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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7/7)

외전 3

데뷔 4주년 콘서트를 마치고 특별휴가가 3일이나 주어졌다. 슬슬 부모님을 한 번 뵙고 올 때라며 외출한 세 멤버와 다르게, 예준과 준은 얌전히 숙소에 남아 있었다. 

준은 굳이 따로 날을 잡을 필요 없이 자주 어머니를 뵈러 갔고, 그와 반대로 예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그렇게 오고 싶으면 너 한가할 때 오지 말고, 내가 한가할 때 와야지! 아버지는 이 한 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숙소에 둘이 남는 건 오랜만이라, 둘은 일부러 방 대신 넓은 거실로 나와서 나른하고 느긋한 하루를 보낼 계획이었다. 겨울이라 날이 추운 만큼 일부러 몸도 잔뜩 붙이고 앉았다.

“으음……?”

한참 잘 앉아 있다가 허리가 아프다며 소파 위에 엎드린 준이, 한참 휴대폰을 하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듯 몸을 살짝 뒤척였다. 그 옆에서 얌전히 허리를 주물러주고 있던 예준이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왜 그래?”

“형. 이런 연락에는 뭐라고 답장해야 돼요?”

“무슨 연락인데?”

예준의 물음에 준이 10줄이 넘는 긴 문자 내용을 한 번 더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내용을 간략하게 간추렸다.

“자기가 유튜버라는데 방송 한 번 나와 줬으면 좋겠대요. 여기 이름도 써 있어요.”

“그런 동영상을 올렸다고?”

“아니요, 저한테 개인적으로 온 건데. 검색해 봤는데 채널이 진짜 있더라고요.”

“네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는데?”

“어……?”

“상식적으로 개인 유튜브에 출연해 달라는 것도 이상한데, 그걸 매니저도 아니고 왜 너한테 보내?”

“헉. 그러네요?”

준이 이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은 듯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예준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진심으로 어디부터 어디까지 고쳐줘야 할지 모르겠다.

전화번호는 또 어디서 돌아다니는 거야. 하기야 요즘은 돈만 주면 사생들이 알아서 팔아 주니까. 한숨을 내뱉은 예준이 바로 대처를 시작했다.

“그 새끼 이름 뭐야?”

“이름은 여기 강혁민이라고 되어 있어요. 근데 프로필 사진 강아지예요. 형이 동물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 없다고 그랬잖아요.”

“지금 얘 때문에 생겼어. 폰 줘 봐, 답장 보내게.”

“그냥 알아서 보낼게요! 형한테 주면 쌍욕할 거잖아요.”

“그럼 내가 불러주는 대로 그대로 타이핑하든가. 야, 이 새끼야. 전화번호 어떻게 알아냈냐? 한 번만 더 연락하면 진짜 좆 까버린다. 차단한다. 유튜브 좆망하길 바란다.”

“…….”

필터를 거치지 않고 흘러나오는 예준의 말들을, 준은 차마 손가락으로 옮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차단 버튼만 누르고 예준에게 검사를 받았다.

“그냥 차단했어요.”

“전화번호 또 털렸네. 마침 쉬니까 이참에 바꾸면 되겠다.”

“번호 바꾼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이번 번호도 입에 달라붙기까지 한참 걸렸는데, 또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연락처에 있는 사람들한테 문자도 다 돌려야 되고. 귀찮고 번거로운 건 딱 질색이었다. 

휴대폰을 만지는 것도 이제 슬슬 질려가던 준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저녁을 먹으려면 한참 남은 시간이었다. 형들도 다 없고……. 각자 부모님을 만나러 간 멤버들을 생각하던 준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형, 나도 엄마 보고 싶어요.”

“갈래?”

“형 안 피곤해요? 혼자 다녀와도 되는데!”

“내가 언제 너 혼자 보낸 적 있냐? 얼른 씻고 가자.”

