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낯선 조우
정태헌이 제약실을 부순 일로 한동안 센터가 떠들썩했다.
한주연은 말로 하지 왜 늘 주먹을 앞세우느냐며 울컥 분노를 터뜨렸다. 김현철은 그가 연오를 위한 결정을 내린 것에 조금 놀랐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한철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태헌을 보러 왔다가 아들의 냉랭하고도 무기력한 태도에 놀라 돌아갔다. 태헌은 알지 못했지만, 어머니 이정우는 아들을 위해 한참을 울다가 연오를 걱정하며 또 울었다.
태헌과 대단한 친분이 없는 에스퍼와 가이드 동료들은 ‘그 성질’이 또 나왔다며 고개를 저었다. 태헌은 그들이 쑥덕거리는 얘기 한 토막을 주워들었다.
“몇 년 전에는 기자실을 그렇게 만들더니.”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의 이야기라 태헌은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태헌은 그 무엇에도 제대로 집중할 수 없는 상태였다.
진종일 강연오 생각뿐이었다.
연오와 이렇게 되지 않을 기회는 너무나 많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대로 행동했다면. 무리가 되지 않는 선의 가이딩을 차분히 찾아 나갔더라면. 연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주는 혼란을 받아들였더라면.
아파서 그랬다는 핑계도 소용없었다. 아픔이 옅어진 후에도 자신의 행동은 좋은 방향으로 흐르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태헌은 자꾸만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되새기며 공연한 후회를 곱씹었다. 의미 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센터 곳곳에 강연오와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 더욱 괴로웠다. 연오를 죽일 뻔했던 가이딩실로는 발걸음조차 할 수 없었고, 버스에서 캐리어를 들고 낑낑거리던 그를 발견한 교차로에서는 심장이 얼어붙었다. 기숙사 방향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으며 병원이나 제약실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며칠이 지나면 잊힐까. 몇 주가 지나면 괜찮아질까. 그러나 태헌은 쉽게 괜찮아질 수가 없었다. 그는 연오가 궁금했다. 장마가 오고 가는 내내 그랬다.
“아.”
로비를 지나다 마주친 박이정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출 만큼.
저 에스퍼만은 연오의 소식을 알 것 같았다. 한주연과 김현철도 연오의 근황 정도는 알겠지만 그래도 연오와 가장 긴밀하게 연락하는 사람은 박이정일 듯했다. 태헌은 멀리 떨어진 그에게 다가가 강연오의 소식을 다그쳐 묻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말없이 박이정을 관찰하는 태헌의 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박이정은 눈 주위가 붉어진 자그마한 여자를 달래 주고 있었다. 간신히 울음을 그친 듯 보이는 여자가 이내 박이정을 올려다보며 힘겹게나마 웃음을 걸어 보였다. 박이정은 막냇동생을 다독이는 큰오빠처럼 그녀의 어깨를 정답게 토닥거렸다. 그런 다음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따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강연오 옆에도 저런 사람이 있을까. 눈물을 닦아 주고, 운 다음에는 꼭 물을 마셔야 한다고 채근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게 내가 될 수도 있었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진 순간 박이정과 눈이 마주쳤다.
박이정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사이에 마음을 진정한 여자가 뺨을 벅벅 문질러 닦으며 뭐라고 인사를 했다. 다감한 얼굴로 인사를 돌려준 박이정이 이내 태헌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우습게도, 태헌은 긴장마저 품은 채 그를 주시했다.
박이정만 보면 질투와 열패감으로 눈을 뒤집던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철없고 유치한 짓이었다. 그럴 시간과 에너지로 연오를 돌봤더라면 지금쯤 그는 자기 옆에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생각이 또 그쪽으로 흘렀다.
“정태헌 에스퍼.”
박이정이 로비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태헌은 자신과 세 뼘쯤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 그를 보다가 인사를 되돌렸다.
“안녕하세요.”
“……네.”
나직하고도 정중한 어투에 놀랐는지 박이정의 대답이 한 박자 늦게 나왔다. 그의 반응이 어떻든, 태헌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기회를 보고 있었다. 강연오의 소식을 물을 기회를. 찾아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은 것뿐이니, 연오가 이것까지 싫어하진 않을 듯했다.
“강연오 가이드랑 연락하죠?”
“네.”
예상한 대답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쓰라렸다. 연오에게 연락할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들었다.
“어떻게 지내요?”
박이정은 말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태헌은 그에게 수차례 무례하게 굴었고, 달려들어 시비를 건 것도 여러 번이었다. 무엇보다도 연오를 부드럽게 대하라는 그의 충고를 줄기차게 무시했다. 박이정이 연오의 소식을 전해주지 않을 이유는 그만큼 차고 넘쳤다.
과연 박이정은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태헌을 빤히 응시했다.
“분위기가 달라졌네요, 에스퍼님.”
“…….”
“어른 된 것 같아요. 갑자기.”
이전 같았으면 말해주기 싫으면 말라고 쏘아붙인 후 자리를 떴을 것이다. 그러나 태헌은 인내심을 갖기로 했다. 연오가 잘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말 목이 타도록 궁금했다.
“혹시 강연오 가이드가 나한테 소식 전하지 말래요?”
“아뇨. 정태헌 에스퍼 얘기 전혀 안 꺼내던데.”
“……그럼 지금 인천에 있는 거예요?”
“서울에 있죠. 곧 개강이잖아요.”
개강?
잠깐의 혼란 후, 태헌은 연오가 대학생이었다는 사실을 힘겹게 떠올렸다. 대학교에 가는 연오라니, 왠지 지독하게 낯설었다. 하지만 얇은 가을 니트와 청바지를 걸치고 세련된 백팩까지 멘 연오를 상상하자 기분이 괜찮아졌다.
연오는 학교로 돌아간 것이다. 자기가 원래 살고 있던 삶으로.
그가 서울에 있다는 사실도 어쩐지 위안으로 다가왔다. 사는 곳도 모르고, 안다 해도 만날 수도 없는데 우스운 일이었다.
“원래 모아둔 돈도 있고 센터에서 가이드로 일하면서 받은 돈도 꽤 돼서 당분간 생활에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몸도 많이 좋아졌다고, 좀 더 회복되면 과외도 할 거라던데.”
“그리고요?”
“나머지는 잘 몰라요. 나랑도 자주 연락하는 건 아니어서.”
박이정은 정말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이야기를 그쳤다. 모호하고 충분하지 않은 정보 때문에 태헌의 갈증은 더 심해졌다. 아예 소식을 몰랐을 땐 이렇게 간절하지 않았는데, 몇 마디를 듣게 되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자주 연락 안 해요. 둘이 친구 아니에요?”
“친구?”
태헌의 말을 따라 한 박이정이 시선을 제 발끝으로 떨어뜨렸다.
“난 가이드랑 친구 못 해요.”
그럼 아까 우는 사람 달래던 건 뭐냐고, 그 사람도 가이드인 것 같던데 친구도 아닌 사람 위로하고 다니냐고, 그런 물음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태헌의 침묵을 달리 해석한 박이정이 침착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강연오 씨는 이제 센터 나갔지만 왠지 계속 가이드인 것 같아서.”
“왜 가이드랑 친구 안 하는데요.”
강연오는 당신이라도 필요로 할 텐데.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는 태헌을 바라보는 박이정의 눈이 한층 깊어졌다. 착각일까, 태헌은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쓰디쓴 후회를 본 것 같았다.
“정태헌 에스퍼가 강연오 씨한테 연락 못 하는 이유랑 비슷할 거예요.”
태헌은 언젠가 이 에스퍼를 보며 느꼈던 찜찜함을 새삼 떠올렸다. 가이드 하나쯤 죽였을 것 같아서 꺼려진다고, 연오에게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문득 연오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박이정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았던 순간이, 알지도 못하면서 끼어든다고 무시했던 순간이 사무치게 후회스러워졌다.
그때 박이정이 자세를 바꾸었다. 몸을 똑바로 펴고 앉은 그가 감상적인 분위기를 커튼 치듯 걷어냈다.
“이런 얘기 하려고 앉은 건 아닌데. 조심하라는 말 하려고요. 요즘 핸드폰 알림 아예 안 보죠? 센터 공지도 확인 안 하고.”
연오가 사라지기 전에도 핸드폰 어플을 붙잡고 시간을 보내는 취미는 없었다. 연오가 사라진 후에는 더 구체적인 이유로 센터 어플을 보기가 괴로워졌다. 가이딩 신청 메뉴를 볼 때마다 뱃속이 찢어지는 듯 아파 왔기 때문이다.
“전국 균열 예측기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어요. 시스템 결함인지 감지 안 되는 형태의 균열이 나타나는 건지는 아직 연구 중이라는데, 긴급 상황이 늘어난 데다 중대형 균열이 나타나는 일이 잦아져서 앞으로 동원될 일 많을 거예요.”
“…….”
“거부 반응 있어서 임시방편인 거 알지만 가이딩 기계라도 자주 쓰고 그래요. 균열 들어가서도 힘 너무 많이 쓰지 말고, 적당히 전략에 따라서 움직이고. A급 에스퍼들이랑 협력 잘 하면 대형 균열도 무리 안 하고 정리할 수 있어요.”
태헌은 자기랑 아무 상관 없는 얘기인 양 박이정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새삼스러운 선배 노릇이 낯설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궁금증과 희망이었다.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런 얘기 해요?”
“왜냐뇨?”
“혹시…….”
혹시 강연오가 나 걱정해요? 나 조심시키라고 했어요?
태헌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연오가 자기 얘기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게 고작해야 몇 분 전인데, 멍청한 말을 뱉을 뻔했다. 그 전에 입을 다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됐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잔인하게 굴고 싶진 않은데, 강연오 씨는 정말 정태헌 에스퍼 얘기 전혀 안 해요.”
잔인하게 굴고 싶지 않다는 박이정의 어조가 밉상스러울 정도로 냉정하고 덤덤했다. 태헌은 그가 자신의 헛된 희망을 꿰뚫어 보았음을 깨닫고 수치심마저 느꼈다. 박이정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얽힌 낯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주었다.
“그냥 옛날 생각 나서 챙기고 싶었어요. 가이드 없어졌다고 죽을 수는 없잖아요. 살아야죠.”
살아야죠. 지금의 태헌에게는 참 어려운 말을, 박이정은 참 쉽게도 했다. 태헌은 일어나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게 보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은 차갑고 얼굴은 뜨거워서 엉망이었다.
나는 이렇게 못 살겠는데. 강연오 안 보고는…….
갑자기 한쪽 귀에서 이명이 치솟았다. 누가 머리에 못을 박는 듯한 두통도 동시에 찾아왔다. 너무 놀라 몸을 웅크린 그때.
머릿속에서 사진처럼 선명한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기억들이 책장 넘기듯 파라락 넘어갔다.
강연오, 강연오, 강연오, 모든 장면에 강연오가 있었다.
통증이 가라앉았을 때 태헌은 멍하게 정신을 놓쳤다. 그는 갑자기 가빠진 숨을 고르는 내내 딱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방금 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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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시작된 두통은 날로 심각해졌다.
만성 가이딩 부족을 겪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그때는 누가 머리에 날카로운 끌을 대고 망치질을 해 두개골을 뚫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순간적인 통증이 환각과 함께 왔다가 사라졌다. 통증의 강도로만 따지면 전보다 나았지만, 태헌의 혼란은 전보다 컸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것은 명확한데 한 가지도 분명한 것이 없었다. 제대로 된 형체도 소리도 없는 뭉개진 장면들만 한가득이었다. 태헌은 물에 젖어 모든 필기가 다 번진 쭈글쭈글한 노트를 들고 선 열등생이 된 기분으로 매일을 보냈다.
아무래도 머리가 정상이 아닌 게 분명했다. 현실의 연오가 사라진 자리를 잃어버린 기억으로 메꾸기라도 하려는 건가. 태헌은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사라지는 두통을 견디며 의미 없는 추측을 해보았다.
차라리 기억이 좀 더 일찍 돌아왔다면 달랐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로비로 내려온 순간, 달랑거리는 목걸이를 매단 남자 두 명이 태헌 곁을 스쳐 갔다. 무심결에 목걸이를 곁눈질하자 센터 출입 기자임을 알리는 플라스틱 신분증이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쩍, 빙하가 갈라지는 듯한 이명과 함께 태헌의 걸음이 뚝 멎었다.
‘가이드가 아닌 일반인 애인과 동거한다는 게 사실인가요?’
신입 특유의 의욕으로 불타는 눈동자가 태헌 앞에 나타났다. 시원스럽게 뻗은 기자의 눈꼬리에 호기심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작은 수첩과 펜이 이상하게 위협적이었다.
‘연예 기사 취재하시는 거예요? 저 연예인 아닌데.’
