 했구, 데이트 맞는 것 같아요.”

    배시시 웃는 서이연의 얼굴을 보며 차주원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스폰하는 배우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 정도는 일상적인 일 아닌가. 이 정도 거리만 유지하면 괜찮겠지. 답지 않게 자기 합리화를 하는 차주원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잠시 후, 동그랗고 커다란 식탁을 꽉 채울 만큼의 음식이 서빙되었다. 이연은 차례차례 식탁에 오르는 음식들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꿀꺽 삼키면서도 얌전히 기다렸다. 이내, 종업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 차주원의 말대로 이것저것 먹어 보기 시작했다.

    “전무님, 이거 진짜 맛있어요.”

    “나쁘지 않네.”

    “이것도 드셔보세요. 입에서 살살 녹아요.”

    “어.”

    서이연은 차주원이 음식을 한 젓가락 먹을 때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가 한입 먹을 때마다 맛있냐고 물어본 후, 괜찮다고 한 음식은 꼭 따라 먹어 보고, 자신이 먹고 맛있다고 느낀 음식은 꼭 그에게도 먹어 보라며 추천했다.

    차주원은 식사하며 이렇게 말을 많이 해본 적은 처음이라 생각하면서도, 서이연이 귀엽게 구는 게 나쁘지 않아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래서, 많이 걱정했었거든요. 그래도 잘 연기했어요. 엔지도 많이 안 냈어요. 연습 많이 한 보람이 있었나 봐요.”

    “잘했네.”

    “눈물 연기는 할 때마다 힘들어요. 예쁘게 울기도 어렵고…….”

    서이연은 매일 저녁 전화를 하며 그렇게나 일상을 쏟아냈으면서도, 또 할 말이 많은 듯 재잘거렸다.

    “아, 사장님이, 세원에서 연락 왔대요. 저번에 광고 찍은 스마트폰, 새로운 시리즈 나온다고, 또 광고 찍자고…….”

    “어.”

    “……전무님이 힘 써주신 거예요?”

    “글쎄. 결재 올라왔길래 승인한 것밖에 없는데.”

    “아…… 그렇구나.”

    이연은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으니, 일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태연한 척 탕수육을 집어먹던 순간, 문득 그와 함께 저녁을 먹는다는 사실에 설레서 저 혼자만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주원은 이제껏 자신의 말에 맞장구만 쳤다. 그도 무언가 얘기하고 싶은 게 있을 수도 있는데…….

    “전무님, 요즘 회사는 어떠세요?”

    “회사?”

    “네. 어…… 스트레스 많이 받으세요?”

    이연의 물음에 차주원이 피식 웃었다. 글쎄, 천억 규모의 계약 체결보다 너 때문에 더 머리가 아팠다고 하면 믿을까.

    “어. 많이 받지.”

    “왜요?”

    이연은 조금이라도 더 그에 대해 알고 싶어 이야깃거리를 기다렸다. 차주원은 자신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커다란 눈을 또렷하게 맞춰오는 이연의 앳된 얼굴과 기다란 속눈썹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누가 나한테 거짓말하는 줄 알았거든.”

    “거짓말요?”

    “응. 연기한다고 생각했었어.”

    “네…….”

    이연은 심각한 얼굴로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런데, 아니더라고.”

    “아니었어요?”

    “어. 거짓말이 아니었어. 그냥, 오해했던 거였어.”

    “아…… 그래도 거짓말이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글쎄. 다행인가.”

    “다행인 것 같은데요…….”

    서이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맞장구를 쳤다. 차주원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열심히 반응하는 서이연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말갛고 가식 없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와 있으면 편안하게 웃을 수 있는 순간이 매번 늘어난다.

    그의 무엇이 이렇게 감정을 요동치게 만드는 걸까.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

    차주원은 뻗어 나가려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이연에 대해 깊게 생각해봤자, 왜 나를 잊었냐고 그를 거칠게 몰아세우고 싶다는 충동만 일기 때문이었다. 그 충동이 사그라지면, 그를 갖고 싶어진다. 또 버려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전무님, 저 이제 돼지 됐어요.”

    서이연이 배를 통통 두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말대로 음식을 한 입씩 맛보기만 했는데도, 배가 꽉 차버려 과식한 것 같았다. 차주원은 어기적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나는 이연을 보며 살짝 미소 지은 후 먼저 룸을 나섰다.

    “아, 내가 계산하려고 했는데!”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던 이연은 화들짝 놀라 룸 밖으로 나갔지만, 남자는 이미 레스토랑을 나서고 있었다.