예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준이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준이 밟고 올라간 자리를, 예준이 그대로 밟으며 느긋하게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천천히 병문안 준비를 시작했다.

예준은 병원에 갈 때만큼은 주주총회 뺨치게 힘을 줬다. 선욱이 있는 병원에 후줄근하게 가고 싶지도 않고, 준의 어머니를 뵈러 가는 자리인 만큼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정작 본인의 부모님은 트레이닝복 입고도 잘만 만나러 가지만.

“형 진짜 병원 갈 때마다 엄청 힘주는 것 같아요.”

“존재 자체에 힘이 들어가 있는 거야.”

적당히 깔끔하게 입고 거실로 나온 준이 예준의 전신을 훑으며 말했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정장에 코트. 밖에 추운데 얼어 죽지 않을까. 그러나 예준은 언제나 패션을 위해 얼어 죽는 걸 택하는 편이었다. 

준이 예준의 말을 간단히 무시하고 목도리를 건넸다. 반대 손에는 이미 어머니에게 가져다 줄 음료수가 들려 있었다.

“이거라도 하고 가요.”

“어차피 차 타고 가는데 뭐. 주차장은 안 춥잖아.”

분명 안 매겠다고 했지만, 차에 시동을 거는 예준의 목에는 어느새 목도리가 둘둘 감겨 있었다. 

매번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는 귀찮고, 본가에 있는 차를 타자니 너무 비싸고 눈에 띄어서 예준은 몇 달 전에 저렴한 가격대의 국산차를 하나 뽑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팬들이 왜 갑자기 돈 없는 척하냐며 예준이 평소 입고 다니는 옷들의 가격을 SNS에 마구 올렸지만, 예준은 꿋꿋하게 이 차를 몰았다.

히터 덕분에 아주 따뜻하게 병원 주차장에 도착한 예준이 목도리를 벗었다.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던 준도 덩달아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두고 차에서 내렸다.

VIP 병동까지 가는 길은 아주 따뜻하고 편안했다. 아직 얼굴에 졸음이 가득한 준의 손에서 예준이 몰래 음료수를 뺏어 들었다. 

“엄마!”

평소처럼 소독을 마친 준이 병실 문을 힘차게 열었다.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아들을 향해 어머니가 익숙하게 팔을 벌렸다. 성장판이 남들보다 빨리 열리고 빨리 닫힌 건지 키는 거의 크지 않았지만, 준은 벌써 스물을 훌쩍 넘긴 어엿한 성인이었다. 하지만 아무 거리낌 없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는 걸 보면 아직까지 어린아이 같았다.

어머니는 몇 년 새 병상에서 일어나 앉고, 남의 도움 없이 복도를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됐다. 그간 수술도 몇 차례 받았지만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확실히 비싼 치료를 받으니 회복 속도도 무척 빨랐다. 아직 퇴원까지는 무리지만, 생과 사를 넘나들던 위태로운 상황은 무사히 넘긴 지 오래였다.

“어? 음료수 아직 남았네?”

음료수를 넣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연 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저번에 넉넉하게 스무 병이나 사 오긴 했지만, 음료수 킬러인 어머니가 아직까지 남겨뒀을 리 없었다. 그것도 한두 병도 아니고 일곱 병씩이나.

남은 개수를 세어 보던 준이 뭔가 다른 점을 알아냈다. 저번에 분명 과일 주스 세트를 사다 놨는데, 웬 처음 보는 매실이 있었다.

“그거 저번 주에 지구랑 하현이가 주고 간 거야.”

“아…….”