좋게 웃었던 것 같다. 기자들과 척을 져 봐야 연오에게 좋을 게 없었으니까. 에스퍼와 가이드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상세히 노출하는 일은 대중도 백안시하는 추세니, 적당히 넘어가면 괜찮을 거라 여겼다.
눈이 초롱초롱한 기자가 정성스럽게 인화까지 한 사진을 꺼내 놓지 않았다면, 태헌은 정말 소란 피우지 않고 넘어갔을 것이다.
‘저희 선배가 보고 찍었다는데요, 저한테 맡아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정태헌 에스퍼가 가이드 결벽증인 건 센터에서도 유명하다고…….’
태헌은 둘뿐인 기자실 책상에 펼쳐진 사진 두 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연오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싼 자신의 옆얼굴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장소는 둘이 자주 산책하는 작은 도시공원. 다행히 연오의 얼굴은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문제는 두 번째 사진이었다. 벤치에 앉은 연오가 태헌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며 금빛으로 빛난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한 사진이었다.
말없이 사진만 들여다보는 태헌의 귀로 거슬리는 음성이 건너왔다.
‘에스퍼랑 가이드 나타난 후부터 동성연애야 뭐, 많이들 그러려니 하니까요. 그런데 S급 에스퍼가 가이드도 아닌 일반인이랑 동거까지 하는 건 좀 의외…….’
‘기자님.’
태헌이 사진 위에 손을 얹고 비스듬히 서서 맑게 웃었다.
‘이거 내보내면 조회수는 확실히 뽑을 텐데, 선배가 이렇게 좋은 건수를 왜 후배한테 넘긴 것 같아요? 착해서?’
‘네?’
‘여기 출입하는 기자들이 나 일반인이랑 동거하는 거 몰랐겠어요? 근데 왜 아무도 기사로 안 썼을까?’
‘그야, 요즘은 에스퍼나 가이드 사생활 노출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고…….’
‘대중 눈치를 봐서 그렇다?’
태헌이 사진 두 장을 쓱 챙겼다. 자신과 연오를 우연히 발견하고 잽싸게 찍은 사진치고는 그림처럼 잘 나왔다.
‘내 눈치를 본 거예요.’
태헌의 손에서 불꽃이 일었다. 사진이 빠르게 우그러지더니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기자는 깜짝 놀라서 숨을 들이켰지만, 의욕으로 무장한 사람답게 물러나지 않았다.
‘나쁘게 쓴다는 게 아닙니다. 그냥 가벼운 인터뷰예요.’
‘내 애인은 일반인이고, 인터넷에 얼굴 오르내릴 사람 아닙니다. 에스퍼랑 일반인이 사귀면 저 에스퍼, 가이딩 어떻게 받냐고 참견해 대는 멍청한 대중한테 흥밋거리로 던져줄 생각 없어요.’
‘요즘은 인식도 많이 변했습니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거예요.’
‘그럼 기삿거리도 아니네요.’
‘에스퍼님…….’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님을 깨달은 태헌이 기자실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센터의 자본력을 증명하듯, 강단을 향해 놓인 의자는 전부 고급이었다. 천 재질이라 불도 잘 붙을 것 같았다.
태헌의 눈길이 닿자 기자와 가장 가까운 의자가 화르륵 불에 휩싸였다.
‘으악!’
숨이 넘어가도록 놀란 기자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목에 걸린 기자증이 크게 흔들렸다.
천과 솜, 나무가 동시에 타며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태헌은 허겁지겁 벽으로 붙어 선 기자를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한편 분노한 그의 표정이 예민한 태헌을 심하게 자극했다.
‘놀랐죠?’
‘…….’
‘이게 기자님이 하려는 짓이에요. 내 애인의 소중하고 평화로운 일상에 갑자기 불을 지르는 거.’
불이 빠르게 옮겨붙었다.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태헌은 기자실을 불바다로 만들 작정인 양 신속하게 불을 붙여 나갔다. 불길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벽을 타고 빠르게 올라갔다. 어쩔 줄 모르던 기자가 급하게 태헌을 지나 달렸다.
달칵. 달칵달칵달칵.
미친 듯 문고리를 돌리는 기자의 관자놀이를 타고 진땀이 흘렀다. 태헌은 느긋하게, 의도적으로 발소리를 내며 다가갔다. 상대가 가까워지는 소리에 분명한 공포를 느낄 수 있도록.
태헌은 문고리를 쥔 기자의 손을 살짝 떼어냈다. 거친 동작도 아니었고 이능을 쓰지도 않았지만, 기자는 완전히 압도당해 조금도 반항하지 못했다. 창백하게 질린 손이 허공에 떠서 덜덜 떨렸다.
‘문은 안 열릴 거예요. 오붓하게 얘기하고 싶어서.’
‘저…… 저 기잡니다. 무섭지도 않아요?’
덜덜 떨면서 그런 얘기를 하니 안 그래도 우습던 사람이 더 우스워졌다. 태헌은 정말로 즐거워서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내가 기자님이 왜 무섭지? 기자님이 오늘 날 찌그러뜨려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 무슨…….’
‘공사 현장 지나갈 때 자재 하나 살짝 밀어서 머리를 깨줄까요? 차량 급발진으로 뒈지는 그림도 괜찮고.’
기자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가 주머니로 손을 넣더니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 모습이 태헌에게 영감을 주었다.
‘머리맡에 두고 자던 핸드폰이 갑자기 폭발하는 건요. 아내 있어요? 옆 사람 머리통도 같이 터지면 볼 만하겠다.’
‘정태헌 에스퍼, 이거 협박이에요. 범죄라고요!’
펑 소리와 함께 강단의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전기가 나가며 안이 확 어두워졌다. 불길이 태헌의 뺨에 극적인 음영을 던졌다. 태헌의 입이 쭉 찢어지며 이가 모조리 드러났다.
‘진짜 범죄가 뭔지 알고 싶으면 더 지껄여.’
형광등이 터지며 무수한 파편이 둘의 머리로 쏟아졌다. 기자는 눈가와 뺨을 스치는 파편을 두려워하면서도 태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태헌이 불길 속의 악귀처럼 웃고 있었다.
‘참, 녹음 처리하는 걸 잊었네.’
태헌의 손이 쑥 다가왔다. 그는 기자가 쥐고 있는 핸드폰을 강제로 빼앗은 후 잠깐 들여다보았다. 녹음 화면을 확인한 태헌의 손에서 전기가 튀어 올랐다. 안의 메모리까지 완전히 태운 그가 핸드폰을 불 속으로 던져 버렸다.
둔탁한 소리는 타닥거리는 소음에 묻혔다. 기자실 내부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에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괴로운 환경에서도 정태헌은 맑은 하늘 아래 있는 양 담담했다.
기자는 제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새파랗게 어린 에스퍼의 낯을 겁에 질린 채 응시했다.
‘여기서 살아나오면 당신한테 사진 준 선배가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 봐요.’
‘…….’
‘아마 객사한 후일걸?’
태헌은 얼어붙은 남자를 그대로 두고 밖으로 나갔다. 아까는 용접이라도 한 듯 돌아가지 않던 문고리가 그의 손에서는 부드럽게 움직였다. 태헌은 문틈으로 기자를 돌아보며 살짝 웃었다. 연기에 얼굴이 시뻘게진 기자가 공포로 허우적거리며 문고리를 쥔 순간.
문이 쾅 닫혔다.
염력으로 문을 완전히 봉한 태헌이 저벅저벅 로비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기자실의 화재경보기까지 고장 내버린 참이라 이대로 둔다면 저 기자는 죽을 게 분명했다. 아직 정말 죽일 생각은 없으니 적당할 때 문을 열어 줘야 할 것이다. 괜한 복수심으로 설치지 못하도록 확실히 위협하려면…… 적어도 기절은 시켜야겠지?
분주한 한낮의 로비를 가로지르며 태헌은 평온하게 시간을 헤아렸다. 그러면서 그 기자에게 사진을 건넨 선배라는 작자를 찾을 계획도 세웠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가볍게 걸음을 옮기던 태헌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인을 확인한 태헌의 입가에 아지랑이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작게나마 힘을 쓴 탓인지 몸의 마디마디가 녹는 듯 욱신거렸지만, 전화를 받는 그의 음성은 피아노 선율처럼 달콤했다.
‘연오야아.’
말이 애교스럽게 늘어졌다. 살짝 기우는 고개가 근사했다.
‘아니, 안 바빠. 아, 오늘 마지막 시험이랬지. 내가 데리러 갈까?’
태헌은 핸드폰 너머에서 쏟아지는 말을 음악인 양 감상했다. 벽에 기대서 눈을 내리뜬 태헌의 속눈썹에 햇빛이 어룽어룽 매달렸다.
‘동기들하고 놀고, 나랑도 있어 줄 거지?’
연오가 부끄러운 듯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길거리에서 간지러운 소리를 하기가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어설픈 수줍음마저도 태헌에게는 알알이 빛나는 보석 같았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나 보러 빨리 와줘.’
전화가 끊어졌다. 태헌은 동기들과 어울리다가 늦게 들어올 것 같다는 연오의 말을 곱씹으며, 달고도 쓴 질투를 음미했다. 사랑이 주는 감정은 언제든 새로워서 좋아하는 초콜릿을 천천히 녹여 먹듯 느리게 즐겨도 질리지가 않았다.
사실 그 즐거움 때문에 태헌은 기자실 문 여는 일을 깜빡 잊어버렸다. 나중에 폐에까지 연기가 찬 기자가 가까스로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는 했다. 사고 후유증인지, 그 기자는 기자실에서 벌어진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귀찮은 일 덜었네. 소식에 대한 태헌의 감상은 그토록 간단했다.
만족하며 씩 웃은 태헌이 고개를 들었고, 현재의 정태헌과 정확히 시선을 맞췄다. 과거의 얼굴에서 기쁨이 확 걷히고 차가운 비난의 눈빛이 정태헌을 관통했다.
바로 거기서, 의식이 현실로 튀어나왔다.
남의 몸에 들어가 있다가 걷어차여 쫓겨난 듯한 충격이 온몸을 두드렸다. 눈앞의 풍경이 필름을 갈아 끼운 듯 뒤바뀌고, 막혔던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감각을 휩쓸었다.
현기증을 견디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런 다음 본능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스쳐 갔던 기자들은 두어 걸음을 멀어져 있을 뿐이었다. 저들이 고작 이 미터 멀어질 동안 태헌은 기나긴 환각을 본 것이다.
끔찍한 혼란이 태헌을 뒤흔들었다. 한편으로는 본래 가지고 있던 기억인 것처럼 모든 장면이 익숙하기도 했다.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강연오의 전화를 받자마자 갑자기 따뜻하고 보드라운 꿈의 세계에 도달한 듯 웃던 자신의 얼굴만은 마음 언저리에서 모질게 서걱거렸다. 연오가 자주 보고 좋아했을 법한 그 표정을, 기억을 잃은 후로는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쓰라렸다. 게다가 마지막에 본 태헌이의 눈빛은…… 송곳처럼 자신을 쑤신 그 눈빛은 정말 그저 환각이었을까?
토막난 기억에서처럼 핸드폰이 울린 건 그때였다.
태헌은 로비 한가운데에서 움찔 멈춰 설 정도로 놀랐다. 데자뷔와도 같은 느낌이 사지에 휘감겼다. 태헌은 급한 손길로 핸드폰을 꺼내다가 그대로 떨어뜨릴 뻔했다.
간절한 그를 맞이한 것은 당연히 연오의 이름이 아니었다.
[서울 전역 균열 발생 예측. 배치 지역 확인 바람.]
긴급 알림을 확인하자마자 기묘한 허탈함이 태헌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는 의욕 없는 손길로 어플과 연결된 링크를 눌러 자신의 배정 지역을 확인했다. 무기력하기까지 하던 그의 눈빛이 일변했다.
그가 배치된 곳은 한강 남쪽의 서울 중심부.
한국대 인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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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 안내 문자가 전송되었다. 시민들은 주소지 혹은 근무지와 가장 가까운 도시 방공호로 몸을 피해야 했다.
연오의 주소지와 가장 가까운 방공호는 한국대 지하였다. 균열이 처음 나타난 해에 곧바로 지어진 방공호는 조금 낡은 감이 있었지만 견고하고 안전했다. 평소에는 한국대의 흉물로 불리던 철제문이 활짝 열리자, 기다리던 시민들이 질서정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학교 근처 원룸에서 간단한 짐을 챙긴 연오도 긴 줄에 합류했다. 주위가 묘하게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웠다. 수업 중에 갑자기 문자를 받고 다급히 온 학생들, 줄 선 시민들 틈에서 지인을 찾는 사람들, 몸이 불편한 가족을 데리고 따가운 가을볕 아래서 들어갈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 연오는 그새 정문 바깥까지 길어진 줄을 보며 울렁거리는 가슴을 꾹 눌렀다.
