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무지
[형,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요?]
서이연은 홀로 늦은 점심을 먹던 중 문자 하나를 받았다.
발신인은 차도윤이었다.
[안녕 도윤아. 응 나 오늘 한가해. 저녁 같이 먹자.]
서이연은 얼른 답장을 보냈다. 지난번 함께 밥을 먹자는 제안은 그냥 인사치레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그가 먼저 연락을 해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차도윤은 쾌활하고 센스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꼭 닮고 싶은 성격을 가진 데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기까지. 한국의 캠퍼스 라이프도 경험에 보지 못한 서이연에게 차도윤은 마치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꺼내주는 보물 상자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그런 성격이면, 전무님도 자신을 조금 더 좋아해 주실까 궁금하기도 했다. 누구라도 재미있는 사람에게는 호감이 가기 마련이니까…….
[우리 오늘은 대학생인 척해볼까요? 대학로에서 밥 먹어요.]
서이연은 차도윤의 답장을 받고 자리에서 폴짝 뛰며 놀랐다. 역시 차도윤은 센스가 넘친다. 대학 얘기를 계속해달라고 조르던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응! 완전 좋아! 대학생인 척해보고 싶었어.]
[저 지금 한국 대학교에 잠시 친구 만나러 왔는데, 여기 주변에서 먹을까요. 여섯 시까지 올 수 있겠어요?]
[응! 갈 수 있어! 그때 보자! ><]
이모티콘으로 설레는 마음을 살짝 표현한 서이연은 먹고 있던 점심을 서둘러 해치운 뒤, 어떤 옷을 입고 나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학생처럼 입어야지……!”
롱패딩 입고 싶은데…… 대학생들은 롱패딩 많이 입던데…… 롱패딩은 이연이 한참을 고민했지만 만만치 않은 가격 때문에 결국 장만하지 못한 옷이었다.
그러나 몇 시간을 심사숙고해도,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괜히 옷장에 있는 몇 안 되는 옷만 침대 위에 늘어놓기를 반복하던 서이연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아…… 모르겠다. 어쩌지.”
대학을 다닌 적도 없는데 어떻게 대학생 옷차림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서이연은 알맞은 옷차림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단정한 면바지와 니트를 입기로 했다.
“생긴 대로 살아야지…… 입던 대로 입자.”
*
서이연은 한국 대학교에서 나오는 학생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책을 한쪽 팔에 끼우고 걷는 학생들을 보니, 문득 책을 한 권 사서 들고 다녀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차도윤에게 어깨가 잡혀 몸이 돌려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형! 일찍 왔네요.”
“도윤아!”
서이연은 드디어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 반가워 환하게 웃었다.
“형,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조금밖에 안 기다렸어.”
“그나저나, 형 축하해요. 영화 잘됐다면서요.”
서이연이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 ‘장소혜’가 이 주 전에 개봉했다. 영화는 말 그대로 대박이 났고, 전국 영화관에서 예매율 부동의 1위를 차지했다. 장소현 역을 맡은 서이연에 대한 반응도 굉장히 뜨거웠는데, 그가 가마 안에서 숨죽여 우는 신이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대중들은 곱고 순하게 생긴 남배우가 여장을 한 채, 소리도 못 내고 끅끅거리며 우는 모습에 열광했다. 서이연도 그 장면이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 줄 몰라 얼떨떨한 상태였다.
“요즘 정말 꿈만 같아…….”
“하하. 말하는 거 보니까 배우긴 배우네요, 형.”
차도윤은 초등학생도 안 쓸 동화 같은 말을 쓰는 서이연이 귀여워 입꼬리를 올렸다.
“응?”
“아니에요. 우리 뭐 먹을까요?”
“여긴 뭐가 유명해?”
“음…… 글쎄요.”
“나 대학생들이 많이 먹는 거 먹고 싶어!”
“술 먹고 싶다고요?”
“응? 아…… 아니, 나 술은-”
“술은 저녁 먹고 먹어요. 친구가 그러는데 근처에 프랑스 가정식 잘하는 집 있대요. 거기 가볼래요?”
“응! 한 번도 안 먹어봤어. 프랑스 가정식이면, 프랑스 가족들이 먹는 음식이야?”
“그런 것 같아요.”
“우리나라 백반 같은 느낌인 거야?”
“그렇지 않을까요.”
대학로에 와서 신이 나기라도 한 건지, 서이연은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다. 차도윤은 자신의 옆에 붙어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상냥하게 대답해주었다.
“저기요.”
신나게 재잘대며 걸음을 옮기고 있던 서이연에게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성이 수줍게 말을 건 것은 막 사거리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볼을 붉히고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는 여성은 책을 한 팔에 끼고 있었는데, 그 위에 종이와 펜이 꽂혀 있었다. 서이연의 머릿속에 삐용삐용하며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분명 팬이 자신을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하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사인 요청을 받게 되다니, 이연은 정말 눈물이 찔끔 나오려 했다.
“네, 네……?”
서이연은 흥분을 감추지 못해 말까지 더듬었다.
이연을 멈춰 세운 여자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인을 요청할 만큼 좋아하는 배우를 길거리에서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니, 분명 머릿속이 새하얘졌을 것이다.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그러나 이연은 배우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리드해야 한다 생각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아, 저, 제가, 제가 사인해드릴까요……?”
“네?”
“……사인, 해드리려구…….”
“혹시 번호 받을 수 있을까요?”
번호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네?”
“여자친구 있으세요?”
“아…… 저, 저는-”
차도윤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더듬거리며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있는 서이연을 옆에서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개인, 개인 정보는, 드릴 수 없어요…….”
“아, 알겠어요…… 실례했습니다.”
서이연은 쿨하게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영화가 개봉한 지 벌써 이 주,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대학로에 나왔지만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어차피 반짝하다 사라질 배우.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는 연기도 별로구만.]
[연기 진짜 못한다. 겨우 삼십 초 정도밖에 안 되는 장면 가지고 왜 이렇게들 난리지.]
[낙하산인가? 연기 별론데.]
요 며칠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댓글들이 다시금 뇌를 파고드는 듯했다. 운 좋게 스폰을 받아 영화에 출연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연기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정말 감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는 있지만, 정말 이렇게 잠깐 주목받다 잊혀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지…….
“형. 인기 많네요?”
“……응.”
“사인 받으려는 건 줄 알았어요?”
“응…….”
“괜찮아요?”
“응…….”
차도윤은 좀 전의 활기는 어디로 갔는지 순식간에 풀이 죽어버린 서이연을 빤히 바라보다, 결국 그의 팔을 잡아끌고 벤치에 데려가 앉혔다. 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다.
“형.”
차도윤은 서이연의 어깨를 잡고 몸을 숙여,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와 눈을 마주하려 했다.
“흐윽…….”
“형? 왜 울어요.”
갑자기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내뱉어버리는 서이연의 모습에, 차도윤은 그의 어깨를 쓸어주며 진정시키려 했다.
“흐으, 으윽…….”
“응? 왜요.”
“흐윽, 나, 나…….”
“…….”
“흐으…… 무서워…….”
서이연은 갑자기 받게 된 관심이 무서웠다. 해일처럼 밀고 들어오는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까 봐 너무나 무서웠다. 이대로 쓸려가게 될 것만 같아, 부정적인 문장 하나에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뭐가 무서워요.”
“그냥, 그냥, 잠깐일까 봐…….”
“…….”
“이제, 실망, 시킬 일만 남았을까 봐…….”
“…….”
차도윤은 울먹이며 중얼거리는 서이연을 가라앉은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언제 추락할지 몰라 항상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 운명. 이쪽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느끼는 불안감일 테지. 우울증과 신경 안정제를 달고 살았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형, 왜 그렇게 생각해요. 이제 잘될 일만 남았잖아.”
“흐윽.”
“왜 아직 닥치지도 않은 미래를 불안해해요.”
“……너무, 짧은 시간인데…… 흐으, 갑자기…….”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불안해지고,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비참한 세계에서 살아남기에, 서이연은 너무 순진하다. 그 바닥에서 지독할 정도로 악착스럽게 버텼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서이연은 마치 갓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연약해 보였다. 푹 젖은 속눈썹을 바라보는 차도윤의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나고 나서 깨닫기에는, 너무 아쉽잖아요.”
“…….”
차도윤의 말에, 서이연은 눈물이 맺혀있는 눈망울을 들었다.
“형이 어떻게 노력했고,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
“……도윤아…….”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지치는 거, 너무 아깝지 않아요?”
“흐으…… 나, 난-”
서이연이 눈물을 닦아내며 울먹거렸다.
“안 그래요?”
“맞아…… 흐윽…… 나는 바보야.”
“하하. 알면 이제 그만 울어요. 형 우는 거 보면 괜히 기분 이상하니까.”
서이연이 출연한 영화를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우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저 순하고 맑은 눈망울에서 눈물을 툭툭 뱉어내며 도톰한 입술을 짓씹을 때면, 잡티 하나 없는 뽀얀 볼이 눈물로 얼룩질 때면…….
벌리고 짓밟아 더럽히고 싶기도 하고, 한없이 부드럽게 매만져주며 위로해주고 싶기도 했다.
