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아픔 (7/17)

5. 아픔

박희은 작가의 새 수목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었다.

서이연은 차주원과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가진 후, 계속해서 그에게 전화와 문자를 통해 연락하려 했다. 그의 비서에게도 연락해보았지만, 결코 연락이 닿지는 못했다.

자신이 너무 미워 방에 틀어박혀 울다, 그래도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차주원에게 전화해 보다, 이럴 시간이 없다며 대본을 들여다보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대사 연습을 반복하는 나날들이 이어진 후에야 서이연은 무사히 대본 리딩을 마칠 수 있었다.

한곳에 모인 톱스타들을 보자, 그제야 박희은 작가의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수백 번 읽어 내리고, 수천 번 연습한 대사 한 줄을 무사히 내뱉고 나서야 이연은 나지막이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자, 이연은 촬영장에서 이제껏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배려를 받았다. 사실 이연에게는 스태프들이 비키라고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꽤 크나큰 배려로 다가왔지만, 주연 배우가 웃으며 말을 걸어오는 것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한 시나리오였다.

“안녕하세요, 서이연 씨 맞죠? 메이크업하니까 대본 리딩 때랑은 또 느낌이 다르네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늘도 정말 멋지세요……!”

서이연은 이번 드라마의 주연 배우인 심은영의 인사를 받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남동생과 함께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 역할에 어울리는 수수한 옷차림과 화장이었지만, 그녀의 수려한 미모를 돋보이게 하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나 윤서랑 친한데, 윤서가 이연 씨 얘기 많이 하더라고요.”

“제 얘기를요?”

“이번에 자기 영화 대박 난 거에 이연 씨 신 화제성이 단단히 한몫한 것 같대요. 영화 장소혜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가마 눈물이 뜬다는데요?”

심은영은 마치 친한 친구와 수다를 떨듯 밝게 웃으며 얘기했고, 그에 이연도 조금은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연관 검색어 얘기는 처음 듣는데, 심은영 같은 대배우에게 칭찬을 받으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번에는 윤서 남동생이 아니라 내 남동생 역할이니까, 우리도 잘 해봐요.”

“네! 그, 그럼요! 저 정말 열심히 할 거예요.”

군기가 바짝 든 서이연의 모습에, 심은영은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윤서랑 만날 때 나도 불러요. 이전에는 아파서 못 만났다던데.”

“아…… 네. 맞아요…….”

“그럼, 나중에 봐요.”

“네, 수고하세요. 선배님.”

서이연은 심은영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후,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신윤서에게 연락이 온 것은 이 주 전, 차주원과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가졌던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서이연이 호텔 침대에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다음 날 오전이었고, 끊어질 듯한 허리와 퉁퉁 부은 얼굴을 한 채 집에 도착하니 이미 오후였다.

집에 도착해 간단히 샤워를 마치자마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는데, 전화를 받아보니 놀랍게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이연 씨, 오랜만이에요.

“신윤서 선배님……?”

-응. 내 목소리 기억하네요?

“선배님 목소리를, 어, 어떻게 잊어버려요…….”

-하하,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잠시 볼까 해서 전화했어요.

“오늘, 저녁이요……?”

-응. 자기 매니저한테 연락해보니까 스케줄 없다길래.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다 쉬었네?

“저, 저, 오늘은 안될 것 같아요, 선배님…… 몸이, 너무 안 좋아서요…….”

-아, 그래요? 배우는 몸 관리가 제일 중요한데 어떻게 해. 약 먹고 푹 쉬어요, 그럼.

“흐윽, 네…… 푹, 쉴게요…….”

-이연 씨, 설마 우는 거 아니죠? 나랑 못 만나는 게 울기까지 할 일이에요?

“죄송해요…… 꼬, 꼭 뵙고 싶었는데…… 흐으…….”

-하하하. 아프다는 사람한테 미안하긴 한데, 이연 씨 진짜 귀엽다.

“흐으, 다음에, 시간 나실 때 꼭 연락해주세요…….”

-그럴게요. 근데 이연 씨, 이 주 후에 드라마 촬영 시작이지. 응원할게요.

“흐윽…… 감사, 감사합니다…….”

-하하. 이제 그만 쉬어요.

“드, 들어가세요…….”

서이연은 그녀와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울었다. 샤워하면서 거울로 확인한 자신의 얼굴은 도저히 누군가를 만날 상태가 아니었다. 차주원에게 맞은 볼은 퉁퉁 부어올라 있었고 입가에도 상처가 나 있었다. 제일 문제는 목에 난 자국이었다. 누가 봐도 졸린 듯 울긋불긋 물들어 있는 목을 한 채 신윤서를 만날 수는 없었다.

차주원과의 관계에 대한 걱정과 신윤서와의 만남을 거절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깊은 서러움이 밀려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기억이 있었다.

“에휴…….”

심은영과의 짧은 대화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서이연은 울적한 얼굴을 한 채 촬영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촬영해야 할 분량은 다짜고짜 남매가 사는 옥탑방으로 쳐들어와 돈을 요구하는 건달들에게 맞는 장면이었다. 이연은 옥탑방 세트장을 돌아다니며 이곳저곳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느 방향으로 엎어지는 게 더 나을지 가늠해보고 있는데, 지나가다 한 번씩 얼굴을 보았던 남자 배우가 말을 걸어왔다.

“와, 그쪽이 서이연인가?”

“안녕하세요. 김정식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서이연은 고개를 깍듯이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러나 이연의 예의 바른 태도에도 불구하고, 김정식은 무례할 정도로 이연의 얼굴을 빤히 훑어보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세원 장남한테 다리 벌린다는 배우가 너였구나.”

“…….”

서이연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장님이 말하길, 이 바닥에 비밀은 없으니 어차피 주요 제작진들은 대부분 자신이 스폰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 말했다. 개중에는 일부러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도, 콩고물이 욕심나 계획적으로 접근해 오는 사람도 있을 테니,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너 원래 그쪽이냐, 아니면 더러워도 참고 하는 거냐?”

“…….”

남자는 지저분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일부러 자극하려는 듯 시비를 걸어오는 그의 태도에, 이연은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을 아꼈다.

“너 맞으면서 스폰 받는다며. 얼굴에는 상처 없네? 혹시 다른 데 맞고 다니나?”

그러나 김정식이 차주원의 평판에도 영향을 미칠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입을 꾹 닫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스폰 관계 중 일어나는 일은 사생활일뿐더러, 괜히 차주원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도 되었다.

“없는 말, 지어내지 마세요.”

“뭐라고?”

김정식은 돌연 주먹을 꽉 쥐고 눈을 치켜뜬 서이연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제가, 제가 스폰 받는데, 왜-”

“하하. 애비 애미도 없는 새끼 스폰해 준다는 게 진짜였네.”

그러나 김정식의 비웃는 듯한 미소가 얼굴에 걸렸을 때, 서이연은 할 말을 잃었다. 꽉 쥐고 있던 주먹에서 힘이 풀린 것도 그 순간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가정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건방진가 봐.”

“…….”

“그게 네 탓은 아니지만, 그래도 몸 팔아서 자리 꿰찬 거 보면 너도 참 양심 없다.”

“…….”

“언제까지고 세원 스폰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서이연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김정식은 더욱 기세 좋게 끔찍한 말을 퍼부었다.

“저한테, 왜,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연은 지금 왜 자신이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나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무례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왜 돌아가신 부모님까지 들먹이며 자신을 괴롭히는 걸까.

“하하.”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아니, 아니잖아요.”

이연은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려 무던히 노력했다.

“있지. 있잖아. 너도 알잖아.”

“…….”

“애초에 너 같은 거한테 어울리는 자리 아닌 거.”

“…….”

서이연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김정식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럼, 나중에 보자. 때리는 건 세게 안 할 테니까 걱정 말고.”

“…….”

“그런데 혹시 모르지.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아서 실수하지는 않을까 걱정이네.”

“…….”

그가 낄낄거리며 사라지고 나서도, 서이연은 한참 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자꾸만 비좁은 틈새를 비집고 빠져나오려 했다.

꿉꿉한 실내, 어둡고 조용한 가운데 울리는 기침 소리, 젖은 베개.

“하아…….”

그날은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밤이었다.

컴컴한 방 안에서, 이연은 기침을 멈추지 못하는 아이를 계속해서 쓰다듬어 주었다. 식은땀이 나는 아이의 이마도 쓸어주고, 괜찮을 거라며 작게 속삭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늦은 밤, 갑자기 원장이 들이닥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기 네 방 아니지 않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원장님, 지, 지원이가, 아파해요. 근데, 어깨 쓰다듬어주면, 아, 예전에 지원이 엄마가 그렇게 해줬대요…… 쓰다듬어주면, 안 울어요. 그래서, 제가-’

‘야. 입 안 다물어? 하여간 가정교육 못 받은 것들이 혀는 제일 바쁘지.’

‘…….’

‘어디서 건방지게 변명을 해. 어서 네 자리로 돌아가지 못해?’

원장이 이연의 작은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세게 밀었다. 이연은 약한 피부를 찌르는 손톱이 아파서 어깨를 움찔했지만, 감히 그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

‘……네, 지금, 갈게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가는 다리가 분주했다.