    “저기, 계산이요.”

    “차 전무님께서 계산 마치셨습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이연은 커다란 뒷모습을 한 남자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가까이 붙었다.

    “왜 계산하셨어요…… 제가 사드리고 싶었는데.”

    “스폰서 뒀다 어디에 쓰려고 그래.”

    “그래도…….”

    “올라갈까.”

    “……네.”

    호텔 방으로 올라가자는 그의 말에, 이연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저녁을 함께한 후 섹스라니, 정말 데이트 같지 않은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이연은 계속 차주원에게 더 가까이 붙으려 꼼지락댔다. 차주원은 자꾸만 오른쪽 팔뚝에 서이연의 어깨가 닿는 것을 느끼며, 그의 동그란 정수리를 어이없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서 뭐가 그리 분주한지, 손가락을 스치듯 건들기도 하고, 팔짱을 끼려는 듯 코트를 살짝 잡아 오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이연이 제대로 된 스킨십을 하기도 전에 최상층에 도착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차주원을 쫓아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가자, 이연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심호흡까지 해야 했다. 항상 문을 열고 오는 그를 맞이하기만 했는데, 그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감회가 새로웠다.

    서이연은 바로 드레스룸으로 향하는 차주원을 졸래졸래 따라가 그가 겉옷을 벗는 것을 구경했다.

    “전무님, 그런데, 전무님은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

    이연이 문득 오늘 낮 차도윤과 했던 대화가 생각나 질문을 던진 건, 호텔에서 차주원을 기다리며 그의 이름을 다시 검색했기 때문이었다. 오래전, 그와 자신이 만나기도 전에 났던 스캔들. 사진을 빤히 들여다보던 이연의 머릿속을 채웠던 것은 역시 재벌끼리는 잘 어울리는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여유로운 표정과 값비싼 옷차림. 어느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힐 일 없었던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특유의 편안함을 눈에 담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멋진 사람이다. 차주원은…… 너무나 멋진 사람이라서, 그가 자신의 스폰서라는 것을 자각할수록 현실감이 없었다.

    “예전에, 사진 같이 찍힌 그분이랑은, 사귀시는 거예요?”

    “…….”

    “혹시, 혹시…… 결혼하실 거예요?”

    그냥 궁금했다. 그가 결혼을 예정한 사람이 있는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그 매혹적인 페로몬을 나누어줄 사람이 있는지.

    “……뭐?”

    차주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지만, 이연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전무님은 결혼 빨리 하실 것 같아요…… 굉장히 가정적이실 것 같고…….”

    주제에 맞지 않는단 걸 잘 알지만, 이연은 괜히 부럽기도 했다. 그의 다정한 미소를 가까이서 볼 사람이.

    “서이연.”

    그러나 차주원의 험악한 얼굴을 마주한 이연은 놀라 어깨를 굳혔다.

    “네……?”

    “저녁 한 번 같이 먹으니까 뭐라도 된 것 같아?”

    짓씹듯 말을 뱉는 차주원의 목소리는, 좀 전의 다정한 목소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낮고 사나운 목소리에 이연의 어깨가 움찔댔다.

    “……전무님…….”

    “선 넘지 마.”

    “네…….”

    한눈에 보기에도 시무룩하게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차주원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전히 눈을 맞추던 서이연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화를 참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래전 찍힌 사진을 들먹이는 것에 짜증이 일었다.

    이럴 때면 그가 정말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왜 저렇게 심기를 건드는 말만 골라 하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 맞는지.

    이연은 날카로운 그의 반응과 페로몬에, 또 실수를 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자책을 멈출 수가 없었다. 차주원이 방금 벗어 걸어놓은 코트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이연은, 조금이라도 그를 기분 좋게 만들고 싶어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전무님은, 연애 많이 해보셨어요? 저는 안 해봤는데…… 전무님은 연애 잘하실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뜻이야.”

    “전무님은 항상 침착하시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연애도 잘한대요.”

    바로 말을 끊어버리지는 않는 그의 모습에, 이번에는 제대로 된 칭찬을 고른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 이연이 재잘거렸다.

    “그래서.”

    “그냥, 많이 해보셨나 궁금해서…….”

    “그게 왜 궁금한데.”

    “어……. 연애, 연애……. 하실 거예요?”