차도윤은 서이연이 가마 안에서 숨죽여 우는 장면이 인터넷에서 엄청난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 사람 사는 게 다 똑같구나 하고 생각했다.
변태들.
“고마워, 도윤아…….”
“하…… 왜 이름을 그렇게 불러요.”
“응? 너, 영어, 이름 있어?”
서이연은 여전히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의 손가락 아래 짓뭉개지는 촉촉한 속눈썹을 눈에 담은 차도윤은 한숨을 쉬며 나직이 말했다.
“있기는 한데, 아니에요. 그냥 이름 불러요.”
“응…… 고마워, 도윤아.”
“고맙다는 말은 한 번만 하죠? 이제 밥 먹으러 가요.”
“응! 프랑스 가정식 먹으러 가자!”
금세 기운을 찾아 씩씩해진 서이연이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상처받든, 어떻게 무시당하든, 얼른 털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강한 자가치유력은 그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서이연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이연은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젖은 얼굴을 소매로 박박 닦아냈고, 그 모습을 본 차도윤이 황급히 그를 말리며 부드러운 손수건을 들려주었다.
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채 도착한 레스토랑에서, 이연은 한참 동안 딸꾹질을 멈추지 못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 서빙된 물 한 컵을 모두 비우고서야, 딸꾹질을 멈추고 진정할 수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응…… 미안해 도윤아. 갑작스러웠지…….”
“음…… 신선하기는 했어요. 하하.”
“에휴…… 갑자기 왜 그랬지. 나 좀 이상한가 봐.”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런데 오늘 만난 친구는 고등학교 친구야?”
“맞아요. 고등학교 친구.”
“대학교 친구들이랑은 요즘 연락 안 해?”
딸꾹질을 멈추자마자 저번처럼 은근슬쩍 대학 이야기를 해달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이연의 말에, 차도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는 아직 울음기가 남아있는 이연의 발간 눈가를 빤히 바라보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다. 수다스러운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 그가, 선뜻 몇 년 전 이야기들까지 꺼내어 놓은 것이다.
“그때 교수님이 드디어 폭발해서 펜 던지면서 말했죠. 다 꺼지라고.”
차도윤이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맛깔나게 늘어놓자, 서이연은 손뼉까지 쳐가며 크게 웃었다.
“도윤아, 네 친구들은, 어떻게 그렇게 다 천방지축이야?”
“…….”
차도윤은 천방지축이란 단어를 쓰는 사람을 생전 처음 보았다. 도대체 그가 어떤 대본을 읽고 있기에 저런 어휘를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왠지 서이연이 말하니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어 피식 웃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오랫동안 편하게 대화를 나눠본 게 처음이라, 자신이 이토록 말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차도윤이 계속 얼굴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옆 창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였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바보처럼 웃고 있는 거지…….
“도윤아, 여기 진짜 요리 잘하는 것 같아.”
서이연은 비밀 얘기를 하듯 식탁 앞으로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그러게요. 맛있었어요.”
“우리, 근데, 진짜 술 먹으러 가?”
“왜요? 가기 싫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나 술을 잘 못 마셔.”
“그럼 약한 거로 먹을까요? 스파클링 와인이나, 샴페인 같은 거.”
“대학생들은, 막걸리나 소주 먹는 거 아니야……?”
스파클링 와인, 샴페인…… 다 가격대가 있을 듯한 술 아닌가…….
“형. 나 돈 많아요.”
“아, 그건 그런데, 내가 사주고 싶은데, 아직 정산을 못 받아서…… 돈이 많지는 않아.”
전무님이 주신 카드를 쓸 수도 있지만, 아는 동생과의 외식인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전무님은 생활비에 보태라고 돈을 주신 거니까…….
“왜 형이 내려고요?”
“내가 형이잖아…….”
“와. 형도 그런 거 따지는 사람이었어요? 안 그래 보이는데.”
차도윤은 씨익 웃으며 말했지만, 이연은 그가 미국에서 살다 와서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괜히 실수한 것만 같았다.
“그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도, 나는 네가 동생이니까, 사주고 싶었어…….”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갈 곳을 잃은 듯 흔들리는 서이연의 눈동자를 보자, 차도윤의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하하. 그럼 나 오늘 형한테 얻어먹을래요.”
“정말?”
“네. 그럼 우리 소주나 먹을까요?”
“그래! 먹어보자. 그런데 과일 소주 먹어도 돼?”
“형 먹고 싶은 걸로 마셔요.”
차도윤은 술만 얻어먹겠다며 재빨리 계산을 마쳤고, 두 사람은 2차로 대학로의 한 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차도윤과 서이연은 꽤 즐거운 술자리를 가졌다. 서이연은 계속해서 차도윤에게 대학 생활 이야기를 해달라 졸랐지만, 이번에는 차도윤이 그에게 연예계가 궁금하다며 말을 흘렸다. 동생이 듣고 싶다는데 모른 체할 수가 없어서, 이연은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겪었던 얘기들을 조심스레 내놓았다.
그리고 서이연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차도윤의 표정이 굳기 시작한 것은, 그가 술에 취해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무리 연기라도 뺨 맞으면 기분 나쁘지 않나.”
차도윤은 서이연의 조막만 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뱉었다. 하얀 볼의 면적이 너무 좁아 맞을 곳도 없는데 뺨 맞는 연기는 어떻게 하나 싶었다.
“연기일 뿐이니까 괜찮아. 내가 싫어서 때리는 게 아니니까…….”
“형은 맞으면 바로 울 것 같아요.”
“아닌데…… 아니야. 연기할 때는 울면 안 되잖아.”
서이연은 취했는지 웃음이 더 많아졌다.
“믿어줄게요.”
“근데 무서운 건, 한 번씩 뺨 맞을 때 옛날 생각이 날 때가 있어. 그러면 진짜 힘들어.”
서이연은 술을 홀짝홀짝 마시며 맨정신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예전 생각이요?”
“응, 보육원에서, 많이 맞았거든. 입양되고 나서도 많이 맞았어.”
“뭐라고요?”
“평소에는 괜찮은데, 맞을 때 자꾸 예전 생각이 나는 날이 있어. 좀…… 힘든 날.”
차도윤은 서이연이 태연하게 내뱉고 있는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보육원에 있을 때는 심지어 미성년자 아니었던가? 미성년자를 때렸다고?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많이 맞았다는 얘기를 내뱉는 서이연의 모습이 소름 끼칠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그럴 때면, 연기에 집중하기가 힘들어. 이때까지는 몇 초 안 되는 장면이라 다행이었긴 한데…….”
“형,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응, 중요한 건, 집중력이 필요한 장면에서, 그런 기억들이 떠올라서 촬영을 망치면, 내가 정말 미울 것 같아…….”
“하아…… 씨발.”
차도윤은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서이연은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자신만 탓하고 있었다. 술에 취했는지 발음도 점점 불명확해지고 고개도 푹푹 떨어지는 게, 이제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럴까 봐 걱정돼…… 무섭고. 무서워…….”
“신고했어요, 그때?”
“응? 무슨 신고?”
“보육원이나 양부모요. 때렸다면서요.”
“아니, 못 했어.”
“…….”
차도윤은 왜 신고를 하지 않았냐고 서이연을 다그칠 수 없었다. 그의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을 그의 상황이 너무나 쉽게 그려졌기에.
서이연은 이제 고개를 지탱하기도 어려운지 테이블에 엎어져 한쪽 뺨을 댄 채 중얼거렸다.
“사실 입양되고 나서, 아저씨한테 한 번 크게 맞은 적이 있었거든…… 그때 머리를 세게 부딪혔는데, 그 이후로는 예전 일이 잘 생각이 안 나. 그냥 맞은 기억들만 자꾸 떠올라.”
차도윤이 테이블 위에서 오물거리는 서이연의 입술을 바라보며 그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그의 뽀얀 이마가 드러나자, 취해 풀려버린 눈동자가 이마를 간질이는 손길을 좇아 움직였다.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땐, 진짜 무서웠는데…….”
“형, 괜찮아요?”
“언제쯤 다 잊을 수 있을까…….”
“집 주소 불러요.”
차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잊고 싶어. 잊기 싫은데 잊고 싶어…….”
“형.”
차도윤이 서이연의 옆으로 다가와 그를 똑바로 앉히고 양어깨를 잡았지만, 그는 금세 차도윤의 가슴팍으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분명, 좋은 추억들도, 더 많았을 텐데…… 맞은 것만, 기억나…… 왜 그럴까.”
차도윤은 풀이 죽은 채 자신의 품 안에 구겨져 있는 서이연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일단 호텔로 가요.”
차주원의 집에서 쫓겨난 차도윤은 잠시 세원그룹 계열사의 호텔에서 지내고 있었다.
서이연에게 집 주소를 말할 만큼의 정신이 남아있지는 않은 것 같으니, 아무래도 오늘은 호텔에서 재우고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서둘러 계산을 마친 차도윤은 흐물거리는 가벼운 몸을 부축해 그를 차에 태웠다.
“씹…… 건드리지만 않으면 괜찮겠지.”
그러나 서이연에게 안전벨트를 매주려 몸을 가까이했다가, 그의 목덜미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체향을 맡은 차도윤은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차 문을 쾅 닫았다.