말도 안 하고 언제 들렀지. 준이 괜히 냉장고 속 차가운 음료수를 만지작거렸다. 눈가 쪽으로 열이 몰렸다. 털어놓으면 우울한 이야기라고 싫어할까 봐, 지레 겁먹고 몇 년을 혼자 앓았다. 하지만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준을 등지지 않았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음료수를 냉장고에 차례차례 집어넣는데, 주머니에 넣어 뒀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살짝 꺼내 확인해 보니 오랜만에 보는 선배의 이름이 떠 있었다. 연차가 한참 위인 가요계 대선배인데, 한 번 고정 프로그램을 같이한 뒤로 몇 번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았다. 딱 준만 한 동생이 있어서 괜히 마음이 간다며, 별다른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어 주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물론 준에게는 좋은 사람일지 몰라도, 예준에게는 그저 블랙리스트 명단자 중 한 명으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그는 무려 준과의 점심 식사 2회, 술자리 3회, 콘서트 초대권 수령 후 불참 1회, 통화 12회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주요 인물이었다.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형. 엄마 잠깐만.”

“그래.”

재빨리 병실을 나선 준이 복도 끝에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그리고 전화가 끊어질까 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선배에게 이번 4주년 콘서트 초대권을 줬었는데, 스케줄 때문에 사정상 오지 못했다. 전날에 미안하다고 엄청 사과해 놓고, 오늘 또 미안한 마음에 밥이라도 한 끼 사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준이 빠르게 상황에 맞는 답변을 골랐다. 이 선배 성격상, 거절보다는 호의를 받아들이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애교스럽게 미리 잘 먹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휴게실 문을 연 준이, 갑자기 튀어나온 무언가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넘어졌다. 놀래줄 생각은 없었는데. 덩달아 놀란 예준이 손을 내밀어 준을 일으키고 엉덩이를 툭툭 털어줬다.

“미안. 그렇게 놀랄 줄 몰랐네. 아파?”

“아니, 아프진 않은데 왜 나왔어요? 금방 다시 들어갈 텐데.”

“내가 너 병원 혼자 오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뭔데.”

“아, 그거 때문에요? 나 이제 미성년자 아니잖아요.”

“쟤는 그냥 미성년자를 좀 더 좋아하는 거지, 성인이라고 쳐다도 안 보고 그러는 새끼 아니야. 무엇보다 지금 솔로지.”

대체 사이도 안 좋으면서 지금 애인이 없는 건 어떻게 아는 걸까. 준이 잠시 의문을 가졌다. 선욱이 잠깐 집적댄 건 한참 전의 일인데도 예준은 여전히 예민하게 굴었다. 나름대로 진지한 예준의 얼굴을 보며 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내가 웃겨?”

“아니요.”

준이 예준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빳빳한 정장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예준이 준을 붙잡고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쪽에 있는 소파 위에 앉았다.

“차라리 보여줄까?”

“뭘 보여 줘요, 뭘.”

“이런 거?”

예준이 준의 볼에 짧게 입 맞췄다. 간지러울 정도로 짧고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준이 웃으면서 예준을 슬쩍 밀었지만 쉽게 밀리지 않았다. 준은 예준이 잔뜩 힘을 주고 꾸미고 있을 때를 좋아했다. 

“형은 평소에도 잘생겼는데 이러고 있으면 가끔 진짜 잘생겨서 깜짝 놀라요. 특히 이렇게 머리 올렸을 때…….”

예준이 이마부터 볼까지 짧게 입을 맞추는 동안, 재잘재잘 예준을 칭찬하던 준이 어깨 너머 무언가와 눈이 마주치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분명히 어머니였다.

“엄, 엄마.”

휴게실 문밖에서 안쪽을 들여다보던 어머니가 뒤를 돌아 허겁지겁 사라졌다. 깜짝 놀란 준이 예준의 다리 위에서 내려왔다. 그 과정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바닥에 넘어졌다.

“야, 괜찮아?”

덩달아 당황한 예준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넘어진 준을 일으킨 예준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휴게실 문을 허탈하게 바라봤다.

병원에서는 참았어야 했는데. 충동적인 행동이 불러일으킨 결과였다. 어차피 이쪽 복도에 병실은 하나뿐이고, 준의 어머니는 거의 병실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당연하게도 자신들만의 공간이라고 착각을 했다.