    그러나 차주원의 말꼬리 잡기가 길어지자, 이연은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 인지하지도 못한 채 횡설수설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차주원의 눈빛이 선명한 경멸을 띠는 것 같아서 절로 입술이 떨려왔다.

    “나보고 연애를 하라고?”

    “네? 아…… 하고 싶으시면…… 하셔야죠…….”

    “…….”

    “그냥, 잘하실 것 같아서…….”

    이연은 이유도 모른 채 서러워져 눈을 내리깔았다.

    “…….”

    “부러워서요…….”

    “하.”

    “전무님…….”

    또 뭘 잘못한 걸까. 누군가 자신에게 좋은 애인이 될 것 같다는 칭찬을 해준다면 날아갈 듯 기쁠 텐데, 차주원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연은 따끔따끔하게 살을 찔러오는 알파 페로몬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개소리가 심하네. 넌 내가 이제 다른 사람 만났으면 싶은가 보지? 받을 건 다 받아 처먹었으니까, 이제 꺼지라 이거야?”

    차주원이 천천히 다가오며 그의 페로몬만큼이나 날 선 말을 뱉었다. 이연은 도대체 왜 얘기가 그렇게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차주원이 떠나가길 바란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네? 그게 무슨-”

    “연기는 몰라도, 기분 좆같게 만드는 데는 소질 있네.”

    “…….”

    이연은 천천히 안구를 감싸는 액체를 느끼며 입술을 짓씹었다.

    “왜. 너도 기분 좆같은가 보지?”

    “……아니요…… 죄송해요.”

    “하. 씹…….”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는 차주원의 입에서 정제되지 않은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눈물이 맺힌 커다란 눈을 마주하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몸을 타고 흘렀다. 기분이 더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서이연은 저렇게 속을 부지깽이로 긁는 듯한 말만 내뱉을까. 그가 하는 모든 말이 마치 또 떠나버리고 싶다는 의미 같아 견딜 수가 없다. 연애, 결혼. 그딴 걸 할 수 있을 리가. 하루하루 삶을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을 줄 수 있을 리가.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저릿하게 머리를 쑤시는 두통을 간신히 참고 있는데, 눈앞의 서이연으로부터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저는 요즘 연기 연습, 많이 하고 있는데…….”

    “…….”

    연기. 그래 너한텐 그딴 게 제일 중요하지. 그걸 건드렸으니, 서럽고 화나겠지. 그런데 나도 그래, 여원아. 나도 아파.

    차주원은 제 페로몬이 제어되지 않는 것을 느끼고는, 손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숨기려 거칠게 머리를 쓸었다.

    “전무님은, 왜, 왜, 자꾸 저한테…….”

    이연은 서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 차주원에게 인정받고 싶었는데, 그는 항상 자신을 오해하고, 비뚤게만 보는 것 같았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 때문일까. 그래도 많이 노력하고 있는데, 조금은, 정말 도토리만큼은 응원해줄 수 있지 않은가.

    “뭐?”

    “제, 제 후원자, 시잖아요…… 그런데, 왜, 저 미워하세요?”

    떨리는 목소리가 이미 물기를 담고 있었다.

    “내가, 널 미워한다고.”

    “네. 저, 마, 마음에 안 들어 하시잖아요…….”

    “……입 다물어.”

    사나운 으르렁거림이 목을 긁고 나왔다. 사면이 희게 변한 차주원의 안구가 살벌하게 희번덕거리며 이연을 향했다.

    “저, 저 좀…….”

    이연이 덜덜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말을 뱉었다. 커다란 눈에 매달려있는 서러움과 간절함에, 차주원의 턱이 화를 참는 듯 도드라졌다.

    “저 좀, 예뻐해 주시면 안 돼요? 흐으…….”

    베일 것같이 날카로운 차주원의 눈빛에, 이연이 눈물방울을 툭툭 뱉어내며 울음을 터뜨렸다.

    “…….”

    순식간에 하얀 볼을 적시는 눈물을 담은 차주원의 눈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착잡함이 내려앉았다.

    “흐으……”

    차주원의 앞에서는 아무리 침착하려고 노력해도, 묻어둔 감정들이 울컥울컥 터져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전무님 좋아해요, 저 좀 칭찬해주세요, 저 좀 예뻐해 주세요, 저 좀 좋아해 주세요, 저 버리지 마세요…….

    이연은 하지 못할 말을 삼키며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차주원과 저녁을 함께 한다는 생각에 온종일 설레면서도 불안했다. 자꾸만 주제를 잊는 것 같아 걱정되면서도, 그와 함께 일상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끝에 와서는 모든 것이 망가졌다. 도대체 그에게 혼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는 막막하기만 했다.

