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빛을 내자, 아래 가득 전시된 반지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뽐내며 반짝였다. 평생을 한 몸처럼 함께할 반지를 고르는 곳이니 분위기도 그에 맞춰 묘하게 엄숙했다.
예쁘게 세공된 반지들을 꼼꼼하게 훑어보는 예준에게 직원의 시선이 닿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반지를 사러 나온 길이라 예준은 그 누구보다 꼼꼼하게 자신을 감췄다. 마스크에, 두꺼운 안경에, 평소라면 입지도 않을 밋밋하고 괴상하게 생긴 옷까지. 가족들 옆을 지나가도 못 알아볼 정도니 거의 변장 수준이었다. 이런 복장으로 찾아온 사람은 처음이라, 직원이 떨떠름한 표정을 겨우 숨겼다.
“일단 이쪽으로 앉으세요.”
반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본 직원이 일단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원하는 디자인이 있는지 물었다. 예준이 곧장 방금 전에 수백 개의 반지를 보며 생각한 것을 내뱉었다.
“일단 화려한 걸로요.”
누가 봐도 저와 맞춘 반지라는 게 티가 나야 뿌듯할 것 같았다. 어차피 손가락에 끼고 다닐 수는 없겠지만 몸에 지니고 다니게 할 수는 있었다. 그러면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저의 것이라는 표식을 보이지 않는 곳에나마 남길 수 있는 거다. 간간이 꺼내 보면서 상기를 좀 시키겠지.
도대체 목줄을 맞추러 온 건지, 반지를 맞추러 온 건지 모를 시커먼 속내로 예준이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바로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간단하게, 또박또박 잘 이야기하는 예준 덕분에 직원은 금방 원하는 스타일을 유추할 수 있었다.
“말씀하신 스타일이랑 유사한 것들 몇 개 가져와 봤어요.”
예준의 의견을 바탕으로 선택된 반지들이 테이블 위에 잔뜩 쌓였다. 한참을 진지한 얼굴로 훑어보던 예준이 하나를 골라 집었다.
“대충 이런 디자인이 좋을 것 같아요.”
“네네. 저희가 직접 공방 운영도 하다 보니까, 세부적으로 원하시는 부분은 커스텀해서 전부 맞춰 드릴 수 있어요.”
자신감 넘치는 직원의 말에 예준이 본격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원래 장신구에 관심이 많은 예준은 이런 쪽으로 아주 세련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자신은 화려한 게 좋지만, 혼자 쓰는 게 아니니까 준도 생각해야 했다. 색을 화사하게 잡고 보석 크기를 조금 줄이는 쪽으로 스스로와 합의를 본 예준이 주문을 끝냈다.
“17호 하나, 18호 하나 맞으시죠.”
“네.”
예비신부 손가락이 굵은 편인가 보네. 직원이 다시 한번 예준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조금도 보이지 않는 꽁꽁 감싼 얼굴에 대한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알아보면 안 되는 사람인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손님의 정체가 아닌 일이었다.
“제작이 조금 걸릴 것 같은데, 혹시 결혼 날짜가 어떻게 되세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서 시간은 넉넉할 것 같아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 예준이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획을 세웠다. 이왕 반지도 주는 거, 평생 옆에 붙어 있으라고 이벤트나 크게 할 생각이었다.
직원은 늦어도 5월 안에는 받아볼 수 있다고 했고, 예준은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급할 건 하나도 없으니 천천히 준비해도 괜찮았다. 서두르다 중요한 일 그르치지 않게 해야지.
직원이 무언가를 작성하는 동안, 예준은 벽에 걸린 다른 물건에 시선을 뺏겼다. 여러 개의 심플한 팔찌들이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옅은 금색의 줄에, 서로 다른 색의 보석이 하나씩 끼워진 걸로 봐서는 대충 탄생석인 것 같았다.
“그것도 보실래요? 탄생석 팔찌라고, 차고 다니면 행운이 들어온다고 해서 선물로 많이 찾으세요.”
예준이 뭘 보고 있었는지 귀신같이 알아차린 직원이 곧장 프로답게 설명을 시작했다. 얘가 2월생이니까 자수정이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결제하는 직원의 손에 팔찌도 함께 들려 있었다.
준이 아무리 정산을 많이 받았어도 돈을 물처럼 쓰면 안 된다고 했지만, 예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걸 사지 않아도 어차피 또 다른 곳에 들어갈 돈인데, 이왕이면 더 느낌 온 쪽에 투자하는 게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첫 방문 하셔서 할인도 들어가거든요.”
“아니요, 원래 가격 그대로 해주세요.”
직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돈 자랑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긴 했지만, 둘밖에 없는 곳에서까지 굳이 돈지랄을? 물음표로 가득한 직원의 얼굴을, 두꺼운 안경테 너머로 힐끔 본 예준이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비싼 걸로 해서 생색내야 되거든요.”
그래야 두 번 할 거 세 번하고, 때려죽여도 안 한다고 한 것도 시키지. 불순한 마인드로 비싼 값을 지불한 예준이 홀가분하게 상담실을 나섰다.
당당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직원이 호들갑스럽게 휴대폰을 들었다. 동료 직원에게 오늘 겪은 신박한 사건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야, 오늘 완전 미친놈 왔어!”
졸지에 미친놈이 된 줄도 모르고, 예준은 건물에서 나와 차분하게 미리 불러 놓은 택시에 탔다. 그리고 은행 앱을 켜서 실시간으로 빠져나간 금액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아직 반지를 받은 것도 아닌데 기분이 하늘 높이 솟았다.
활동 잘만 하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다 있었다. 이야기는 며칠 전, 가상결혼 프로그램에 나온 연예인 둘이 커플링을 맞추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됐다. 두 사람이 실제로 사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처음에는 진짜 신혼부부인 줄 착각했을 정도로 2년째 연애 중인 두 사람보다 더 달달한 모습이었다.
딱히 재밌는 건 아니었는데 남자 배우가 여자 모델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장면은 기억에 남았다. 사방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카페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이벤트를 하는데, 바닷가에 있는 곳이라 그런지 창밖의 풍경이 유독 아름다웠다. 거기에 남자가 피아노 연주까지 잘해서 더 분위기 있었다.
준이 한참 눈을 떼질 못하기에, 예준도 그 옆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쳐다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귄 지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흔한 반지 하나 못 맞췄다는 걸. 휴식기에는 항상 별거 없이 붙어 있기만 하고, 활동만 시작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제대로 스킨십 하기도 힘들었다.
물론 벌써 10년 차를 훌쩍 넘긴 예준은 능숙하게 컨디션을 조절했지만, 준이 워낙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힘들어해서 활동 중에는 하자는 얘기조차 꺼낼 수 없었다. 연애하는 기분이 안 들 테니, 당연히 매일 데이트하는 프로그램 속 가상 커플이 부러울 수밖에.
그렇게 예준은 충동적으로 프러포즈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 방문한 곳은 비싸고 예쁜 만큼 유명하다기에 미리 일주일 전에 예약까지 잡아뒀다.
아이돌 신분으로 예물 파는 곳을 직접 가는 게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인지는 알지만, 눈으로 직접 보고 고르고 싶어서 그냥 무리수를 뒀다. 만약 걸렸다면 커뮤니티 베스트 게시글에 일주일 내내 이름을 올리고도 남았을 위험천만한 짓을, 매니저에게 얘기도 하지 않고 저지른 것이다.
다행히 못 알아본 것 같긴 했다. 답답한 마스크를 아래로 끌어내린 예준이 창밖을 바라봤다.
지금이 4월이니까, 반지 받고 이것저것 준비하려면 6월은 되겠지. 마침 5월과 6월에 걸쳐서 활동을 하니까, 휴식기에 들어갈 때와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벌써부터 좋아할 얼굴이 눈에 선했다.
“터널 들어가니까 창문 잠깐 닫을게요.”
“네.”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바깥의 바람을 만끽하던 예준이 창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떨어뜨렸다. 상상 속의 준은 이미 프러포즈를 받고 감동으로 울먹이고 있었다.
우는 얼굴도 보고 싶고, 웃는 얼굴도 보고 싶고. 상상만 했을 뿐인데 아래가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 * *
눈 깜빡할 사이에 5월이 찾아왔다. 예준이 잡아둔 결전의 날은 7월 2일. 2주년 기념일도 있긴 했지만 예준은 본래 그런 걸 일일이 챙기지 않았다. 귀찮게 누가 그걸 계산한다고. 자신이 고른 날이 곧 기념일이므로 올해의 기념일은 7월 2일이 될 예정이었다.
이것저것 더 준비하려고 애쓰다 보니 생각보다 일정이 조금 늦어졌다. 아버지 비서에게 부탁해서 풀빌라 하나를 통째로 예약해 놨고, 반지도 딱 때맞춰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계획을 떠올리며 설레하기에는 컴백이 한 달도 남지 않아서 한창 바빴다. 촬영이나 녹음은 전부 끝났지만,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고 무엇보다 연습 스케줄이 지옥이었다.
“죽겠네, 진짜.”