이전에도 방공호로 대피한 적은 있지만, 태헌이 그렇게 되고 난 후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리를 지켜야 하는 가이드로 산 시간이 그리 길었던 것도 아닌데 대피라는 행위 자체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아는 얼굴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알고 지내던 동기나 선후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아직 짐을 챙기고 있거나 줄 끝에 서 있을 것이다. 센터가 문자로 알린 균열 발생 예측 시간은 오후 다섯 시인데, 그때까지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 멍하게 시간만 보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연오는 전화라도 걸어 볼까 싶어 핸드폰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잠깐 인터뷰 가능할까요?”
불쑥 나타난 기자가 연오를 방해했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 뒤에 방송국 로고가 부착된 카메라가 몇 대 있었다. 당황한 연오가 고개만 이리저리 돌리는 사이 설명이 이어졌다.
“SBM 뉴스입니다. 한국대 학생이시죠? 요즘 센터 쪽에 문제가 많은데, 간단한 시민 인터뷰를 하려고 합니다.”
“네, 근데…….”
줄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기자에게 붙들린 연오를 지나 앞으로 나아갔다. 연오는 초조하게 뒤를 돌아보다가 인터뷰를 거절하려고 했다.
“균열 예측기 오작동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갑자기 치고 들어온 질문이 거절할 타이밍을 빼앗았다. 카메라에서 빨간 불이 깜빡거렸다. 생방송이 아니라 기획 보도를 위한 녹화일 테니 지금 자리를 떠도 괜찮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연오는 사로잡힌 듯 되묻고 말았다.
“균열 예측기 오작동이요?”
예측기는 균열 희생자 수를 극적으로 줄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 분위기를 평화롭게 만들어 주었다. 언제 어디서 균열에 휘말릴지 몰라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게 된 것도 예측기의 발명 덕분이었다.
균열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연오도 기계 덕분에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게 된’ 사람 중 하나였다. 태헌이의 공도 지대했지만, 태헌이가 그의 구원이었다면 예측기는 사회적 안전망이었다.
연오의 관심을 읽어 낸 기자가 강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즘 예측되지 않은 균열이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센터는 오차 범위 내의 일이라고 설명했지만 석연찮은 점이 많아요. 예측기 시스템 자체의 결함이거나 새로운 유형의 균열이 나타난 것일 텐데, 이에 대한 시민 인식을 보도하려고 합니다. 모르셨으면 몰랐다고 솔직히 말해주셔도 돼요.”
여기서 ‘전혀 몰랐어요.’라고 대답하면 자막 화면과 함께 뉴스에 얼굴이 나가는 걸까. 그건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때 기자가 카메라를 힐끗 돌아보더니 힘주어 말했다.
“모르셨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연오가 안 되겠다고 말하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난 그때.
“지금 취재하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익숙한 사람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연오와 가까이 붙어 섰던 기자가 밀리듯 쑥 물러났다. 연오는 절대 잊을 수 없을 이가, 앞으로 만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가 갑자기 등장한 상황에 놀라 굳어 버렸다.
연오를 등지고 기자를 막던 태헌이 살짝 고개를 틀어 연오의 상태를 확인했다. 연오는 제 몸 상태를 확인하는 시선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한 발을 뒤로 뺐다. 그사이 태헌의 관심은 카메라로 향했다. 목에 걸고 있던 에스퍼 신분증을 들어 보여주는 그의 동작이 단호했다.
“균열 발생 예측 지역입니다. 시민들 대피 방해하지 마세요.”
앞으로 성큼 나아간 태헌이 카메라를 든 사람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다. 연오는 제 영상을 지우라고 나직하게 윽박지르는 태헌의 옆얼굴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지난 계절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태헌은 그사이에 쑥 자란 느낌이었다. 침착하고 진지한 목소리와 말끔히 정리된 표정. 감정이 마구잡이로 널뛰던 시절은 아예 없던 사람 같았다. 헤어진 후로 한 달 반이 지났을 뿐인데도.
연오가 혼란을 겪는 동안, 태헌은 결국 카메라의 영상을 지우는 데 성공했다. 어차피 제대로 된 인터뷰를 못 해서 뉴스에 낼 수도 없다는 카메라맨의 해명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태헌은 그들이 영상을 지우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협조해 줘서 고맙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취재진을 돌려보낸 태헌이 곧장 돌아서서 눈을 맞췄다.
팽팽히 당겨지는 공기 속에서 연오가 반사적으로 움칠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태헌이 달리듯 다가와 좋지 않을 일을 할까 봐 겁이 났다. 이제 그럴 일 없다는 사실을, 정태헌도 변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오는 손으로 다른 팔을 꽉 붙잡으며 동요를 감추려 애썼다.
태헌과의 거리가 한 걸음으로 줄어들었다. 그가 괜찮은지 살피고 싶은 마음과 이대로 등을 돌려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연오 안에서 맹렬히 부딪쳤다. 태헌과 전혀 얼굴을 맞대지 않고 지내는 동안 많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주치니 속이 울렁거렸다.
그가 안부를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잘 지냈다고?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잠도 규칙적으로 자려고 노력했다고? 그런 대답은 자신을 지극히 걱정하는 친구에게나 할 말이라 쑥스러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태헌을 보고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연오가 가까운 앞일을 예측하며 우왕좌왕하던 그때.
“저 사람이 뭐 물어봤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이 인사도 없이 던져졌다. 연오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걸 느끼며 반사적으로 답했다.
“예측기 오작동이요.”
“그 얘기만? 나랑 무슨 관계냐는 식의 질문은 안 했고요?”
“……네?”
저 기자가 왜 그런 질문을 하겠느냐는 의문이 함축된 짧은 되물음이었다.
심각한 어조로 캐묻던 태헌도 그제야 자기가 뜬금없는 소릴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떠오른 기억 때문에 예민하게 굴고 말았다. 연오 눈에 그런 제 모습이 얼마나 이상하게 비쳤을지 예상이 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단 안으로 가요, 위험하니까.”
다가온 태헌이 재촉하듯 연오의 등에 손을 대려 했다.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며 황급히 줄로 돌아갔다. 그래놓고 쫓기듯 달아난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태헌은 무안하게 뜬 손을 아래로 내렸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연오에게 한마디라도 더 붙여보고 싶은데 그럴듯한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계속 여기서 연오를 붙들고 대피를 방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게는 맡겨진 임무도 있었다. 어서 발을 옮겨야 하는데 두 다리가 전부 돌이 된 것만 같았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연오였다. 어색하게 눈을 피한 연오가 앞사람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태헌을 돌아볼 듯 주저하면서도 끝내 고개를 틀지 않았다. 멀어지는 연오를 멀거니 보던 태헌의 머릿속에 그제야 무난한 안부 인사가 떠올랐다.
잘 지냈어요?
짧고 간단하고 흔해 빠진 한마디가 뭐 그렇게 어렵다고. 태헌은 답답한 마음에 입술만 심하게 잘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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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에서 예측한 균열 발생 시간인 다섯 시가 지났지만 방공호 밖은 조용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사람들도 점점 웅성거리며 동요를 보였다. 그러나 연오는 구석에 가만히 웅크린 채 소란과 습한 공기, 먼지 냄새, 어두운 조명을 견뎠다.
그는 예측기 오작동 문제가 심각하다는 기자의 말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예측기에 문제가 생겼다면 정해진 시간에 균열이 나타나지 않아도 이상할 건 없었다. 예측되지 않았던 균열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잡념 속을 헤엄치던 연오의 머릿속에 자신과 기자 사이로 끼어들던 태헌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기자의 취재를 막는 태헌의 굳은 턱, 카메라맨에게 영상을 삭제하라고 경고할 때의 차가운 눈빛.
연오에게도 낯선 모습은 아니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태헌은 사진이나 기자에 예민했다. 처음에는 사생활을 파헤치려 드는 기자나 대중에게 진절머리가 나서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오야, 혹시 너한테 나랑 무슨 관계냐고 하면서 말 건 사람 없었어?’
언젠가 약간의 탄내를 묻히고 집으로 돌아온 태헌이 그렇게 물었었다. 동기들과 술을 몇 잔 마시고 돌아온 연오는 코끝에 맴도는 탄내가 자신의 착각에 불과한지 아닌지 아리송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없었는데?’
‘누가 사진 찍는 느낌도 없었고?’
‘……왜, 무슨 일 있었어?’
태헌의 심각한 표정을 읽은 연오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 옆에 앉은 태헌은 연오의 어깨에 가볍게 머리를 비비며 그날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기자가 왔었고, 너랑 날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인터뷰 요청을 해서 거절했다고 했다. 다행히 설득이 통해 사진 파일은 없애 주었지만 너한테까지 접근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는 말도 덧붙었다.
‘별일 아니었네. 나한테 온 사람은 없었어. 와도 내가 잘 거절할게.’
‘가끔 끈질긴 놈들이 있어서 그래.’
‘그래? 그래도 이번엔 잘 설득했다니까 다행이다. 착한 분이었나 봐.’
그 말에 태헌은 자기가 더 착하다는 표정으로 순하게 웃었다. 연오의 손을 깍지 껴 잡는 낯이 어린애처럼 선량하고 무구했다.
‘으응, 그랬지.’
‘걱정하지 마, 태헌아. 나도 이제 어른이고.’
‘그래도 걱정이야.’
‘난 네가 있어서 아무것도 걱정 안 하는데.’
술기운을 빌린 고백이었지만, 진심이었다. 태헌에게 삶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또 많은 감정을 쏟아부었던 연오는, 태헌의 존재를 믿고 두려움 없이 세상을 누볐다. 태헌은 옆에 없을 때도 연오를 지켜주었고 가족만큼이나 헌신적이고 든든한 존재였다.
진심 어린 대답을 들은 태헌의 얼굴이 눈의 결정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얼굴에 애정이 가득했다.
‘다행이다.’
그래, 태헌이는 다행이다, 라고 했다.
현재의 연오는 멍하게 지난 시간을 곱씹었다.
태헌이는 나도 네 덕분에 든든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태헌이가 그 비슷한 말이라도 한 적이 있었나. 나는 태헌이에게 짐만 되는 존재는 아니었을까. 서로 의지하고 지지하는 관계라고 믿었는데, 또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그런 관계였을 텐데, 헤어지고 나니 못 해준 것만 떠올라 괴로웠다.
태헌이와 정태헌의 얼굴이 번갈아 의식의 수면으로 떠올랐다. 그들이 했던 말도 가위처럼 교차했다.
‘나랑 무슨 관계냐는 식의 질문은 안 했고요?’
‘너한테 나랑 무슨 관계냐고 하면서 말 건 사람 없었어?’
그러고 보면 그 말을 하는 둘의 표정이 참 비슷했던 듯도 하고…….
무릎에 이마를 기대고 있던 연오가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간절히 바라다가 포기하듯 내려놓았던 한 가지 가능성이 갑자기 그의 뺨을 후려쳤다.
태헌의 기억이 돌아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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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 인근의 경계 상태는 밤 아홉 시가 넘어서야 해제되었다. 다섯 시에 균열이 열린다는 것은 잘못된 예측이었다. 축축하고 불편한 방공호에 옹기종기 앉아 견디느라 힘들었던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일제히 불만을 터뜨렸다.
“요즘 이런 일 너무 많지 않아?”
“대피하고 아무 문제 없는 것도 한두 번이지, 피곤해 죽겠어. 아, 운동도 못 가고 짜증 나.”
연오는 그들 틈에 섞여 묵묵히 방공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고 작은 불평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처음 균열과 괴물이 나타났을 때는 모두가 공공의 안전을 지키는 센터와 에스퍼, 가이드를 칭송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감사는 흐려지고 불만은 늘었으며 에스퍼와 가이드는 공공재 취급받았다. 인권 문제가 터지면 잠깐 관심이 쏠리긴 했지만 그마저도 순간에 불과했다.
에스퍼의 가이드 살해, 균열에서 거듭되는 에스퍼의 희생, 센터의 주먹구구식 행정 운영, 이 모든 결점은 대중의 무관심에 힘입어 스리슬쩍 덮였다.
가이드 노릇을 하기 전까지는 태헌이만 걱정했을 뿐 사회의 어두운 면면은 보지 못했는데, 센터에 몸을 담아 보니 많은 것이 새로웠다.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새로워 문제지. 태헌이가 수술만은 절대 안 된다고 말렸던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으리라.
태헌이…….
애써 눌러 놓았던 생각이 그쯤에서 다시 태헌에게로 흘렀다.
연오는 인파에 떠밀려 밖으로 나가며 태헌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방공호 입구에서 시민을 안내하는 에스퍼들 사이에 태헌은 없었다. S급이니 다른 긴급한 지역으로 갔거나 휴식을 취하러 갔는지도 모른다. 핸드폰을 열어 뉴스를 확인하니 서울 곳곳에 소형, 중형 균열이 열려 시끄러운 모양이었다.