그날 이연은 컴컴한 방으로 돌아와 더러운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보육원에 맡겨졌다는 이유만으로 항상 편견 어린 말들을 들으며 생활하는 것은 어린 이연의 가슴에 크나큰 상처가 되었다.

가정교육 못 받은 애. 부모도 없는 새끼.

항상 비웃듯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흘러나왔던, 수백, 수천 번도 넘게 들어야 했던 말이다.

“후우…….”

그러나 이연은 항상 그랬듯 자신을 채찍질했다. 별거 아닌 일에 괜히 과민반응하지 말자며 서러움을 억눌렀지만, 그의 마른 어깨는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제 곧 촬영이야. 우울해할 시간 없어.

“하아…… 잘할 수 있어.”

서이연은 오늘 촬영할 장면의 대사를 이미 다 외우고 있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대사까지도.

<빌린 돈은 갚아야지. 그게 상도덕 아니겠냐?>

<너네 부모가 그런 것도 안 가르쳐줬어?>

<아, 가르쳐줄 시간이 없었나?>

<아니 그래도, 너네가 가정교육 제대로 못 받은 게 우리 탓은 아니잖냐.>

<우리는 돈만 받으면 돼. 돈만. 어?>

왜 하필 이 장면을 찍기 전에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걸까. 잘할 수 있을까. 대사를 더듬지 않을 수 있을까. 제발…….

이연은 식은땀이 나는 손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진정하려 노력했다.

“절대 실수하면 안 돼…… 많이 연습했잖아……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확신 없이 중얼거리는 이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잠시 뒤, 이연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누나가 잠시 나간 사이 남매가 함께 생활하는 옥탑방을 찾아온 빚쟁이들은 함부로 좁은 집 안을 뒤지며 난동을 부리고, 그 과정에서 이연이 구타를 당해 쓰러지는 것까지가 촬영할 분량이었다.

“가프, 갚을게요…….”

엔지-

“이연 씨, 대사 똑바로 하세요.”

그러나 이연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수천 번 연습했던 대사와 연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직 맞지도 않았는데도 벌벌 떨며 울먹거리는 서이연의 모습에, 감독과 스태프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 제대로 하겠습니다.”

이연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며 죄송하단 말을 연신 내뱉었다.

“가정교육 못 받은 누구 때문에 다들 고생하겠구먼-”

김정식은 눈물을 참으려 애쓰고 있는 서이연의 옆에서 킬킬거리며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연에게는 너무나 선명히 들려왔다. 그저 주먹을 꽉 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숨을 고르고, 카메라 앞에서 내뱉어야 하는 대사에 집중해보았지만 쉽지가 않았다.

“후우…… 이연아. 제발…….”

이연이 덜덜 떨리는 손을 꽉 말아쥐며 제게 속삭였다. 커다란 눈을 꽉 채운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듯 뛰는 심장이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촬영은 계속되었다.

“너네 부모가 그런 것도 안 가르쳐줬어?”

김정식이 서이연의 볼을 툭툭 치며 물었다.

“아니 그래도, 너네가 가정교육 제대로 못 받은 게 우리 탓은 아니잖냐.”

“돈, 갚으면 되잖아요. 갚는다고요!”

“이게 어디서 말대답이야!”

퍽-

김정식이 고함과 함께 서이연의 뺨을 내리쳤다. 그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서이연을 향해 대사를 뱉었다.

“언제, 어떻게 갚을 건데. 어? ……아, 죄송합니다.”

엔지-

감독의 엔지 사인과 함께, 김정식이 멋쩍은 듯한 웃음을 지으며 스태프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연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다시 그 앞에 섰다. 이미 몇 번이고 엔지를 낸 서이연과 김정식 때문에, 이연의 하얀 볼은 발갛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김정식은 몸을 일으킨 서이연에게 작게 윙크했다. 그를 본 이연은 눈물이 핑 돌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머릿속은 안개가 낀 듯 뿌옇기만 한 데다, 점점 숨을 쉬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돈, 갚으면 되잖아요. 갚는다고요!”

“이게 어디서 말대답이야!”

퍽-

그러나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진 촬영은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서이연은 끝까지 실수를 연발했다.

“저도, 일할 거예요. 누나랑 제가 일해서 갚을 거라고요!”

“부모도 없는 것들이, 그깟 월급쟁이 돼봤자 어떻게 돈을 갚겠다고!”

“흐으, 가프, 갚으, 갚겠다고요!”

엔지-

“…….”

감독은 모자를 벗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연은 짜증스러움과 불쾌함이 깔린 감독의 표정을 마주하자,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던 거대한 공포가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트라우마에 잡아먹혀 촬영을 망치는 자신. 아무리 도망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

성인이 된 후, 다시 연기를 시작하며 계속해서 불안해했던 상황이었다. 준비만 제대로 하면 괜찮을 거라며 자신을 안심시키고는 했는데, 악몽 같은 기억은 발목을 잡고 도저히 놔주지 않았다. 목이 졸려오듯 숨이 턱턱 막혀 대사를 제대로 뱉을 수가 없었다.

“……야. 조감독, 이 장면 촬영 월말로 뺄 수 있어?”

감독이 옆에 있는 스태프를 향해 물었다.

“아…… 예. 가능은 합니다.”

조연출로 보이는 남자가 패드를 훑어보더니 대답했다.

“자, 오늘은 이만합시다! 오늘 꼭 끝내야 하는 다른 신이 있어서.”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겨입으며 말했다. 다른 스태프들도 카메라를 정리하고, 주변 소품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스케줄은 매니저들 통해서 알려줄게요. 그때는 엔지 없이 갑시다.”

“저, 감독님……!”

서이연은 바로 감독에게 달려갔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거, 이연 씨. 다음엔 연습 좀 더 해와요.”

“네, 네…… 절대로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서이연은 계속해서 허리를 숙이며 감독에게 사과했다.

“그래요. 오늘은 차 전무님 생각해서 넘어갈 테니까, 다음엔 잘합시다?”

감독은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서이연의 얼굴을 건조하게 쳐다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네…… 정말 죄송합니다.”

서이연은 감독이 세트장을 나설 때까지 허리를 굽힌 채 펴지 않았다.

“이건 뭐, 내가 엔지 낼 필요도 없었네.”

서이연의 옆으로 조용히 다가온 김정식이 비웃듯 말했다.

“그래도 뒤에 세원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까, 감독님도 아무 말 못 하고.”

“…….”

“스폰서가 힘이 있으니까 좋긴 좋아?”

“…….”

이연이 입술을 덜덜 떨며 김정식을 노려보았다.

“오늘부로 모르던 사람들도 다 알게 됐겠네. 네가 낙하산인 거.”

“…….”

김정식은 서이연의 치켜뜬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연의 눈망울에 넘칠 듯 맺혀있던 눈물이 발갛게 부풀어 있는 볼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수고해라.”

“…….”

그가 떠나고 홀로 남은 이연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몇 번이나 헐떡거리며 숨을 골라야 했다.

이연은 재빨리 세트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태프들이 주위에 있는 곳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이며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구석의 화장실에 다다르자, 그제서야 숨이 쉬어졌다. 문을 걸어 잠그는 이연의 볼은 이미 눈물로 젖어있었다.

“흐으…… 으윽…….”

작은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엄마…… 아빠…… 흐으, 으으…….”

연기할 때면 항상 응원을 아끼지 않던 부모님이 그리웠다. 북적거리는 촬영장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낯설고 무서워, 아빠 품에 고개를 묻고 어리광을 부리던 그때가 그리웠다.

‘우리 이연이, 하기 싫어? 우리 그냥 집에 갈까?’

‘압빠…….’

‘이연이 춤추고 싶어? 우리 이연이가 다섯 살 아기 중에서는 춤 제일 잘 추잖아. 그렇지?’

‘웅…….’

‘여기 있는 아저씨들은 이연이가 잘 놀 수 있게 과자 동산 만들어 주고 있는 거야.’

‘정말?’

‘응. 저기 봐. 커다란 사탕도 있고, 이연이가 좋아하는 초콜릿도 있네?’

‘아빠, 아빠, 가까이서 구경할래요.’

‘그래, 그러자. 읏차- 우리 이연이, 아빠가 안아 줄게.’

보살핌과 사랑으로 단단히 보호받으며,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던 그때가 그리웠다. 이연은 아직도 따뜻하고 아늑했던 그날 아버지의 품을 똑똑히 기억했다.

“흐으…… 보고 싶어…….”

이연에게는 그때의 기억이,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의 기억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래서 연기를 계속해야만 했다. 연기를 계속하기만 하면 사랑을 듬뿍 받고, 항상 응원받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흐으…… 으윽…… 나도 데려가지…… 왜 나만 두고, 갔, 어요…….”

갑작스레 혼자가 되어버린 일곱 살 아이가 감당하기엔, 현실은 마치 가시투성이 같았다. 아프고 서러운 일들은 매일매일 마치 새것처럼 덧씌워졌다.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희미해지지 않는 아픔이었다.

“보고 싶어요…… 너무 보고 싶어…….”