“뭔, 씨발 스물여섯 먹은 남자한테서 아기 냄새가 나.”
술에 완전히 취한 오메가가 얌전히 자는 차를 세워두고, 차도윤은 기사를 기다리며 담배를 태웠다.
“하아…….”
서이연은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꽤 가까이 두고 싶은 오메가였다.
이렇게 즐겁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처음이기도 했고…… 저 투명한 눈동자를 맞춰오며,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볼 때면…… 왜 그 차주원이 끼고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알파든 오메가든 페로몬 냄새는 역겹다더니…… 위선자가 따로 없네…….
“하긴, 저 얼굴이면 페로몬이 걸레 냄새라도 좋다고 들러붙겠다.”
걸레 냄새가 아니라 분유 냄새가 나는 게 문제긴 하지만.
차도윤이 한숨처럼 내뱉는 담배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
“무, 물 좀…….”
차도윤이 호텔에 도착해 서이연을 소파에 풀썩 내려놓자, 서이연은 고개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손 진짜 많이 가네, 형.”
“감사, 하…….”
차도윤은 물을 건네주자, 말도 채 끝맺지 않고 꼴딱꼴딱 잘도 마시는 서이연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촤악-
“어…?”
그러나 차도윤이 잠시 눈을 뗀 사이, 서이연은 물벼락이라도 맞은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컵이 기울었는지 물이 그의 옷 위로 다 쏟아져 있었다. 본인도 놀랐는지 가만히 눈을 껌뻑이고 있던 서이연은 곧 올망거리는 눈동자를 맞춰왔다.
“형, 다 젖었잖아요.”
“미안…….”
“화 안 났으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요.”
차도윤은 서이연의 옷을 벗겨주려 그의 니트를 잡고 위로 올렸다. 베이지색 니트를 벗겨내자, 안에 받쳐입고 있던 새하얀 내복이 드러났다.
“오, 옷 안 가져, 왔는데…….”
“내 티셔츠 줄게요.”
“응…….”
“만세.”
“만세…….”
차도윤은 어릴 적 어머니가 자신에게 해주던 것처럼 만세를 중얼거리며 서이연의 내복을 위로 벗겨냈다. 그러나 곧 드러난 서이연의 뽀얀 겨드랑이는, 차도윤을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뭐야, 왜 털이 없어요?”
차도윤은 놀라 목소리를 높였고, 그의 굵고 커다란 목소리에 놀란 서이연은 곧바로 어깨를 움찔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놀리지 마! 흐으, 놀리, 놀리지 마…….”
“왜 또 울어요.”
갑자기 겁먹은 듯한 고양이가 털을 세우듯 울먹거리는 서이연의 태도에, 차도윤은 한숨을 내쉬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무마해보려 했다.
“크흠, 형, 겨드랑이에는 왜 털이 없어요.”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털 가지고 싶어. 흐으…….”
서이연은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술에 많이 취했는지, 서이연은 차도윤이 무슨 말만 꺼내도 울음을 터뜨리려 했다.
“형 밑에도 털 없어요?”
설마. 사타구니에도 털이 없다면. 차도윤은 갑자기 차주원에게 쌍욕을 하고 싶어졌다.
“아냐, 나, 나 있어…….”
차도윤은 서이연의 자신 없는 중얼거림에 의구심이 들었지만, 여기서 더 물어보면 그가 대성통곡이라도 할 것 같아 묻지 않기로 하였다.
“다시 한번 봐도 돼요?”
“응? 뭘……?”
“형 겨드랑이.”
“왜, 왜 보고 싶어 하는 거야…… 너도 이상해.”
“나도?”
“이상해…….”
“차주원도 겨드랑이 보자고 그랬어요?”
“아, 아냐…… 이제, 프랭키, 안 돼…….”
차도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서이연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래로 내리뜬 그의 눈매 위, 기다란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술기운 때문인지 발그레한 볼은 딸기 찹쌀떡이라도 되는 양 통통해 보였다. 아래의 도톰한 입술은 또 어떠한가. 물을 먹고 촉촉해져 있는 데다 계속 울먹이며 짓씹어서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차도윤은 연한 체취를 퐁퐁 터뜨리며 부스럭거리는 눈앞의 오메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타구니가 점점 답답해졌다. 왜 이걸 가만히 놔둬야 하지? 누구 좋으라고.
“형, 나랑 키스 한 번만 해요.”
“뭐……?”
차도윤은 서이연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마자 곧바로 입술을 붙여왔다. 부드럽게 목덜미를 감싸고, 혀를 집어넣어 비비는 모든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서이연은 몸을 감싸오는 그의 알파 페로몬으로 인해, 벗은 상체에 닿는 그의 옷감 자락에도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으응…….”
차도윤은 서이연의 목덜미와 허리를 단단한 손으로 매만지며 혀를 깊게 박아넣었다. 그는 작은 입 안을 천천히 훑으며 혀를 문지르다, 서이연의 아랫입술을 길게 빨아들였다. 짧은 키스를 마친 후 입술을 떼자, 서이연의 기다란 속눈썹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연은 조금만 움직여도 입술 표피가 닿을만한 거리에서 눈을 맞춰오는 어린 알파를 바라보았다.
“야…….”
“하하. 왜요. 형, 애인도 없잖아.”
차도윤은 태연하게 서이연의 가는 양팔을 들어 자신의 목덜미에 감으며 말했다.
“페로몬, 그만…….”
서이연은 밀려드는 알파 페로몬에 온몸에 힘이 빠져 흐느적대며 중얼거렸다.
“형도 섰죠?”
차도윤은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다시 입술을 붙여왔고, 서이연은 그의 무게에 못 이겨 소파에 무너졌다.
자신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는 서이연의 매끈한 팔을 천천히 매만지던 차도윤은, 보송한 겨드랑이 쪽으로 손을 내리기 시작했다.
“으으…….”
차도윤이 엄지손가락으로 마사지하듯 겨드랑이를 매만지자, 서이연의 입에서 신음이 새 나갔다.
직접 만지자 살결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말랑하고 보드라웠다. 그 때문에 차도윤은 서이연이 허리를 움찔거리며 뒤트는데도 그 여린 살을 멈추지 않고 문질렀다. 손을 뗄 수 없는 중독성 있는 살결이었다.
“아으…….”
“형, 입이 왜 이렇게 좁아요. 차주원 건 어떻게 물어?”
차도윤이 서이연의 겨드랑이와 허리를 매만지며 이것저것 묻기 바빴지만, 그의 알파 페로몬과 알코올에 취해있는 서이연은 그저 신음만 내뱉을 뿐 정확한 문장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는 서이연의 입술을 충분히 빨아준 후, 사슴 같은 목으로 입술을 내렸다. 차도윤이 숨을 들이쉬자, 서이연의 체향과 페로몬이 섞인 순한 향기가 빨려 들었다.
“하아…… 형. 냄새 진짜 꼴린다.”
“도유나, 아으…….”
차도윤은 서이연의 하얀 목에 입술을 찍으며 내려가더니, 바로 겨드랑이에 코를 박았다.
“히익!”
겨드랑이에서 은은히 풍기는 그의 여린 체향을 마음껏 맡던 차도윤은, 그대로 혀를 내어 보드라운 살결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겨드랑이를 베어 물기라도 할 듯 게걸스럽게 빠는 그로 인해, 서이연은 사타구니에서부터 번지는 성감을 참으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으응…… 하으…….”
매끄럽고 뽀송뽀송한 살결을 마음껏 핥고 빨던 차도윤은, 그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올려 젖꼭지를 건드렸다. 작지만 통통하게 부풀어 있는 젖꼭지를 빙빙 돌리던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무슨 이런 색이 다 있어.”
겨드랑이에서 입을 떼고 산호색 젖꼭지를 유심히 바라보던 차도윤은 그 귀여운 젖꼭지를 퉁퉁 튕기며 괴롭혔다. 손을 대면 대는 대로 파르르 떨리는 젖꼭지가 귀여워 계속 괴롭히고만 싶었다.
“야, 야, 도유나, 우리 이럼 안 돼…….”
그리고 서이연이 마침내 웅얼거리던 문장을 그나마 정확히 내뱉은 것은 차도윤이 젖꼭지를 물어버리기 직전이었다.
“왜. 차주원 때문에?”
“아니, 나, 나 때문에…….”
“무슨 소리예요.”
“나 전무님 좋아해…….”
“차주원이랑 사귀고 싶다고요?”
차도윤은 순간 서이연이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차주원을 좋아한다고? 서이연이 아직 그 사이코패스와 대화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건가?
“아니? 나 같은 게, 어떻게 전무님이랑 사귀어…….”
그러나 그는 마치 당연한 사실을 왜 묻느냐는 듯 말간 눈을 맞춰왔다.
“그럼 뭔데요.”
“그냥, 좋다구.”
씹, 귀여워…… 차도윤은 부끄러운지 눈을 아래로 내리뜨며 속삭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욕지거리를 삼켰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요.”
“이, 이런 건, 전무님이랑만, 하고 싶어…….”
너무나 서이연다운 대답에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차도윤은 산뜻한 미소를 지은 채 장난스레 말했다.
“왜 순진한 척이에요. 나랑도 섹스할 수 있잖아.”