예준은 본래 계획적이지 않은 사람이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도 매우 즉흥적이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선은 의식하고 살았다. 그러니까, 만약 커밍아웃을 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충동적으로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적어도 몇 달은 고민하고, 말을 고르고, 실패했을 경우의 대책도 열 가지 정도는 세워 놓고 도전했을 거다. 무엇보다 이건 혼자만의 일이 아니니까. 자신이야 상관없다지만,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준이라면 얘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엄마!”

휴게실을 뛰어나간 준이 병실 문을 두드렸다. 예준이 황급히 뒤를 따라 나가 휘청대는 몸을 붙잡았다. 준이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마. 들어오지 마. 기다려.”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 문 밖으로 넘어 왔다. 그와 동시에 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주먹 쥔 양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깨를 감싼 예준이 준을 병실 옆 복도 의자에 끌어 앉혔다. 준의 정신은 이미 반쯤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이 상황에도 예준이 급히 복도를 살폈다. 직업의 특성상 한시도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행동할 수가 없었다. VIP병동이니까 누가 돌아다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선욱도 병원장 아들이라는 명목으로 복도를 여유롭게 돌아다녔으니까. 다행히 지금은 복도에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본 거라고 변명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적나라했다. 준이 예준의 다리 위에 앉아 있었고, 문 앞에 있었으니 몇 번이고 얼굴에 입을 맞추는 것도 전부 보였을 거다. 앉아 있던 소파하고 문하고 각도가 약간 어긋나 있으니까. 예준은 일단 자신의 어린 연인부터 달래기로 했다.

“준아, 일단 아니라고 해. 아직 준비 안 됐잖아.”

무의식적으로 나온 튀어나온 다정한 목소리가 답지 않게 떨렸다. 아, 살면서 이렇게 긴장해 본 적 없는데. 대학을 수시로 가서 수능은 안 쳐봤지만, 수능 날 아침이 꼭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긴장하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헤어지라고 할까 봐 겁난다기보다, 준이 불안해하니까 긴장이 됐다. 혹시라도 어머니에게 험한 말이라도 듣는다면……. 저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예준은 침착하게 다음 방안을 내놓았다.

“아니면 그냥 내가 장난치려고 억지로 했다고 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좋아 죽는 거 다 보였을 텐데, 그게 어디를 봐서 억지로 한 거예요.”

준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현저하게 날카로웠다. 예준은 그제야 잘못된 말을 꺼냈음을 깨달았다. 안 그래도 지금 제일 불안하고 예민할 텐데, 장난스럽게 들렸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평소 태도가 조금 그런 편이니까.

예준이 아차 싶은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거짓말을 하라는 건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니까. 안 좋은 말 하나 뱉는 것도 한참을 고민하는 애한테, 이 여유 없는 상황을 일단 받아들이고 이해를 구하자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준은 곧장 사과를 하려고 했다. 준이 먼저 선수를 쳐서 입을 열지만 않았어도, 이미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도 남았을 거다.

“왜 아니라고 해요? 맞는데. 내가 형 좋아하고, 형도 나 좋아하잖아요. 엄마한테 싹싹 비는 한이 있어도 거짓말이나 변명은 안 할 거예요. 형이랑 내 관계 부정하고 싶지 않아요.”

상상은 많이 했다. 언젠가 예준의 손을 붙잡고 어머니에게 말하는 장면을. 셋이 한 가족처럼 맛있는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과일을 깎아 먹으면서, 잔뜩 행복에 취해 있는 상태로,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한 번쯤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생겼으니까 엄마는 이제 안심해도 된다고. 그러면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해주는, 그런 대화를 나눠 보는 게 오랜 소원이었다. 물론 그 수많은 상상 속에 이렇게 갑작스러운 상황은 단 한 장면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을 예준과의 관계를 부정하면서 타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머니에게 들킨 것보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예준이 거짓말을 하라고 말한 게 더 속상했다. 