벌써 15년 가까이 아이돌 활동을 하고 있는 예준이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을 내뱉었다. 이번 활동 역시 두 번이나 했던 거라 남들보다 수월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격한 안무라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 30년도 안 산 몸인데 뇌가 낡아서 그런가. 두 번까지는 어찌어찌 살았지만, 아무래도 세 번은 정신적으로 무리가 조금 있었다. 만약 준이 없었다면, 반복되는 무료한 일상이 지겨워서라도 이쯤에서 위약금을 물고 탈퇴했을 게 분명했다. 예준은 충분히 쏟아지는 악플을 전부 무시하고도 마이웨이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이제 슬슬 정리하고 가요.”
춤 연습할 때만큼은 실질적 리더나 다름없는 하현이 드디어 집에 가자는 말을 꺼냈다. 예준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왼손으로는 휴대폰을, 오른손으로는 준을 챙겼다. 양손이 무거운 게 만족스러웠다.
몇 달 전에 옮긴 숙소에는 방이 많았다. 드디어 거실에서 나와 자신만의 방이 생긴 것이다. 장점도 매우 많았다. 방음도 잘돼서 굳이 호텔을 가지 않아도 되고, 준의 방이 바로 옆이라 밤에 몰래 옮겨도 모르고. 게다가 2층짜리라 다른 멤버들 방이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방에 딸린 욕실에서 씻은 뒤, 느긋하게 젖은 머리까지 말리고 나온 예준이 침대에 누웠다. 평소 같으면 습관처럼 게임을 하다가 잘 텐데 오늘은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베개를 두 개 겹쳐 베고 편안한 숙면에 빠져들던 찰나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
예준이 이 시간에 벌써 자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준이 주춤했다. 방 안으로 반쯤 들여놓은 발이 움찔거렸다. 외마디 소리만 듣고도 준임을 알아챈 예준이 오른쪽 눈만 슬쩍 떴다.
“아직 안 자.”
조용히 문을 닫고 발을 물리려던 준이 안심한 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준이, 어느새 두 눈을 멀쩡히 뜨고 몸을 반쯤 일으킨 예준에게 우물쭈물 물었다.
“형, 혹시 7일에 시간 있어요?”
긴장이라도 되는지, 옷자락을 꾹 쥐고 있는 양손이 이상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예준이 천천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방금 막 씻고 나온 만큼 편안한 차림이었다. 심지어 줄곧 누워 있었으니 머리도 부스스할 텐데. 반쯤 일으켰던 몸을 똑바로 세운 예준이 물었다.
“나 지금 무섭냐?”
“아니요?”
거울을 한 번 보고 와야 하나 싶었는데, 준이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왜 묻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게 아닌가 싶어 예준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7일에 왜?”
“별일 없죠? 그날 연습도 없으니까.”
컴백 준비 기간에는 언제나 바쁘지만, 사람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면 하루 정도는 쉬어가는 날도 필요했다. 그리고 그날이 바로 7일이었다. 당연히 하루 종일 집에서 쉴 생각이었으니 일은 없지만…….
“설마 나가자고?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날에?”
“나가자는 거 맞는데요.”
“야, 안 피곤하냐?”
예준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몇 살 더 어리다고 체력이 남아도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남들보다 부족한 만큼 연습량이 더 많은 준이 쉬는 날 나가 놀 만큼 기운이 넘칠 리가 없었다.
“컴백하면 절대 못 쉬어. 너도 피곤할 거 아니야.”
“피곤한 건 맞는데……. 그냥 같이 나가주면 안 돼요?”
우물쭈물, 도통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야기하는 준을 보며 예준이 눈을 좁혔다. 얘가 이런 식으로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평소 병원에 가자고 할 때도,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할 때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던 걸 생각해 보면 뭔가 특별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알았어. 나가자.”
묘하게 긴장하고 있는 것 같던 준의 표정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하여간 표정 관리 진짜 못한다니까. 하지만 예준은 그냥 순순히 나가줄 사람이 아니었다.
“단 어디를, 왜 가는지 얘기하면.”
“어…….”
그건 좀 곤란하다는 듯 준이 눈을 굴렸다. 어디를 가길래 말을 못 해. 예준이 손을 뻗어 준의 볼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었다.
“나한테 비밀 만들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어차피 형이랑 가는 건데 이게 무슨 비밀이에요!”
“7일까지 내가 모르잖아.”
예준은 언제나 강조했다. 너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일은 없어야지. 답지 않게 단호한 말투라 준은 반박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언제나 할 일을 착실히 보고하는 편이었다.
“형도 나한테 자기 얘기 많이 안 하잖아요!”
“너 내가 뭐 숨기는 거 봤어?”
“형이, 숨기는 거…….”
준이 곰곰이 생각했다. 형이 나한테 숨기는 게 뭐가 있더라? 예준은 상당히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서, 그날 입은 속옷까지 준에게 공유하는 편이었다. 한참 끙끙대며 예준이 자신에게 숨긴 것을 떠올리던 준이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 친구 취준생이라고 거짓말…… 했잖아요.”
“그게 언제 적이야.”
어디 파묻혀 있던 일을 꺼내왔어. 어깨를 으쓱이는 예준의 행동에 결국 할 말이 없어진 준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린 애인 이겨 먹고 좋다고 웃던 예준이 문득 떠오른 기분 나쁜 얼굴에 인상을 찌푸렸다.
“근데 그 새끼 얘기를 왜 또 해? 아직도 기억에서 안 지웠네?”
“그냥 생각나서 얘기한 거예요…….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예준은 병원에서 만났던 선욱의 이야기만 나오면 유독 예민하게 굴었다. 아무래도 여간 안 좋은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친구라는 말을 믿었던 예전의 자신이 신기할 정도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준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안 갈 거예요? 내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할 수 있는 최대로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인 준이 손톱으로 허벅지를 꾹 눌렀다. 준은 이렇게 노리고 하는 애교에 약했다.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게 육안으로 선명히 보였다.
아, 시발. 귀여워서 어떡하지. 예준이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더 이상 물을 전의가 사라졌다. 평소 같으면 어떻게든 원하는 대답을 들었을 텐데, 귀여우니까 한 번 봐주자는 마음이 커졌다.
결국 예준이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몇 시에?”
“어……. 그건 생각해 보고요. 7일에 절대 약속 잡으면 안 돼요.”
눈치 빠른 예준은 어렴풋이 느꼈다. 딱 보니까 뭔가 준비한 것 같은데. 2주년은 아직 조금 남았는데 무슨 날이지. 한참 생각을 하느라 시선이 허공을 떠돌았다. 초점을 잃은 예준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준이 팔을 벌려 넓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몸이 자연스럽게 예준의 다리 위로 올라왔다.
갑작스럽게 밀착해 온 몸에 예준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침대를 짚은 손을 들어 올려 넘어지지 않게 붙잡으려고 했는데, 준이 움직이는 게 먼저였다.
“어쨌든 알겠다고 해 줘서 고마워요. 형 사랑해요!”
준은 순식간에 양쪽 볼에 한 번씩 입술을 꾹꾹 누르고는, 잡을 새도 없이 밖으로 뛰어 나가버렸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예준이 눈을 깜빡이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게 겁도 없이 뽀뽀하고 튀어?
“야, 너 다시 안 들어와?”
방문을 벌컥 연 예준이 준을 불렀지만, 바로 옆방이라 이미 문을 닫고 들어간 상태였다.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예준이 다급하게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덜컥 소리만 날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을 잠가? 이러고 튀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예준이 문을 쿵쿵 두드렸다. 장난은 쳐도 문을 잠그는 건 아니지. 여전히 입술이 다녀간 감각이 남아 있는 볼을 쓰다듬으며 예준이 다시 한번 문고리를 당겼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그 요란한 소리가 1층까지 들리지 않을 리 만무했다. 거실에 있던 하현이 남의 방문을 쾅쾅 두드려대는 소리를 듣고 계단을 올라왔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로 난간에 기대서, 한심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 사랑싸움은 조용히 좀 하세요.”
자신이 시끄러웠던 건 인정하지만, 며칠 전 진짜 사랑싸움을 한 놈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예준이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서, 거실에서 싸우느라 사람 물도 못 마시게 한 건 어디 사는 누구더라.”
“결국은 마셨잖아요.”
단호한 반박에 할 말이 없어졌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예준이 아무렇지 않게 정수기로 걸어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둘의 싸움을 구경한 건 사실이었다. 내 일과 남의 일. 예준은 언제나 두 가지를 매우 뚜렷하게 잘 구분했다.
“형이 좋아죽겠는 건 알겠는데 숙소에서 이렇게 시끄럽게 티 내면 어떡해요. 이러다 휘영이도 알겠어요.”
하현의 말에 예준이 슬쩍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휘영의 방문을 쳐다봤다. 지금쯤 씻고 자고 있을 테니 괜찮겠지만, 하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금 한 명한테 걸린 거로도 이렇게 고통받는데, 나머지 멤버들까지 전부 알게 되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구 지금 자는 중이니까 목소리 키우지 마요. 애 예민한 거 알잖아요.”
예준은 그제야 하현이 친히 2층까지 발걸음 한 이유를 알게 됐다. 예준의 황당하다는 표정을 미소로 받아친 하현이 유유히 계단을 내려갔다.