서이연이 순진한 척하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차도윤은 괜히 짜증이 치밀었다. 이 순간만큼은 서이연을 먼저 채 간 차주원이 죽도록 미웠다.
“도윤아…….”
서이연의 눈꼬리가 난처한 듯 축 처졌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설득의 말을 뱉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술기운과 알파 페로몬에 취해 정확한 문장을 만들기 어려워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자고 가요. 안 건드릴 테니까.”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서이연은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흐느적거리는 몸을 세울 수도 없었다. 그저 멀어지는 넓은 등만 바라보고 있던 이연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겉옷을 힘겹게 주워 덮고 눈을 감았다.
알코올과 알파 페로몬에 젖은 무거운 몸이 서서히 무의식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
서이연이 차주원으로부터 다음 만남을 통보받은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그는 물밀듯 들어오는 광고와 화보 섭외로 인해 꽤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다음 달이면 드디어 박희은 작가의 새 드라마 촬영을 진행하게 되어, 이연은 요즈음 좀처럼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설레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차주원과 만나기로 한 그날도, 이연은 약속 시각보다 몇 시간 일찍 호텔에 도착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창밖의 아름다운 야경을 구경하기도 하고, 드레스룸에 걸려있는 차주원의 정장들을 몸에 대어보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이연은 헐레벌떡 문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달칵-
긴 코트를 걸친 차주원이 스위트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오늘도 한 점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멋질 수 있을까…… 이연은 얼굴 위로 퍼져나가는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이연은 그의 수려한 모습을 초롱초롱한 눈에 담자마자 바로 쪼르르 달려가 인사했다.
“전무님, 오셨어요?”
“…….”
차주원은 오늘도 무심함이 뚝뚝 묻어나는 서늘한 얼굴이었다.
“오늘은, 코트 입으셨네요. 엄청 잘 어울려요.”
“…….”
차주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의 눈치를 보던 이연은 재빨리 소파 위에 벗어놓은 베이지색 떡볶이 코트를 들고 그에게 달려갔다.
“저, 전무님이 주신 카드로, 이 코트 샀어요! 색깔이 예뻐서 샀는데, 저한테 잘 어울리죠?”
차주원이 낑낑대며 코트를 입는 서이연을 가라앉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굳게 닫힌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 보세요!”
서이연이 코트를 입은 모습을 더 잘 보여주고 싶은지 그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기까지 했다.
“…….”
그러나 남자는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서이연을 그대로 지나쳐 침실로 향했다. 묵직한 체향과 향수 냄새가 섞인 향기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어깨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 것을 느낀 이연은 또다시 그 뒤를 졸졸 쫓았다.
“전무님……!”
“…….”
“오늘 회사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서이연이 드레스룸에서 정장을 벗고 있는 차주원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서이연에게 시선 한 톨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겉옷을 벗고, 시계를 풀었다.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풀리는 손목시계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연이 그의 옆모습으로 시선을 올렸다. 선이 매끄러운 얼굴에서부터 목 끝까지 채워진 셔츠의 단추, 그리고 매끈하고 단단한 목에서 넥타이를 풀어내는 모습들을 커다란 눈에 담으며 관찰했다.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은 건조한 얼굴이 지쳐 보였다.
“전무님, 오늘 같이 씻어도 돼요?”
서이연이 조금 초조함을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눈조차 마주쳐 주지 않는 차주원의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
“제가, 등도 밀어 드릴게요.”
“…….”
“저, 두피 마사지도 배워 왔는데-”
“나가.”
차주원이 드디어 고저 없는 목소리를 입 밖으로 꺼냈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와 경멸을 담고 있는 날카로운 눈빛에 이연의 어깨가 움찔했다.
“…….”
저번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시면 안 돼요……?
이연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을 꾹 눌러 삼켰다. 아무래도 그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으니 더는 그를 귀찮게 하지 않고 싶지 않았다.
“……저, 나가 있을게요…….”
풀죽은 목소리가 작은 입 밖으로 웅얼거리며 흘러나왔다. 차주원은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터덜터덜 침실을 나가는 그에게 여전히 시선 한 자락 던져주지 않았다.
“아휴…….”
침실을 나온 서이연은 리빙룸에 위스키와 잔을 힘없이 세팅했다.
오늘 남자는 기분이 굉장히 나빠 보였다. 평소보다 더. 혹시 회사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 때문일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인사였는데. 설마 같이 씻자고 한 것 때문에 그런 걸까. 다른 사람이랑 같이 씻는 걸 싫어하시나? 그렇지만 내가 그런 몸이라면 하루가 멀다 하고 공중목욕탕을 갔을 텐데…… 아닌가.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건가.
“휴우…… 멍청아. 더 생각해봐…….”
서이연이 소파에 앉아 한숨만 내쉬고 있던 사이, 차주원이 리빙룸으로 걸어 나왔다. 거추장스러운 겉옷과 넥타이를 벗고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그대로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잔에 따랐고, 서이연은 그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많은 양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잔을 비운 차주원은, 어느새 자신에게 다가와 바로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는 서이연에게 시선을 두었다.
“전무님…….”
서이연이 차주원의 손을 잡고 싶다는 듯 슬금슬금 손을 움직였다. 핏줄이 돋아있는 단단한 손에 깍지를 끼우려 손가락을 집으려는데,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도윤은 왜 만났어.”
서이연은 바로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새까만 동공 안에서 일렁이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초조해진 이연은 바로 대답을 뱉어냈다.
“아, 도윤이요? 저, 도윤이가 저녁 먹자고 연락이 와서…… 대학가에서, 같이 저녁 먹었어요.”
이연은 드디어 그가 말을 걸어주는 것에 대한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방긋 웃는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
차주원은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은 채 서이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연은 그가 자신을 지긋이 쳐다봐주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볼만 발긋하게 붉히고 있었다.
그러나 서이연의 태연하고 성실한 대답에도, 차주원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서이연의 순한 눈매에 가만히 시선을 두고 있는 그의 모습은 도무지 현실적이지가 않았다.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침묵이 어색했던 이연은 그의 손에 손가락을 깊숙이 끼우며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프랑스 가정식 먹었어요…….”
“…….”
“과일 소주도, 마셨어요…….”
“…….”
차주원의 무거운 침묵이 점점 숨 막히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니, 침묵 때문이 아니었다. 페로몬.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알파 페로몬이 마치 목이라도 조르는 양 달려들어 숨통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소주 먹고 좀 취했었는데, 잘 기억은 안 나고, 크흡, 도윤이가 자기 집에서, 아니 호텔이긴 한데, 거기서 지낸다구…… 끄윽, 그래서 거기서-”
서이연이 숨을 밭게 쉬면서도 이야기를 더듬더듬 늘어놓았다. 그냥, 이 소름 끼치는 정적이 계속되는 것을 막아야 할 것 같았다.
“서이연.”
차주원이 고저 없는 목소리를 뱉었다. 폭발하지 않으려 무던히 참고 있는 목소리 같기도, 가볍게 묻는 목소리 같기도 했다. 이연은 그 모순이 너무 무서웠다.
“네……?”
“내가 그렇게 쉬워?”
“…….”
“너무 쉬워서, 우스워?”
차주원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러나 피부를 고통스럽게 찌르는 그의 페로몬으로 인해, 이연의 하얀 이마 위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아니. 넌 내가 우스운 거야.”
차주원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안광을 희번덕거리며 미소 짓는 그 모습이 너무 무서워, 이연은 오줌이 찔끔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아니면 그럴 수가 없지.”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덜덜 떨며 차주원의 살기 어린 얼굴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넌 너무 연기를 잘해.”
“전무, 님…….”
점점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이연은 금방이라도 눈에서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그를 애타게 불렀다.
“순진한 척하는 연기.”
“흐윽…….”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 맞춰 올 때마다 오냐오냐해줬으니, 내가 얼마나 우스웠겠어.”
“아니, 아니에요…….”
이연은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더욱 몸을 붙였다. 차주원은 마치 안아달라는 듯 가까이 다가오는 서이연의 턱을 잡아채며 물었다. 그의 무시무시한 악력에, 이연은 턱이 빠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넌 내가, 내 걸 나눠야 하는 사람처럼 보여?”
“…….”
이연은 남자가 이렇게까지 화가 난 이유가 차도윤과의 스킨십 때문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흐으……. 으윽.”
이연은 차주원의 미소와 페로몬이 너무 무서웠다. 이제껏 아무리 그가 화났어도 이런 페로몬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마치 동상에 걸린 것같이 팔과 다리가 저렸다. 머리가 아프고, 배도 아프고, 흐느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잡고 있는 턱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입을 벌리기도 힘들었지만, 이연은 훌쩍이며 무어라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차주원은 이연이 입을 떼려 하자 그의 얼굴을 팽개치듯 놓았다.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쓸어 올리는 차주원의 얼굴이 피로해 보였다.
“저, 전무님, 전-”
“이연아. 우리 이제 그만하자.”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낮은 목소리는, 서이연의 호흡을 막아버리기에 충분했다. 이연은 차주원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보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지금 전무님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지……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의 건조한 얼굴에 선명하게 드러난 체념이 너무 서러워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너도 힘들잖아.”