“부끄러운 일 아니잖아요. 안 될 일도 아니고요.”

예준이 눈을 깜빡이며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바라봤다. 꼭 쥐고 있는 두 손은 벌벌 떨리고, 눈가 주변까지 잘게 경련하고 있는데도 표정 하나만은 단호했다. 그 눈과 마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예준은 세상 그 무엇도 이겨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를 얻었다.

준은 언제나 그랬다. 한없이 여리고 겁이 많아 보이다가도, 중요한 순간에는 절대 뒤로 가지 않고 손을 잡아 왔다. 예준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래서 내가 너를 사랑하지.

그때 안쪽에서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곧바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준이만 들어와 봐.”

“형.”

“앉아 있어.”

예준이 옷자락을 붙잡은 준의 손을 살짝 떼어냈다.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가득했다. 설마하니 예준만 따로 부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모양이었다.

“형, 혼나도 같이 가야죠…… 나도 할 말 있어요.”

“지금은 나만 부르셨잖아. 기다리고 있어.”

준의 어깨를 살짝 눌러 의자에 편하게 기대게 한 예준이 혼자 병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준의 어머니는 침대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는 많이 건강해졌지만 여전히 여윈 몸이었다. 

예준이 스스로의 몸을 내려다봤다. 이날을 위해서 평소에 열심히 정장 입고 다녔나 보다. 그저 반쯤 습관이 된 패션 취향일 뿐이지만 예준은 오늘따라 아버지에게 고마워졌다. 

네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누구의 자식인지, 언제나 옷을 보면서 상기시켜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교육 받은 덕이었다. 그냥 후줄근한 티셔츠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다녔으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그림이었다.

준의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준이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닫고 한 발자국 더 안으로 들어왔다.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는 병실은 공기도, 온도도 최적의 조건에 춰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예준은 호흡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숨을 한 번 작게 내뱉은 예준이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입으로는 백 번도 더 꿇어봤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릎 꿇기란 자존심 높은 예준에게 쉬운 행동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빳빳하게 선 상태로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순진한 아들 꼬드겼다고 해도 할 말 없지. 처음 시작한 그때, 예준은 어른이었고 준은 아직 어렸으니까. 같은 인생을 세 번째 살고 있었던 만큼 자신이 조금 더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하는 게 맞았다. 때리면 맞고, 욕을 하면 듣자. 그렇게 결심했다.

“저.”

막 뭐라도 말을 시작해 보려는 찰나였다. 예준의 무릎이 바닥에 닿는 걸 본 어머니가 깜짝 놀라 황급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단번에 걸렸다. 

“무릎을 왜 꿇니, 얼른 일어나! 어서!”

어머니가 예준의 팔을 붙잡아 위로 잡아당겼다. 혹시나 이러다 어머니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예준이 급하게 스스로 일어났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무릎을 왜 꿇어. 얼른 이리 와서 앉아.”

준의 성격은 어머니를 쏙 빼닮은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을 배려하는 걸 보니. 옷자락이 붙잡힌 예준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머니에게 끌려갔다. 예준을 병실 안 소파에 앉힌 어머니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무릎 막 꿇고 그러는 거 아니야! 깜짝 놀랐네.”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따뜻한 목소리에 예준이 어머니와 천천히 눈을 맞췄다. 마주 본 얼굴에서는 혐오감이라는 걸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몰래 봐서 내가 미안하지……. 놀라기도 했고, 준이랑 눈이 마주쳐서 당황했거든.”

“아……. 네.”

“사실 혹시나, 하고 있었어. 그래도 엄마인데 아들을 모르겠어. 좋아 죽겠다는 게 얼굴에 다 써 있는데.”