이연은 무릎에 고개를 묻고 한참을 펑펑 울었다. 세상에 혼자 남은 게 너무나 서러워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매 순간 혼자여야 한다는 게 너무 외롭고 힘들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이연은 한 번도 괜찮은 적이 없었다.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린 마음을 안고 괜찮은 척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하아…… 후우…….”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어버린 이연은 가만히 숨을 고르며 차가운 바닥에 웅크렸다. 그때였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진 것은.

[3015호. 21시.]

차주원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이연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물론 오랜 시간 동안 펑펑 울어 부은 눈은 원래의 크기만큼 커지지 않았다.

차도윤과의 일로 그에게 실망을 안긴 후로 처음 받은 문자였다. 이연은 아직 그가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이미 세 시간 정도 운 후였다.

이제는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이연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얼굴의 눈물을 씻어냈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그의 얼굴은 아직 부기가 빠지지 않은 뺨과 장시간의 울음으로 엉망이었다. 누가 봐도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 할 만큼 가여운 얼굴이었다.

이연은 너무 오래 울었는지 계속해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도 했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져 오는 것을 보니, 아까 맞는 연기를 할 때 잘못 넘어졌나 싶기도 했다.

어서 호텔로 가 깨끗이 씻고 그를 기다려야 한다. 매니저에게 연락한 후에도 한참 동안 그를 기다리던 이연은, 뒤늦게 도착한 그의 차에 올라타 호텔로 향했다.

*

차주원이 호텔에 도착한 시각은 늦은 밤이었다.

서이연을 보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그날 차도윤과 서이연, 두 사람이 함께 차도윤이 머무는 호텔 방으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고 서이연을 몰아붙인 후로, 차주원은 오랜 시간 고민했다. 서이연과의 관계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그냥 그를 보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더는 그 유순한 눈망울에 흔들리지 않고, 그 연약한 체취에 휘둘리지 않고, 그 고운 미소에 동요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더는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가 너무나 미워서, 곁에 두고 괴롭히려 했다. 자신이 고통에 몸부림쳤던 시간만큼, 그도 아프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할수록 다치는 것은 저뿐인 것 같았다.

차주원은 오늘 서이연에게 마지막을 고하기 위해 그를 불렀다.

서이연이 얼마나 울든, 얼마나 애원하든, 이제는 끝내는 게 맞다. 차주원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가 기다리고 있을 호텔 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차주원이 방 안으로 들어서고, 문이 채 닫히기도 전이었다.

“전무님……!”

서이연이 쏜살같이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는 양팔로 차주원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그의 가슴팍에 볼을 부볐다.

차주원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서이연에게서 느껴지는 페로몬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페로몬은 항상 불면 날아갈 듯 연하고 순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깨질 듯 불안정하게 느껴졌다. 연약한 오메가의 육체쯤은 손쉽게 망가뜨릴 수 있을 만큼 위태로웠다.

“고개 들어.”

차주원은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그러나 서이연은 그의 가슴팍에서 얼굴을 떼지 않은 채 무어라 웅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얼굴을 가슴에 짓누르다시피 한 채 말을 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아예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차주원은 한숨을 쉬고는 그의 어깨를 잡아떼어냈다. 서이연은 조금 저항하는 듯했지만, 차주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

그리고 마침내 차주원이 서이연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서이연은 펑펑 울고 있었다.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말도 안 되게 울고 있었다.

왼쪽 입가는 터져있고, 볼은 마치 맞은 것처럼 부어있었다. 입술은 얼마나 짓씹었는지 도톰한 입술에 피가 맺힌 상처가 가득했고, 앞머리는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소리도 못 내고 끅끅대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서이연의 눈을 마주하자, 마치 열네 살의 아이를 만난 듯했다. 온몸이 차게 굳어버려,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서이연.”

“끄윽…… 으윽…… 전무님…….”

이연은 다시 차주원에게 붙으려 낑낑댔다. 놀란 차주원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을 때였다.

“너 병원 가야 해.”

“싫, 어요…… 병원, 싫어요. 흐으…….”

“…….”

“왜, 왜 이렇게 늦게 와, 왔어요.”

“…….”

“아호, 아홉 시만, 기다렸, 단 말이에요. 흐으…….”

“……왜 울고 있어.”

차주원이 착잡함을 숨기지 못한 얼굴을 한 채 물었다.

“보, 고, 싶었어요.”

“…….”

“전무님이, 너무, 너무 보고 싶었, 어요…… 흐으…….”

차주원이 이연의 덜덜 떨리는 등을 쓸어주었다.

“이연아.”

“흐윽, 우윽…… 저, 저, 진짜 바보예요…….”

“하…….”

“버림, 받아도, 할 말 없어요…… 흐윽.”

“…….”

“근데, 버리지, 마세요…….”

“…….”

“버리면, 그러면, 안 돼요. 으윽…….”

차주원은 횡설수설하며 다시 자신을 껴안으려는 서이연을 데리고 소파에 앉혔다. 도저히 오늘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았다. 연한 살결 정도는 손쉽게 찢어버릴 정도로 비틀린 페로몬을 내뿜고 있는 오메가에게, 끝을 통보할 수는 없었다.

서이연은 소파에 앉아 몸을 덜덜 떨면서도 차주원에게 가까이 붙으려 애썼다. 차주원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으려 낑낑대는 서이연을 심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꾸만 몸을 붙이려는 모습이 마치 어미를 잃은 강아지 같았다.

이연은 차주원을 마주 보고, 그의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올린 채 앉았다. 원하는 자세를 취하자 조금이라도 살을 붙인 게 안심되는지, 이연이 그제야 떨리는 숨을 작게 내뱉었다.

“누구한테 맞았어.”

차주원이 서이연의 고개를 살짝 들며 물었다.

“전무님…….”

“…….”

“저는, 전, 학습 능력도, 없나 봐요. 수백 번도 더 들은 말인데, 또 바보같이, 얼었어요…….”

서이연이 자신의 턱을 잡고 있는 차주원의 손을 한 손으로 꼭 잡았다.

“무슨 말이야.”

“그 사람이, 전무님이 저 스폰해 주시는 거, 알아요. 그래서 저한테, 계속 나쁜 말 했어요.”

차주원은 촬영장에서 일방적인 시비가 붙었구나 생각했다. 이제껏 계속해서 들어오던 스폰 로비를 거절하다 처음 수락한 게 서이연이었으니, 어지간히들 관심을 두고 지켜보았을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었어?”

“저도, 맞서 싸웠어요. 왜 그러냐고, 내가 뭘 잘못했냐고, 쏘아붙였어요…….”

“잘했네.”

“네. 근데, 근데 바보는 저예요. 저, 오늘, 어땠는지 아세요? 흐으윽…….”

서이연이 꼭 잡고 있던 차주원의 손을 가슴에 안은 채 훌쩍이기 시작했다. 차주원은 작은 가슴 위에 놓인 손바닥 아래서 터질 듯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뭐가 그리 불안하고 무서운 걸까.

“나쁜 기억들이, 자꾸 떠올라서…… 연기도 제대로 못 했어요.”

“…….”

“감독님도, 저한테 실망하셨어요. 흐으, 우욱…….”

서이연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차주원은 이연에게 촬영을 망쳤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단 한 가지 목표이자 삶의 의미. 그것이 바로 연기였기에.

“흐으…… 우윽. 토할 것, 같아요…….”

“너 지금 아픈 거 알아?”

차주원이 이연의 볼록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그러나 이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아파요…… 병원, 안 갈 거예요…… 싫어요. 흐으.”

“…….”

차주원은 계속 고개를 저으며 병원은 안 된다고 말하는 이연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시선을 두었다. 그날, 내가 널 처음 본 날. 그때도 이렇게 불안한 눈을 한 채 울고 있었을까.

“그냥, 그냥……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요…….”

“…….”

“혼자인 게 싫어요. 엄마, 아빠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

시비가 붙었다는 사람이 설마 서이연의 부모를 들먹인 건가. 차주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절대로 가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제가, 제가 왜 멍청하냐면요, 흐윽…….”

서이연은 하얀 볼 위로 방울방울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더듬더듬 말을 꺼내는 그를 보는 차주원의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내려앉았다.

“아저씨가, 입양하고 나서, 흐으, 많이, 때렸어요. 근데 그러다가, 맞고 나서, 책상에 머리 부딪혔어요. 진짜, 아팠는데…… 그때부터, 이상해요…….”

“…….”

“자꾸 기억이 안 나요. 흐윽, 계속 까먹고, 나쁜 기억만 나요…….”

“…….”

“엄마랑 아빠랑, 끄윽, 추억들도, 분명 더 있을, 텐데…… 기억하고 싶어도, 잘 안 나요…….”

울먹이며 말을 이어가던 서이연이 양손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꼭 잡고 있던 차주원의 손도 함께였다. 차주원이 보드라운 서이연의 볼에 붙어 축축한 눈물을 쓸고 있는 제 손을 빼내, 울고 있는 이연을 품에 안았다.

서이연은 그의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차주원이 이연의 떨리는 어깨와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입양도, 가는 줄도 몰랐는데, 흐으, 으윽, 원장님이 갑자기…… 무서웠어요…… 흐윽, 무서웠어요…….”

“……뭐라고?”