한 달 반이라는 시간 동안 태헌을 잊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 왔는데, 갑자기 마주치니 평정심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 태헌이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이성을 잃고 센터 앞을 서성였다는 것을, 그러다가 누가 자신을 죽일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져 정신없이 집으로 도망치곤 했다는 것을, 태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목이 심하게 탔다. 연오는 자판기를 찾아 정문 근처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내부는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지만 바깥은 무리 지어 이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소란스러웠다. 극명히 다른 두 공간이 얇은 유리문 하나로 갈라졌다. 소음이 한 겹 멀어지자 안정과 불안이 동시에 찾아왔다.
자판기 앞에 선 연오는 조금 급한 손길로 지폐를 찾았다. 자판기는 자꾸만 돈을 뱉어냈다. 그냥 빨리 집으로 갈까, 그 생각까지 들었을 무렵 지폐가 마침내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바깥의 소음이 갑자기 가까워진 것도 그때였다. 자판기에 불이 들어왔지만 연오는 본능처럼 뒤로 돌아섰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태헌이었다. 문이 닫히며 안이 다시 조용해졌지만, 아까 같은 안정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연오는 둘만 남은 듯한 공간에 이상한 부담마저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형광등 불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같은 방향으로 누웠다. 태헌은 동그랗고 빨간 자판기 불빛을 등진 채 자신을 보는 연오를 막막하게 응시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만나고 싶었던 건데, 연오의 표정을 보니 그에게는 이 상황이 위협인 듯했다.
태헌은 부러 정확한 동작으로 걸음을 물렸다. 유리문에 붙어 서다시피 한 그가 연오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했다. 놀라고 겁먹은 듯한, 복잡한 표정이 쓰라려 오래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음료수 뽑아요.”
“…….”
“괜찮으면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고 싶어서 온 거예요. 예측기가 정확하진 않았지만, 통계만 보면 이 근처 다른 곳에 균열이 생길 가능성도 있어요.”
연오는 과하게 반응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겨우 자판기로 몸을 틀었다. 아무 버튼이나 대강 누른 후에는 거스름돈 챙기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제 별로 마시고 싶지 않은, 차가운 캔 음료를 든 연오가 심호흡을 한 뒤 태헌을 돌아보았다.
연오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태헌은 경직된 얼굴에서 거절을 읽었다. 데려다준다고 다시 한번 우기고 싶었는데 잔뜩 긴장한 연오를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일부러 이쪽에 배치받은 건 아니에요. 가이드님 보려고…… 아니.”
이제 연오는 가이드가 아니니 ‘가이드님’은 적절한 호칭이 아니었다. 태헌은 박이정이 연오를 뭐라고 불렀는가 재빠르게 생각해냈다.
“강연오 씨 보려고 일부러 수작 부린 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냥 우연히.”
연오는 입술만 조금 달싹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부질없이 혼자 떠들던 태헌이 눈을 내리깔았다.
“제약실 일 때문에 화났어요?”
“…….”
“아니면, 아직도 내가 미워서 그래요?”
“…….”
“그냥 무서워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다른 것보다 연오가 괜찮은지 알고 싶었다. 센터에 있는 내내 그걸 궁금해했으니까. 칩을 제거하는 수술은 잘 됐는지, 센터 밖 생활에는 잘 적응했는지, 새로 구한 집은 마음에 드는지, 그런 자질구레한 질문을 하고 싶었다. 정작 입 밖으로 나간 것은 모호한 미련뿐이었지만.
결국 태헌은 마음에 품었던 모든 질문을 포기하고 한 가지만 물었다.
“잘 지내는 거죠?”
대단한 말도 아니었는데, 묘하게 초점이 없던 연오의 눈에 마침내 빛이 돌아왔다. 연오는 따지도 않은 캔을 꼭 쥔 채 미약하게 머리를 주억거렸다.
“네.”
그 말을 끝으로 연오는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제약실 일로 화가 나서는 아니었다. 태헌이 아직도 미워서? 그런 이유도 아니었다. 그와 둘이 남겨진 상황이 무서워서……. 그건 사실이었지만 침묵의 주된 이유도 될 수 없었다.
연오는 아까부터 한 가지 물음만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다. 태헌의 말에 제대로 대답조차 못 할 정도로.
기억 돌아오고 있어요?
하나씩 기억이 나는 거예요?
그러나 태헌의 이능은 물리력이지 독심술이 아니었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마음을 투시할 수 없는 태헌은, 못 박힌 듯 서서 주저하는 연오에게서 거부를 읽었다. 데려다주는 것도 싫고 대화하기도 싫다면 물러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태헌은 발목에 매달린 미련을 떨쳐버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불편하면 갈게요.”
“…….”
“다음에 보면…….”
그때도 인사해도 돼요?
차마 그 말까지는 뱉을 수 없었다. 다시는 못 볼 것처럼 작별 인사를 해놓고 우연히 마주치자마자 어떻게든 인연을 잇고 싶어 안달하다니. 연오가 질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에요. 빨리 가요.”
태헌은 느리게 돌아섰다. 손이 차가운 금속 손잡이에 닿은 순간.
“저기.”
연오가 낯선 호칭으로 그를 붙잡았다.
‘태헌이’도 아니고 ‘정태헌 에스퍼’도 아닌, 저기. 짧은 부름에 연오의 혼란이 전부 담겨 있었다. 연오는 자기 앞에 나타난 상대가 과거의 태헌이인지 현재의 정태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떻게든 부르고 싶어 무작정 입을 열었는데, 어색하다 못해 머나먼 이를 부르는 호칭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태헌은 ‘저기’든 ‘야’든 아무 상관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화답하는 신도처럼 급히 연오에게 돌아섰다. 연오는 자꾸 미끄러지려는 캔을 움켜쥔 채 마른 입술을 적시고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서 태헌도 함께 동요했다.
왜 불렀지. 데려다 달라고 하려고? 아니면 화를 내려고? 다른 할 말이 있어서?
“혹시 기억 돌아온 거예요?”
확신 없는 목소리가 태헌의 기대를 깨부쉈다. 터질 듯 부풀었던 마음에서 단숨에 바람이 빠져나갔다.
결국 연오가 찾는 이는 과거의 ‘태헌이’뿐이라는 사실이 허탈함과 괴로움을 선사했다. 그러나 희망도 동시에 솟아났다. 떠오른 기억으로 연오의 환심을 살 수는 없을까. 혹시 연오가 원하는 태헌이를 연기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해서 오늘 딱 하루라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집까지 동행할 수 있다면…….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했는데도 미련이 남았다.
태헌은 치열하게 계산하며 자신의 대답만을 기다리는 연오를 응시했다. 자판기와 형광등 불빛 때문인지 여윈 뺨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태헌이 흉내를 내서라도 가여운 얼굴을 딱 한 번만 쓸어주고 싶다고 느낀 그때, 태헌은 깨달았다.
연오의 얼굴에 기쁨 한 점 없다는 사실을.
그 깨달음이 태헌이 하려던 대답을 모두 거둬갔다. 태헌은 두 손을 꾹 말아쥐었다.
“기억 찾으면 좋겠어요?”
물으면서도 어색했다. 연오는 당연히 좋아할 것이다. 완전히 변한 자신의 품에서도 과거를 찾으며 울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정말, 정말 이상하게도 연오의 얼굴이 울 것처럼 흐려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연오가 떨리는 날숨을 뱉었다. 어느새 물방울이 맺힌 캔이 손에서 미끄러지려 했다.
“모르겠어요.”
두 쌍의 눈이 진득하게 얽혔다. 너무나 의외의 대답이라 태헌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과거의 태헌이를 지독하게 질투했는데 지금만큼은 어쩐지 심한 말을 들은 듯 마음이 욱신거렸다.
“기억 돌아오면,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요?”
연오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속눈썹을 가만히 내리깔았다. 잔잔한 슬픔이 연오의 무릎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나한테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몸과 정신이 회복될 때까지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타일러도 어쩔 수 없었다. 물에 잠긴 채 사는 것처럼, 연오의 마음은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내내 허우적거렸다. 태헌이가 기억을 찾으면, 그래서 왜 나를 떠났느냐고 원망하면 뭐라고 해야 하나. 태헌이라면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은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쉽게도 깨어졌다.
자신만 해도 ‘절대’ 태헌이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 도망치지 않았나. 가서 칩 빼고 잘 살라는 말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줄행랑을 치지 않았나. 태헌이라고 변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그러니 ‘잘 지냈다’는 대답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연오는 조금도 잘 지내지 못했다. 살고 싶었고, 성숙한 이별을 겪어내고 싶었지만 둘 다 어렵게만 느껴졌다.
무릎까지 차올랐던 물의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숨이 가빠왔다. 손에서 캔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캔이 태헌의 발치로 굴러가다가 그의 신발코에 툭 부딪혔다.
멈칫한 태헌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캔을 들고, 더러워진 표면을 소매로 쓱쓱 문질러 닦아내는 동작은 더없이 침착하고 정확했는데도 어쩐지 우왕좌왕하는 느낌을 풍겼다. 주저하며 한 걸음씩 다가오는 태헌을 지켜보며, 연오는 조금 떨었다.
칙, 캔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한 모금이라도 마셔요. 쓰러질 것 같아요.”
태헌이 연오의 손에 캔을 직접 쥐여 주었다. 맨살이 닿는 감촉이 이상할 정도로 황홀하고 또 죽도록 아팠다.
연오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야 했다. 우연히 마주쳤어도 모르는 사람인 척 지나쳤어야 했다. 겨우 혼란을 수습하고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을 뒤흔들지 말아야 했다.
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물러나려던 그때, 연오가 태헌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주 연약한 손길이었는데도 태헌은 올무에 걸린 듯 소스라쳤다. 마주친 연오의 얼굴은 황폐하면서도 결연했다.
“나중에라도 기억 찾으면, 나 한 번은 만나러 와 줄래요?”
“…….”
“나한테 실망했다고, 화내고 나쁘게 대해도 되니까 얼굴 한 번만 보여줄 수 있어요?”
태헌은 잠시 멍해졌다.
결국 연오가 다시 만나고 싶은 이는 지금의 자신이 아니었다. 마음속 목소리가 그를 통렬히 비꼬았다. 당연하지, 기절하도록 패고 매칭률 좀 떨어졌다고 에너지 갈취해서 빈사 상태로 만드는 새끼를 누가 진심으로 좋아하겠어?
두 눈으로 열기가 몰렸다. 연오가 약을 만들다 죽겠다고 했을 때보다 더 큰 후회가 그를 쓰레기처럼 찌그러뜨렸다. 그래서 태헌은 오수처럼 약속을 뱉었다.
“네.”
“…….”
“만나러 갈게요.”
연오의 입술 끝에 힘없는 미소가 맺혔다.
그는 태헌 옆을 스쳐 걸어갔다. 데려다준다는 제안은 끝내 거절하려는 모양이었다. 태헌은 어느새 조용해진 교정으로 빠져나가는 연오의 뒷모습을 붙잡지 못했다. 잡지 못했으므로 간절한 물음을 꺼내 놓지도 못했다.
기억 찾으면 나 용서해 줄 거예요?
내가 당신이 못 잊는 태헌이가 되면, 다시 사랑해 줄 거예요?
-
학교를 빠져나온 연오는 자취방 앞까지 갔다가 그냥 몸을 돌렸다. 지금 집에 가도 우울한 생각만 날 것 같았다. 차라리 지치도록 걸은 뒤 들어가자마자 씻고 잠드는 편이 나을 듯했다.
걷자고 정했지만 갈 곳은 없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연오는 저물어가는 하늘을 이고 정처 없이 발을 옮겼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거리며 눈을 찔렀다. 빠르게 달리는 차들은 경적을 울리지 않아도 시끄러워서, 쐐액 소리와 함께 연오를 스쳐 갔다. 점점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자동차 소리를 들으며 연오는 다리가 붓도록 걷고 또 걸었다.
아까 만난 정태헌에게 왜 쓸데없는 말을 했을까. 떨어지는 것이 서로의 최선임을 알고 있으면서 괜한 미련을 남기고 말았다. 기억을 찾으면 꼭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하던 태헌의 얼굴이 너무 아파 보였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안 그래도 ‘태헌이’ 얘기를 질색하던 그인데 너무 잔인하게 군 걸까.
태헌이 기억을 되찾은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지금으로선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다. 가이드 수술을 받았다고 무섭게 화를 낼 것 같기도 했고 왜 나를 버렸느냐고 원망할 것 같기도 했다. 태헌 쪽에서 조용히 인연을 끊어내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나마 태헌의 행동은 이리저리 짐작해 볼 수나 있지, 연오 자신의 마음은 공식도 없고 풀이도 해낼 수 없는 끔찍한 난제였다. 돌아온 태헌이에게 용서를 빌고 싶은 한편 절절한 사과를 받고 싶기도 했다. 전처럼 함께하고 싶기도 하고 간단한 인사만 나눈 후 영영 안 보고 살고 싶기도 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여러 번 분리되었다 하나로 합쳐졌다 했던, 태헌의 두 가지 얼굴이었다. 연오는 여전히 그 둘을 다른 사람처럼 바라보았다가 하나로 보았다가 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친 태헌이 해결되지 않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아.”