    “…….”

    하얀 볼을 가로지르는 눈물을 닦아내는 가는 손가락에 시선을 둔 차주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예뻐해달라고. 얼마나 더? 예전처럼? 그때처럼 예뻐해달라는 거야?

    그렇게 해주면, 또 떠나려고?

    “……이 정도 거리만 지키는 게, 도대체 뭐가 힘들다고 자꾸 선을 넘어.”

    건조함을 담은 얼굴만큼이나 무심하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윽, 으으…….”

    “나는 네 스폰서야.”

    “흐으…….”

    “그러니까…… 그게 다니까.”

    주먹을 꽉 쥐었음에도, 혼란스러움을 담은 알파 페로몬이 이리저리 엉킨 채 새어 나왔다.

    “평소처럼 웃으면서 다리나 벌려.”

    “흐으! 으으…… 으윽…….”

    차주원은 그 말을 듣고 으아앙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려 버리는 서이연을 착잡하게 바라보다, 그대로 그를 지나쳐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연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전무님…… 흐으, 전무님…….”

    연기도, 감정도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열심히 다가가도, 역시 그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냥 너무 멋진 사람이어서, 정말 고마운 사람이어서, 함께 웃으며 대화만 할 수 있어도 좋을 것 같은데, 그냥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사소한 것조차 너무 힘들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닌데. 조금만 더 가까워지는 것. 그 정도면 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잠시 후, 호텔 방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은 이연은 홀로 한참을 펑펑 울었다.

    그러다 작은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낸 것은, 더는 주위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을 때였다.

    “으으…… 차, 차주원, 지, 진짜…… 납, 나빠…….”

    이연은 훌쩍이며 고개를 무릎에 묻었다.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소리 내 불러보았는데, 왠지 이름의 어감이 좋아 슬쩍 기분이 풀리는 게 억울했다. 흐린 시야로 주위를 슬쩍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불만도 토로했다.

    “연기, 잘한다고, 칭찬 좀, 해주면, 안 되나…… 흐으.”

    드레스룸의 구석에 홀로 웅크린 이연에게서 떨리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나도, 이제, 잘생겼다고 안 해야지…….”

    무릎 부분에 콧물을 슬쩍 닦은 후 씩씩거리며 중얼거리다가.

    “멋지다고도 안 할래…….”

    발끝을 꼼지락거리며 눈물을 훔쳤다.

    “……마음속으로만, 할래…….”

    잘생긴 데다 아름답기까지 한 사람을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 아닌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쯤이야 할 수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드는 생각까지 막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에휴…… 멍청하니까, 살기, 힘들다…….”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눈치도 없고. 서이연 진짜 쓸모없다. 네가 잘하는 게 뭐야.

    “연기는, 그래도…….”

    연기는 좀 한다. 그것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노력했는데.

    오늘부터는 전화 걸어도 안 받겠지…… 문자에도 답장 안 해줄 거고…… 간신히 거리를 좁혔는데, 또 멀어져 버렸다. 이연은 차주원이 참 알기 어려운 사람이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무님…….”

    이미 그는 호텔을 나섰을 테지만, 혹시 몰라 그를 불러보았다. 침실에도, 리빙룸에도, 그는 없었다. 터벅터벅 유리창 앞으로 다가가자,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은, 별로다…….”

    눈물을 닦느라 축축해진 손가락을 들어 유리창에 대었다. 아름다운 야경을 눈에 담아도 울적한 마음을 숨길 길이 없었다.

    사실 이연은 오늘 차주원과 키스를 하고 싶었다. 전무님과의 데이트라는 노래를 만들어 흥얼거릴 때부터, 그와 키스할 생각에 설레 잠도 설쳤다.

    “원래 데이트는, 저녁으로 시작해서 키스로, 끝나는 건데…….”

    모 잡지에서 읽었던 문장을 담아두고 있던 이연은, 오늘 정말 그와 부드럽게 키스하고, 기분 좋은 섹스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다 망했지만.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겨 와인 셀러에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꺼낸 서이연은, 와인 병과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이 스위트룸이 차주원의 전용 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꽤 놀랐었는데…… 그것도 스위트룸의 구석구석을 몰래 구경하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의 정장과 시계로 가득 찬 드레스룸과, 와인과 양주로 가득 차 있는 와인 셀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리저리 살펴보는 곳이었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이연이 잔에 와인을 가득 따라 꿀꺽꿀꺽 마셨다.