마른 등을 쓸어주던 손이 멈췄다. 서이연의 말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아, 차주원의 미간이 구겨졌다. 입양이 결정된 것은 그가 떠나기 오래전이 아니었던가.

“저도, 저도 까먹기 싫었단 말이에요…… 잊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입양 가는 줄도 몰랐다니.”

차주원이 횡설수설하는 서이연의 어깨를 잡고,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물었다. 순간 숨을 제대로 뱉어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몰랐다니, 잊었다니. 오랫동안 믿고 싶었지만, 끝내 부정해야 했던 사실이 이연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몰라요…… 몰랐, 어요…….”

너무 울어 발갛게 부어오른 이연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이연의 어깨를 잡은 차주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머리를 부딪혀 기억이 온전치 않다면 왜…… 정말 이제껏 조롱하는 듯 느껴졌던 그의 말과 무언가를 아는 듯한 행동들은 그저 우연이었단 말인가.

“서이연, 내가 누구야.”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차주원의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연은 그의 물음에 겁먹은 듯한 눈을 했다. 눈물이 맺힌 커다란 눈을 바라보자, 차주원은 애가 타서 미칠 것만 같았다.

“……전무님.”

이연이 작은 목소리를 뱉었다. 내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간단한 대답이었고,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면 당연한 대답이었다.

차주원은 이제껏 서여원이 자신을 잊었을 거라는 가정은 단 한 순간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한순간도 아이를 잊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래 기다리지는 않으마.’

순간, 머릿속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지켜야 할 게 있는 이는 큰 그릇이 되기 어렵지.’

그는, 기다리지 않았다.

‘입양은 언제 결정 난 겁니까.’

‘한 달 전이네요.’

아버지는 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에게는 너무도 손쉬웠을 것이다. 아이 하나쯤 치워버리는 것은.

서이연의 마른 어깨를 잡은 차주원의 손이 벌벌 떨렸다.

“서여원.”

“…….”

순간 이연은 차주원이 자신의 예명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아해했지만, 아마 그라면 과거 아역 배우 시절의 정보를 얻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이름을 가졌을 땐 항상 곁에 계셨던 부모님을 생각하니, 그리움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여원아.”

차주원이 입술을 덜덜 떨고 있는 서이연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서이연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을 때, 조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원이, 였을 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차주원은 서이연의 맑은 눈동자 속에서, 끝내 부정했던 진실을 마주했다. 이연의 기억 속에는 열여덟의 차주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형, 나같이 큰 애도 입양 갈 수 있을까?’

‘그 애가 말하지 않던가요? 이번 주에 입양 간다고.’

‘형, 형, 다음 주에 꼭 와야 해요.’

‘배우 서이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전무님이 시키는 건, 다 할 수 있어요. 세, 섹스도 잘할게요.’

‘맞고 나서, 책상에 머리 부딪혔어요. 진짜, 아팠는데…… 그때부터, 이상해요…….’

‘맷집, 좋아요. 많이 맞아봤어요.’

‘여원이, 였을 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차주원은 품 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서이연을 바라보며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이제껏 나는 무엇을 원망하고 있었나.

상처와 외로움으로 가득했던 아이가 소중한 기억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으면, 비참한 현실에 짓눌려 압사라도 할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신은 아이에게서 너무 많은 기억을 앗아가 버렸다.

“흐으, 그러, 니까…… 연기해야 해요, 행복해지려면, 연기해야 해요…… 흐으.”

“…….”

“전무님…… 저, 저 잘할 수 있어요. 다음부터는, 절대 안 그럴게요. 제발, 제발…… 저 연기, 계속하게 해주세요…… 흐윽.”

“정신 차려, 서이연.”

“제발…… 제발요…….”

“…….”

서이연은 차주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절박하게 애원했다. 이연은 머리가 아파져 올 정도로 비틀린 페로몬을 내뿜고 있었다. 분명 이렇게 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닐 텐데…….

“으윽…….”

서이연은 힘겹게 의식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까지 감기는 두 눈을 뜨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차주원의 옷자락을 붙잡았지만, 약하디약한 열성 오메가의 몸은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힘을 잃었다.

품 안에 풀썩 쓰러지는 작은 몸을 안고, 식은땀에 축축이 젖은 머리를 쓸어주던 차주원이 곧 그를 침실로 옮겼다. 가벼운 몸을 침대 위에 뉜 그는, 비서에게 연락해 의사를 불렀다.

침대에 풀썩 주저앉아 마른세수를 하는 차주원의 얼굴에 짙은 착잡함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리자 새하얗게 질린 앳된 얼굴이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차주원이 가늘고 흰 서이연의 손가락을 조심스레 잡고, 가만히 문질렀다.

“언제까지, 숨길 셈이었어.”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떨렸다. 변함없는 유순한 눈매를 바라보면서도, 그가 거짓말을 한다 생각했다. 그 모든 게 연기라 생각했다.

아니, 숨긴다고 생각한 사람은 나였나.

어릴 적과 다름없이 쉽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면서도, 그저 자신을 우습게 본다는 생각만 했다. 말도 없이 떠난 건 모른 척하고, 이득만 취하려 접근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연의 작은 손톱을 바라보는 차주원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굳센 파도처럼 서서히 몸을 뒤덮었다.

“여원아…… 얼마나 힘들었으면, 다 잊었어.”

입양된 후에는 얼마나 맞았을까. 아니, 보육원에서 매주 만나던 그때에도 이미 서이연은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자신의 눈치를 보며 친구들에게 괴롭히지 말라고 말해보라던 그 앳된 얼굴이, 아직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왜 그땐 더 캐묻지 않았을까.

“왜, 잊었어…….”

나는 한순간도 잊지 못했는데.

차주원이 눈을 질끈 감으며 힘겨운 날숨을 뱉었다. 두 눈을 덮는 커다란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차주원은 서이연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아직도 알지 못했다. 열여덟,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고 있는 아이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절대로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기만 하고 있었다.

다 포기했었다. 한 시간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아이의 연락을 기다리다, 끝내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을 때. 사람을 시켜 아이를 찾아보려 해도 아무런 정보를 찾을 수 없었을 때. 아버지의 압박에 이기지 못해 미국으로 떠났을 때. 다 포기했었다.

소중한 이에게 또다시 버림받은 뒤로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또 무너져 내려 버릴까 봐. 이제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까 봐.

“……”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허공에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 걸, 이제 그만 하고 싶다.

“하…….”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이제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차주원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생각이 깊게 침잠하여 검은 늪 속으로 빠져들기 직전, 진동이 울렸다. 환자가 깰까 봐 호텔 방 앞에 찾아온 의사가 벨을 누르지 않고 문자를 한 것이었다. 그는 표정을 지운 채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의사는 침대 위에 늘어져 있는 서이연을 보고는 꽤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차주원의 눈치를 보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구타를 당한 듯 얼굴이 얼룩덜룩한 오메가가 정신을 잃은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으니, 저속한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터였다.

그는 재빨리 진료 도구를 꺼내 이런저런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팔짱을 낀 채 침실 문에 기대어, 이연의 작고 하얀 몸을 응시하는 차주원의 눈매가 짙어졌다. 저렇게 약한 몸을 한 오메가는 또다시 날 떠나버리겠지.

“……젠장.”

저 얼굴만 보면 두개골을 쳐부수고 스며드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어차피 저 오메가는 또다시 나를 떠나갈 사람이라는, 학습된 그 생각을.

“전무님.”

진찰을 마쳤는지, 의사가 난처한 표정을 한 채 차주원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내어놓은 진단은, 차주원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히트 사이클입니다.”

“……뭐라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정상적인 히트 사이클은 아니고, 아무래도 육체적이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비정기 이상 히트 사이클로 보입니다.”

“…….”

당연히 정상적인 히트 사이클이 아니겠지. 저 페로몬이 절대 정상일 리가 없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페로몬 폭발이라면, 제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서이연이 겪고 있다고.

그 지독한 고통을, 저 작은 오메가가…….

“아마도 잠에서 깨면, 몸 안에 고인 열기를 누그러뜨려야 할 텐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유발된 히트 사이클이 아니라, 약물을 쓰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

차주원이 서늘한 얼굴로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않자, 의사가 작게 헛기침했다.

“크흠.”

“……씹질이라도 하라고?”

그는 짓씹듯 말을 뱉었다. 의사는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차주원의 눈깔을 마주하고, 몸을 움찔 떨었다.

“……크흠, 억제제는 처방해드리겠지만, 약물치료는 효과가 아주 느릴 겁니다. 그만큼 몸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시간도 길어질 테고요.”

“툭 치면 쓰러지는 사람을 데리고 섹스를 하라고.”

“허허, 전무님. 임신 중에도 잠자리는 하지 않습니까. 부드럽게만 하시면 오히려 지금 상황에는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하…… 씹.”

의사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는 차주원의 눈치를 보더니 슬쩍 탁자에 억제제를 놓고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전무님.”

“…….”

곧이어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나고, 침실은 다시 정적을 맞았다. 차주원은 조용히 침대로 다가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서이연의 옷을 벗겼다. 서툰 손짓으로 땀에 흠뻑 젖은 이연의 옷을 마른 옷으로 갈아입힌 후에는,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채 새액새액 밭은 숨을 내뱉는 그의 옆에 앉았다.