결국 예준은 얌전히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약 10분 뒤에, 준이 베개를 들고 머쓱한 미소와 함께 찾아왔다.
“형 아까는요…… 부끄러워서 잠근 건데……. 그래도 잠은 같이 잘 거죠?”
방문 앞에 가만히 서서, 베개만 이리저리 괴롭히는 준을 예준이 순식간에 낚아챘다. 그리고 제 발로 찾아온 준은 불행히도 그날 멀쩡히 잠을 잘 수 없었다.
* * *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하지?”
하현의 중얼거림에 찔린 사람이 몸을 흠칫 떨며 반응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집중을 못 하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모르는 척을 포기한 준이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형…….”
“괜찮아, 그래도 숙지는 다 됐으니까. 어차피 휘영이 없어서 제대로 동선도 안 맞잖아.”
개인 스케줄이 있는 휘영이 빠진 탓에 모인 멤버는 넷뿐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이탈한 예준이 슬쩍 바닥에 먼저 앉았다.
“잠깐 쉬고 가자.”
하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준이 혼자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총총 걸어가는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예준이 생각에 잠겼다.
준은 최근 도통 연습에 집중을 못 하는 듯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예준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볼펜을 계속 눌렀다. 딸각거리는 소리가 부산스럽게 연습실을 울렸다.
“형. 그거 그만하면 안 돼요?”
“뭐?”
예준이 볼펜을 딸각거리며 고개를 들어 물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입 주변을 닦아내며 하현이 한숨을 쉬었다. 뭔지 알면서 저러는 건가. 친절하게 손을 가리키고 나서야 예준이 손에서 볼펜을 놓았다.
“형은 또 왜 그래요?”
“야. 네 눈에도 쟤 뭐 문제 있어 보이지?”
“준이요?”
“어.”
잠깐 생각하던 하현이 고개를 살짝 낮췄다. 그리고 예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보통 애인이 제일 잘 알지 않아요?”
장난스러운 표정과 짓궂은 물음에, 예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맞다, 여전히 놀림 당하는 처지였지. 딱 한 대만 쥐어박을까. 고민하는 예준의 앞으로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무슨 귓속말을 그렇게 재밌게 해?”
“……뭔데?”
“아니, 하현이 형이랑 무슨 말 하냐고.”
그래, 네 애인이랑 귓속말해서 화났다 이거지. 예준이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빼줬다. 그리고 어서 데리고 꺼지라는 의미로 손짓까지 했다. 그 말을 착실하게 받은 지구가 하현을 데리고 예준과 가장 떨어진 곳에 앉았다.
하현과의 짧은, 얻은 것 하나 없는 대화를 끝낸 예준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준은 웬일로 좋아하는 멤버 형들과 멀찍이 떨어진 연습실 구석에 혼자 있었다. 몸을 둥글게 말아 앉은 상태로, 뭔가를 집중해서 보면서.
“야. 뭘 그렇게 보냐?”
“뭐, 뭐예요?”
파드득 놀라며 준이 수첩을 뒤로 숨겼다. 거기에 잔뜩 당황한 표정까지. 매우 수상쩍은 행동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좌우로 휙휙 돌아가는 얼굴을 보며 예준이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 이렇게 대놓고 숨기면 그냥 가주기 싫어지는데.
“줘 봐.”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요.”
어색하게 웃으며 준이 필사적으로 수첩을 사수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팔을, 예준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바라봤다.
유일한 비밀이었던 집안 사정을 알게 된 이후로, 준은 예준에게 비밀을 만든 적이 없었다. 한 번쯤은 믿고 그냥 넘어가 줄까. 휴대폰을 숨기는 것도 아니고……. 일기라도 쓰나.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혼자 일기를 끄적이는 동그란 뒤통수가 절로 상상이 갔다. 씨발, 귀여워. 습관처럼 속으로 욕을 내뱉은 예준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갑작스러운 예준의 행동에 준이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저래……. 때마침 반대편에 있던 하현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연습 계속해요.”
준이 마침 잘됐다는 듯, 수첩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하현에게 뛰어갔다. 그리고는 예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종알종알 떠들기 시작했다.
“근데 형, 이 앞에 와플 가게 생긴 거 봤어요?”
“어디?”
“앞 건물 반대편에요!”
방금 전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은 건지, 와플 생각에 신나서는 목소리 톤이 잔뜩 올라갔다. 쟤는 대체 싫어하는 음식이 뭘까. 좀처럼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앞뒤로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을 보며 예준이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따 쉬는 시간에 와플 먹이러 가야겠네. 원래 컴백 전은 다이어트 기간이라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되지만, 예준은 그런 규칙 따위 사뿐히 무시했다.
거기다 예준이 봐온 준은 아무리 칼로리 높은 음식을 먹어도 살이 잘 오르지 않았다. 한 번쯤은 통통할 볼살을 만져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생긴 건 생긴 거고, 연습은 해야지. 자리 잡아.”
“넵…….”
느릿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소심한 발걸음을 보며 예준이 자기 자리를 찾아 섰다. 귀여우니까 한 번만 더 봐줘야지. 무엇보다 준은 침대 위에서 거짓말을 못하니까,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정 궁금하면 그때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다.
* * *
5월 7일. 이른 아침부터 예준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깨끗하게 씻은 몸 위로 비싼 옷을 걸치고 정성스럽게 머리까지 정돈했다. 어제 저녁에 찾아온 준이 트레이닝 복도 안 되고, 정장도 안 된다고 해서 옷은 그냥 셔츠만 가볍게 입었다. 심플하긴 하지만 당장 손목에 찬 시계 가격만 해도 어마어마한 터라 저렴해 보이진 않았다.
색깔별로 걸린 코트 중에서 뭘 입을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무난한 준의 취향을 고려해 베이지색 코트를 걸쳤을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인기척도 내지 않고, 노크도 하지 않고 불쑥 들어온 준은 이미 준비를 끝마친 채였다.
“형 얼른 나와요!”
“야, 너 오늘 뭘 이렇게 꾸몄어?”
항상 한 몸처럼 따라다니던 편한 옷들은 어디 가고. 딱 맞는 슬랙스에 셔츠는 틀림없이 준의 취향은 아니었다. 생소한 모습에 예준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항상 무난한 디자인의 옷이나, 팬들이 선물로 준 옷들을 조합 따위는 생각도 안 하고 마구 껴입던 준답지 않은 옷차림이었다.
기껏해야 쇼핑이라도 가자는 건가 했더니 뭔가 중요한 곳에 가는 모양이었다. 이미 충분히 차려 입었지만, 괜한 기분이 들어 예준이 코트를 검은색으로 바꿨다.
근데 저 옷은 본 적이 없는데. 준에 대한 것이라면 옷 정도야 가뿐히 꿰고 있는 예준이 전신을 한 번 더 훑었다.
“그건 어디서 산 옷인데.”
“비밀이에요.”
“뭐?”
이게 무슨 비밀이야. 예준이 오른쪽 눈을 살짝 찌푸렸다.
며칠 전, 계획대로 한창 섹스를 하던 중에 수첩에 대해 물은 예준은 대답을 거절당했다. 말도 똑바로 못하면서, 절대 못 알려준다고 도리질을 친 탓에 서운함을 잔뜩 드러낸 예준을 달래기 위해 준은 약속 하나를 했다.
수첩에 대해서 더 이상 캐묻지 않는 대신 비밀을 만들지 않을 것. 애인 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냐는 예준의 의견에 따라, 그 약속 이후 한동안 꼬박꼬박 일상을 보고하던 준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 수첩은 그렇다고 쳐도 이건 진짜 별것도 아니잖아.
“야, 너랑 나 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어. 약속했잖아.”
“솔직히 옷 산 곳이 왜 궁금해요. 중요한 것도 아닌데.”
“안 중요하다고?”
저가 모르는 곳을 가고, 모르는 옷을 사고, 그걸 버젓이 입고 다니는데 중요한 게 아니라니.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예준이 결국 발걸음을 멈췄다.
“말해줘야 움직일 마음이 생길 것 같은데.”
“아…… 진짜. 알았어요.”
“셔츠 어디서 샀어?”
“이거는 인터넷으로 샀어요.”
“어디 사이트?”
“…….”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준이 입을 벙긋거렸다. 예준이 뭐 문제 있냐는 듯 웃었다. 결국 휴대폰으로 결제 내역까지 보여주고 나서야 예준이 다시 발을 옮겼다.
방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서, 계단까지 순조롭게 내려갔는데, 현관문 앞에서 또 다시 걸음을 멈춰 섰다. 준이 휙 고개를 돌려 외쳤다.
“아, 또 뭔데요!”
“바지는 어디서 샀는데?”
“와, 형 진짜……. 양말도 어디서 샀는지 알려줘요?”
“응.”
결국 그 자리에서 몸에 걸친 옷들의 출처를 전부 다 밝힌 준이, 지친 얼굴로 예준을 끌고 숙소를 나왔다. 그리고 숙소 바로 앞에는 택시가 서 있었다. 척 봐도 미리 불러둔 택시였다.
“택시 미리 불러놨어?”
“아까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단 말이에요. 근데 형이 자꾸 쓸데없는 거 물어봐서……. 늦어서 죄송합니다.”