    “크으…….”

    오늘은 취하고 싶었다. 술맛도 모르는데 와인을 마시려니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기비하로 가득한 머릿속을 조금이라도 뿌옇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순식간에 와인 한 잔을 비운 이연은 또 잔을 채웠다. 그러고는 건배할 사람이 없는 주위를 시무룩하게 둘러본 뒤, 잔을 비웠다. 문득 차주원의 페로몬이 맡고 싶어진 것은, 멍하니 와인 잔 안의 액체를 바라보고 있던 때였다.

    “아…… 코, 코트…… 코트…….”

    꼬이는 다리로 힘겹게 드레스룸에 도착한 이연은, 그가 벗어 두고 간 코트를 옷걸이에서 빼냈다. 각 잡힌 어깨선이 이연의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끝자락이 바닥에 끌리려는 커다란 코트를 입은 채 다시 소파에 앉는 이연의 얼굴이 붉었다.

    “화난, 페로몬…….”

    코트에는 우성 알파 페로몬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그의 감정이 아직 곁에서 넘실대는 듯했다. 이연은 커다란 코트 안에 파묻힌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전무님은 왜 화났을까. 내가 너무 들이대서? 연애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냥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건데…… 나도 그 정도는 안다. 재벌은 재벌끼리 연애하고 결혼하는 거. 주제도 모르고 나댄 건 아닌데…… 그냥 오랫동안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앞으로는 그냥 웃으면서 다리나 벌려야지. 그런데 가짜로 웃어야지. 난 연기 잘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연기는 모르겠는데 사람 기분 나쁘게 만드는 데는 소질이 있다고 말한 건 너무한 거 아니야? 사람이 아무리 잘생겼어도 너무 도도하면 안 된다. 아니, 그 정도로 잘생겼으면 그래도 되나? 그래도 나는 서러웠는데…….

    우성 알파 페로몬을 맡으니 흐릿하던 의식이 점차 까맣게 변해갔다.

    “그래도, 가지 말지…….”

    이연은 천천히 밀려오는 잠기운에 굴복한 채, 의식을 깊은 암흑 속으로 보냈다. 저녁 내내 눈물을 닦았던 손에는, 여전히 차주원의 코트 끝자락이 꼭 쥐어져 있었다.

    *

    “이연아! 에이씨, 늦었다. 빨리 가자.”

    “형, 촬영 장소 바뀐 거 모르셨어요……?”

    “아니, 그걸 하루 전날 알려주는 사람들이 어딨냐.”

    “감독님이 일주일 전에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빨리 타기나 해. 이러다 진짜 늦겠다.”

    “네…….”

    이연이 서둘러 차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오늘은 지방 촬영이 있는 날이라 아침 일찍부터 매니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매니저가 촬영 장소가 바뀐 것을 어제 전달받았다며 지금 출발해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다는 얘기를 해왔다. 매니저가 이미 바뀐 장소를 전달받았을 줄로만 알고 있던 이연은 불안함을 지우지 못한 채 승용차 뒷좌석에 앉았다. 회사에서 밴을 지원해주지는 않았기에,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백팩을 내려놓은 이연은 울상을 지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메이크업이랑 헤어 받으려면 시간 촉박한데…….

    이연이 탄 차는 한참을 빠른 속도로 달렸다.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가 들릴 만큼 불편한 속도에, 이연이 안전벨트를 꽉 잡았다.

    끼익-

    그러던 중, 갑자기 타이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차가 급정거했다. 앞 좌석에 머리를 박을 뻔한 이연은 놀란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아, 미안하다 이연아. 저 새끼가 갑자기 끼어드는 바람에…….”

    “노, 놀랐어요, 형…….”

    너무 놀라 눈물이 찔끔 맺힌 눈을 한 이연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심장이 쿵쾅대는 진동이 느껴질 만큼 긴장하자, 괜히 지난 일주일간 계속해서 불안에 떨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차주원과 저녁을 먹었던 그다음 날 저녁, 이연은 그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전무님, 어제 저녁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맛있었어요. 다음에는 꼭 제가 사드리고 싶어요. 어제 제가 기분 상하게 만들어드렸다면 죄송해요. 꼭 다시 만나서 사과드리고 싶어요.]

    몇 번을 지웠다 썼다 한 문자를 결국 전송하고, 이연은 지렁이처럼 기어 소파 위에서 굴러떨어져 내렸다. 도저히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 답장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기대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아아…….”