여전히 그의 몸에서는 독사 같은 페로몬이 이리저리 퍼져 나오고 있었다. 도통 편히 잠들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그를 눈에 담자, 괜히 애가 타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었다.

“…….”

차주원이 서이연의 얼굴 위로 우울한 시선을 내렸다.

뽀얀 이마와 선이 고운 눈썹. 눈 밑에 그늘을 만들 정도로 긴 속눈썹과 오똑한 코, 그 밑으로 보이는 도톰하고 붉은 입술. 웃을 때면 볼 한가운데 깊게 찍히는 보조개나, 예쁜 입술 사이로 언뜻 보이는 작고 고른 치아는 열네 살 그때와 하나도 변한 게 없어서 더욱 화가 났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을까.

그 커다랗고 순한 눈망울을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을까.

그 발갛고 부드러운 볼을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을까.

듣는 것만으로도 새벽녘 풀잎에 맺힌 이슬을 떠올리게 하는 그 목소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너인데.

여원이 너인데.

물 한 모금 맛보게 해주고 나를 다시 사막에 처박은 너인데.

오지 않을 네 연락을 기다리며, 다시 한번 나는 혼자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어머니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는데, 나는 또 멍청하게 기대했다고.

그리고 너는 날 잊었다. 연기하고 싶다며 울고 애원할 때도, 서로의 페로몬에 흠뻑 취해 살을 맞대고 잠이 들 때도,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다시 네가 나를 기억한대도, 너는 날 또 떠나버리지 않을까.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열네 살의 서여원이 그랬던 것처럼.

“…….”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열여덟, 그 이후로 자라지 못한 나약한 마음은 견고한 갑옷을 벗어 던지기를 거부했다.

“……그냥.”

그냥 이대로 있자, 서이연.

스폰서와 배우로. 돈과 이해관계로 묶인 계약으로. 이 정도 거리라면 괜찮지 않을까. 네가 다시 나를 버려도, 네가 다시 나를 떠나가도.

네가 날 가지지 않으면, 버리지도 못할 테니.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던, 무엇이든 나누고 싶었던 그때처럼 오롯이 나를 너에게 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 다시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어, 엄마…….”

문득 서이연이 웅얼거리며 잠꼬대를 뱉었다. 고통스러운지 찡그린 얼굴을 보자 절로 그 몸에 손이 갔다. 차주원은 이연의 하얀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와 거리를 두자고 결심한 지 십 초도 지나지 않은 때였지만, 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아빠…….”

너는 지금 지옥을 다시 보고 있을까, 천국을 상상하고 있을까. 네가 무의식에서 떠올린 그 기억이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 그때의 순간이 아니었으면 한다.

“형…….”

그러나 버석하게 말라 피가 맺힌 서이연의 입에서 다시 조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차주원은 모든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흐으…… 주워니, 형아…….”

서이연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아직 그 시절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차주원은 그가 자신을 꿈에서라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쁜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한 채, 목이 졸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원아.”

그만 울어, 여원아. 제발…….

차주원이 눈을 감은 아이에게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출 길이 없었다. 아이가 아픈 게 애가 타 알파 페로몬을 부드럽게 풀자, 밭은 숨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차주원은 밤새 끙끙 앓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페로몬으로 감싸주었다.

*

“으…….”

서이연이 부은 눈을 떴을 땐, 이미 바깥이 밝아진 뒤였다. 가슴에서 무게감이 느껴져 시선을 내려보니 커다란 손이 가슴 위에 놓여있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을 감고 있는 차주원의 피곤한 얼굴이 바로 옆에 있었다.

“어……?”

왜 전무님이 여기 계시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익숙한 천장이 호텔인 것 같기는 한데…… 촬영장에서 어떻게 호텔로 온 거지.

“아…….”

그러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어지럽던 머릿속도, 의식이 점점 또렷해지자 고통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사타구니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감이 선명했다. 다리를 배배 꼬아도 보고 배를 문질러보기도 했지만, 벌써 구멍에서 물이 질질 흐르는 게 느껴졌다.

“아, 안 돼…….”

히트 사이클일 때와 비슷한 증상이었지만, 왜 성감과 함께 고통이 따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배가 아파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흐으…….”

서이연은 옆에 누워있는 남자 쪽으로 낑낑대며 다가가 그를 껴안았다. 그의 널따란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흐르는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그의 체취를 느꼈다. 이연은 여느 오메가가 성감에 허우적대며 그러하듯, 알파의 체취와 페로몬을 한 방울이라도 더 맡으려 끙끙댔다.

“전, 무님…….”

그와 몸을 붙이니 더욱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연은 힘을 받은 성기를 차주원의 단단한 허벅지에 문질렀다. 자는 사람을 깨울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듯 몸을 비비는 그의 행동에, 차주원도 서서히 무의식의 늪에서 건져 올려졌다.

“서이연…….”

한 시간밖에 자지 못한 차주원이 목을 긁는 듯한 낮은 목소리를 냈다.

“전무님…… 저, 저 왜 이래요……?”

그는 가슴팍에 딱 달라붙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서이연과 눈을 맞췄다.

“하…… 언제 일어났어.”

“흐으, 저, 저 아침부터, 싸, 쌌어요…… 이상해요…….”

정신이 무너진 채 횡설수설했던 어젯밤과는 달리, 오직 성감으로 달아올라 어쩔 줄 모르는 그의 순한 얼굴을 보자 차주원의 얼굴에 옅은 안도가 깔렸다. 밤새 페로몬을 쏟아부은 것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열성 오메가인 것이 다행이라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우성 알파 페로몬에 맥을 못 추는 열성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정도로 빨리 회복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좀 강한 히트 사이클이라고 생각해.”

그래, 딱 이만큼의 거리만. 스폰서와 배우처럼만. 차주원이 서이연의 부은 눈과 긴 속눈썹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이다. 잠자리만 함께하는 사이라면. 아마도, 더는 상처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저, 저, 아직 주기 멀었는데…….”

“우성 알파가 옆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눈을 쓸어주더니 이번엔 볼까지 살살 쓸어주는 그의 다정한 손길에, 서이연은 희망을 담고 물었다.

“저랑, 섹스해 주실 거예요……?”

서이연의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차도윤과의 일로 화났던 그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아니.”

차주원은 서이연의 허리로 손을 미끄러뜨리듯 내리면서도 표정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해주세요…….”

“…….”

“네? 저, 안아 주세요…….”

서이연이 그의 옷깃을 잡고 천천히 올라가 입술에 입을 맞췄다. 처음 몇 번은 평소처럼 입술만 가볍게 맞대는 수준이었으나, 곧 이연이 차주원의 입술을 핥기 시작했다. 한번 점막을 맞대니 못 참겠는지, 곧바로 작은 혀를 집어넣기까지 했다.

그는 차주원의 몸에 올라타 다리로 두툼한 허리를 옭아맸다. 작은 손으로는 그의 목덜미를 꼭 감은 채였다.

차주원은 서이연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열렬한 입맞춤에 응해주었다. 고른 치열을 쓸어주고, 부드러운 입 안을 골고루 훑어주었다. 서이연은 키스가 계속될수록 점점 몸을 붙여왔다. 차주원이 이연의 입에서 들뜬 신음이 새어 나올 때까지 혀를 빨아주자, 결국 참지 못한 이연이 젖은 속옷을 복근에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으응…….”

“언제 올라갔어.”

키스가 끝났을 때 즈음엔, 이미 차주원의 허리에 올라탄 이연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씨익 웃으며 묻는 차주원의 말에 볼을 살짝 붉힌 서이연은 양손을 단단한 가슴 위에 올렸다. 계속해서 꾹꾹 누르고 싶은 탄력 있는 가슴은 자신의 것과 달리 단단하고 넓었다.

“제가, 위에서 해도 돼요……?”

이연은 축축이 젖은 회음부 밑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성기에 잘게 몸을 떨면서도, 당돌하게 물어왔다.

차주원이 어젯밤 옷을 갈아입히며 커다란 티셔츠 하나만 입혀 놓아, 서이연은 아래에 애액으로 축축해진 속옷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다. 차주원은 그 엉덩이 크기만큼 작은 속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커다란 손 안에 딱 알맞게 들어오는 앙증맞은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다 구멍에 중지를 갖다 대자, 찐득한 액이 손가락에 달라붙어 왔다.

“많이 쌌네.”

차주원이 이연의 속옷을 벗겨내며 무심히 말했다.

“전무님 페로몬, 때문에…… 으으.”

차주원은 곧바로 내벽 안으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내벽 안으로 손가락을 세 개나 집어넣어 문지르는 그의 행동에, 이연의 입에서 밭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 때문이라고?”

“그런 것, 같아요…….”

“이제 물 많은 것도 내 탓으로 돌리려고?”

“탓하는 게 아니구요, 히익, 그냥, 그런 것 같다구요…….”

이연은 전립선을 건드리는 그의 손가락에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찡그렸다.

“윙크하지 마.”

차주원은 입술을 짓씹으며 한쪽 눈을 깜빡이는 그에게 차갑게 일갈했다. 이게 어디서 끼를 부리려고…….