금방이라도 다리를 걷어찰 기세로 발을 들어 올렸다가, 사뿐히 내린 준이 곧장 택시 기사에게 사과했다.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더니, 어서 타라고 예준을 택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대체 어디를 가는데?”
“그냥 궁금해하지 말고 협조 좀 해줘요.”
예준이 고개를 끄덕이고 창밖을 바라봤다. 궁금해하지 말라고 정말 궁금증을 내려놓을 리가 없었다. 도로 표지판을 보고 예준이 대충 도착지 예측을 끝냈다. 한강 가는 거네. 예상대로 곧 시야에 한강이 들어왔다.
하지만 택시는 예준이 예상한 장소에 멈춰 서지 않았다. 돗자리 깔고, 같이 라면이라도 끓여 먹자는 건 줄 알았는데…….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을 지나친 택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멈췄다.
“감사합니다.”
밝은 목소리로 택시 기사에게 인사한 준이 먼저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가만히 앉아 있는 예준의 팔을 잡아당겨 택시 밖으로 끄집어냈다.
“야, 여기 어디야?”
예준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건물이 높아서 꼭대기 층을 보려면 고개를 조금 많이 꺾어야 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장소였다. 여러 동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신축 아파트 단지를 한 번 둘러본 예준이 다시 물었다.
“야, 여기 어딘데?”
“일단 올라가요.”
아니, 대체 뭔데. 황당한 표정의 예준을 붙잡고 준이 1층 상가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아파트 주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그 짧은 순간, 예준은 머릿속으로 준의 인맥을 전부 그려냈다.
그 이번에 친해진 신인 아이돌 그룹 멤버인가? 아니면 다른 선배? 고등학교 친구? 그럴 리가 없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완전히 연락이 끊어진 걸 확인했고, 집까지 들락날락할 사이라면 이미 누구인지, 어디 사는 인간인지 예준이 전부 알고 있어야 했다.
“누구 집이야?”
예준이 망설임 없이 물었다. 하지만 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체 누구를 소개시켜 주려고, 저렇게 예쁘게 입고 와서, 7일에 시간 되냐고 미리 약속까지 잡아놓고…….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예준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21층에서 멈췄다. 준이 예준의 손목을 붙잡고 내렸다.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표정을 하고도 순순히 끌려간 예준이 눈앞의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2103호. 예준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관심도 없는 듯, 준이 뻣뻣하게 팔을 움직여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어어. 비밀번호?
“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예준이 준의 팔을 탁 잡았을 때,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 안쪽으로 넓은 창이 보였다. 탁 트인 시야로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넓은 평수는 아니지만 이 뷰 하나만으로 값어치를 하는 집이었다.
“음……. 형. 오글거릴 수도 있는데 그냥 들어요. 말하는 내가 더 부끄러우니까.”
뭐라 말을 할 새도 없이 예준을 질질 끌고 거실 중앙까지 온 준이 목을 다듬었다. 어제 긴장해서 잠을 잘 못 잤더니 목 상태가 영 별로라, 말하다가 삑사리가 나진 않을지 걱정이 됐다.
“우리 연애한 지 벌써 2년째잖아요.”
정확히 2주년은 아니지만 그 언저리이긴 했다. 예준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병원도 매번 같이 가주고, 연습 잘 안 될 때 도와주고…… 우울하면 와서 달래주고. 솔직히 형이랑 연애하고 나서 우울했던 적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아래쪽으로 내린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손가락을 접어 나가는 동작이 묘하게 다급했다.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게 느껴졌다.
“평소에 말은 안 해도 형한테 고마운 거 진짜 많아요. 형이 안 그런 척하면서도 계속 신경 써주는 것도, 나 위해서 이것저것 해 주는 것도 다 알고요.”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목소리에서, 발음에 잔뜩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예준은 본능적으로 지금 이 순간이 서로에게 매우 중요하고, 소중하게 기억될 것이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삐딱하게 서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데뷔한 이후로 중요한 게 진짜 많이 생겼어요. 우리 그룹도 그렇고, 지금 위치도,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다 소중해서, 포기 못 할 것 같아서……. 형은 전에 나만 있으면 된다고 말해 줬는데, 나 혼자 욕심부리는 것 같은 거예요. 그날 자려고 누웠는데, 형한테 나도 그렇다고 대답 못 해 준 게 후회되더라고요. 그래서 꼭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형이 제일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정말로요.”
준은 애교가 많은 편이고, 표현도 잘 하는 편에 속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웬만한 일로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는 예준이 몸을 움찔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빠르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 불행은 절대로 나눠서 반이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형은 반을 나눠 든 게 아니라 통째로 가져갔어요. 그러니까…… 형 덕분에 제대로 나를 찾은 거라고 생각해요.”
준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예준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저는 예준 덕분에 많이 변했다. 울 거면 똑바로 울라고 말해 준 사람도, 웃기 싫으면 웃지 말라고 말해 준 사람도, 인생을 전부 뒤져봐도 예준이 유일했다. 그러니까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다른 그 누가 떠나더라도, 예준만 있다면 괜찮을 것 같은, 그 정도의 감정이었다.
예준은 아무 생각 없이 아래로 늘어뜨려 놨던 왼손이 잡히는 걸 느꼈다. 곧 네 번째 손가락에 무언가가 끼워졌다. 꼭 맞는, 그러니까…… 예준의 취향을 딱 빼 박은 반지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마자, 환하게 웃는 사랑스러운 얼굴과 마주했다.
“그러니까 나랑 평생 같이 있어 줘야 해요.”
예준은 깊이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형체가 있는 것들은 눈에 담기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는 반지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중앙에 박힌 보석이 유독 시선을 끄는 반지. 화려하지만 촌스럽지 않고 정교하게 세공된 반지는 꽤 솜씨 좋은 사람이 만든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바라보던 예준이, 한참 내뱉지 못해 답답해진 숨을 겨우 한 번 내쉬었다.
비싼 반지는 여럿 가지고 있었다. 장신구를 좋아하는 편이라 자주 과소비를 하니까. 끼지도 않을 거면서 눈에 띌 때마다 사는 게 습관이라, 본가에 가면 방 여기저기에 반지며 귀걸이며 하는 것들이 굴러다닐 정도였다.
“손에 완전 딱 맞네요.”
반지가 끼워진 예준의 손을 매만지며 준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생각보다 더 잘 어울리네. 워낙 미적 감각이 없다 보니 거의 몇 시간을 고민한 디자인이었다. 직원이 답답했는지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에, 다행히 완성품은 잘 나온 것 같았다.
준이 뿌듯해하는 동안, 예준은 심장이 너무 뛰어서 곧 죽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디 이름 모를 바다의 깊숙한 곳까지 가라앉은 것 같았다. 막 100m를 질주해서 달려온 것처럼 호흡이 불안정하고 얼굴이 뜨거웠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과한 기분이었다.
“야, 너…….”
예준이 힘겹게 입을 뗐다.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야, 하고 시작된 말은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밑으로 툭 떨어졌다.
언제나 당당한 예준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목이 메는 순간은,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디자인 괜찮죠? 형 취향 생각해서 열심히 고른 건데.”
서바이벌에서 5위 안에 들어 데뷔했을 때도, 첫 신인상을 받았을 때도, 첫 대상을 받았을 때도 예준은 언제나 당당했다. 마치 이 자리는, 막 건네받은 화려한 트로피는 원래 당연히 내 것이었다는 듯이. 팬들이 최소 인생 2회차일 거라고 입 모아 이야기할 정도로. 그런데 그런 예준이.
“형?”
울기 직전이었다. 예준의 눈이 물기에 젖은 모습은 생전 처음 보는 거라 준은 정말로 당황했다. 감동 받았으면 하고 준비한 건 맞지만 솔직히 기대도 안 했다. 웃으면서 고맙다고 머리나 쓰다듬어 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언제 다 준비했냐?”
평소처럼 툭 뱉는 말투는 변함이 없는데, 잔뜩 억눌린 목소리는 낯선 사람의 것처럼 어색했다. 이런 모습을 평소에 본 적이 있었어야 말이지. 갈 곳을 잃은 준의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예준이 반지가 끼워진 손을 다시 한번 내려다봤다. 그리고 손을 뻗어 준의 몸을 끌어안았다.
“내가 잘할게. 헤어지니 뭐니 그딴 소리 안 나오게. 나 말고 평생 같이 있을 사람이 누가 있어.”
준이 잠시 귀를 의심했다. 설마 예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카메라를 켜 놨어야 하는데! 당황한 와중에도 준은 이 순간을 영상으로 남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알았어요, 형. 잠시만, 진정 좀…….”
“가만히 있어 봐.”
이 주책바가지 형 대체 뭐 하는 건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던 준이, 약간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를 듣고 다급히 예준의 등을 두드렸다. 예준은 곧 서른이지만, 그보다 훨씬 어릴 때도 눈물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체 안은 건지, 안긴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준에게 기댄 예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두 걸음 정도 떨어져서 급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 진정이 되니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씨발, 꿈이겠지? 하지만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그대로였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던 건 언제냐는 듯, 예준이 반지가 끼워진 손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본인은 전혀 모르는 것 같지만 반지를 살펴보는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표정을 확인한 준이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아무래도 예준의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말도 잘한 것 같고, 반지도 줬으니까 이제 조금 있다가 예약해 둔 식당에 가서……. 앞으로 남은 일정을 천천히 생각하는데, 언제 울기 직전이었냐는 듯 멀쩡해진 예준이 물었다.