“…….”
“연기하기 힘들지 않아?”
“…….”
“내 앞에서 계속 연기하는 거. 힘들잖아.”
차주원이 깊은 체념과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얼굴을 한 채 물었다. 서이연의 볼은 이미 울음기로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흐으…… 그러, 그렇게, 말, 하지 마세요…….”
서이연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눈을 하고는, 그 커다란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을 펑펑 쏟아냈다.
“흐으, 저, 전무님…… 저, 연기 계속할 거예요. 흐윽, 연기, 해야 해요…….”
그만하자니. 연기하는 게 힘들 테니 그만하라니. 서이연은 연기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연기만 계속할 수 있으면 어떤 힘든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차주원은, 서이연이 연기를 계속하기 위해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제가, 제가 다 잘못했어요…… 흐으, 제가 잘못했어요…….”
서이연은 무작정 빌었다. 차주원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엉엉 울며 매달렸다.
“저 버리지 마세요…… 버리면 안 돼요…… 으윽…….”
차주원은 이연의 손이 무릎에 닿는 게 경멸스럽다는 듯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를 쓸어올리며 창가로 향하는 숨이 분노로 거칠어져 있었다.
서이연도 그를 따라 떨리는 다리를 일으켰다.
“전무님…… 저, 저 다시는, 안 그럴게요…… 흐윽.”
그는 굳은 얼굴로 창가에만 시선을 두고 있는 차주원의 뒤에 서서,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다. 멍청하게도 술기운과 알파 페로몬을 이기지 못해, 간질간질한 자극을 느꼈던 그때로 시간을 되돌리고만 싶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절대로 그러지 않을 텐데. 어떻게든 차도윤을 떼어 내려 발버둥 쳤을 텐데.
“제가, 멍청해서 그랬어요. 바보라서, 그래서, 잘못한 거예요…… 흐으…….”
“닥쳐.”
“흐윽…… 전무님, 제발요…….”
서이연은 차주원의 허리를 잡고 매달리며 애원했다. 고통스럽게 피부를 찌르는 알파 페로몬과 그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차주원이 고개를 돌리고 똑바로 눈을 맞춰왔다. 서이연이 흐린 시야를 걷어내고 그와 눈을 맞추기 위해 눈물을 닦았다.
“강제였다고 말해.”
“……네?”
“차도윤이 강제로 그런 거라고.”
차주원은 서이연을 차가운 눈길로 내려다보며 낮게 읊조렸다. 당장이라도 폭발해 버릴 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담은 목소리가 시렸다.
“말해.”
“전무님…….”
이연이 떨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강제가 아니었다. 알파 페로몬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헤퍼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강제가, 아니었다.
이연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닫고야 말았다. 그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깨달았다.
내가 전무님을 배신했어…….
차주원을 올려다보고 있던 이연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고, 서러움을 담은 눈에 걸려있던 눈물방울도 함께 추락했다.
차주원은 눈을 내리깐 그의 젖은 속눈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한참 후에야 울음이 묻은 축축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공기를 갈랐을 때.
퍼억-
서이연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작은 몸이 옆으로 휘청거리다, 이내 바닥에 엎어졌다.
“흐으, 으으…… 으윽.”
“일어나.”
덜덜 떨고 있는 마른 어깨와 다리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차주원이 시린 목소리를 내었다. 이연이 훌쩍거리면서도 착실히 다리를 세워 그 앞에 섰다.
“강제였다고 말해.”
“흐으…… 저, 저는 전무님이랑만, 하려고-”
퍼억-
“흐윽……. 으으…….”
서이연의 가는 다리는 이번에도 중심을 잡지 못했다. 아니, 누구였더라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분노에 가득 찬 우성 알파는, 너무나 위험한 존재였다.
“일어나.”
“흐으, 으윽…… 저, 전무님…….”
차주원이 이미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서이연의 왼쪽 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입가가 터져 핏물이 맺혀 있고, 커다란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그의 모습은 가학심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전무님…… 잘못했어요…….”
그러나 차주원은 화가 나 있었다.
페로몬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손이 덜덜 떨릴 만큼 화나 있었다.
“변명이라도 해.”
“흐윽, 전무님…… 저, 제가…….”
“…….”
“제가, 제가요…….”
이연은 또다시 차주원의 앞에 섰다. 다시 맞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의 앞에 섰다. 공포와 절망으로 물든 머리는 그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설명을 해야 한다.
이연이 덜덜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제가, 전무님을 좋아해요…….”
“…….”
서이연이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악의 말을 내뱉은 것은, 그가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이 그 말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술에 취해서 실수했지만, 전무님을 좋아해서 멈췄어요. 전무님이랑만 키스하고, 섹스하고 싶어요. 전무님을 많이 좋아해요. 그러니까 절 버리지 마세요. 무섭게 쳐다보지 말고, 꼭 안아주세요.
손찌검에 터져버려 피가 새어 나오는 입술은 공포로 뿌옇게 물든 머릿속을 따라와 주지 않았다.
“……하.”
그러나 서이연이 마주한 차주원의 눈은,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깊은 모멸감을 담고 있었다. 그의 얼굴 위에 숨길 수 없는 절망이 퍼져 있었다. 총알처럼 강하게 퍼져나가는 우성 알파 페로몬이 이연의 여린 피부를 상처입혔다.
“흐으…… 으윽…….”
이연은 이번에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너무나 선명하게 느꼈다. 피부에 닿아오는 그의 페로몬이 너무나 아파서,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항상 멍청하게 일을 망치는 자신이 너무나 싫어졌다.
차주원이 그의 앞에서 서럽게 흐느끼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연이 덜덜 떨리는 작은 손을 겹쳐 잡고, 아이처럼 크게 울고 있었다.
“……좋아한다고.”
“흐윽…… 우윽…….”
“네가, 날 좋아한다고.”
“네에…… 전무님…… 흐으.”
“그래서, 그랬다고.”
“흐윽, 전무님…… 흐으…… 네에…… 죄송해요.”
차주원이 손으로 눈두덩이를 덮은 채 고개를 들었다. 체념이 담긴 무거운 한숨이 천장으로 흩어졌다. 차도윤과 호텔로 들어가 다음 날 아침까지 나오지 않았음에도, 내 앞에서는 변명조차 하지 않는 널, 아무렇지 않게 날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널, 나는 도대체…….
“……그래. 죄송해야지.”
서이연은 차주원의 몸에서 가시처럼 튕겨 나오던 페로몬이 천천히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다. 목에서 걸려 잘 넘어가지 않던 산소를, 드디어 조금은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다.
“너한테 양심이란 게 있다면, 그래야지.”
“죄송, 해요…… 흐윽.”
저 같은 게, 감히 전무님을 좋아해서 죄송해요.
“…….”
“으으…… 흐윽.”
“벗어.”
고압적인 음성이 귓가에 닿자마자, 이연은 눈물을 매단 커다란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차주원의 얼굴에서 더는 이전의 다정함을 찾을 수 없었다. 경멸과 혐오 이상의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무심한 낯에, 이연은 더욱 크게 울음을 터뜨려버리고 싶었다. 주저앉아 떼를 쓰며 그의 포옹을 받고 싶었다. 그에게 다시 다정하게 대해 달라 무릎 꿇고 애원하고 싶었다.
“섹스하고 싶어서 그딴 말 지껄인 거 아니야?”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스폰 받는 배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전무님한테, 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이번에도 속아 넘어가 줄 테니까, 울지 말고 벗어.”
차주원이 거칠게 벨트를 풀어냈다. 검은 벨트가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뱀처럼 빠져나와 그의 손에 들렸다.
이연은 훌쩍거리면서도 몸에서 옷을 한 꺼풀씩 벗겨냈다. 차주원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 이연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보들보들한 니트도 벗어내고, 그 안의 내복도 벗었다. 바지와 속옷까지 벗어 내리자 이연은 완전한 나체가 되었다.
그러나 서이연은 곧, 제대로 숨을 내쉬는 것도 잊은 채 경악했다. 자신의 목에 차주원의 벨트가 감길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차주원이 벨트를 목에 감을 때의 힘에 짓눌려 바닥에 주저앉은 이연은, 마치 개 목줄을 쥔 양 벨트 끝을 쥔 알파의 무자비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전무, 님…….”
차주원이 벨트를 끌어당기자, 이연의 목이 끌려가 얼굴이 그의 사타구니에 부딪혔다. 허겁지겁 단단한 허벅지를 잡고 몸을 지탱한 이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무서워…… 너무 무서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차주원의 바지를 움켜쥔 이연은 두려움이 덕지덕지 묻은 눈을 들어, 그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마치 두꺼운 얼음이라도 덮여 있는 듯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차주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 속, 마침내 이연이 정장 바지 지퍼를 끌어 내릴 때까지.
“흐으…….”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값비싼 정장 바지의 앞부분을 열고 속옷을 끌어 내려, 그 안의 성기를 잡을 때까지.
“후우…… 으윽.”
이연은 울음으로 할딱이는 숨을 진정한 후, 거대한 성기 끝을 물었다. 그러나 이연이 입을 아무리 크게 벌려도, 그는 차주원의 귀두조차 제대로 물지 못했다. 그 애처로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차주원이 애정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무심한 낯을 한 채, 쥐고 있던 벨트를 잡아당겼다.