열 달을 배 아파 낳은 소중한 자식이다. 연기하는 얼굴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열 몇 살짜리가 제아무리 환하게 웃어봤자 부모의 눈에는 다 보였다. 억지로 웃는구나. 별로 기쁘지 않구나. 입꼬리의 미세한 떨림, 약간 올라간 목소리, 그런 게 전부 다 느껴졌다. 보고 있으면 속상해서 눈물이 날 만큼.

분명히 그랬는데, 최근 준의 얼굴에는 억지로 웃는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설마 했다. 상대가 여자였다면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결론을 내렸겠지만, 예준은 평균보다 큰 편인 준보다 더 큰 건장한 남자였으니까. 작은 의심은 점점 커져서, 반쯤 확신을 가진 채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어쩌면 예준을 따라 나가, 휴게실 문 앞에 섰을 때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아직까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관계라면 앞에 서서 방패가 되어 주기에도 모자랄 시간에, 질책하고 따지고 들 시간이 어디에 있을까.

“사실 바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지만……. 아들이 걸어가기로 한 길인데, 엄마가 내친다는 게 말도 안 되지.”

방금 병실에서 혼자 가만히 생각하는 동안 가장 슬펐던 건 따로 있었다. 분명 몇 년 전부터 만나고 있던 사이였을 텐데,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 무섭고 두려웠으니 그랬겠지. 믿음직한 부모가 아니었던 것 같아 속상했고, 그뿐이었다.

“살면서 좋은 엄마였던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무슨 자격으로 아들이 행복하다는데 그걸 막겠어.”

“…….”

“십몇 년을 자기 인생 없이 살았어. 제대로 된 용돈 한 번 줘본 적도 없는데, 어느 순간 나는 여기 누워 있고 애는 스스로 돈을 벌고 있더라고.”

“…….”

“그냥, 항상 그런 게 걱정이었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무시당하면 어떡하나. 떳떳하게 내세울 만한 배경도 없는데, 어른이 되고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면 어떡하나. 미래에 먹고살 만한 직업은 가지고 있을까…….”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던 어머니가 예준과 눈을 맞췄다. 예준은 한마디 말없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근데 준이는 내 걱정보다 한 발자국 앞에 있더라고. 자기는 공부를 못 하니까 평생 몸 쓰는 거라도 하겠다던 애가 어디 출연 제의를 받았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 티비에 나오더라. 같이 하는 형들도 너무 좋고 재밌대. 처음으로 열심히 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더라. 그 말이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말을 하다 보니 정말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들 애인 앞에서 우는 건 주책이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른 어머니가, 독한 치료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아줌마가 앞에 세워 놓고 너무 하고 싶은 얘기만 한 것 같네.”

“아닙니다.”

“이리와 봐.”

어머니가 상냥한 목소리로 예준을 불렀다. 자리에서 일어난 예준이 한 걸음 걸어 바로 앞에 얌전히 섰다. 어머니가 넓은 어깨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한껏 벌린 팔로 단단한 몸을 쓸어내린 어머니가 웃었다.

“불쌍히 여기라고 한 얘기는 아니야. 알지?”

“네.”

고개를 끄덕인 예준이 손을 들어 올려 어머니의 몸을 약하게 끌어안았다. 

“제가 준이한테 잘 하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잘 해 주고 있던데, 뭘 더.”

“어머니가 안심하고 맡기실 수 있을 만큼이요.”

예준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준이 낳아주셔서 감사하고, 평생 사랑해 줄 자신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 하지만 생각만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한 번도 생각을 입 밖으로 내보지 못한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못다 한 말들은 그냥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했다. 시간은 많으니까.

“아줌마가 덕분에…….”

“아니요.”

예준이 살짝 웃으며 어머니의 양손을 붙잡았다. 커다란 손안에 마르고 거친 손이 전부 들어왔다.

“아줌마 말고 어머니요.”

“…….”

어머니의 입술 위로 옅은 웃음이 내려앉았다. 