꽤 먼 거리의 전철역에 도착한 후에야 연오는 자기가 아직도 음료수를 마시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젤리가 든 음료를 보던 연오의 귓가로 아까의 목소리가 깃들었다.
‘한 모금이라도 마셔요. 쓰러질 것 같아요.’
식판에 음식을 조금씩 덜어 담아 주며 이거라도 먹으라고 재촉하던, 오래전의 태헌이가 떠올랐다.
순식간에 목이 메었다. 연오는 억지로 음료를 마셨다. 말랑말랑한 젤리를 씹어 삼키면서 왔던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단 음료를 마시니 힘이 났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늘어진 앞머리를 살짝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연오는 머리를 자를 때가 지났음을 깨달았다.
불을 밝힌 미용실로 들어간 건 충동이었다. 우울의 아가리를 벌리고 자신을 삼킬 게 분명한 집에 벌써 들어가고 싶진 않다는 생각의 발로이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
친절하지만 말이 없는 미용사가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기 시작했다. 하얀 가운으로 짧은 머리카락 조각들이 사각사각 잘려 떨어졌다.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하던 연오의 어깨가 순간 움찔 떨렸다.
고개를 홱 돌려 미용실 유리문 밖을 바라보았다. 안은 밝고 밖은 어두워 문 너머에 누가 있는지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니 아무도 없는 것 같기는 했다.
분명 누가 지켜보는 느낌이었는데, 착각이었을까? 태헌이 여기까지 따라왔을 거라는 생각은 역시 너무 지나친…….
“손님, 앞에 보실게요.”
“아, 네.”
연오는 다시 거울로 눈을 돌렸다. 그러면서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바람 빠지는 소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밖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홀쭉하게 쪼그라든 감정은 기대감이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연오는 카운터 앞에 서서 계산을 준비하면서도 유리문 밖을 힐끔거렸다. 미용실 밖으로 나온 후에도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태헌 대신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 뻗은 도로와 철골 나무처럼 솟은 건물들 위로 펼쳐진, 검보라색 밤하늘.
구름은 고장 난 반죽기가 꾸역꾸역 뱉어낸 덩어리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밝은 달이 그 덩어리들에 스며 빛과 어둠이 극적으로 대비되었다. 건물과 차, 가로등은 물론 지나다니는 사람들까지 구름 그림자에 집어삼켜졌다.
또다시 그날 같았다, 모든 것을 잃었던 그날.
우뚝 멎었던 연오의 걸음이 아까보다 한층 더 빨라졌다. 하늘이 어쩌고저쩌고, 이런 건 다 혼자 만들어낸 징크스나 미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균열 예측기 오작동에 관한 얘기가 떠올라 발작적인 불안이 솟았다. 연오는 발을 끌며 걸었던 길을 반쯤 달리듯 되짚었다. 두려움 탓인지 약해진 체력 탓인지 금세 숨이 가빠왔다.
달이 구름에 가려졌다가 다시 얼굴을 내밀 때마다 세상이 암전된 무대처럼 캄캄해졌다가 환하게 밝아졌다. 가로등도 차도 많은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학습된 공포가 지나친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연오는 쫓기듯 달렸다.
학교 근처의 조용한 주택가, 자취방 근처에 다다른 후에야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익숙한 붉은 벽돌 빌라들, 사이사이에 새로 난 이빨처럼 어색하게 끼어 선 신축 건물들, 필로티 주차장의 굵은 기둥과 엉망으로 주차된 차들.
“헉, 헉…….”
잠시 멈춰서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다가, 연오가 식은땀을 닦으며 한숨을 쏟았다.
‘바보 같아.’
어린애도 아니고, 언제까지 전전긍긍 하늘만 쳐다보면서 스스로를 윽박지를 건지. 괜한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떨쳐내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뉴스에서 예측기 오작동 운운하긴 하지만 길거리가 안전해진 지가 언젠데.
몸을 똑바로 편 연오가 원룸 건물로 들어가려던 그때, 조용한 주택가의 밤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차 빼시라고요. 애랑 나가야 하는데 길을 막고 주차하면 어떡합니까?”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니 나가는 골목을 막고 선 차 앞에 서서 핸드폰을 붙잡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내로 보이는 여자는 남자 못지않게 화가 난 얼굴로 옆에 서서 통화 내용을 같이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 쪼그려 앉은, 작은 책가방을 멘 어린아이.
“지금 캠핑 장비 다 챙겨서 애랑 내려와 있는데 내일 일찍은 무슨 일찍이에요. 술 드셨으면 대리 불러서라도 빼세요. 이러시면 진짜 견인합니다?”
부모님이 언성을 높이고 있는데도 아이는 자기 손보다 커다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반짝거리는 불빛이 아이의 얼굴에 환하게 부서졌다. 무서운 밤하늘 아래를 가로질러 뛰어온 탓일까, 연오는 괜히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차가 잘 안 다니는 골목이긴 하지만 아이를 저렇게 외따로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오지랖인 줄 알면서도 건물 입구에서 머뭇거린 건, 운명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
아이와 부모 사이의 허공이 아지랑이 이는 양 울렁거리며 왜곡되었다. 칼로 북 찢은 듯한 자국이 생겨나더니 공중에 틈이 생겼다. 곧 보이지 않는 손이 찢어진 부분을 잡아 벌렸다. 커튼 열리듯 벌어진 안쪽은 어둠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어…….”
연오의 동공이 점처럼 작아지며 정신이 확 날아갔다. 심장이 당장 멎을 것처럼 맹렬히 뛰기 시작했다. 살려고 입을 벌려 호흡하는데 어쩐지 점점 더 숨이 막혔다. 머리가 텅 비고 다리가 돌덩이처럼 굳으며 피가 식었다.
과거가 연오 위로 우르르 무너졌다.
함께 밤 산책을 나섰던 부모님의 형상이 좌우에 나타났다. 뒤쪽에서 튀어나왔던, 전선줄 같은 수백 개의 검은 촉수. 끝에는 갓난애 손 같은 손바닥이 달려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가늘고 긴 팔이 밧줄처럼 부모님을 휘감아 균열 안으로 빨아들였다. 연오야! 빨리 가! 거세게 외친 엄마의 입으로도 검은 손이 들어갔다. 얼굴 가죽이 억지로 당겨지며 두 발이 바닥에서 떠올랐다. 먼저 끌려가는 엄마의 손을 잡은 아빠, 꿈틀거리는 촉수 사이로 튀어나와 있던 사랑하는 손. 구할 수 없었던 사람의 손.
갑자기 모든 회상이 유리창 깨지듯 조각났다. 과거의 파편이 뺨을 스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만들었다.
뜨끈한 피가 흐르는 듯한 환촉마저 일어난 그때, 연오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아이의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아이가 뒤를 돌아본 순간, 균열의 사나운 아가리에서 무수한 팔이 쏟아졌다. 균열이 쏟아내는 바람 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연오는 어떻게 거기까지 도달했는지 알지 못했다. 어떻게 패닉을 깨고 팔을 뻗을 수 있었는지, 어떻게 아이의 작은 손을 붙들 수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손이 맞닿자마자 사력을 다해 끌어당겼다. 아이의 부모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연오는 끈질기게 달라붙는 촉수들을 마구잡이로 떼어내면서 이를 악물었다. 반쯤 정신을 놓은 채 새파랗게 얼어붙은 아이의 몸은 시체처럼 차가웠다. 연오는 뒤로 뻗은 발에 무게를 실으며 이를 악물었다. 아이의 부모가 연오를 붙잡고 함께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끔찍한 줄다리기 끝에 촉수가 우르르 끊어졌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이 끊어진 듯 연오는 아이와 한 몸이 되어 뒹굴었다.
“서연아!”
얼굴이 잿빛이 된 부모가 연오의 품에서 기절한 아이를 끌어당겼다. 연오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주저앉은 채 숨을 헐떡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정신없이 아이를 보듬던 부모들이 고개를 들었다.
연오는 그들이 고맙다고 웃으며 인사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은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 이유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반응하기도 전에 얼굴 좌우에서 촉수가 뻗어 나왔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촤악!
거머리처럼 연오를 감싼 검은 것들이 균열로 빠르게 돌아가려 했다. 코앞에 있던 가족이 거짓말처럼 멀어지며 두 발이 붕 떠올랐다. 비명을 지르려고 했는데 작은 손이 목구멍으로 파고들어 목젖을 쥐었다. 끔찍한 고통에 눈앞이 번쩍거리며 토악질이 치밀었다.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뱀처럼 꿈틀거리는 촉수가 풍경을 조각냈다.
연오는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나 촉수가 만든 벽을 뚫을 수는 없었다. 속절없이 끌려가 죽는가 싶던 찰나.
물컹한 촉수 사이를 헤치고 커다란 손이 튀어나왔다. 열 개의 손가락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연오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를 붙들었다. 체온이 익숙했다.
“강연오!”
목소리도 익숙했다. 기어이 촉수를 비집고 들어온 이의 얼굴도 익숙했다. 태헌의 상체가 연오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둘은 고치에 싸인 듯 구속되어 근원 모를 바닥으로 추락했다. 맞잡은 연오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그러나 태헌은 연오의 손을 놓지 않았다.
끝까지 놓지 않았다.
-
균열에서 먼저 목숨을 잃은 쪽은 아버지였다.
그들은 균열 내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일반인 가족이었다. 에스퍼나 가이드 친척도, 친구도, 지인도 없던 평범한 가족. 그랬기 때문에 몬스터가 아예 없는 균열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운이 좋았어. 괴물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까……. 에스퍼들이 구하러 올 거야. 그때까지만 기다리자.’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면 안 된다는 사실도 몰랐고, 균열에 호흡기를 통해 침투하는 독이 있다는 사실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래서 그들은 ‘위급상황 시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상식을 지키기로 했다. 연오와 그의 부모는 딱 붙어 선 채 제자리를 지켰다.
벽돌로 지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건물 내부 같던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한 것은 삼사 분이 지난 후였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이 갑자기 소용돌이치듯 움직이더니 사람을 빨아들였다.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던 연오가 아래로 쑥 빨려 들어갔다. 시멘트가 녹은 타르처럼 끈적하게 연오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들의 양팔을 잡고 힘껏 끌어당기며 용을 썼다.
‘연오야!’
에스퍼들도 버거워하는 지형을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연오가 점성 바닥에 허리까지 박히고 말았을 때쯤에는 어머니와 아버지도 점점 소용돌이의 권역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연오야.’
‘아빠, 아빠, 나 무서워…….’
‘연오야, 아빠가 없어도 엄마가 널 지켜줄 거야.’
그때 연오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었는지도.
‘엄마마저 없어져도, 네가 너 자신을 지켜야 돼.’
‘……아빠! 왜 그런 말을 해?’
‘알았지?’
다짐받듯 힘주어 물은 뒤, 아버지는 곧장 연오 옆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다음 연오의 허리를 잡고 온 힘을 다해 팔을 펼쳤다. 위에서 잡아당기고 아래서 밀자, 버둥거리던 연오의 몸이 가까스로 쑥 빠져나왔다.
‘아빠!’
역할을 다한 구명 튜브가 수평선 너머로 멀어지듯, 아버지는 바닥으로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연오와 어머니는 손을 붙잡고 점점 넓어지는 바닥의 소용돌이를 피해 전력으로 달렸다. 한자리에 있어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그 뒤부터 계속 이동했다.
물론 무지한 이동이 그들을 돕지는 못했다.
계속된 달리기에 먼저 지친 쪽은 연오였다. 함정에 걸려들었던 다리에 발진이 일어났고 약한 화상이라도 입은 듯 피부가 화끈거렸다.
그때부터는 어머니가 앞장섰다. 시멘트 바닥, 콘크리트 벽, 형광등, 계단, 심지어 난간까지 있어서 폐교처럼 기괴하고 오싹한 균열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쉴 곳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벽을 타고 슬금슬금 기어 내려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둘 다 그게 뭔지 몰랐지만 적어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연오와 어머니는 동시에 뒤돌아 왔던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맹렬하게 꿈틀거리며 다가오다가 갑자기 형체를 가지고 솟구쳤다. 불룩 솟은 커다란 형체는 더는 그림자가 아니었다. 살아 움직이는 흙더미였다. 작은 산사태라도 일으킬 듯 엄청난 속도로 쫓아오는 흙더미가 모자를 위협했다.
‘연오야, 어서!’
다리를 다친 연오는 제대로 뛸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놓치고 그대로 넘어지며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벌떡 일어나 달렸지만 절뚝거리느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연오야!’