“그래서 여기는 누구 집인데? 누구한테 빌렸어?”
그 새를 못 참고 던진 질문은 준이 듣기에 굉장히 황당했다. 아니, 척 보면 모르나? 생활감이 하나도 없는데 이게 누구 사는 집 같나? 하지만 질투에 눈이 먼 예준에게 집안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모르는 타인의 공간에서 준이 이런 이벤트를 기획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었다.
“샀어요.”
“……샀다고?”
“네. 우리 집이에요.”
예준이 눈을 깜빡였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반지도 모자라서 집까지? 두 번 회귀하면서 세상에는 깜짝 놀랄 만한 일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깨달은 지 꽤 됐는데, 지금 보니 준과 관련된 일은 예외로 둬야 할 것 같았다.
예준이 바깥이 훤히 보이는 커다란 창을 바라봤다. 창밖으로 한강이 바로 보였다. 그거다. 지금은 연락을 끊은 래퍼 형이, 저번에 행사 뛰면서 샀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던 한강뷰 아파트.
“그냥 일단 사두기만 한 거예요. 태어나서 이런 금액 써 본 적이 없어서 진짜 손이 다 벌벌 떨렸어요.”
이 위치면 아무리 제일 좁은 평수라지만 3, 4억으로는 턱도 없었을 텐데. 활동하면서 정산 받은 금액이 어마어마하긴 하지만, 평소에 돈 쓰는 곳이라고는 음식점뿐인 준이 집을 샀다는 건 정말이지 엄청난 일이었다.
예준이 창 바로 앞에 섰다. 햇빛도 잘 들고, 재산으로 두기에도 괜찮아 보였다. 다른 연예인들도 돈 모으면 바로 건물부터 매매하니까. 하지만 저 없이도 이렇게 혼자 할 수 있다는 게 뿌듯하면서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말도 안 하고 혼자 몰래 독립 준비를 하는 걸 우연히 알게 된 기분이었다.
“여긴 왜 산 건데?”
언제까지고 숙소에서 저와 함께 살 것만 같았던 애가, 말도 안 하고 집을 홀랑 사버렸으니 불안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연차 더 쌓이면 나가서 살겠다고 산 건 아니겠지.
“이거 준비하려고 산 건데요?”
“이거 때문에?”
“네.”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머리에, 염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밝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형은 나중에 이런 집에서 살 것 같아서요. 옷도 엄청 차려입고. 그래서 나도 뒤처지면 안 될 것 같아서.”
그제야 준이 오늘따라 신경 써서 차려입은 이유를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와, 진짜. 예준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눈을 감았다. 어두워진 시야 안으로 창을 넘어 들어온 햇빛이 밀려들어 왔다.
이제는 어엿한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스러워졌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연말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는데도, 준이 나이를 먹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주문 제작을 맡겨둔 반지가 떠올라 또다시 목이 뜨끈해졌다. 어쩌면 이렇게 같은 타이밍에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준비해 둔 프러포즈를 하기도 전에 준이 이렇게 먼저 선수를 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고맙다.”
예준이 품 안 가득 아직 어린 애인을 끌어안았다. 준비한 반지도 귀엽고, 자신 때문에 나름 신경 써서 입었다는 옷도 귀여웠다. 준은 벌써 40년 가까이 살아온 인생에서 예준이 뒤늦게 깨달은, 가장 큰 행복이자 낙이었다.
“근데 왜 하필 지금이야. 한창 바쁜데.”
“컴백하면 이렇게 시간 못 내잖아요.”
“끝나고 하면 되지.”
“그건 그런데 빨리하고 싶어서…….”
준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빨리하고 싶다고? 예준이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기다렸다가 여유롭게 하고 싶긴 했는데, 기다릴 수가 없는 거예요. 계속 생각나서 연습도 제대로 안 되고, 긴장되고…….”
“안무 연습?”
“아니요, 그거 말고 형한테 할 말 연습했는데…….”
“연습을 했다고?”
“네.”
준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끝까지 다 잠갔던 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 내린 준이 말을 이었다.
“긴장해서 횡설수설할 것 같아서……. 안 그래도 말 잘 못 하는데. 수첩에 적어놓고 계속 외웠어요. 그것도 모르고 형이 계속 보여 달라고 했잖아요!”
솔직한 말에 예준이 서서히 입을 벌렸다. 나이 먹고 이런, 생에 첫 고백을 받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게 될 줄은. 예준을 아는 사람이 본다면 몇 년은 놀려먹을 만한 모습이었다.
준은 말을 썩 잘하지 못했다. 특히나 진지한 자리에서는 더욱더. 본인도 그걸 너무나 잘 알아서,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열심히 말을 하다가도 중요한 자리에만 가면 최대한 말을 줄였다.
처음에는 곧잘 하는 듯싶더니, 다양하게 표현을 못 하니까 모든 소감이 똑같아지면서부터 마이크 앞에 잘 서지 않았다. 작년 시상식 때는, 소감 도중에 말실수를 해서 시상식장이 웃음바다가 됐을 정도였다. 그런 애가, 이걸 위해서 따로 연습까지 했다는 말은 예준이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냥 횡설수설 이야기해도, 단어가 다 틀려도, 조사가 맞지 않아도 알아서 잘 들었을 텐데. 안 그래도 바쁜 일정에 이렇게까지 노력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수록곡 가사 외우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이건 또 언제 따로 외워서…….
“그런 거라고 말을 하지.”
“몰래 하는 건데 어떻게 말을 해요.”
“잘 외웠네.”
머리를 부드럽게 한 번 쓰다듬어준 예준이 문득 창에 비친 침대를 발견했다. 아무것도 없는 집 안에 달랑 하나 놓여 있는 침대는, 왜 이제야 발견했지 싶을 정도로 컸다.
“근데 저 침대는 네가 샀어?”
“네.”
아무래도 여전히 답답한지, 단추를 하나 더 푼 준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신혼집에 침대 하나는 있어야죠.”
평온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예준은 아무렇지 않게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여줄 수 없었다.
“지금 그런 말 하는 건 당장 하게 해 준다는 뜻이지?”
“네?”
예준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빳빳한 새 옷을 잡아당겼다. 아니, 아니, 형 잠깐만요. 준이 다급하게 손목을 붙잡아봤지만 이미 의미 부여를 끝낸 예준에게 다른 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준은 무려 2주일 전에 미리 해 둔 식당의 예약을 취소해야 했다. 애인이 직접 고른 침대가 굉장히 푹신하고, 탄력성이 좋다는 걸 밤새 몸으로 느낀 예준은 비밀번호까지 자신의 생일로 바꾸고 나서야 준과 함께 신혼집을 나왔다.
* * *
프러포즈 한 번에 녹초가 된 준은 오전 연습을 나오지 못했다. 조금만 자고 오후에는 꼭 같이 연습하겠다는 준을 두고 가고 싶진 않았지만, 너무나 건강한 예준은 연습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다들 하나같이 뭘 하는지 나오는 게 느렸다. 먼저 매니저의 차에 탑승한 예준이 또다시 습관처럼 반지를 쳐다봤다. 그리고 앞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는 매니저를 툭툭 쳐서 물었다.
“형. 이거 보여요?”
“뭔데?”
커플링이라기에는 조금 눈에 띄게 화려해서, 예준의 매니저는 당연히 그냥 액세서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의 없는 대답을 돌려줬다.
“괜찮네.”
“그게 끝이에요?”
“뭐가 더 필요해?”
“형 반지 보는 눈이 영 없네요.”
매니저가 어이없다는 듯 예준을 쳐다봤다. 그래, 너 잘났다. 1년에 몇억씩 정산 받는 연예인하고, 딱 먹고 살 만큼 월급만 받는 매니저 안목이 똑같은 게 이상하지.
싸늘하게 식은 눈빛에도 예준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매니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별로 관심도 없고 상관도 없었다. 다만 자랑만은 하고 싶었다.
“예쁘지 않아요?”
“예쁘네. 디자인도 독특하고.”
“그러니까요.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
아무래도 최근 예준의 상태가 이상하다. 매니저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원래도 혼자 튀는 타입이긴 했지만 최근에는 좀 실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너 요즘 뭐 좋은 일 있냐?”
“약간요? 형. 끝나고 사장님 한 번 뵙고 갈게요.”
예준이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말했다. 아니, 실없다는 건 취소. 예준은 여전히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기가 세고, 당당했으며, 세상에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사람처럼 사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오늘도 사장과 1대 1 면담을 자처하는 걸 보면.
하긴, 이 사장 밑에서 이렇게 잘 버틴 게 다 얘 덕분이지. 사장 앞에서 쫄지도 않고 요구할 거 요구하고, 아닌 것 같은 건 바로 내쳐서, 되레 사장이 예준의 대화를 일부러 피할 정도였다.