“아흐, 전무님이, 자꾸, 찌르잖아요…….”

“서이연. 히트 때는 원래 이렇게 말대꾸를 많이 하나?”

내벽 안의 손가락이 어느 한 지점을 꾸욱 누르며 거칠게 비볐다.

“몰라요…… 하읏!”

서이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분홍빛 성기에서 하얀 액체를 핏 하고 뱉어냈다. 뽀얀 정액이 차주원의 복근 위로 흩뿌려졌다. 이연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허벅지를 벌벌 떨었다. 차주원은 배 위에 뱉어낸 묽은 정액 위, 숨죽여 떨고 있는 그의 성기를 눈에 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일곱 번 정도는 더 쌀 수 있지?”

“……네?”

“못 하겠으면 막아줄게.”

“히, 히트라고 그만큼 많이 쌀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차주원은 얼굴이 발개진 채 앙알거리는 서이연을 무시한 채, 성기를 구멍에 맞췄다. 그의 구멍이 촉촉이 젖어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좁아서, 굵은 귀두가 내벽을 가를 땐 구멍 가장자리가 주름 하나 없이 팽팽히 펴졌다.

“아으……. 전무님.”

서이연은 천천히 밀고 들어와 순식간에 내벽을 채우는 성기에, 발가락을 오므리며 고개를 젖혔다.

“힘 빼.”

이연은 차주원의 골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하얀 허벅지를 덜덜 떨며 성기를 받았다. 그는 서이연의 허리를 꽉 잡은 채 초반부터 성기를 쾅쾅 박아넣었다. 마치 이연이 차주원의 위에 앉아있는 게 아닌, 그의 성기에 꽂혀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허릿짓을 할 때마다 자신의 검은 음모 위에서 통통 튀는 서이연의 성기와 불알을 보며, 차주원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앙…… 빠, 빨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성기가 이제껏 들어온 적 없는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는 게 느껴졌다. 이연은 온몸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중심을 잡으려 했으나, 계속해서 전립선이 괴롭혀지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힘이 빠져 결국 풀썩 엎어진 이연이 탄탄한 가슴 위에 한쪽 볼을 댔다.

차주원은 가벼운 무게감을 느끼며 천천히 성기를 빼냈다. 퉁 하며 튕겨 나오는 성기가 구멍 가장자리를 자극해 이연의 허리가 움찔하며 떨렸지만, 차주원은 봐주는 것 따위 없이 자세를 전복했다.

침대에 등이 닿자 할딱거리며 성감에 풀린 눈을 맞춰오는 이연의 볼이 발갰다.

“저, 전무님…… 깊었, 어요…….”

“그랬어.”

차주원은 중얼거리고 있는 서이연의 티셔츠를 벗겼다. 눈처럼 새하얀 상체가 드러나자, 차주원의 성기가 더욱 힘을 받았다. 그는 서이연의 다리를 활짝 벌리고, 위에서 그를 감상했다. 산호색 젖꼭지부터, 선이 고운 허리, 애액으로 젖어 반질반질한 회음부와 구멍까지 천천히 훑는 그의 눈빛이 평소와는 달랐다.

“부끄, 러워요…….”

서이연은 자신의 허벅지를 단단히 잡고 벌린 채 낯선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차주원이 조금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힘없는 팔을 주섬주섬 들어 성기를 가렸다.

“이제 와서 뭘 가리게.”

차주원이 피식 웃으며 꼼질 거리는 손가락에 눌린 작은 불알을 눈에 담았다. 가만히 보니 서이연의 불알에는 주름이 적은 것 같기도 했다. 반들반들한 분홍빛에, 솜털도 언뜻 보였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기가 눌린 이연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자신의 허벅지를 벌린 채 내려다보고 있는 차주원의 덩치가 너무 컸다.

“내가 어떻게 봤는데.”

“배, 뱀같이…….”

차주원은 자신의 사타구니를 샅샅이 핥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이 마치 곧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듯했다. 번들거리는 눈빛에 소름이 살짝 돋은 것 같기도 했다.

“너야말로 그렇게 쳐다보지 마.”

그러나 차주원은 이연의 말에 코웃음 치며 말했다.

“……뱀같이요……?”

“……아니. 개같이.”

“개요……?”

“어. 아기 개.”

“……아기 개…… 강아지요?”

서이연이 강아지같이 순한 눈망울을 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되물어왔다.

“어.”

차주원은 여상하게 대답하고는 곧바로 성기를 구멍에 맞췄다. 잠시 성기를 뺐다고 그새 다물어진 구멍이 귀두와 닿자, 다시 입을 벌렸다. 축축한 내벽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굵은 성기에, 이연이 허리를 뒤틀며 신음을 뱉었다.

“아으, 전무님…… 너무, 커, 커서…… 힘들어요.”

“히트 사이클이니까 다 먹어야지. 응?”

“네에…… 그, 그런데요…… 저 귀여워요?”

이연은 굵은 성기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와중에도, 다람쥐 눈물만큼의 기대를 담아 물었다.

“뭐?”

서이연의 당돌한 질문에, 차주원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왜, 귀여워요, 제가……?”

서이연은 차주원의 거대한 성기를 뿌리까지 몸에 품고서, 잘도 아양을 떨었다. 본인은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하.”

차주원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뱉었다. 히트 사이클인 오메가는 원래 이렇게 당돌해지는 건가. 그는 조막만 한 서이연의 얼굴 옆에 팔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그게 왜 궁금해.”

“이쁨받으려구요…… 저, 전무님한테, 이쁨받을래요.”

이연은 눈꼬리를 곱게 휘며 작게 중얼거린 후, 그대로 차주원의 목에 팔을 감고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 대답을 들은 차주원도 살짝 미소 지으며 키스에 응했다. 이연은 두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에 감고, 스스로 허리를 살짝 흔들었다.

거대한 성기 끝이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오기를 반복했다. 내벽 안의 애액으로 인해 서이연이 조금만 허리를 움직여도 찌걱찌걱 소리가 났다.

입술 사이에서 맴도는 달뜬 숨과 구멍과 성기 사이에서 질금질금 새는 액체가 모두 달콤한 페로몬을 담고 있었다.

차주원은 이연에게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본격적으로 허리를 쾅쾅 치받았다. 사타구니가 거칠게 부딪히자, 두툼한 허리 양옆의 하얀 허벅지가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흐…… 으응…….”

그의 성기가 전립선을 강하게 짓눌렀을 때, 이연이 몸을 바르르 떨며 눈을 까뒤집었다. 차주원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가는 다리 또한 침대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그는 몸을 움찔움찔 떠는 서이연의 내벽에 계속해서 성기를 거칠게 박아넣었다. 사슴 같은 목덜미에 입술을 찍고, 곧은 쇄골에도 입질했다. 연한 색의 젖꼭지는 마구 깨물어주었으며, 뽀얀 겨드랑이에도 코를 박고 입술을 묻었다.

이연은 그의 페로몬과 질척한 애무에 거의 질식사 하기 직전이었다. 차주원은 허릿짓을 할 때마다 귀두부터 뿌리까지 한꺼번에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몸 이곳저곳에 혀를 대고, 입술을 찍었다.

그가 겨드랑이를 이빨로 긁고 물어버릴 때는, 허리와 엉덩이를 크게 움찔거리며 내벽을 조일 수밖에 없었다.

히트 사이클인 열성 오메가에게 우성 알파와의 섹스는 너무나 가혹하고, 자극적이었다. 그저 천박하게 혀를 내민 채 침을 질질 흘리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히익…… 아앙!”

그러던 와중 서이연이 갑자기 신음을 뱉으며 허리를 뒤틀었다. 그와 함께 내벽이 마치 성기를 쥐어짜듯 조여왔다.

그의 겨드랑이에 코를 박은 채 핥고 있던 차주원은 갑자기 배를 적시는 감각에 허리를 세웠다. 시선을 내리자, 꼿꼿이 선 발간 성기에서 투명한 액체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이연은 발로 침대 시트를 밀며 오르가즘을 견뎌보려 했지만,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릴 때까지 물을 내뿜어야 했다.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고 까뒤집어진 지 오래였다. 크게 벌어진 도톰한 입술 양옆으로 타액이 질질 흘렀다.

“하으…… 아윽…….”

“……하.”

차주원은 물줄기를 뿜어내는 성기부터 꼿꼿이 서 있는 젖꼭지, 그리고 성감으로 완전히 풀려버린 서이연의 얼굴까지 천천히 눈에 담았다. 기이하게 동공이 확장된 눈을 하고서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는 차주원에게서 폭발적인 페로몬이 뿜어져 나왔다.

“아앙, 으응…….”

“……욕실에서 하는 거랑 다를 게 없네.”

차주원이 흠뻑 젖은 사타구니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의 복근에도, 음모에도, 허벅지에도 액체가 튀어있었다. 서이연의 몸은 말할 것도 없었다. 판판한 배 위에 투명한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흐으…… 아냐, 아니에요…… 아응.”

서이연은 몸부림을 치듯 벌어져 있는 다리를 파닥거렸다. 차주원은 배 위에 고인 웅덩이를 없애려는 듯 몸을 움직이는 그를 보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뭐 해.”