멀어졌던 어머니가 되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손이 붙들리며 앞으로 홱 끌려 나갔다. 어머니의 작은 몸 어디에 이런 힘이 숨어 있었나 싶었다. 거인에게 붙잡혀 정면으로 팽개쳐진 느낌마저 들었던, 그때.
‘아아아악!’
긴 비명과 함께 흙더미가 어머니를 덮쳤다.
먹잇감을 얻은 흙더미는 더는 연오를 쫓아오지 않고 어머니를 품은 채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흙 위로 불쑥 올라온, 힘없이 늘어진 어머니의 손만이 방금까지 연오 옆에 있었던 그녀의 존재를 증명했다. 발이라도 달린 양 스스스 멀어지는 흙더미 사이로 기절한 어머니의 얼굴이 짧게 보였다 사라졌다.
‘엄마! 엄마!’
연오는 무릎에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그쪽으로 달렸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어머니의 손을 잡을 수 있었을까.
기적은 없었다. 어머니를 데려간 흙더미는 형체화했던 그 장소에 다다르자마자 다시 그림자로 변했다. 그러면 어머니의 몸뚱이라도 남아야 하는데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
공허한 부름.
‘엄마아아!’
그때 에스퍼들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연오는 멀리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도, 그들의 고함도, 자신의 어깨를 낚아채는 손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연오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추락하고 또 추락할 뿐이었다.
애초에 밤 산책을 나가자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제자리에 멈춰 선 채 하늘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아버지 대신 자신이 소용돌이에 빠져 죽었더라면.
어머니를 구할 수 있었더라면. 바보처럼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아무도.
그런데 강연오는 혼자 살아남았다. 모든 비극이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균열에서의 기억은 에스퍼들에게 구출되던 그 순간에 죽었다.
자아를 으깨고 정신을 질식시키는 기억을 버림으로써 강연오는 ‘균열 생존자’가 되었다. 균열에서 나온 후에도 자주 자살 충동을 느끼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살아남았다. 누군가는 부족하고 기괴한 관계라 일컫겠지만 자신에게만은 값진 사랑을 했고, 삶의 다양한 면면과 마주쳤다.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새로 시작할 기회는 늘 있었다.
그런데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이.
“정신 차려요! 정신 차리라고! 강연오!”
다시 여기, 균열.
“강연오! 강연오, 강연오!”
예전에 봤던 공간과 비슷했다. 딱딱한 바닥. 벽. 조명. 간신히 전기만 끊기지 않은 폐건물을 연상케 하는 음산함. 퀴퀴한 냄새와 습기. 올라가도 소용없고 내려가도 소용없는, 위태로운 계단. 시뻘겋게 녹슨 철제 난간.
아무래도 그곳에서 꿈을 꾸나 보다. 구출되었던 것, 태헌이를 만났던 것, 가이드 수술을 받았던 것, 그런 건 전부 꿈이었나 보다.
“강연오, 일어나!”
커다란 손이 철썩 뺨을 갈겼다.
연오는 꾸벅꾸벅 졸다가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소스라쳤다. 허어억, 숨을 들이켜며 상체를 일으켰다. 급하게 일어난 탓인지 일어나자마자 세상이 핑 돌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갑자기 끔찍한 추위가 엄습했다.
갑자기 덜덜 떨기 시작하는 연오를 확인한 태헌이 급히 겉옷을 벗었다. 짧은 가을 코트가 연오를 덮었다. 연오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기에 옷을 덧입혀도 되나 고민스러웠지만, 사시나무처럼 떠는 연오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일어나요.”
태헌은 연오를 부축해 억지로 일으켰다. 균열에서 무력하게 가족을 잃었던 ‘일반인’ 연오와는 달리 정태헌은 에스퍼였다. 그는 연오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패닉에서 겨우 벗어난 연오를 끌다시피 인도하며 태헌이 어조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출입구가 닫혔어요. 예측되지 않았던 균열이라, 문이 닫히지 않았어도 구조까지는 멀었어요. 그 전에 핵을 찾을 거예요.”
핵?
열과 추위에 시달려 흐려졌던 연오의 정신이 번뜩 제자리를 찾았다. 균열의 핵, 그 단어가 이상할 정도로 귀에 익었다.
‘좋아요, 저 혼자 갑니다. 핵 안으로 직접 침투하겠어요.’
정태헌이 목숨을 잃을 뻔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가서, 뭐 할 건데요?”
묻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연오는 말리려는 듯 태헌의 팔을 꽉 붙잡았다. 연오는 몰랐지만, 연오가 태헌에게 먼저 접촉한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태헌은 그토록 잡고 싶었던 마른 손을 아주 생경한 듯 내려다보다가 엉뚱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일반인이나 가이드는 균열에서 오래 못 버텨요. 공기 중에 독성이 있어서. 그래서 센터가 균열 안까지 가이드를 안 들여보내는 거예요.”
“……전에는 가족이랑 엄청 오래 균열에 있었어요.”
“느낌이 그랬겠죠. 실제로는 길어야 삼십 분 정도,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아니라고, 적어도 몇 시간은 내부를 헤매고 돌아다녔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해리되었던 기억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체감상으로는 서너 시간 넘게 미로 같은 균열을 뛰어다닌 것 같은데 그게 고작 삼십 분 정도였을 거라고?
“일반인은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돼요. 구조가 올 때까지 한가하게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요.”
연오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태헌의 팔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고열 때문에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핵 찾아서 어쩔 건데요?”
불안정한 음성에 태헌이 움찔 멈췄다. 그는 자신을 붙든 연오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낸 후, 부축하기 편한 쪽으로 자세를 고쳤다. 키가 맞지 않아 태헌이 몸을 한 뼘쯤 숙여야 했다.
거리가 좁혀지자 연오는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까지 볼 수 있었다. 대답하지 않는 태헌의 긴장과 각오, 고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연오는 전율에 가까운 감정에 휩싸인 채 멍하게 입을 벌렸다. 설마. 설마…….
“핵 안쪽으로 진입하면, 혼자서도 빨리 파괴할 수 있어요.”
우드득, 우드득, 태헌의 뼈가 산 채로 부러지던 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연오가 발작하듯 태헌을 밀쳤다. 싫어! 몸에 갇힌 절규는 소리를 입지 못했다. 태헌이 넘어지려는 연오를 잡아채 깊이 품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연오의 체향이 그대로 전해졌다.
끔찍하게 황홀했다. 연오가 열에 들떠 독을 마시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태헌은 그런 자신에게 진저리가 났다.
“괜찮을 거예요.”
“…….”
“빨리 가요.”
누가 괜찮을 것인지, 정태헌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
연오는 일하는 태헌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더 능숙했을지 모르지만, 연오 눈에는 지금의 태헌도 충분히 노련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부질없이 계단만 오르내렸던 연오와 그의 가족과는 달리, 태헌은 에스퍼다운 판단력과 지식으로 길을 찾아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벽을 밀어 새로운 길을 만들거나, 어머니를 집어삼켰던 소파 같은 함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별해내는 모습은 낯설기까지 했다.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어린애처럼 보일 때가 많았는데, 균열에서는 한 명의 에스퍼라니.
“잠깐 기다려요.”
태헌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연오가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문이었는데, 태헌은 그를 물러나게 한 다음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긴장으로 굳은 옆얼굴이 제법 창백했다.
태헌이 금속 문고리를 덥석 붙잡았다. 그런 다음 그대로 문고리를 뽑아 버렸다. 문고리를 내던지는 손바닥이 시뻘겋게 익어 있었다.
“손이…….”
“괜찮아요.”
그나마 신체를 강화하는 이능을 사용해 이 정도지, 일반인이었다면 저 쇠 문고리가 피부에 들러붙었을 것이다. 손바닥의 신경까지 죄다 태운 후에야 너덜너덜해진 가죽과 함께 떨어졌겠지.
태헌은 자세히 설명하는 대신 문고리가 떨어진 문을 발로 찼다. 그러면서 아까부터 거의 입을 열지 않는 연오를 곁눈질했다.
핵을 언급하자 눈에 띄게 불안해하던 연오는 그 뒤로 조용히 태헌의 뒤만 따라왔다.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에, 태헌은 괜히 미안해졌다. 차라리 괴물이 쏟아지는 균열이었다면 적당히 처리하고 갈 수 있을 텐데, 함정이 가득한 곳이라 조심조심 나아가야 해 연오를 쉬게 할 수가 없었다.
“거의 다 왔어요.”
태헌은 지친 게 분명한 낯을 향해 알렸다.
“숨쉬기 괜찮아요?”
“네.”
“후유증을 남기는 독은 아니니까 나가면 나을 거예요. 나가자마자 바로 치료받아요.”
그때, 연오가 검게 죽은 눈을 들어 태헌을 노려보았다. 타오르는 듯한 눈빛이 태헌을 찔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나운 눈길에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왜 나 혼자 나갈 것처럼 말해요?”
그야 정말 혼자 나갈 거니까.
태헌은 가까스로 그 말을 삼켰다. 지금은 이런 말을 하기 적당한 때가 아니다. 연오는 균열 트라우마를 가진 생존자로서 간신히 버티고 있으니 충격을 줄 필요가 없었다. 균열에 들어온 직후에는 거품을 물며 발작하지 않았나. 깨우느라 애를 먹었는데, 다시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때는 뒷일을 장담할 수가 없다.
태헌의 침묵이 연오에게 장작처럼 던져졌다. 연오의 마음이 더 큰 불안과 좌절로 활활 타올랐다.
“예전처럼, 태헌이처럼, 핵 안으로 들어가서 죽으려는 거예요?”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때도 안 죽었잖아요.”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는 태도에 연오의 눈이 번뜩였다. 남의 희생을 발판 삼아 살아남는 것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부모님도 태헌이도 같은 방식으로 잃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짓밟고 선 고통이 너무 심해서, 이제는 그들에 대한 감사마저 옅어지려 했다.
“좀 더 기다리면 다른 에스퍼들 올 거예요. 기다리면 되잖아요.”
“서울 전역에 열린 균열 때문에 다들 정신없어요. 그리고 목숨 걸고 기다릴 필요는 없잖아요.”
“그럼.”
연오가 치받는 덩어리를 삼켰다. 목소리가 찢어졌다.
“그럼, 진짜 죽겠다고요?”
긍정의 답을 들으면 달려들기라도 할 듯 흥분하고 절망한 연오가 태헌의 시야에 들어찼다. 태헌은 잠시 그에게서 눈을 떼고 막 열린 문 너머를 살폈다.
강한 열기를 뿜으며 블랙홀처럼 주위의 공기를 빨아들이는, 균열의 핵이 거기에 있었다. 핵은 마치 시뻘겋게 빛나는 거대한 눈구멍 같았다. 눈알 없는 눈구멍, 그 안쪽 깊이 어금니처럼 박힌 핵을 파괴하면 균열은 소멸한다.
태헌은 다시 연오의 상태를 확인했다. 연오 자신은 흥분 때문에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의 입술은 이미 보랏빛이었다. 가뜩이나 체력적으로 약해진 사람이 여기까지 기절하지 않고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연오가 내색하지 않았을 뿐, 계단을 오르다가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는 사실을 태헌도 모르지 않았다.
버티는 건 미련한 짓이다.
거기까지 판단하자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태헌은 연오가 안쪽의 핵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도록 슬쩍 문에 기대섰다. 어차피 연오도 일반인일 뿐이다. 가이드가 된 후 균열에 대한 교육은 받았겠지만 단숨에 핵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는 없을 것이다. 헤어짐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도 모르겠지.
태헌은 주저앉기 직전인 연오를, 가만히 불러 보았다.
“강연오.”
동그라미가 유난히 많은, 부드럽고 유연한 이름이 입 안에서 달게 녹았다.
“하지 마요.”
연오가 단숨에 태헌의 말을 끊었다. 태헌은 자신의 팔을 움켜쥐려는 연오의 손을 간단히 뿌리쳤다. 부드러우면서도 정확한 거부의 몸짓에 연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태헌이 또렷한 의지로 연오의 손을 거절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짜 하지 마요. 그냥 여기서 기다려요. 나 숨쉬기도 괜찮고…….”
말을 많이 했더니 목에서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 일었다.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는데 또 피가 울컥 쏟아졌다. 연오가 피가 말라붙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눈만 깜빡거렸다.
“일산화탄소 중독 같은 거예요. 자다 죽는 사람들처럼, 조용히 죽어요.”
덤덤한 설명도 연오를 진정시키진 못했다. 그는 입에 고인 피를 퉤 뱉었다. 피가 덜 닦인 입술이 매서운 말을 쏟아냈다.
“잘됐네요. 안 아프게 죽고.”
“미쳤어요? 왜 그런 소릴 해요?”
“정태헌, 너야말로 미쳤어?”
확 달라진 말투에 태헌이 멈칫했다. 연오는 태헌에게 바짝 다가가며 마구 쏘아붙였다.