“으윽!”
몸이 앞으로 끌려 당겨짐과 동시에 숨이 턱 막혔다. 차주원은 열린 목구멍에 그대로 성기를 처박았다. 성기를 중간까지 밀어 넣자, 이연의 눈이 까뒤집히기 시작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가 야했다.
차주원은 벨트를 쥔 손을 물리지 않았다. 목을 조르고 있는 벨트로 인해 이연이 뒤로 몸을 물리지 못하자, 성기가 계속해서 목구멍을 파고들었다.
“끄윽…….”
산소가 부족해져 숨이 새는 소리가 났다. 이연은 차주원의 허벅지를 밀어내며 몸을 물리려 했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벨트를 쥐고 있는 차주원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검은 음모에 코를 박은 이연이 산소를 들이마셔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끕…… 브윽…….”
차주원이 벨트를 놓은 것은, 이연의 팔이 더는 허벅지를 밀어내지 못하게 되었을 때였다. 힘없이 떨어진 그의 손가락이 바지를 주르륵 쓸어내렸을 때, 거대한 성기가 입 안을 긁으며 빠져나갔다.
털썩-
작은 몸이 바닥으로 엎어진 건 당연한 순서였다. 허겁지겁 산소를 들이마시느라 캑캑대는 이연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침이 줄줄 흐르는 입가는 살짝 찢어져 있었다.
“흐으…… 하악…….”
마른 가슴이 위로 솟아올랐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때까지도 차주원은 아무런 말 없이 서이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연이 겨우 숨을 고르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을 때, 서늘한 목소리가 아래로 꽂혔다.
“일어나.”
“……흐으…….”
가는 다리가 비틀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고 곧게 세워졌다. 이연의 마른 어깨와 떨림을 숨기려 꼭 쥐어 잡은 양손을 눈에 담은 차주원의 얼굴이 그 깊이를 짐작하기 힘든 비참함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차주원은 훌쩍이는 서이연의 목에서 벨트를 풀어낸 뒤 그를 거칠게 돌렸다. 이연의 양 손목을 벨트로 결박하는 차주원의 손길에서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순식간에 양팔을 뒤로 묶여버린 이연은 쉬어버린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전무님…… 전무님…… 저, 저-”
“입 다물어.”
“흐으…….”
조금이라도 그가 기분을 풀었으면 하는 마음에 용기 내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했다. 멸시를 담고 있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이연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차주원이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이연의 팔을 거칠게 잡고 침실로 향했다. 손이 뒤로 묶인 채 끌려가자니 마치 범죄자라도 된 기분에 이연의 훌쩍임이 더욱 거세졌다.
차주원은 그를 침대 위에 팽개쳤다.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엎어진 이연은 뒤에서 등을 눌러오는 단단한 손길을 느끼며 생각했다. 오늘은 그가 원하지 않으면 그에게 닿을 수 없다. 차주원이 자신을 묶은 이유는 아마 제 손길이 닿는 것이 싫어서일 것이다.
“으윽…….”
이연은 푹신한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차주원의 단단한 손가락이 서이연의 구멍 주위를 만지작거렸다. 이제껏 울고 애원하기만 했던 몸은, 구멍을 조금도 촉촉하게 만들지 못했다.
남자가 천천히 알파 페로몬을 풀었다. 보송한 구멍 가장자리 주름을 엄지로 매만지며 페로몬을 조절하는 그의 표정에서 착잡함 이외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 전무님…….”
이연은 농도 짙은 우성 알파 페로몬이 허벅지를 슬금슬금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그를 제대로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지만, 이연은 우성 알파 앞의 한낱 열성 오메가일 뿐이었다.
폭포 밑에 자리해 있으면 쏟아져 내려 온몸을 적시는 물보라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차주원의 페로몬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연을 흥분시켰다.
“하으…… 흐윽.”
하얗고 부드러운 몸을 타고 흐르는 페로몬이 점점 이연의 다리를 벌렸다. 허리를 배배 꼬이게 하고, 허벅지를 떨리게 했다.
차주원은 어떠한 전희도 없이 귀두를 구멍에 맞추었다. 알파 페로몬으로 인해 물기를 뱉은 구멍 가장자리가 벌써 주먹만 한 귀두에 조르듯 달라붙어 왔다.
“아윽!”
귀두부터 뿌리 끝까지 성기가 한 번에 처넣어지고, 단단한 허벅지가 덜덜 떨리는 부드러운 허벅지에 쾅 치받았다.
서이연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흉포한 성기에 내벽의 힘을 풀기가 어려운지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배가 꽉 차 있는 데다 양손이 자유롭지 못해, 마치 그의 거대한 성기에 꿰뚫린 것만 같았다.
“하아…… 으으…….”
그러나 차주원은 벌벌 떨리는 하얀 허벅지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이연의 다리를 더 벌린 뒤, 이미 뿌리 끝까지 들어가 있는 성기를 더 깊게 밀어 넣었다.
“아흑! 기, 깊어요…… 흐으…….”
이연은 전립선을 짓누르듯 파고드는 그의 성기에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핏줄이 돋아있는 단단한 성기가 여린 내벽을 거침없이 파고들며 내벽을 쑤셨다.
차주원은 그저 서이연의 가는 허리와 뒤로 결박된 손목을 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 잡고, 성기를 쾅쾅 박아넣기만을 반복했다.
“으윽…… 하읏, 저, 전무님…….”
이연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그를 불렀다.
그러나 침실에는 사타구니가 부딪히는 소리와, 정체 모를 액체가 찌걱거리는 소리, 이연의 신음 소리만이 맴돌 뿐 남자의 목소리는 절대로 섞여들지 않았다.
“전무, 전무님…… 아으.”
이연은 전립선을 쾅쾅 치받는 그의 성기에, 발가락을 오므리며 계속해서 그를 불렀다. 찌릿하게 내벽을 자극하는 성감에 자꾸만 혀가 풀려 발음을 내뱉는 게 쉽지 않았다.
그 순간, 차주원이 허릿짓을 멈추더니 성기를 한 번에 빼냈다.
“히익!”
순식간에 내벽을 긁어내리며 빠져나간 단단한 성기에, 이연의 눈이 뒤집혔다. 혀를 내민 채 신음을 뱉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웅얼거림이 목을 긁고 나왔다. 엉덩이를 위로 쳐든 채 허벅지만 덜덜 떨고 있는데, 차주원이 이연의 어깨를 돌려 잡고 똑바로 눕혔다.
차주원은 침을 질질 흘리며 밭은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이연의 다리를 태연히 벌리고, 다시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이윽고 그의 성기가 다물린 주름을 다시 파고들었다.
“아으…….”
이연은 그가 잡아 벌리고 있어 허공에 들려 있는 양 다리를 발차기하듯 살짝 움직였다. 수십 번을 받아도 적응되지 않는 거대한 크기의 성기가 느릿하게 밀고 들어오는 순간에는, 몸을 스스로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발차기를 하고, 허리를 뒤틀어보기도 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뒤로 묶여있는 손을 꼼지락거리기도 하며 구멍에 힘을 풀자, 마침내 그의 음모가 회음부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전무, 님……. 전무님.”
이연은 끝까지 박힌 성기가 움직이지 않자, 맺혀있는 눈물방울을 떨쳐내려 눈을 꾸욱 감았다 떴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
그러나 서이연이 마주한 차주원의 눈은, 전에도 본 적 있는 싸늘한 경멸을 담고 있었다. 살을 맞대고 있는데도, 이렇게 성기의 핏줄까지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밀착해 있는데도, 그의 얼굴에선 성욕 한 가닥 찾아볼 수 없었다.
“흐으…… 아, 안 돼…… 아니야…….”
서이연은 그제야 이 섹스가 체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으흑…… 전무님…… 제가, 잘못했어요…….”
차주원은 그저 서이연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말을 해도 목소리를 허락해주지 않는 그의 태도에 서러워져, 이연은 훌쩍이며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전무님을, 제가, 제가 좋아하는데, 배신, 했어요…… 흐으…… 그러, 그러면, 안 됐는데…….”
그때, 서이연의 허벅지를 벌리고 있던 차주원의 손이 천천히 위로 움직였다. 배꼽과 가슴 위를 지나오는 커다란 손을 바라보며, 이연은 그가 자신의 눈물을 닦아줄 수도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었다.
“크흑-”
그러나, 단단한 손은 사슴 같은 목을 거세게 쥐어 잡았다. 서이연의 눈이 두려움으로 커지고, 그가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차주원은 손에 힘을 주었다.
“히익!”
서이연은 그의 손을 잡고 밀어내고 싶었지만, 그의 팔은 뒤로 묶여있어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입을 크게 벌리고 공기를 들이마시려 하거나, 다리로 시트를 밀어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서이연이 가늘고 하얀 다리를 버둥거리며 침대를 치고 몸을 비틀수록, 내벽이 성기를 쥐어짜듯 조여 왔다.
“끄윽…… 흐으.”