매니저가 혀를 내둘렀다. 가끔 보면 진짜 20대 같지가 않다니까. 하는 짓만 보면 무슨 어디 재벌 집 외동아들이 따로 없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그만 너무 먼 곳까지 가버렸다.
마침 나머지 멤버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매니저는 쓸데없는 생각을 접고 얌전히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순식간에 활동이 지나가고, 어느새 7월 2일 저녁이 다가왔다. 미리 맞춰놓은 알람을 듣고 상쾌하게 일어난 예준이 욕실로 들어갔다. 한참을 깨끗하게 몸을 씻어내고, 옷을 입은 뒤 애인이 선물한 반지를 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을 가만히 지켜봤다. 시계의 큰 바늘이 정확히 7을 가리켰을 때, 예준이 방을 나서서 준의 방문을 두드렸다.
“일어나 봐.”
“아, 형……. 조금만 더 자고요…….”
“형이랑 약속했잖아. 그리고 지금 7시거든?”
“일 있는 것도 아닌데 7시에 왜 깨워요…….”
“아침 7시인 줄 아네. 눈 뜨고 좀 봐라.”
베개가 예준이라도 되는 듯 꽉 끌어안고 있는 준의 몸을 억지로 반쯤 일으켜 창문을 보게 했다. 여름이라 아직 밝았지만, 아침 7시만큼 쨍쨍하지는 않았다. 그제야 예준과의 약속을 기억해낸 준이 뭉그적거리며 겨우 침대를 벗어났다.
최근 줄곧 밤과 낮이 뒤바뀐 상태로 지내다 보니 평균 기상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 원인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놓아주지 않는 예준에게 있었다. 몇 번이나 사정하고 나서도 얌전히 자지 않고 자꾸만 슬금슬금 움직이는 예준 때문에, 자신의 방으로 도망친 게 겨우 5시간 전이다. 그러니 아무리 휴식기라지만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근데 어디 가는 건데요?”
“뭐든 모르고 해야 재미있지. 얼른 씻고 나와.”
아직 잠에 흠뻑 취한 얼굴을 보며, 막 일어나 엉망이 된 머리를 쓰다듬어준 예준이 욕실을 가리켰다. 정신이 멍해서 제대로 못 들었는지 준이 가만히 서서 눈을 깜빡였다.
“왜 안 가, 씻겨줘?”
의자에 살짝 걸터앉은 예준이 물었다. 몸을 비스듬히 뒤로 젖히고, 고개를 까닥이며 묻는 폼이 영 건방졌다. 예준을 너무 잘 아는 준은 한 번 쓱 보고 혼자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대답도 듣지 못하고 무참히 씹혔는데도 예준은 개의치 않았다.
머리까지 감고 나온 준이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예준이 이리 오라며 손짓을 했다. 예준의 앞에 마주 앉은 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이제 어엿한 성인이지만, 예준에게는 여전히 턱없이 어리기만 했다.
“뒤돌아봐.”
예준이 서랍에서 드라이기를 꺼내 코드를 꽂았다. 그렇게 손수 머리를 말려주고, 입을 옷까지 꺼내 앞에 놓아준 예준이 인테리어용으로 놓아둔 흔들의자에 걸어앉았다. 앞뒤로 흔들리는 예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준이 느릿느릿 옷을 갈아입었다.
연애를 시작한 지 2년이나 됐고, 이제는 밥 먹듯이 몸을 섞는 사이인데도 매일매일 예준이 다르게 느껴졌다. 진짜 많이 좋아하니까 그런 거겠지.
큰 키만큼 큰 손 약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숙소에만 있는데도,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항상 저렇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하루도 까먹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예준의 마음을 전부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은지도 꽤 됐다.
“이제 나가요?”
“어.”
다들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 탓에, 항상 고요한 거실을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벌써 8시가 다 되어 가는데 이 시간에 어디를 가는 걸까. 궁금했지만 예준이 몰라야 재밌다고 했기 때문에 묻지는 않았다.
택시를 잡아탄 예준이 기사에게 위치가 찍힌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렇게 택시가 출발했다.
“좀 걸릴 거니까 자도 돼.”
예준의 말에 준이 또다시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늦은 시간인데 오래 걸린다고? 혹시 기념일인가 싶어서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다 생각해봤지만, 오늘은 그 어떤 날도 아니었다. 결국 추리를 포기한 준이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정확히 5분 만에 잠들었다.
“멀리 가네요.”
“네.”
기사가 넌지시 말을 건넸고, 예준은 칼같이 한 마디만 대꾸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창문에 쿵쿵 머리를 박던 준이 어느새 안정적으로 예준의 손에 머리를 기댔다.
이러고 네 시간을 어떻게 가지. 벌써 팔이 저려 오는 기분이었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인데. 연애하면 사람이 바뀐다는 게 진짜인 것 같아 마냥 웃음만 나왔다.
“다 왔다, 일어나.”
결국 몇 시간이나 손을 희생시킨 예준이, 택시가 멈추자마자 준을 깨웠다. 하늘이 놀라울 정도로 캄캄해져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뜬 준이 새카맣게 변한 바깥에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줄곧 머리를 감싸고 있던 예준의 손은 보지도 못한 것 같았다.
“여기 어디예요?”
“일단 내려.”
“어…….”
예준에게 등 떠밀려 택시에서 내린 준이 눈앞의 건물을 바라봤다. 규모가 꽤 커 보이는 풀빌라 한 채가 있었다. 여기는 또 언제 예약한 거야. 도무지 예상을 할 수 없는 예준의 행동에 준이 헛웃음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준의 어깨에 팔을 올린 예준이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우리 오늘 외박할 거야.”
“난 외박한다고 안 했는데요?”
“내가 하면 너도 하고, 네가 하면 나도 하는 거지.”
예준이 열쇠로 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직원이 없던데……. 열쇠는 갑자기 어디서 난 거지? 준이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예준이 팔을 끌어당겼다. 뻥 뚫린 한쪽 벽면으로 한껏 가꿔놓은 풍경이 보였다.
높은 건물은 아니지만, 건물이 여러 채가 모여 있어서 밖으로 보이는 모습이 예뻤다. 무엇보다 조명이 화려해서 분위기가 살았다. 방 안도 넓고 깨끗하고. 건물 바로 앞에는 커다란 풀이 있었다.
커다란 창 앞에 달라붙어 구경하기 바쁜 준의 모습에, 예준이 이것저것 찾아보고 고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근데 위치 알면 난리 나겠지. 준이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을 확인하지 못하도록, 예준이 미리 휴대폰을 챙겨 서랍 안에 넣었다.
“너 경치 보는 거 좋아하잖아.”
“그래서 온 거예요?”
“어.”
별 날도 아닌데, 이런 걸 다 신경 써주고……. 감동한 게 얼굴에 다 드러났다. 잠깐 사이에 졸음이 다 가신 얼굴을 보며 예준이 조심스럽게 준비했던 반지를 꺼내 놨다.
오글거리는 멘트를 하는 건 예준의 취향이 아니고, 피아노 연주 같은 건 더더욱 사절이었다. 물론 준이 또 해 준다면 사양 없이 받겠지만.
“이리 와봐.”
“형 내가 그렇게 고개 치켜들고 얘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평소처럼 고개를 살짝 들고 까딱이던 예준이 얌전히 시선을 내렸다. 그제야 만족한 듯 다가온 준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왜요?”
“손 줘봐.”
순순히 손을 내미는 준의 눈에는 일말의 기대감도 없었다. 보통 이쯤 되면 선물이구나, 하지 않나?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이대로 손바닥에 글씨를 쓰고, 뭔지 맞춰보라고 해도 까르르 웃으며 재밌어할 것만 같았다.
“어때?”
반지를 발견한 준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예준의 손에 끼워져 있는, 약 두 달 전에 자신이 선물했던 반지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이거 뭐예요?”
“내가 먼저 주려고 했는데 네가 선수 쳐서 지금 주는 거.”
제대로 반지를 확인한 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똑같은 이벤트를 준비했지. 그리고 동시에 미리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반지 선물하고 커플링 선물은 좀 비교되니까.
“네가 네 거는 안 만들고 내 거만 홀랑 해 왔잖아. 커플링 하나는 있어야지.”
어깨를 으쓱하며 예준이 준의 손에 반지를 끼워줬다. 뭔가 감동적인 멘트를 쳐야 하는 순간인데, 예준은 원래 말로 하는 건 뭐든 싫어했다. 글로 쓰는 거면 모를까.
잔뜩 감동 받은 눈으로 반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준의 눈앞으로, 예준이 반지 케이스를 툭 떨어뜨렸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반지 케이스가 거칠게 테이블 위를 뒹굴었다. 깜짝 놀란 준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지려는 케이스를 붙잡았다.
“부수려고 그래요?”
“아니, 끼워달라고 그런 건데?”
예준이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어릴 때 잠깐 피아노를 배웠다던 예준의 손은 크고 길었다. 하얀 손등 위에 도드라지는 핏줄이 자꾸만 시선을 잡아끌었다. 오늘 오전에, 침대를 뒹굴며 몇 번이고 핥았던 손가락이……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뭐 해?”