“으흑, 흐으. 너무, 못, 견디겠어요…….”

이연은 입술을 파들파들 떨며 침대를 짚고 상체를 세웠다.

“뭐를.”

“세, 섹스요. 너무, 기분 좋아서, 아프단 말이에요…….”

“……하.”

못 견디게 아플 정도로 느낀단 말인가.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 것도 재주다. 차주원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서이연을 안아 들었다. 여전히 내벽에 성기를 넣은 채였다. 차주원이 침대를 벗어나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이연이 아, 앙, 아, 하고 신음을 뱉었다. 그가 한 발짝 옮길 때마다 내벽에 성기가 얕게 꽂히기를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차주원은 침대 옆에 놓인 커다랗고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이연은 그에게 매미처럼 꼭 붙어있다가 그의 허벅지 위에 자리 잡았다. 다리와 발을 조금 꼼지락거리자, 단단한 허벅지 위에서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괜히 어색해져 눈을 굴리던 이연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차주원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전무님은, 왜, 아침에도 잘 생기셨어요……?”

“…….”

서이연이 모처럼 그를 내려다보며 선이 굵은 얼굴을 매만졌다. 콧대가 너무 높아 쓸어보고 싶었지만, 베일 것만 같아서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선이 고운 입술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가 미소 짓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괜히 입술 선도 따라 그려 보았다.

“예쁘다…….”

“누가 누구보고 예쁘대.”

“저 예뻐요?”

“아니.”

“…….”

“안 예뻐. 하나도.”

“전무님도 하나도 안 예뻐요…….”

“방금은 예쁘다며.”

“마음 바뀌었어요…….”

차주원은 자신의 얼굴을 커다란 눈망울로 빤히 쳐다보며 이곳저곳을 만져보는 서이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리깐 속눈썹에 드리운 긴 그림자라든지, 귀여운 코끝이라든지, 역광에 비치는 볼의 솜털 따위를.

“이제 안 아파?”

차주원은 서서히 떨림이 멎어가는 이연의 허리를 느릿하게 매만지며 그의 통통한 엉덩이로 손을 내렸다. 서이연은 그가 걱정해주는 게 기분 좋은지 살포시 웃더니 차주원의 볼에 입술을 찍었다.

쪽-

“안 아파요. 좋아요…….”

갑작스러운 뽀뽀를 받은 차주원은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이런 장난만도 못한 스킨십에 긴장이라도 한 건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은 그는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뽀얀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나 새하얀 얼굴에 얼룩처럼 앉은 상처를 보자 괜히 마음이 쓰였다. 누가 이 순한 오메가를 건드렸을까…… 주제도 모르고.

“어떻게 해줄까.”

“네? 저요?”

서이연은 그가 히트 사이클인 자신을 배려해 어떤 섹스를 하고 싶냐고 묻는다 생각했다. 이연은 섹스하며 뽀뽀를 많이 해달라 말하고 싶었다. 이곳저곳 끊임없이 쓰다듬어 주는 것도 좋다고 덧붙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입을 떼려는 순간, 차주원이 물었다.

“너 때린 그 새끼.”

“아…….”

섹스 얘기가 아니었구나.

“매장시켜줘?”

“네? 아뇨…… 그러지 마세요.”

“그럼.”

“저도, 맞서 싸웠다니까요…….”

“어. 그래.”

“정말이에요…….”

“그랬겠지.”

“……설마, 저 안 믿으시는 건 아니죠?”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차주원에게, 이연이 다급하게 물었다.

“믿지.”

차주원이 고개를 살짝 비틀며 대답했다.

“예전에도 제 말 안 믿으셔서, 이번에도 그런 줄 알구…….”

“예전에? 내 바지에 쌌으면서 아니라고 우겼던 거?”

“……네에…….”

기억하고 계셨구나…… 그런 건 잊어버리셔도 되는데…… 이연은 볼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시선을 내리자 시야에 들어온 것이 검은 음모 위에 놓인 제 풀죽은 성기였기에, 이연은 다시 황급히 고개를 들어야 했다. 조금 전 제가 싼 것 때문인지, 그의 음모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검은 음모 위의 연한 색의 성기, 그 이질적인 색 차이는 언제 봐도 적응되지 않았다.

차주원은 발갛게 달아오르는 그의 볼을 보며 아직 서이연이 그때의 일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작은 머리통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예측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잘 알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그는 눈앞에 있는 솜사탕 같은 몸에 집중하기로 했다. 세게 문지르면 녹아버릴 것만 같은 연한 색 젖꼭지를 엄지로 살살 매만지자, 붉은 입술에서 신음이 쏟아져 내렸다. 손가락 밑에서 이리저리 짓이겨지는 젖꼭지가 귀여워 반대쪽 가슴을 물었다.

손을 내려 그 가는 허리를 잡고 앞뒤로 슬쩍 움직여주니, 성기가 내벽 안에서 잔잔히 마찰했다. 또다시 주먹만 한 귀두 끝이 전립선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으으…….”

이연은 가슴을 빨며 내벽을 자극하는 차주원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무엇이라도 안아야 이 자극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서이연이 차주원의 얼굴을 팔 안에 가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가슴을 빨던 그가 고개를 돌려 겨드랑이에 입술을 묻었다. 그는 심지어 이연의 한쪽 팔뚝을 잡고 들어 올려 본격적으로 겨드랑이를 핥고, 깨물기까지 했다.

“아으…… 하, 지, 마세요…….”

“겨드랑이가 왜 이렇게 부드러워.”

“흐으…….”

“이걸 어떻게 가만히 둬. 응?”

“아앙…….”

연하고 뽀얀 살이 그의 입 안에서 한참이나 뭉개졌다. 이연은 겨드랑이를 빨리는 감각에는 도통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빨려본 적이 없는 곳을 깨물고 빨아들이는 그로 인해, 매번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져 도망치고만 싶었다.

그러나 몸을 물리고 싶어도 반대편 손으로 허리를 꽉 잡고 있는 차주원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꼭두각시 인형이라도 된 듯 팔을 타의로 쳐들고 겨드랑이를 빨리고 있자니, 그의 너른 등을 손톱으로 긁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의 성기가 내벽 안에서 점점 크기를 키워가는 것이 느껴지자, 눈물이 찔끔 나왔다. 또 싸고 싶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까지 많이 싸도 되는 걸까…… 몸이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 무서워.

“아앙……. 흐으. 안 돼.”

이러다 정말 그의 말대로 일곱 번 싸게 될 것 같아 무서워, 이연은 차주원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리 허리를 뒤틀어도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기는커녕, 거대한 성기가 전립선을 누르는 것을 도와주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이연은 또 한 번 부르르 떨며 정액을 짜냈다.

“히익, 으으…… 아앙.”

발가락이 곱고, 엉덩이가 절로 구멍을 조였다. 허리를 앞뒤로 흔들며 신음을 뱉어내는 이연의 붉은 혀가 입 밖으로 내밀어져 있었다.

성기를 쥐어짜듯 수축하는 내벽에, 차주원이 미간을 찡그리며 겨드랑이에서 입술을 뗐다. 이연은 마치 한쪽 팔이 위로 묶여 매달린 인형처럼 몸을 축 늘어뜨렸다. 오르가즘에 스스로 허리를 흔든 뒤에 힘이 빠졌는지, 고개가 푹 꺾여 있었다.

발개진 성기는 여전히 하얀 정액을 꿀렁꿀렁 내뱉고 있었다. 짧은 텀을 두고 이미 많이 싸버린 탓에, 농도가 연하고 양도 많지 않았다. 차주원이 이연을 잡고 있는 팔을 흔들자, 힘이 빠진 몸이 종잇장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서이연.”

차주원이 그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완전히 풀려버린 얼굴 근육과 나른한 눈매를 보자, 자신에게 섹시한 매력이 있지 않나 싶다던 그의 말에 수긍이 가려 했다. 서이연의 얼굴은 확실히 묘했다. 유순한 얼굴에 색기가 넘칠 듯 찰랑찰랑 고인, 자꾸만 시선이 가는 말간 얼굴이었다.

입을 맞출 듯 가까이서 이연을 관찰하던 차주원은 그를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연을 다시 침대에 눕힌 후, 허벅지를 한계까지 벌리는 그의 얼굴에서는 좀 전에 가버린 오메가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도 찾을 수 없었다. 이연의 하얀 다리가 힘없이 활짝 벌어졌다. 회음부를 문지르며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애액을 가만히 바라보던 차주원이 나직이 말했다.

“안에 싸 줄게.”

“흐으…… 이제, 그, 그만, 히익!”

차주원이 성기를 물려 구멍 가장자리에 귀두를 걸치더니, 곧바로 뿌리까지 처박았다. 이연은 자지러지며 허리를 띄웠고, 차주원은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거친 허릿짓으로 성기를 쾅 쾅 치받았다. 굵은 성기가 내벽을 이리저리 휘젓고 전립선을 짓눌러댈 때마다, 이연의 허리가 뒤틀렸다. 사정만을 위한 무자비하고 거친 삽입에, 가벼운 몸이 덜컹거리며 성기를 받았다.