    그렇게 끙끙대며 스마트폰 화면을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이나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런 알림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에휴…… 망했다 진짜…….”

    작게 한숨을 쉬면서도, 문자 한 통으로 포기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숫자 0을 꾸욱 눌렀다. 스피커폰으로 바꾸고, 핸드폰을 저 멀리 치웠다.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신호가 가는 소리는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한쪽 뺨을 댄 채 핸드폰만 바라보는 이연의 눈가가 울적했다.

    “……전무님, 진짜…….”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짙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이연은 그가 보고 싶었다. 많이 보고 싶었다. 앞머리를 완전히 올려 보기 좋게 드러나는 이마도 보고 싶었고, 짙은 눈썹과 각 잡힌 콧대도 보고 싶었다. 가로로 긴 눈매에서 속쌍꺼풀을 찾아냈을 때는 정말 기뻤는데. 못된 말만 하는 입이지만 보기 좋게 도톰한 입술도 눈에 담고 싶었고, 핏줄이 돋아있는 커다란 손도 잡고 싶었다.

    그리고 차분한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무자비하고 매혹적인 페로몬도.

    머릿속을 온통 그로 가득 채운 채 멍하니 시간을 죽이다 보니, 문득 이연은 자신이 뭘 걱정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가 더는 자신을 후원해주지 않을까 봐?

    “……너무 많이, 받았어…….”

    그러나 이제껏 그에게 넘치도록 받아서, 그간 쌓은 경험을 양분 삼아 이제 홀로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까지 그에게 기댈 수는 없지 않은가. 그가 후원을 그만둔다고 해도, 이연은 이제 스스로 잘 헤쳐나갈 자신이 있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해도,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불안하지…….”

    차주원을 더는 못 보게 될까 봐?

    “…….”

    툭툭 던지듯 못된 말만 하는 것 같아도, 무너지고 짓밟혀 길을 잃은 순간에 촛불을 켜 길을 밝혀주는 사람. 떨리는 몸을 가눌 정신도 없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넓고 따뜻한 품을 빌려주는 사람. 일곱 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한 번도 받을 수 없었던 위로. 터질 것 같이 요동치는 불안한 가슴을 진정시켜주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페로몬.

    “……계속, 보고 싶어…….”

    앞으로 그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수 있을 것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울컥울컥 차올랐다. 좁은 틈으로 파고든 생각에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하여, 이연은 깊게 심호흡하며 가슴을 턱턱 두드렸다.

    “휴우…….”

    차주원을 못 보게 될 일은 없을 거라 한참을 중얼거리고 난 후에야, 서이연은 긴 숨을 내뱉으며 진정할 수 있었다.

    “하아…….”

    새까맣고 멍한 눈을 한 채 며칠 전을 회상하던 이연은, 그때처럼 가슴을 턱턱 두드리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이연아, 안 다쳤어?”

    “네, 괜찮아요. 좀 놀랐어요.”

    “미안하다. 마음이 급하네.”

    “네…….”

    안전벨트를 꼭 잡은 이연을 태운 차는 한참을 더 불안정하게 달리고서야 촬영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결국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이연은 만나는 스텝마다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인 뒤에야 허리를 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듯해, 재빨리 대기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솜털이 올라있는 서이연의 흰 목덜미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꽤 외곽에 위치한 촬영장이라 신선한 공기가 폐부를 채웠지만, 이연은 그런 여유를 느낄 새도 없이 바로 준비된 의상으로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받았다. 오늘 촬영을 마치면 앞으로 삼 주 정도는 촬영분이 없다. 그동안 광고 촬영과 화보 촬영 일정이 잡혀있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훨씬 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그 시간을 전무님과 함께 보내고 싶었는데…….

    “이연씨, 준비 다 됐어요?”

    “네, 지금 갈게요!”

    촬영장에서 긴장을 놓을 수 있는 순간은 없었다. 이연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카메라 앞으로 향했다. 새까맣고 가차 없는 검은 렌즈 앞에 설 때면, 아직도 전기에 감전된 듯 근육 조직이 뻣뻣해진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때 떠올릴 얼굴이 한 명 더 생겼다. 엄마, 아빠, 그리고…….

    “슛 들어가겠습니다!”

    이연은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수많은 스태프와 연기자 사이에 둘러싸여 대사를 뱉을 수 있는 매 순간순간이, 이연에게는 놓칠 수 없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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