도덕성과 참을성이 함께 증발했는지, 예준이 탁자 아래로 발장난을 치며 재촉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살짝 표정을 구겼던 준이 잽싸게 반지를 꺼내서 손가락에 끼워줬다.
“디자인 진짜 잘한 것 같아요. 형이랑 잘 어울린다.”
“그래? 그럼 이제 줄 거 다 줬으니까 일어나 봐.”
“또 뭐 있어요?”
“당연한 걸 뭘 물어.”
집 안을 한 번 쭉 둘러본 예준은 애인에게 선택권을 주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다 돌 거니까. 예준의 픽은 개인적으로 저 앞에 있는 커다란 풀이었다.
“올라갈까? 아님 여기서 할래?”
“뭘 해요?”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지? 듣기로는 3층 침대가 제일 좋다던데. 어디?”
미리 사전 조사까지 해온 예준이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살짝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아니, 3층을 통째로 쓸 수 있는 숙소인 건 둘째 치고 뭘 하자고? 살짝 당황한 준이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아니, 아니 여기까지 와서 하자고요? 와, 와인 같은 거 안 먹어요?”
“그딴 걸 굳이 왜 여기까지 와서 마셔. 나중에 사줄게.”
“아, 아니 사달라는 건 아니고요.”
이리저리 고개를 젓는 사이 예준의 손에 이끌려서 어느덧 소파 위에 도착했다. 좋은 숙소라 그런지 소파도 넓었다. 180cm를 훌쩍 넘기는 예준이 누워도 모자람이 없는 걸 보니. 망설임 없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는 예준에 준이 뻥 뚫린 창을 한 번 보고,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
“아, 으, 형. 여기서 하면 다른 사람들이, 볼 수도 있잖아요!”
진심으로 다급해 보이는 준의 얼굴에 예준이 동작을 멈췄다. 잠깐 사이 풀린 눈을 물끄러미 마주 본 예준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통째로 빌려서 아무도 없는데?”
통째로 빌렸다고. 통째로…… 여기 다? 옆 건물도? 준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다른 동들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불 켜진 곳이 하나도 없는데…… 설마…….
“설마 저기 다른 건물까지 다 빌린 건 아니죠?”
“맞는데?”
준은 곧 이해를 포기하기로 했다. 예준이 씀씀이 큰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래도 하룻밤에 풀빌라 일곱 채를 빌리는 건 정말 상상도 못 했지만…….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준이 중얼거렸다.
“딱 봐도 비쌀 것 같은데…….”
“나 돈 없어 보여? 요즘 씀씀이가 좀 부족했나?”
“아니, 형이야 항상 돈 많아 보이죠…….”
금수저는 딱 보이는 느낌부터 타고 나는 법이니까. 예준은 길가다 스친 사람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온몸으로 유복하게 자랐음을 티 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찍던 시절부터 하루라도 옷을 겹치게 입고 오는 날이 없었으니까. 갑작스러운 옛날 생각에 젖어있는 준의 눈가 위로 예준이 입술부터 찍어 눌렀다.
“아무도 없으니까 저기 벤치에서도 하고, 풀에서도 하자. 아. 옆 동에서도.”
“저기서 하자고요? CCTV에 다 찍히거든요?”
“진작 다 꺼졌지.”
왜 이럴 때만 준비성이 철저해? 약간 억울함이 담긴 목소리는 갑작스럽게 일으켜진 몸 때문에 안으로 먹혀들어 갔다. 예준이 준의 귀를 입술로 살짝 물었다 놓으며, 눈짓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그냥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코스로 가자.”
이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데이트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 줄도 모르고, 예준은 새벽을 꼬박 새워 준과 함께 열심히 짜둔 데이트 코스를 전부 수행했다.
* * *
준의 마지막 기억은 분명 식탁이었는데, 눈을 떠보니 침대 위였다. 그것도 제일 푹신하다는 3층.
온통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준이 아래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기겁을 했다. 이 형 진짜 뭐 하는 사람이지?
“형, 형. 일어나요, 빨리!”
깜짝 놀라서 너무 다급했던 나머지, 준은 실수로 예준의 머리를 세게 치고 말았다. 처음부터 깨어있던 예준은 갑작스러운 타격에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품 안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끌어안은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왜?”
“왜, 왜 움직여요!”
준이 빳빳하게 굳은 채로 목소리를 높였다. 중간에 필름이 끊겨서 어떻게 끝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이야, 진짜 울고 싶다. 팔꿈치를 휘둘러서 단단한 배를 한 대 쳐줄까 하다가, 마침 손가락에 껴둔 커플링이 보여서 한 번 용서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 실랑이를 하고 나서야 예준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안 넣을 테니까 와서 누워 있으라는 예준의 말은 무시하고, 1층까지 내려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을 주워 입은 준이 그제야 무언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형, 제 휴대폰 어디 있어요?”
“거기 서랍 봐봐.”
주변이 조용하니 3층까지 목소리가 잘 들리는지, 예준이 곧장 대답을 해왔다. 서랍 속에서 밤새 켜져 있던 휴대폰은 배터리가 간당간당했다. 그때 준의 눈에 막, 휴대폰 화면에 뜬 현재 위치가 걸렸다.
“형!”
계단을 올라오는 쿵쿵 소리가 크게 들렸다. 예준은 그제야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아, 잔뜩 피곤하게 만들고 또 택시에서 자게 할 생각이었는데. 몸을 못 가눌 정도로 피곤하게 만드는 건 성공했는데, 그다음 작전을 시도도 하기 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대체 몇 시간을 온 거예요?”
“풍경 좋고 기분 좋았으면 됐지.”
하지만 예준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꾸했다. 변명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매우 당당한 자세였다. 좋았던 건 사실이라 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 위치야 이미 와 버린 거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서 그냥 조용히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줍고, 예준에게 어서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왜 이렇게 서둘러.”
“여기 체크아웃 몇 신데요? 벌써 10시예요.”
“혹시 몰라서 이틀 빌렸으니까 천천히 해도 돼.”
설마 다른 동까지 전부 다요? 눈으로 묻길래,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이 들고 있던 베개를 뚝 떨어뜨렸다.
* * *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1박 2일 데이트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준은 그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숙소에 가만히 있기라도 하면 괜찮을 텐데, 준은 뭐가 그렇게 바쁜지 계속 여기저기 싸돌아다녔다.
오늘은 또 무슨 선배랑 약속이 있단다. 즐겁고 편한 사이라서 가는 게 아니라, 비즈니스를 편하게 하려고 가는 거라니까 어쩔 수 없이 한 발 물러서 주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어서, 늦게 들어오거나 연락을 받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일일 계약서도 쓰고, 준비하는 것까지 지켜봤다.
그렇게 가만히 보기만 하던 예준이 입을 연 건, 준이 머리까지 매만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왜 이렇게 신경을 써?”
“그래도 연예계 선배 만나러 가는 건데, 성의 없게 갈 수는 없잖아요. 머리 좀 정리하는 게 어때서요. 형처럼 정장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평소 옷차림을 지적당한 예준이, 불량한 자세로 준을 위아래로 훑었다. 무난히 깔끔하고 단정한 복장에, 손목에는 예준이 뒤늦게 건네준 팔찌가 걸려있고, 손가락에는 커플링이 끼워져 있었다. 반지를 여러 개 끼고 있으니 어차피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냥 흐뭇했다.
예준이 선물한 것들을 몸에 잘 지니고, 현관 앞까지 걸어간 준이 잠깐 뒤돌아서서 당부했다.
“게임 많이 하지 말고요.”
“누가 들으면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 줄 알잖아.”
“형이 요즘 게임 말고 하는 게 뭔데요?”
“사랑?”
어떤 운동화를 신을지 눈으로 고르던 준이 슬쩍 예준을 흘겨봤다. 좋지 않은 반응을 받게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재미있어서 자꾸만 놀리게 됐다. 예준이 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기껏 정리한 머리가 죄다 망가졌다.
“아, 방금 정리한 건데.”
신발장 옆 거울을 힐끗 본 준이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그도 잠깐이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뒤에 가만히 선 예준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실없는 웃음을 잔뜩 흘리며 준이 밝게 인사했다.
“진짜 금방 들어올게요.”
“아까 계약서 쓴 거 읊어봐.”
“10시 전에 들어오기, 10분에 한 번씩 문자하기, 소주만 마시지 말고 섞어 마시기, 두 잔에 한 잔은 몰래 버리기.”
“잘 외웠네.”
요즘 기억력이 물올랐단 말이지. 6살 연상 애인의 칭찬을 듬뿍 받으며 준이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저걸 다 지킬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지만 일단 계약서를 써뒀으니 됐다.
착실하게 10분에 한 번씩 연락하고 제시간에 귀가해도 좋고, 어겨서 계약서에 적어둔 대로 벌을 줄 수 있게 되면 그것도 좋고.
“다녀올게요.”
다들 나가서 숙소에 아무도 없다고, 빛의 속도로 볼에 뽀뽀까지 하고 나갔다. 예준이 젖살 따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딱딱한 볼을 손바닥으로 몇 번 쓸었다. 쟤는 왜 맨날 혼자만 하고 튀는 거야.