“앙, 아응, 아, 안, 돼…….”

“더 박히기 싫으면,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았어야지.”

차주원은 이를 악물고 성기를 박아댔다. 히트 사이클인 오메가의 페로몬에 오랜 시간 적셔져 이성을 잃기 직전인 알파의 모습이었다. 곧이어 그의 주먹만 한 귀두가 내벽 깊은 곳을 쾅 치받았을 때, 엄청난 양의 정액이 쏟아냈다.

“크읏…….”

차주원은 그르렁대는 신음을 뱉으며 해일처럼 몰아치는 절정을 느꼈다. 그러나 서이연은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사정하면서도 허릿짓을 멈추지 않는 그로 인해, 좁은 내벽이 꿀렁꿀렁 정액을 뱉어냈다.

“하아…….”

“흐으, 으응…… 배, 배가…….”

배가 정액으로 꽉 찬 것 같았다. 이연이 눈물을 찔끔 흘리며 중얼거렸다.

“기절하지 마.”

“흐으…….”

차주원은 천천히 성기를 빼낸 후, 볼록한 이마에 입 맞추었다. 코끝을 건드리는 순한 땀 냄새가 기꺼웠다.

이연은 감각이 거의 사라진 와중에도, 구멍 안에서 꾸물꾸물 새어 나오는 액체를 느꼈다. 다리를 모으고 싶었지만 덜덜 떨리는 허벅지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저, 저, 무님…….”

“어.”

“타, 탔어요. 저…….”

이연은 사타구니서부터 온몸을 타고 흐르는 찌릿찌릿한 전류에 어딘가 타버렸다 생각했다. 몸이 고장이라도 났는지, 움찔거리기만 할 뿐 움직여지지 않았다.

“…….”

차주원은 침대 위에 늘어져 중얼거리는 이연을 기가 찬 듯 내려다보았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그는 하얀 나체 위에 이불을 덮어준 뒤 욕실로 향했다. 이연은 쏴아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누워있었다.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있을까.

눈이 스르륵 감기고 잠이 들려는 순간, 익숙한 체향이 가까이 풍겨왔다. 목덜미와 무릎 아래로 손이 들어오더니, 순식간에 몸이 허공에 들렸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보니 남자가 자신을 안고 욕실로 향하고 있었다.

“저희, 같이, 씻어요……?”

“계속 같이 씻고 싶다며.”

차주원은 커다란 눈을 끔뻑대는 서이연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와아…….”

이연은 힘이 없어 흐물거리는 와중에도 충실히 반응했다. 그러나 욕실에 도착해 부드러운 거품이 가득한 욕조 안에 담가졌을 때, 그는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차주원은 왠지 서이연이 거품 목욕에 환장할 것 같다는 강한 확신으로 거품을 풀었는데, 정작 그는 욕조 안에서 입과 눈을 크게 벌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서이연.”

그가 계속해서 얼어있자, 차주원이 욕조에 걸터앉아 마른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그는 거품을 조금 덜어 이연의 머리 위에 올렸다.

뽀얀 얼굴 위에 하얀 거품이 올라가자, 꽃을 달기라도 한 듯 꽤 잘 어울렸다. 귀여운 모습에 차주원이 입꼬리를 올리며 마른 어깨 위에도 거품을 놓은 순간, 서이연이 드디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거, 이거 뭐예요……?”

“뭐긴. 거품이지.”

차주원이 여상하게 대답했지만, 이연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손을 살짝 들어 거품을 떠보았다. 손바닥 모양으로 퍼진 몽글몽글한 거품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전무님……!”

이연이 고개를 들어 감격스러움을 한가득 담은 눈을 맞췄다. 매번 상상만 했지, 실제로 거품 목욕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욕조가 있는 집에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이연은 언제 힘이 없어 축 늘어져 있었냐는 듯 팔다리를 마구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몸에 구름처럼 휘감겨오는 거품들에, 말간 얼굴에 아이 같은 웃음이 걸렸다.

“저, 전무님! 저 좀 보세요……!”

이연은 물속으로 잠수를 했다가 물 밖으로 나와, 거품으로 완전히 뒤덮인 모습으로 말했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입에 묻어있던 거품이 이리저리 날아갔다.

“어. 봤어.”

“전무님, 어서 들어오세요!”

“어.”

어차피 서이연과 함께 씻으려고 한 것이긴 했지만, 놀이동산에 온 아이라도 된 듯 신이 난 그를 보자, 차주원은 괜히 장단을 맞춰줘야 할 것만 같아 부담스러워졌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워하는 그를 보자 얼굴에 웃음기가 도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차주원이 넓은 욕조 안으로 들어오자, 이연은 잽싸게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이제는 허벅지가 당연히 제 자리라는 듯 구는 서이연을 보자, 차주원은 그가 뻔뻔한 건지 겁대가리가 없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연은 아까 차주원이 한 것처럼 거품을 덜어 그의 머리 위에 놓고, 제 머리 위에도 놓더니 말했다.

“저희 커플이에요!”

머리 위에 동그란 거품을 올린 채 눈매를 곱게 접어 웃는 서이연의 모습을 보자, 차주원의 미소 띤 얼굴에 실금이 갔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거센 파도와도 같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커플 눈사람이에요!”

환하게 웃는 서이연은 아이처럼 맑았으며, 사랑스러웠다. 차주원은 간신히 표정을 풀고, 미소를 띤 채 그가 하는 행동에 시선을 두었다. 서이연이 거품을 손으로 조금 덜어, 자신의 코 밑에 묻혔다. 그리고는 또다시 거품을 덜어 차주원의 코 밑에도 묻혔다.

“커플 콧수염이에요!”

“하하하.”

서이연의 계속되는 엉뚱한 행동에, 드디어 차주원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연은 그가 소리 내 웃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를 꼭 껴안았다. 거품으로 인해 미끌미끌한 가슴팍에, 한껏 볼을 부볐다.

“전무님…… 너무 좋아요.”

행복에 취한 달콤한 목소리가 욕실에 울려 퍼졌다.

마치 사랑 고백을 하는 것 같은 그의 말에, 차주원은 굳어버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지금의 서이연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에게 자신은 한낱 스폰서일 뿐이다. 혼자 착각하고 기대하지 마, 등신같이.

“……너는 거품 목욕 좋아할 줄 알았어.”

차주원이 태연한 척 대답했다.

“전무님은 뭐 좋아하세요?”

“…….”

내가 뭘 좋아햐나고.

……어머니, 서여원. 그 뒤부터는 소중한 걸 만들지 않으려 강박적으로 노력했다.

“저는, 저는 김밥이랑, 산책하다가 잠시 벤치에 앉아서 쉬는 거랑요, 복조리랑, 팝콘도 좋아하구요, 오늘부터 거품 목욕은 진짜 진짜 좋아할 거예요!”

서이연은 환하게 웃으며 종알거렸다. 그가 단어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굳어 가는 차주원의 얼굴을 눈치채지 못한 채.

“……난.”

차주원은 쉽게 말을 뱉지 못했다. 서이연과 서여원을 분리하려고 해도, 자꾸만 욕심이 난다. 그 아이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자꾸만 고민하게 된다.

기죽은 아이를 달래주기 위해 준비했던 김밥, 아이의 입가에 묻은 팝콘 가루를 떼어주며 나누었던 이야기들, 아이가 떠난 날 홀로 벤치에 앉아 몇 시간이나 바라보았던 흐린 하늘.

그 모든 것들이 눈앞의 서이연을 많이 그리워하게 만든다. 미워하게 만든다. 가지고 싶게 만든다.

“그런 거 없어.”

그러나 계속해서 다짐하듯, 차주원은 다시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는 좋아하는 게 계속 새로 생겨요.”

서이연은 반짝이는 눈을 맞춰오며 말했다. 하얀 거품 속에 파묻힌 채 재잘거리는 그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나 요정 같은 모습이었다.

“……좋겠네.”

“엄마랑 아빠 다음으로 전무님이 좋아요.”

“스폰서라서?”

“스폰서가 전무님이라서 좋아요.”

“…….”

“전무님이 제 스폰서라서 다행이에요.”

“…….”

“저는, 전무님이랑만 섹스하고 싶어요.”

서이연은 항상 말간 얼굴로 사람을 흔드는 말을 뱉는다. 깃털 같은 그의 목소리와는 달리, 그 말이 폭풍처럼 무겁게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럼 나랑만 섹스해.”

차주원이 서이연의 볼에 손을 갖다 대자, 이연은 그 커다란 손에 바로 볼을 비벼왔다. 주인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유순한 눈을 하고서.

“네가 다른 사람이랑 섹스하는 거, 허락할 생각 없으니까.”

차주원은 품 안에 달라붙어 오는 서이연의 몸이 너무나 부드럽고 물러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를 자신만 볼 수 있는 곳에 가두고 싶은 상상. 저 고운 미소는 자신만 봐야 한다는 생각. 저 하얀 몸은 자신만 손댈 수 있다는 집착적인 기대.

“네, 전무님. 그럴게요.”

서이연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차주원은 그에게 마주 미소 지어주지 않았다. 새까만 눈동자는 짙은 소유욕을 담은 채 맑은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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