차주원은 서이연의 목을 조르며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파 페로몬으로 인해 힘을 받아 서 있던 이연의 성기가 마치 겁을 먹은 듯 파르르 떨렸다. 그는 이연의 목과 허벅지를 누른 채 점점 거칠게 성기를 삽입했다.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내벽으로 너무나 강한 자극을 느끼게 되자, 서이연은 자지러지며 신음을 내질렀다. 마른 어깨와 도톰한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지만, 차주원의 얼굴에는 여전히 어떠한 표정도 덧씌워지지 않았다.
“하윽! 으윽! 끄으…….”
공기가 새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까뒤집은 이연은 더는 차주원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점점 움직임이 없어지는 이연의 풀린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허리를 치받았다.
“아으…….”
쥐어짜듯 수축한 내벽 안의 거대한 성기가 끈적한 액체를 뱉어낸 것은, 결국 서이연의 다리가 버둥거림을 멈추었을 때였다. 전립선을 짓누르며 뜨끈한 액체를 내뱉는 차주원의 성기로 인해, 이연이 가는 허리를 움찔거리며 엉덩이를 띄웠다. 그때까지도 이연은 풀린 얼굴로 침만 질질 흘렸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멍하니 허공을 향해 있었다.
차주원은 사정과 동시에 서이연의 목에서 손을 뗐다. 목을 감싸고 있던 커다란 손이 사라지자, 이연의 작은 몸이 들썩거리며 밭은기침을 뱉어냈다.
“크흡, 흐윽…… 하아…….”
목이 졸리는 감각과 서러움으로 인해 발기가 풀린 지 오래였다. 남자는 사정을 마쳤지만, 이연의 성기는 여전히 숨이 죽은 채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또 한 번 내벽을 사납게 긁으며 성기를 빼내고는,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는 이연의 몸을 뒤집었다. 그러고는 손목을 결박하고 있는 벨트를 배려 없는 거친 손길로 풀어내고,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결국 그날 밤 서로의 살이 맞닿아있던 내내, 서이연은 절대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이연은 한동안 침대 위에 엎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흐윽…… 으으…… 전무님…….”
두꺼운 시트에 얼굴을 묻은 그는 막막함과 자괴감으로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 축 늘어진 팔다리가 울음으로 인해 미세하게 떨렸고,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전무님을 배신했을까.
나를 안아주는 단 한 사람인데.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인데.
“흐으윽…… 우윽…….”
모든 걸 제 손으로 망쳐버린 것만 같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고 멍청할까…….
소리도 못 내고 흐느끼던 이연이 쓰러지듯 정신을 잃은 것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
“이제 바깥나들이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니.”
“…….”
차 회장이 입을 연 것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였다. 두 사람이 아무 표정 없이 식기를 움직이고 있는 삭막한 분위기와 다르게, 식탁 위에는 다채로운 요리들이 가득했다.
“언제 입학할 거니.”
“……어딜요.”
“모르는 척하지 말거라. 미국 말이다.”
차주원은 꾸역꾸역 음식물을 삼켰다. 목구멍을 긁고 넘어가는 음식들이 모래알처럼 느껴져 구역질이 일었다.
“지켜야 할 게 있는 이는 큰 그릇이 되기 어렵지.”
“…….”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쉽게 포기해 버리거든.”
“…….”
“지금 너처럼 말이다.”
“……그런 거 아닙니다.”
“오래 기다리지는 않으마.”
차 회장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에 홀로 남겨진 차주원이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가 떠난 이후로,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식사 자리가 죽고 싶을 만큼 싫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국으로 보내버리려는 아집도, 당연히 자신이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거라 예상하는 안일함도, 다 싫었다.
“…….”
그냥 도망쳐 버릴까.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
“형, 형, 형이 예전에 친구 많이 없다고 그랬잖아-”
아이가 그렇게 물어온 것은 두 사람이 보육원 뒷마당 벤치에 나란히 앉아 차주원이 가져온 팝콘을 함께 먹고 있을 때였다.
“응.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아.”
“형 친구들이, 괴롭혀?”
아이는 조금 눈치를 보는 듯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차주원은 그 커다란 눈 안에서 눈동자가 떼구루루 구르듯 자신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괴롭힌다면 괴롭히는 거긴 하지.”
세원에 연줄 한번 대어보겠다며 들러붙는 날파리 떼는 항상 귀찮게만 느껴졌다. 이제는 처음 보는 사람이 말만 걸어도 인상이 찌푸려지기 시작해 아버지에게 경고받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차주원은 그냥 사람이 싫었다.
“그러면, 그럼, 형, 하지 말라고 해.”
아이는 웬일로 순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 동그란 눈에 힘을 주며 당차게 말하는 그를 보자, 차주원은 웃음을 터뜨릴 뻔한 걸 참아야 했다.
“그러면 애들이 더 괴롭히지 않을까?”
차주원은 이성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원래 애들이라는 게 꿈틀거리면 더 밟아버리는 잔인한 족속이니까.
“……그래두, 그렇게 말 해봐.”
그러자 아이는 조금 풀죽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팝콘 가루가 묻은 도톰한 입술이 조금 튀어나온 듯 보이기도 했다.
“알겠어.”
“응. 그렇게 말해보고, 나한테도 말해줘. 친구들이 이제 안 괴롭히는지.”
“그럴게.”
차주원은 아이에게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아이의 말대로 하지 말라느니 하는 나약한 소리를 날파리들에게 지껄일 마음은 없었지만,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스러운 말이겠거니 생각한 그는 팝콘 한 조각을 들어 아이의 입가에 대주었다.
그는 냉큼 팝콘을 받아먹은 뒤 환하게 웃었다.
“맛있어?”
“응! 형 집에는 팝콘 많아?”
“아니. 너 주려고 가져온 거야.”
“형은 팝콘 안 좋아해?”
“글쎄, 그냥 그래. 근데 너랑 같이 먹으니까 맛있네.”
“나도! 나도 형이랑 같이 먹어서 맛있는 것 같아.”
차주원은 아이의 하얀 볼에 귀엽게 찍힌 보조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보조개에 손가락을 대고 꾸욱 누르는 장난을 치자 아이의 입에서 간지럽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형은 맨날 볼만 괴롭혀.”
“다른 데도 괴롭혀볼까?”
“어디?”
“여기.”
차주원이 아이의 작은 코를 잡고 흔들었다.
“안 돼! 못생겨져!”
“하하. 못생겨져?”
이렇게나 예쁜데, 못생겨질 데가 어딨다고. 차주원은 코를 가린 채 유순한 눈망울을 치켜뜬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형, 나같이 큰 애도 입양 갈 수 있을까?”
그러나 아이는 순식간에 조금 풀이 죽은 얼굴로 물어왔다.
“너같이 큰 애?”
차주원은 아이의 하얀 얼굴을 마주 보며 되물었다. 얼굴도 작고, 코도 작고, 키도 작고, 손도 작은 아이인데, 도대체 어디가 크단 말인가. 그 질문이 잘 이해되지 않은 차주원은 괜히 아이의 조막만 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응, 나, 열네 살이잖아…….”
“아, 당연히 갈 수 있지.”
나이 얘기였구나. 아이는 열네 살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그리 보이지 않았다. 몸집이 작고 말라서일까.
“그렇지? 그랬으면 좋겠다…… 원장님은 내가 못생겨서 힘들 수도 있대.”
“뭐?”
“나 못생겼어, 형? 아직 아무한테도 못 물어봤어.”
“여원아.”
“우리 엄마랑 아빠는 나 예쁘댔어…….”
“내 눈에도 그래. 너 정말 예뻐.”
“그러면, 그럼 됐어. 엄마랑 아빠랑, 형한테 예쁘니까…….”
아이는 작게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하. 원장 혼내줘야겠다. 형이 혼내줄까?”
“응? 아니, 원장님 무서워…….”
“그럼 혼내지 마?”
“응…… 형은 착한데 원장님은 무서워. 형이 질 수도 있어.”
“하하하. 여원아.”
차주원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너무 순진해서 어처구니없게 들리는 말도, 아이의 입에서 나오니 그저 귀여운 어리광으로 들렸다.
기분 좋은 듯 볼을 붉히며 쓰다듬을 받고 있는 아이를 보니, 절로 그의 발긋한 볼에 손이 갔다. 그는 아이의 볼을 늘리며 장난을 걸었다.
“왜 그래……!”
“여원아, 네 볼 엄청 늘어난다.”
“안 돌아오면 어떡해, 형……!”
그는 찹쌀떡처럼 늘어나는 아이의 볼을 아프지 않게 잡고 문지르며 놀렸고, 아이는 올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칭얼거렸다.
“하하하.”
차주원이 볼을 놔주자, 아이는 조금 발개진 볼을 작은 두 손으로 문지르며 새침한 눈초리를 했다.
“나 못생겨지면 형 탓이야…….”
나름 눈을 흘겼지만 여전히 유순해 보이는 동글동글한 눈매에, 차주원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형이 어떻게 알아…….”
아이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조금 발긋해진 볼을 만지작댔다. 길 잃은 강아지, 혹은 새끼 고양이가 가냘프게 울며 바짓가랑이에 달라붙으면 이런 기분일까.
아직 아이를 아끼는 마음이 어떤 감정인지 제대로 정의하지 못했다. 전혀 알지 못하는 감정이었다. 누군가를 보호해주고 싶다는 마음은.