“어머니.”

“그래.”

“오래 건강하세요.”

“그래야지. 오래오래 살아서 봐야지. 우리 아들 둘, 어떻게 사는지.”

어머니가 아무렇지 않게 예준을 아들이라고 칭했다. 그 호칭이 나쁘지 않았다. 병실 안의 공기는 아까와 똑같은데도 예준은 괜히 나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예준아.”

“네.”

“우리 아들 혼자 외롭겠다. 얼른 들어오라고 해.”

고개를 끄덕인 예준이 병실 문을 열고 나왔다. 아까 준이 앉아 있던 의자는 텅 비어 있었다. 고개를 돌린 예준이 어렵지 않게 사람 형체를 발견했다. 그 길로 복도를 따라 쭉 걸어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준을 일으켰다.

“왜 여기 앉아 있어. 차갑다.”

“형, 얘기 다 했어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 준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물었다. 그래도 눈물 자국이 없는 걸로 봐서는 아직 운 것 같지는 않았다. 주변을 살핀 예준이 이마에 짧게 뽀뽀했다.

“안 울고 잘 기다렸네.”

“아니, 이런 중요한 때에 어떻게 울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됐냐고요.”

“들어가서 직접 듣던지.”

준을 데리고 병실로 다시 들어온 예준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준이 쭈뼛쭈뼛 앞으로 걸어왔다. 잔뜩 움츠러든 아들을 보고 어머니가 말했다.

“결혼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 그렇지?”

“엄마.”

“마음이 떠나면 다 도망가는걸.”

단 두 마디뿐이었지만 눈물을 흘리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준이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목이 아팠다. 이미 이별을 한 번 겪은 어머니의 말은, 수많은 걱정을 단번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엄마는 우리 아들이 좋은 사람 만났으면 그걸로 됐어. 그게 남자든 여자든 뭐가 중요해.”

“엄마…….”

“그리고 예준이라 더 안심이네.”

예준은 지난 몇 년간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준과 함께 병실을 찾았다. 해가 져서 어두운 시간에도, 눈이나 비가 오는 날에도. 언제라도 준이 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얌전히 씻고 옷을 입었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어머니와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준의 옆에 묵묵히 서서 냉장고에 음료수를 채워 넣거나, 병실 창가에 놓인 꽃병에 물을 주거나 했다. 큰 키 탓에, 무릎을 살짝 굽히고 창문가에 놓인 화분을 들여다보는 뒷모습이 제일 기억에 많이 남았다. 직접 눈으로 봐온 그 시간들이 예준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줬다.

긴장감이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풀렸다. 어머니는 바빠서 데이트는 언제 하는지, 만난 지는 얼마나 됐는지 같은 걸 물었고, 예준은 아직까지 눈물을 그치지 못한 준을 품에 안고 달래면서 착실히 대답했다. 

“준이가 속 썩일 때는 없고?”

“엄청 많죠. 어머니가 혼내주세요.”

얌전히 안겨 있던 준이 어이없다는 듯 예준을 쳐다봤다. 제일 속 썩이는 사람이 누군데. 게임 중독에, 방도 잘 어지르고, 두 끼 거르고 한 끼에 5인분 먹는 건강하지 못한 생활 패턴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예준이 고개를 살짝 숙여 준과 눈을 맞췄다. 빨갛게 부은 눈으로 노려봐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대로 입술에 짧게 뽀뽀한 예준이 다시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렸다.

“아…….”

“예준이 너 약간 그런 타입이구나. 너무 자연스러워서 뭐가 지나갔는지도 몰랐네.”

약간 놀림조의 말에 예준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 잠깐 사이에 얼굴이 약간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잠시 쑥스러워하던 예준은, 준이 놀리기도 전에 다시 평소의 뻔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화려한 입담으로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예준은 평소 성격대로 금방 이 분위기와 관계에 적응을 끝냈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상견례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예준이 웃으며 농담을 했다.