“또 죽어서 어쩔 건데. 겨우 살려 놨더니 또 죽겠다고 하면 어쩌라는 건데. 이 짓 처음부터 다 다시 할까? 너는 나 때문에 죽었다고 화내고 나는 그거 받아주다가 나가떨어지고 결국은 널 버리고, 이거 다 다시 해?”
“…….”
“사람들은 자꾸 날 지킨다고 죽어. 그럼 나는 혼자 남아서 어쩌라는 건데. 너 핵 들어갔다가 또…… 또.”
내장까지 환히 보이던 끔찍한 몰골이 연오를 덮쳤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머리가…….
“또 그렇게 죽으면, 내가 잘 살 것 같아? 그렇게 죽고 잘 살라고 인사하면 끝이야?”
태헌이 연오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진정해요. 나직한 속삭임은 연오의 중심에 닿지 못했다. 연오의 눈에서 눈물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죽을 것 같았다. 생각이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어떻게 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이 무서운 시련에 짓눌려 사라지고만 싶었다.
이번에도 정태헌을 잃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자신 때문에 그가 죽었다는, 칼날처럼 명징한 진실에 매일매일 급소를 찔려 가며 살아야 할 텐데. 게다가 태헌이는? 두 번이나 자신 때문에 죽어야 하는 태헌이 인생은?
연오는 애타는 마음으로 태헌을 쳐다보았다. 제발 그가 마음을 바꾸기를. 살고 싶다고, 살려 달라고 외치면서 가이딩 에너지를 빼앗던 그때처럼 굴어 주기를. 나 살기도 바쁜데 너까지 어떻게 신경 쓰겠냐고 매몰차게 말하던 마음이 되살아나기를. 그래서 내게 평온한 죽음을 허락하고 너는 네 인생을, 잘, 살아가기를.
그런데 이상했다. 너무나 이상했다.
정태헌이 꼭 태헌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미안했어요.”
“…….”
“사람처럼 안 대한 거. 언제든 에너지 갖다 쓸 수 있는 호구 취급한 거……. 매칭률 안 올랐다고 성질낸 거, 그런 거, 나 정말로 창피하게 생각해요.”
태헌이 힘겹게 웃었다. 마지막을 앞둔 사람 같은 비장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냥 정말, 창피한 일을 꺼내 놓을 때처럼 민망하고 무안하고 마음에 식은땀이 나는 사람 같았다.
“폭주 가이딩해 주고 나 무서워하는 거 알았으면서, 그거 한 번도 제대로 얘기 안 한 거. 사과도 안 하고 대충 넘어가려고 한 거…….”
“그만 해요.”
“내가 옛날처럼 되길 바랐는데, 계속 나는 그 사람이랑 다르다고 하면서 애처럼 징징거린 거, 그건 솔직히 잊어 줬으면 좋겠어요. 그거 때문에 가끔 자다가도 이불을 차요.”
“그만하라고!”
연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치솟았다.
태헌의 평정심은 오히려 더 굳건해졌다. 기억을 잃은 직후, 마구잡이로 날뛰는 태헌을 보며 연오가 함께 흥분하지 않았듯이. 종잡을 수 없이 오가는 감정을 차분히 따라잡고 거기 맞춰 줄 수 있었듯이.
상대방이 너무 심하게 흥분하면, 오히려 반대편은 차분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
“진짜 많이 잘못했어요.”
“…….”
“처음부터 끝까지.”
연오는 까마득히 높은 절벽 앞에 던져진 듯 막막하게 태헌을 바라보았다.
진짜 결심했구나. 무슨 짓을 해도 결정을 바꿀 수가 없겠구나. 무슨 수를 써서든 기어이 핵으로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겠구나.
“안 어울리게 왜 그래요.”
이건 연오가 만나 온 정태헌이 아니다. 기억을 찾은 것도 아닐 텐데 왜 갑자기 어른인 척하는 것인가. 어린애 주제에, 마음에 안 들면 다짜고짜 성질을 부리고 제대로 사과도 안 하는 애새끼 주제에.
욱하여 절박하게 뱉은 말에도 태헌은 그냥 조용히 웃었다.
제약실을 부순 그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연오는 설명해도 모를 것이다.
거대한 손 두 개가 머리와 발을 나눠 잡더니 몸을 길게 잡아 늘였다. 갑자기 키가 커지며 시야가 넓어졌고 세상이 달라졌다. 사고의 폭이 문을 활짝 연 듯 넓어지며 세상이 강연오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사랑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잃어버린 기억 없이도 자랄 수 있음을, 태헌은 그때 깨달았다.
“그러게요. 내가 처음부터 잘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처음부터 그 사람처럼 했다면.”
다정하고 친절하게 다가갔다면. 성질을 감추고 좋은 면면을 먼저 보여주었다면. 이해해 주고 감싸 주고 편들어 주었다면.
“절대 용서 못 받겠지만.”
“…….”
“그래도 마지막은 흉내 낼 수 있어요.”
온몸을 떠는 연오를 보니 달콤한 유혹이 치밀어올랐다.
딱 한 번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해 주었으면 했다. 가지 말라고, 죽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더 좋을 텐데.
지금 부탁하면 연오는 원하는 말을 해 줄 것이다. 그걸 알기에 더 부탁할 수가 없었다.
“잘 살 거죠?”
부러 가볍게 실어 보낸 말에 연오의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눈의 실핏줄이 터진 것은 슬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유독한 공기가 연오를 점점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 연오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허세 부리지 마요. 지금 무서운 거 다 아니까.”
태헌은 어쩔 수 없이 웃어 버렸다.
무서웠다. 안 무서울 리가. 제 뼈 부러지는 소리까지 들었었는데. 장기가 터지고 으깨지는 소리까지 생생히 들었는데 무섭지 않을 리가.
그리고 정태헌은 확신했다. ‘태헌이’도 무서웠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안으로 뛰어들었을 리 없다. 어쩌면 다 큰 사내놈이 죽는 게 무서워서 질질 울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으로 연오를 부르며 죽기 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국은 갔다.
결국은.
아마 행복했겠지, 연오가 언젠가 말했듯.
그래서 태헌은 후련하게 웃었다.
“하나도 안 무서워요.”
최후의 거짓말과 함께 문을 열었다. 달리기 시작했다. 두 발이 땅을 박찼다. 시뻘건 핵이 아가리를 벌리고 그를 맞이했다.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피 흘리는 눈구멍 속으로. 적막한 무덤으로.
“정태헌!”
마지막에 들은 것은 자신의 이름.
다이빙하듯 상체를 밀어 넣자 구멍이 즉각 수축하며 신체를 으스러뜨리기 시작했다. 치받는 고통이 그를 찢었다. 오른손을 뻗자 송곳니 같은 뭔가가 걸렸다. 됐다, 짧은 희열이 잠시나마 무통을 선사했다. 태헌은 핵을 움켜쥐고 죽을힘까지 쏟아냈다.
제 몸이 부서지는 소리가 잔인하리만치 선명했다. 그러나 핵이 깨지는 소음이 더 분명했다.
잔인한 입처럼 몸을 짓씹던 것들이 서서히 사라졌다. 압박감이 가시며 역설적으로 피가 터져 나왔다. 죽음이 코앞이었다. 눈이 먼 듯 시야가 새까맣게 변했고 이제 귀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 후의 캄캄한 탈진이었다.
오직 자신의 손을 감싸는 체온만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만이 세상의 전부였다.
시각과 청각이 차단된 극한의 적막 속에서 다른 감각은 오히려 날카롭게 되살아났다.
어디선가 금빛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 파도가 해일처럼 일어나 태헌을 덮쳤다. 그의 모든 것이 쓸려나갔다. 하물며 고통까지도. 측량 불가능한 크기의 에너지였다. 웅대한 물살이 버석버석 부서지던 몸을 흠뻑 적셨다.
심장 가운데가 인두로 지지는 듯 뜨거웠다. 손가락을 세워 그곳을 벅벅 긁고 싶었다. 본능처럼 알 수 있었다. 이름이 새겨지고 있다. 이름. 이름이.
태헌은 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한 글자씩 각인되는 이름을 더듬더듬 읽어나갔다.
강…… 연…… 오…….
-
죽은 줄 알았는데, 태헌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반짝거리는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교복 차림의 열일곱 살.
빙그레 웃는 얼굴이 낯설었다. 태헌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브이 자로 벌려 입꼬리를 꾹꾹 눌러 보았다. 그래도 자연스러운 표정이 나오지 않았다. 아주 부드럽고 느슨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만들어 보이고 싶어 애가 탔다.
태헌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안녕, 연오야.”
“연오야, 어제 뭐 했어?”
“우리 아직 번호도 모르더라. 너 핸드폰 번호 뭐야?”
고등학교 1학년 3월. 연오와 사귀기는커녕 친하다고 말할 수도 없던 때였다. 당연히, 그가 등교하는 연오를 매일같이 데리러 가기도 전이었다.
새 학기 첫날부터 입을 굳게 다물고 다른 세상에 있는 듯 정신을 놓고 있던 연오의 자세한 사정은 전혀 몰랐다. 그러나 적절한 무지는 풋사랑을 타오르게 하는 장작이기도 해서, 태헌은 연오를 잘 모르는 채로도 그를 무척 좋아했다. 이유도 모르면서.
“연오야아.”
나긋한 어조를 만들어 보이려 애쓰며 태헌은 말꼬리를 길게 잡아 뺐다. 거울 속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제 얼굴이 정말 못 봐줄 꼴이라,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침대로 달려들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주먹으로 침대를 퍽퍽 치는 그의 귀뿌리가 시뻘겠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지금 거울 앞에 서서 무슨 쇼를 하는 거냐고?
그때의 그는 몰랐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울 앞에 선다는 것을. 이 옷 저 옷을 몸에 대 보고 어떤 표정이 가장 매력적인지 가늠해 보면서 하루를 보내곤 한다는 사실을.
그 시기의 태헌은 자기가 갑자기 중병에라도 걸려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걸까 고민했지만 거울 앞을 떠나지는 못했다. 사랑에 빠진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
거울에 비친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미간이 좁아지며 입술이 뒤틀리고 뺨의 근육이 심하게 경련했다. 이를 악문 듯 턱까지 단단해졌고 눈꺼풀은 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떨렸다.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한 몸은 서서히 허물어져 태헌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본래도 그리 살뜰하고 다정한 성품은 아니었지만, 연오를 만나며 가다듬어졌던 성격마저 차츰 풍화되었다.
코밑까지 물이 찬 듯 답답할 때면 뭐든 때려 부숴서라도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가이딩 기계도, 약도 소용없음을 알았을 때는 결벽증을 고쳐 보라는 무의미한 충고까지 들어야 했다. 원해서 결벽증이 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와중에 한주연 본부장은 애인에 대한 마음을 좀 내려놓으라는 조언까지 해 태헌의 속을 더 뒤집었다.
한주연에게 연오를 소개해 준 것은 만일의 상황이 닥쳤을 때 그녀가 연오를 보호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고, 또 그녀가 ‘애인과 거리를 둬 보라’는 식의 개 같은 충고를 그만두었으면 해서였다.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버거웠다. 몸의 고통은 사람을 확실하게 망가뜨렸다. 무슨 비밀을 털어놓아도 벗어날 수 없는 고문실에 갇힌 듯한 공포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마저도 애초에 제대로 잠들었을 때의 얘기지만.
“태헌아.”
그래도 그 부름 하나면, 웃을 수 있었다.
거울 속 얼굴이 다시 평온해졌다. 얇은 얼굴 가죽으로 연오 몰래 일어나 변기에 속을 게워야 했던 밤을 덮어 감췄다. 숨이 차서 통잠을 잘 수 없는 날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런 밤마다 잠든 연오를 바라보며 좀 더 견딜 수 있다고, 견딜 수 있다고 되뇌는 자신의 모습도.
“괜찮아? 얼굴이 안 좋은데.”
연오가 가이드 수술 이야기를 꺼낸 후에는 더더욱 고통을 내색할 수 없었다. 연오가 자기 몰래 수술을 받아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칩은 제거할 수 있다지만 연오를 다시 수술대에 눕히려면 긴 싸움을 벌여야 할 테다. 그러다 각인이라도 한다면 연오는 절대 칩을 포기하지 않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괜찮아. 그냥 체했나 봐.”
그래서 태헌은 늘 웃으면서 다른 핑계를 댔다. 싸울 사람이 없어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까지 균열에 투입하는 센터, 등급 높은 에스퍼가 ‘실수로’ 가이드를 죽여도 제대로 처벌할 수 없는 현실, 가이드를 마트에서 묶음 판매하는 건전지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 이 끔찍한 세상을 연오는 몰랐으면 했다.