“형이 여원이를 많이 좋아하니까 알지.”
“……응.”
그러나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리는 아이는 차주원이 이제껏 본 어떤 생명체보다 귀하고, 순했다. 마냥 아껴주고, 보듬어주고만 싶은 아이였다.
이 감정의 이름이 무엇일지는, 아이의 곁에서 천천히 고민해보아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형, 다음 주에도 올 거지?”
“응. 여원이 보러 와야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런데 형은 왜 맨날 먹을 거 사 오는 거야?”
“네가 먹고 싶다며.”
“난 먹고 싶다고 한 적 없어! 그냥 형한테 신기하다고만 했어.”
“하하. 알았어. 형이 먹고 싶어서 가져온 거야.”
“난 형한테 줄 것도 없는데, 계속 형만 사주니까…….”
“여원아.”
“나도, 형한테 맛있는 거 주고 싶어. 근데 돈이 없어…… 미안해.”
고개를 떨군 아이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차주원의 얼굴에 실금이 갔다. 아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저 아이의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 베풀었던 가벼운 호의가 그에게는 꽤 무겁게 받아들여졌나 보다.
“형이 주기만 하는 것 같아?”
“응…… 나도 주고 싶어. 근데 형한테는 필요 없을 것 같은 거밖에 없어…….”
“형은 여원이가 크면 맛있는 거 사주길 기대하고 있는데?”
“나 커서……?”
“응. 왜, 커서는 형이랑 안 만나주려고?”
“아냐! 커서도 형이랑 만날 거야! 그때는 내가 형 맛있는 거 사줄게. 그거, 그거, 치킨 사줄래!”
“하하. 기대하고 있을게.”
차주원은 다음 주에는 치킨을 사 와야겠다 생각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형, 형, 다음 주에 꼭 와야 돼요.”
“응. 꼭 올게.”
“응응. 나, 형한테 꼭 주고 싶은 거 있어.”
“뭔데? 미리 알려주면 안 돼?”
“안 돼! 형 보면 깜짝 놀랄 거란 말이야!”
“하하. 나 깜짝 놀라는 거야?”
“응!”
“알겠어. 깜짝 놀랄 준비하고 올게.”
“괜찮아, 편하게 와두 돼!”
“하하.”
아이와 있을 때면 순간순간이 가식 없이 웃을 수 있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속이 다 비치는 호수를 닮은 맑은 눈동자. 때가 타지 않은 무구한 웃음. 햇살 한 조각이 스며들 수 있을 정도로 깊게 패는 뽀얗고 통통한 볼 위의 보조개.
이전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안정감을 느끼는 차주원의 얼굴 위로 그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변화가 내려앉고 있었다.
*
그래서 열여덟의 차주원은, 자신에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만큼 의지하고, 마음을 나누게 될 사람이 생기게 될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애가 말하지 않던가요? 이번 주에 입양 간다고.”
그러나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일이 당연하게 일어나듯, 아이는 떠났다.
“사흘 전에 나갔어요. 당연히 입양 가정에 대한 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고요.”
차주원은 태연히 말하는 원장의 앞에서 한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아이가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났다는 말을 하는 건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다시…… 확인해요. 그럴 리가 없잖아.”
“사흘 전에 입양 가정으로 떠났습니다. 구체적인 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고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원장의 목소리가 차주원의 귓가를 때렸다.
“……입양은 언제 결정 난 겁니까.”
멍한 눈길로 창문 밖 뒤뜰을 바라보던 차주원에게서 모래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달 전이네요.”
원장은 서류를 뒤적거리다 여상하게 말했다.
왜 아이는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일까. 깜짝 놀랄 거라며 기대하라던 아이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형, 형, 다음 주에 꼭 와야 돼요.’
‘나, 형한테 꼭 주고 싶은 거 있어.’
‘엄마가 주원이한테 꼭 해야 할 얘기가 있어.’
모두 당연하다는 듯 떠난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듯 제 곁을 떠난다. 차주원은 이제는 인정해야만 한다 생각했다. 나에게는 조금의 따뜻함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버림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
떨리는 날숨을 뱉는 차주원의 입술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덜덜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펴는 그에게서 불안정한 페로몬이 쏟아지듯 퍼져 나왔다. 그것을 제어해보려 이를 악물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원장에게 닿았을 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순한 화풀이, 또는 아이가 불이익을 당할까 봐 눌러왔던 분노였다.
“앞으로 여기 다시 올 일은 없을 겁니다.”
“네, 원래 세 번만 방문하시기로 하셨는데, 거의 일 년이 다 되어가네요. 회장님께서도 많이 의아해하셨어요.”
“더는 당신이 세원의 후원을 받을 일도 없을 겁니다.”
“…….”
“아버지가 후원한 금액이 적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아이들은 간식 하나 제대로 못 먹었던 겁니까.”
“그건-”
“당신이 걸친 옷은 계속 값비싸지는데. 모를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차주원이 원장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 가득한 자신의 페로몬이 마치 빽빽한 가스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작은 불꽃이나 자극에도 폭발해 버릴 것이다.
“허억…….”
그가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다 도착한 곳은, 우습게도 뒤뜰의 벤치였다.
매주 일요일,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그 장소였다.
“…….”
왜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이곳을 떠나게 될 거라고, 왜 말하지 않았을까.
“하…….”
말도 없이 날 떠날 거라고, 왜 알려주지 않았을까.
알았다면 널 처음 본 그날, 서럽게 우는 너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돌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래도 난 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을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생겨 기뻤던 건 저뿐이었나 보다.
“…….”
차주원은 천천히 벤치에 앉았다. 매일 앉던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는 그의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을 담을 여유도 없어 보였다.
나무가 조금 더 거칠한 그 자리는 아이의 연한 살이 거스러미에 긁히기라도 할까 항상 제가 차지했던 자리였다. 고개를 돌리면 아이의 동그란 정수리를 마음껏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웠던 자리였고, 아이의 오른쪽 귀에 있는 작은 점을 눈에 담을 수 있어 좋아했던 자리였다.
“서여원…….”
아이가 일부러 그랬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분명 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아이는 자신의 번호를 가지고 있으니 분명히 연락이 오겠지. 보육원을 떠나는 날짜를 착각해서 형한테 미리 말을 못 했다고 웅얼거리며 말할 것이다. 아이가 울먹이며 미안하다고 하면, 울지 말라고 위로해줄 것이다. 다 괜찮다고. 이렇게 연락이 닿았으니 다 괜찮다고.
“여원아.”
네가 날 일부러 떠난 게 아니니, 다 괜찮다고.
어머니처럼 그렇게, 한시라도 못 참겠다는 듯 떠난 게 아니니, 괜찮다고.
“……아닐 거야.”
아니겠지. 아이가 자신에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듣고 대신 눈물까지 흘려준 아이였다. 자신이 괜찮지 않아 보인다며 어떻게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 하던 그 눈물 맺힌 눈동자를 아직 기억한다.
“…….”
아이와 연락이 닿으면 나눠야 할 얘기가 많았다. 바뀐 환경은 어떤지, 가족들은 다 좋은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오늘 주기로 했던 선물이 뭔지도…… 아이에게 묻고 싶은 게 참 많았다.
“…….”
차주원이 마침내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새파랗던 하늘이 빨갛게 물들었을 즈음이었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페로몬에 이상이 생겨, 처음으로 비정상적인 그의 러트가 시작된 때이기도 했다. 십 미터 반경 내에서 대기하던 경호원이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걸어오는 차주원을 발견한 순간이기도 했으며, 이상함을 느낀 그들이 그를 긴급하게 병원으로 이송한 때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날 밤, 차주원은 최악의 러트를 겪었다.
사포로 몸의 살을 다 갈아내는 듯한 고통은 온몸을 불덩이처럼 뜨겁게 만들었고,
환자복이 흠뻑 젖을 정도로 흘러나오는 땀에 온몸의 수분을 다 빼앗기는 듯했다.
죽고 싶을 만큼 아파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앓으면서도, 머릿속을 채운 것은 아이의 순한 눈망울이었다. 부드럽고 통통한 볼 한가운데 깊게 찍힌 보조개였다.
차주원은 너무 아팠다.
또다시 버려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팠다.
*
‘엄마, 나 학교 갔다 왔는데…… 엄마 어디 있어요?’
‘진짜, 진짜 떠난 거예요?’
‘아빠는 엄마가 이제 돌아오지 않을 거래요. 내가 싫어서 떠난 거래요.’
‘난 아빠 말 안 믿어요. 엄마가 하는 말만 믿을래요.’
‘그러니까 이제 집으로 와주면 안 돼요? 아니면, 나도 데려가면 안 돼요?’
‘흐윽, 흐으…… 엄마…… 제발…… 나도 데려가요.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이제 말 잘 들을게요. 제발…… 제발…… 엄마.’
차주원은 연기를 끝낸 후 기대를 담은 커다란 눈망울을 맞춰오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여원아, 너는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는 아이였구나.
어쩌면, 그날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건 일부러 그런 것일 수도 있겠구나.
왜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건지, 왜 나를 조롱하듯 연기하는 건지,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척하는 건지.
차주원은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날의 러트가 너무나 아파서, 절대로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