“나중에 결혼할 때도 오셔야죠.”

“어디서 하려고?”

“어머니 가보고 싶으신 나라에서요.”

완전히 풀린 분위기로, 늦은 저녁까지 대화는 계속됐다. 비록 자극적인 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병원 밥이지만, 준의 소원대로 어머니까지 함께 셋이 저녁도 먹었다. 어머니는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저녁이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엄마 내일 또 올까?”

“운전은 예준이가 하는데 왜 나한테 물어.”

“그러네. 형, 내일 또 와도 돼요?”

“그래. 내일은 너 지금까지 사고 친 거 정리해서 말씀드려야겠다.”

“아하하하. 그래, 와서 많이 해. 잘 들어가.”

어머니의 배웅을 받고 병실에서 나온 준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렇다고 실실 웃고 있는 건 또 아니었다. 생각이 많은지,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한마디 말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괜히 말을 걸고 싶지는 않아 예준 역시 침묵을 지켰다.

차에 타서 야무지게 안전벨트를 맨 준이 몸을 뒤로 기댔다. 피곤한가. 자려나. 예준이 시동을 걸면서 가만히 지켜보는데, 준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형. 우리 이제 가족인데 말 놔도 돼요?”

예준은 순간 정말 크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설마 지금까지 저거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반말 따위야 백 번을 해도 좋지만, 순순히 그러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랑 나랑 몇 살 차이인데 말을 놓겠다는 거야, 말이 돼?”

“가족이잖아요.”

“가족이면 형이고 동생이고 없어?”

“형 나랑 결혼한다면서요. 그럼 반말 정도는 할 수 있게 해 줘야죠.”

아, 저걸 또 기억하고 있네. 예준이 웃으며 꽂아 놓은 차 키를 툭툭 두드렸다. 이걸 뽑아, 말아. 

“말 놓게 해 주면 결혼해 줄 거야?”

“그건 무슨 이상한 질문이에요……. 언제요?”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형은 맨날 그렇게 여유롭더라.”

“뭐야, 벌써 놓은 거야?”

준비도 없이 바로 툭 놓네. 하긴, 예전에 술 먹고 욕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오래전부터 고대해온 일 같기도 했다. 예준이 핸들에서 한쪽 손을 놓고 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 인생 생각보다 길잖아.”

예준은 모든 끝을 인생의 마지막으로 잡았다. 언젠가 헤어질지 모른다, 마음이 떠날지 모른다 그런 가정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준은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한 그 순간부터 평생 여기에 묶인 거다. 예준에게 놓아준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형 이러고 나중에 헤어지자고 하기만 해봐.”

“하면 어쩔 건데?”

“으음…….”

잠시 고민하는 듯 준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소리 할 일도 없을 텐데 진지하게 고민하는 꼴이 좀 웃겼다. 무슨 대답이 나올지 궁금해서, 예준이 핸들에 손을 얹은 채로 준을 빤히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시동이 걸려 있는 차에서 약한 소음과 진동이 느껴졌다.

“우리 엄마가 알았잖아. 그러니까 헤어질 수 있는 기회도 완전 끝난 거야. 몰라. 이제 다른 사람 못 만나, 알아서 해.”

대답을 들은 예준이 차 키를 뽑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옆으로 빼서 제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입을 맞췄다. 어머니 앞에서 했던 것처럼 짧고 가벼운 게 아니었다. 아주 길었고, 또 입 안을 무섭게 짓누르는 입맞춤이었다.

“알았어, 형이 알아서 할게.”

내가 너 아니면 누굴 만나겠어. 같은 시간을 세 번 살아온 15년 동안 너 말고 아무도 없었는데.

오늘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예준에게도 행복한 저녁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열심히 숨을 몰아쉬고 있는 6살 연하의 사랑스러운 애인에게도.

외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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