연오는 일반인이니까. 각성한 것도 아닌데 굳이 깊은 이야기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평범한 사람들이 균열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센터를 손가락질하며 세금 도둑질이나 한다고 혀를 찰 때, 연오도 그들 틈에 끼어 있었으면 했다. 평화롭고 안전하고 상식적인 곳에 남아 있어 주길 바랐다.
“가이드 수술 관련해서 얘기 좀 하고 싶은데, 화 안 내면 좋겠어, 태헌아.”
솔직히 고백하자면 연오가 두 번째로 가이드 수술 얘기를 꺼냈던 12월 31일에는 태헌도 흔들렸다. 고통은 빠르게 극에 달했고, 만성 가이딩 부족 증상이 심해질 때였다. 이게 신체적 고통인지 정신 질환인지도 구분할 수 없을 때쯤 연오가 수술 이야기를 꺼냈으니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연오는 가이드 수술이 그리 위험하지는 않다며 열심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학교 다니면서도 가이드 일은 할 수 있고, 몸 관리만 신경 쓰면 수술 부작용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태헌은 그 말을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애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연오 앞에서는 한 번도 그렇게 서럽게 울어 본 일이 없는데.
“정말 그래 줄 거야?”
환하게 밝아지는 연오의 얼굴을, 재잘재잘 설명을 쏟아내는 입술을, 태헌은 울면서 바라보았다.
사실 그때 태헌은 연오의 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폭주 상태인 에스퍼를 구하다가 죽음에 이른 수많은 가이드를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이드의 시체를 본 적도 있었다. 들것에 실려 나가던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들것 아래로 툭 떨어지던 손과,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울면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에스퍼. 그 장면이 어찌나 충격이었는지 태헌은 에스퍼가 목놓아 부르던 이름까지 기억했다. 이연서.
각인 가이드였다고 한다. 각인, 에스퍼와 가이드를 이어주는 가장 단단한 끈도 그 가이드의 목숨을 지키지 못했다.
연오도 똑같이 죽을 수 있었다.
그런데 뭐? 수술받고 가이드가 되어 줄 거냐고?
“미친 새끼…….”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지금 포기하면 이제껏 참아온 건 뭐가 되는데. 연오의 평화로운 일상은 또 어떻고. 균열 때문에 부모님을 잃어버리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내 가여운 연인의 인생을 망쳐 버리려고?
“연오야, 우리 헤어지자.”
연오가 다시는 수술 얘기를 꺼내지 않겠다고 울며불며 맹세하지 않았다면, 태헌은 그날 정말로 연오와 헤어졌을 것이다.
-
거울 속 태헌이 다시 미소를 짓고 있다. 시간이 흘러 이제 그는 스물하나였다.
[좋아요, 저 혼자 갑니다. 핵 안으로 직접 침투하겠어요.]
[연희동 쪽으로 번져도 연오 잘 대피시키면 되잖아! 정태헌, 당장 나와!]
[씨발, 연오 균열 보면 패닉 일으켜요. 혼자서는 대피 못 한다고요!]
달콤했던 죽음의 순간.
솔직히 태헌은 그 죽음을 희생이라 여기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균열의 핵으로 투신하면서도 오히려 홀가분했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아프지 않아도 돼.
계속 정신이 이상해지다가 연오에게까지 화풀이를 할까 봐 마음 졸이지 않아도 돼.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연오를 밀거나 때리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버려지는 건 아닐까 무서워할 필요도 없어.
이렇게 죽으면 연오는 나를 오래도록 기억하겠지. 많이 아파하겠지만, 그래도 나를 마음 한구석에 담고 잘 살아가겠지. 언젠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더라도 섭섭해하지 않을 테니, 한두 달 정도는 나만 생각하며 슬퍼해 주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완벽했다. 사랑의 완성이었다.
그는 연오에게 ‘매 순간’ 좋은 사람으로 남는 데 성공했고, 갑작스러운 각성이 몰고 온 태풍으로부터 연오를 지켰다. 그는 운명적인 재앙에 맞서다가 죽어가겠지만 연오는 옷자락 하나 젖지 않은 채로 온전했다. 그가 해낸 것이다.
자부심을 품고 죽는 자는, 조금 무서울지는 몰라도 아프지는 않다.
그래서 태헌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
거울 속에 연오가 있다.
“나 너랑 안 헤어질래, 태헌아…….”
어리둥절한 태헌은 매끈한 거울에 손을 대며 연오의 얼굴을 만져 주려고 했다. 눈물에 젖은 뺨을 닦아주고 그를 안아 준 다음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당연하지. 내가 너랑 왜 헤어져. 어떻게 헤어져. 왜 그런 무서운 말을 해?
그런데 입에서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난 툭하면 우는 등신 같은 새끼를 좋아했나 보네요.”
연오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그가 너무 놀라 상처조차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태헌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니야.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야. 거울의 모서리를 붙잡은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된 거야. 연오가 왜 울지. 이 상황은 대체 뭐지. 왜 저렇게 아파 보여. 또 밥 안 먹었구나.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났던 그때보다 더 말랐어.
“당신 부담스럽다고요. 난 당신 기억도 못 하는데 여전히 반말이나 하면서 사귀는 사람처럼 절절하게 굴고.”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휙 장면이 바뀌었다. 에너지를 갈취당해 지친 연오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를 일으키기 위해 본능처럼 걸음을 옮긴 순간.
“불쌍한 척하지 마요. 본인이 하라고 해놓고 피해자인 척하는 건 또 뭐예요. 사람 기분 더럽게 만들고 싶어서?”
제발 닥쳐. 제발 입 다물고 연오부터 일으켜. 병원으로 데려가. 힘들어하잖아. 이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정말 잘못되기라도 하면? 안 그래도 약한데 죽기라도 하면?
생각이 죽음에 다다르자 거울 속 연오의 모습이 다시 바뀌었다. 망가진 인형처럼 바닥에 누운 연오가 시체 같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연오가 손을 뻗었다. 태헌은 허겁지겁 손바닥을 겹쳤다. 무서워서 졸도할 것 같았다.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태헌아…….”
알았어. 병원 가자, 연오야. 빨리 가자. 내가 옆에 있을게. 넌 안 죽을 거야. 넌 무사할 거야. 내가 너 꼭…….
“그럼 죽어요.”
마구 이어지던 생각이 뚝 잘려 나갔다.
“나 멀쩡하게 만들어 주고 죽어.”
이제 거울 속 연오는 생기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미안한 낯이었다. 잔뜩 주눅 들고 위축된, 볼품없고 초라한 표정이 낯설어 거울 밖 태헌은 우뚝 굳고 말았다.
“가이드님이 괜찮다고 했잖아요. 아팠으니까 그럴 수 있는 거라고, 이해한다고 했잖아요.”
방금 자기 입에서 이해 불가능한 말이 나온 것 같았다. 괜찮아? 아팠으니까 이해해? 뭘? 그 개 같은 폭언과 무자비한 폭력을? 연오를 저 지경으로 만든 지독한 괴롭힘을?
“정태헌 에스퍼가 아주 가끔, 무서운 정도고…… 극복할 수 있게 노력할 테니까……. 저 때문에 상처받지 마세요.”
이어지는 상황에 태헌은 정말로 기절할 뻔했다. 나 위로하지 마. 상처받은 건 너야. 치료가 필요한 쪽도, 위로가 절실한 쪽도 너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야 하는 사람은 너야. 한주연 본부장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가이드 본부장은? 연오를 혼자 두고 다들 어디 있는 거야?
“가이드님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거짓말을 한 거든 아니든, 매칭률이 떨어지든 말든 난 가이딩 받을 거예요. 가이드님한테만. 다른 가이드는 필요 없어요.”
연오의 눈이 우묵하게 깊어졌다. 태헌은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소리치고 싶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연오야. 내가 하는 말이 아니야. 내가 저런 말을 할 리 없잖아. 내가 너를 착취할 리 없잖아. 짓밟을 리도, 학대할 리도 없잖아.
“허락하는 거죠?”
목소리가 거울 너머까지 닿지 않았다. 연오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태헌은 가슴이 터져라 소리쳤다.
연오야, 나는 이런 짓 안 해. 나는 이런 짓 안 해! 나는!
거울 속 연오가 끝내 쓰러졌다. 마지막 숨이, 희망이 그의 몸을 천천히 떠나는 게 느껴졌다. 온종일 사랑해도 갈급하기만 하던 따뜻한 몸이 시체만도 못하게 식어 갔다.
연오의 상이 사라졌다. 거울에는 차가운 눈빛의 정태헌만 남았다. 그가 거울 너머를 쏘아보자 두 존재의 시선이 부딪혔다.
“이제 말해 봐요.”
태헌은 거울을 후려쳐 그의 입을 닥치게 하고 싶었다. 거울 속으로 뛰어들어 목을 조르고 싶었다. 아가리를 찢어 놓고 얼굴을 곤죽이 되도록 두드리며 고함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무력했다. 거울 안으로 갈 수도 없고 과거를 바꿀 수도 없었다. 그저 주먹을 말아쥐고 선 채로 반사된 과거를 노려볼 뿐.
“내가 누구 때문에 죽을 뻔한 것 같아요?”
“이 개새끼야!”
주먹이 쇄도했다. 거울 속 얼굴 한가운데 주먹이 꽂혔다. 쩌억! 유리 깨지는 소리가 아니라 얼음 터지는 소리가 났다. 태헌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악을 썼다.
“개새끼야, 닥쳐! 닥쳐, 이 씹새끼야! 원해서 죽었잖아, 연오 지키고 죽었잖아. 네가 뭔데 연오한테!”
쾅! 쾅! 쾅! 주먹이 찢어졌다. 거미줄처럼 금이 간 거울에서 유리 가루가 날렸다.
“네가 뭐라고 연오를, 씨발, 네가 아픈 게 뭔데! 그게 뭐가 대단한데!”
조각난 거울 속에서 정태헌이 웃고 있었다. 태헌이가 징그러울 만큼 소중히 지켜 온 사랑을 조롱하고 있었다.
네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냐고. 너도 내심으로는 연오가 알아서 수술받기를 바랐던 거 아니냐고. 연오만 아니었다면 결벽증으로 고생할 일도 없었다고 생각했던 거 아니냐고.
안 그래, 태헌아? 정태헌이 한껏 이죽거렸다. 말 안 해도 연오가 너 얼마나 아픈지 알아주길 기대했잖아. 연오가 수술대에 오르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일 생각이었잖아. 단 한 번도 연오를 원망한 적 없다고 맹세할 수 있어?
“으아아아아!”
태헌의 주먹이 거울 한가운데 내리꽂혔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울을 노려보았다. 정태헌이 다시 한번 헛소리를 하면 정말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정태헌이 없었다. 깨진 거울에 비치는 것은, 괴물 같은 눈을 번뜩이며 씨근덕거리는 자신뿐이었다.
한 줄기 눈물이 창백한 뺨을 긋고 지나갔다. 태헌은 거울에 제 머리를 박으며 오열했다.
나는 누구일까.
태헌이의 기억을 얻은 정태헌? 정태헌이 핵에서 죽은 틈을 타 되돌아온 태헌이?
그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더는 거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파손된 기물에 답이 적혀 있기라도 한 양.
조각조각 갈라져 흉측한, 연오에게 보이기 싫었던 면을 모조리 드러내고 만.
단 한 명의 인간이 거기 있었다.
“연오야……. 연오야, 내가 널…….”
너무나도 낯선 조우의 순간.
완벽하게 지켜 왔다고 믿은 세계가 깨진 유리처럼 쏟아져 내렸다. 반짝거리는 파편이 머리 가죽과 뺨, 귓불을 찢으며 발치로 떨어졌다. 비가 오는 것 같았다. 아픈 비가.
긴 폭우였다.
-
태헌은 연명실이 아닌 일반 병실에서 눈을 떴다.
그는 죽지도 않았고 처음 핵에서 으깨졌을 때처럼 뒤틀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가벼운 통증조차 없었다. 그는 그저 편안히 잠들었던 사람처럼, 어두컴컴한 공간에 혼자 누워 있었다.
온몸의 감각이 하나씩, 느리게 되살아났다. 손발도 전부 움직여졌고 팔다리에 힘도 넘쳤다. 가이딩을 넘치게 받았을 때처럼.
‘가이딩을 넘치게 받았을 때’의 감각을 알고 있는 것 자체가 역겨웠다. 연오의 숨이 끊어질 정도로 에너지를 빼앗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태헌은 지체하지 않았다. 왼팔에 꽂힌 링거를 거칠게 뽑아내고 이불을 걷었다. 맨발로 바닥을 딛자 찬 기운이 밀려왔다. 주저 없이 창문으로 다가갔다. 답답하게 반만 열리는 형태가 아니라 옆으로 밀어 여는 슬라이딩 형태였다. 운이 좋았다.
태헌은 창틀을 세게 움켜쥐었다. 센터 건물 아래를 지나는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바람이 그를 끌어당기며 속살거렸다.
죽여버려야 돼.
죽어버려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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