몇 시간 후에 귀가할 애인을 제일 먼저, 빠르게 맞이하기 위해서 예준이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방에서 가져온 공기계로 조용히 평소 즐겨 하던 게임을 켰다. 조금 더 수월하게 게임을 하기 위한 세컨드 계정이었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캐시 아이템으로 도배를 한 예준의 캐릭터가 등장했다. 닉네임은 ‘우리준이’였다. 다른 유저의 커플 닉네임에 꽂힌 게 화근이었다. 준이 제발 그런 닉네임 하지 말라고, 밥까지 거부하며 반대했지만 예준은 손수 밥을 떠먹이면서까지 기어코 바꿨다.
부계정인 만큼 친구창이 휑했다. 평소처럼 랜덤 매칭을 돌린 예준이, 한참 게임을 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오늘 왜 이러지?”
오늘따라 판이 유독 잘 안 풀렸다. 예준의 게임 실력은 정말 저주받은 수준이라, 평소에도 팀원들에게 쌍욕을 먹는 게 일상이지만 오늘은 더욱 심각했다. 이상하게 자꾸 헛손질을 해서 바로 앞에 있는 팀원도 못 살렸다.
띡띡띡. 띡띡.
막 다음 라운드가 시작됐는데, 그리 길지 않은 도어록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곧바로 소파 맞은편에 있는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예준은 당연히 멤버들이라고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뛰어 들어온 건 매니저였다.
“야, 예준아! 양예준!”
“왜요.”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 게임을 하던 예준이, 다급해 보이는 매니저에게 고개만 살짝 들어서 물었다. 휴식기에 매니저의 방문은 조금 뜬금없었다.
이번 판은 잘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300번이 넘는 패배가 쌓이는 동안, 56회뿐인 승리 기록에 잘하면 1을 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예준은 매니저에게 관심을 줄 수가 없었다.
“너 인터넷 좀 봐봐! 빨리!”
분명 이유를 먼저 물었는데, 거기에 대한 답은 없고 어서 인터넷이나 보라고 성화다. 열애설이라도 떴나. 활동기도 아닌데 갑자기 급하게 뜰 거라면 그런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준은 열애설보다 게임이 더 중요했다. 무엇보다 지금 힐러를 선택했기 때문에 자신이 없으면 팀이 매우 곤란해지는 상황이었다.
“이것만 끝나고요.”
“너 지금 집안 털렸다니까! 너희 아버지랑 너랑 나란히 실검에 있어!”
막 사망한 팀원을 부활시켜 주려던 예준이 동작을 멈췄다. 쿨 타임을 놓친 팀원이 사망했지만 예준은 더 이상 게임으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줘 봐요.”
매니저의 휴대폰을 건네받은 예준이 최대한 침착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스크롤을 내리면 내릴수록 난리였다. 실시간검색어에 나란히 오른 부모님의 회사 이름, 아버지의 이름, 자신의 이름.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알려질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게 맞았다. 자신은 부모님과 연락도 잘 안 하는 데다가,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던 미취학 아동 시절의 얼굴은 현재의 자신에게서 찾아볼 수도 없으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정보도 없으니까.
“이거 언제 떴어요?”
“방금 전에!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너 이거 진짜야? 아니, 너 진짜 재벌이야? 재벌이 아이돌을 왜 하냐?”
“형. 소리 지르지 말아 봐요.”
마른세수를 한 예준이 한참 게임이 진행 중인 공기계를 끄고 진짜 휴대폰을 찾았다. 소파 구석에 처박혀 있던 휴대폰을 잡자마자 손이 불타는 줄 알았다. 전화고, 문자고 연락들이 폭주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매니저의 휴대폰을 빌렸다.
“일단 회사에 해명 기사 올리자고 해요.”
“해명……을 왜 해? 너희 아버지 아니야?”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는 매니저에 예준이 그제야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해명할 게 없네. 고민하던 예준이 매니저의 휴대폰을 빌려, 가물가물한 비서의 개인 연락처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두 번은 통화 중이 뜨고, 한 번은 받지 않더니, 네 번째 시도에서야 연락이 닿았다.
- 안녕하십……
“저 양예준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
- 죄송합니다.
서로 공평하게 한 번씩 말을 잘라먹고, 비서의 입에서 뜬금없이 죄송하다는 말이 나왔다. 눈치 빠른 예준은 금방 원인을 파악했다. 갑자기 이렇게 될 일이라면, 풀빌라 빌렸던 것밖에 없지.
- 제가 말씀하신 곳 빌리면서, 실수로 회사 이름으로 예약을…….
순순히 잘못을 털어놓는 비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예준이 이마를 짚었다. 아니, 명문대 나왔다며. 아이큐가 멘사라며. 우리 준이도 이런 실수는 안 하겠네.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차려입고, 자신의 옆에서 얌전히 업무를 확인하는 연하 애인을 잠시 상상한 예준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갑작스럽게 기분이 괜찮아졌다. 생각한 것만으로 머리가 깨끗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니…… 그걸 회사 이름으로 빌리시면 어떡합니까.”
- 정말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통째로 빌리는 거라 남에게 맡기는 게 수월할 것 같아서, 비용까지 지불하고 부탁한 건데 정말 괜한 짓을 했다. 죄송하다는데 더 몰아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괜찮다고 하고 끊었다. 이미 터진 거, 이제 와서 꿰맬 수도 없으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연예계 다 뒤져봐도 이런 사례는 너밖에 없을 거다.”
매니저가 중얼거리는 동안, 예준은 포털 사이트에 다시 한번 접속했다. 전화 한 통을 하고 왔는데도 여전히 양예준 석 자가 실시간검색어 1위에 올라 있었다.
단독으로 1위는 처음 해 보는 것 같은데. 그룹 이름으로는 해봤어도. 매우 영광스러운 순간이라, 예준이 그대로 볼륨키와 전원키를 동시에 눌렀다. 화면이 깔끔하게 캡처됐다.
“형. 이거 사진 좀 보내줘요.”
매니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황당함에 휩싸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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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브 게시판][BEST] 아니 이거 ㄹㅇ이냐?????
http://knowwwnews.com/main/read1439802
커뮤니티에 글이 하나 올라옴. 자기 부모님이 좀 규모있는 풀빌라를 하시는데 누가 이틀동안 거기를 통째로 빌렸대... 근데 그게 YT물산... 그래서 뭐 직원들 단합이라도 하나 싶었는데 알고보니 거기 묵은 사람 양예준..... 꽁꽁 싸매고 나갔는데 팬이어서 바로 알아봤대 멤버랑 같이 왔다는데.... 그리고 글 올라오자마자 몇시간만에 뉴스 뜬거임
기사보면 빼박같거든 양씨가 흔한 성도 아니고..? 근데 집안 규모 어마어마한데 아이돌을 했다는게 말이 안돼서 못믿겠음ㅠㅠㅠㅠ
댓글
└ ????? 구라아니고 ㄹㅇ????
└ 실검 1위인데 정정기사 없잖아.. 이건 맞는거임
└ ㅇㅇㅇㅇㅇㅇ 소속사도 말업고 와이티도 말업자나
└ 왜 회사 이름으로 빌린건데..? 관종임?
└ 관종이었으면 데뷔할때부터 이미 다 떠벌리고 다녔겠지.
└ 뭐 문제 생겨서 저렇게된듯.. 내가 다 당황스럽네;ㅅ;
└ 아니씨팔외동아들인게제일충격임
└ 얘드라 나 지금 새우퐁당만두 먹고있거든 이거 와이티푸드껀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울오빠 먹여살리고 있었던거 맞지???
└ ㅅㅂ ㅋㄱㅋㄱㅋㄱㅋㄱㅋ
└ 아 나도 오늘부터 갈아타야겠다,,
└ 엥 근데 어떻게 아무도 모를수가있음????
└ 알음알음 알긴했겠지.. 우리같은 사람들 말고 비슷한 집안사람들만.....
└ 상상을 해보셈 니가 커뮤에 야 양예준 YT물산 회장 외동아들인거 아냐?ㅋㅋ 이런 글쓰면 믿어줄거같음?
└ ㄴㄴ.. 걍 먹금할듯..
└ 금수저인건 다 알았음 고등학교도 학군 좋은곳 나왔고
└ 데뷔초에 겜에 300썼다 했을때부터 최소 은수저겠구나 하긴했는데......
└ 그거 걍 손가락 3개 아니었음?
└ 300 아니고 3000각인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양예준 1년에 nn억 버니까 ㅈㄴ 효자라고 생각했는데..외동인데 회사 버리고 뛰쳐나온거면 ㄹㅇ 불효자 아니냐??
└ 울레브 떠서 그나마 다행이지.. 망돌이었으면 레알 큰일났어
└ 씀씀이 보고 유복하게 자랐을거라고 예상은 다 했음.... 근데 너무 어마어마해서 놀랐을뿐..
└ ??? 예준이 문창과 아님.....??
└ ??????
└ ??????????/
└ ㅇㅇ 맞잖아........
└ 이 정도면 그냥 하고싶은거 하고 살다보니까 회장님하고 진득하게 얽힌수준아니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친아들 아니고 얼마전에 입양하신거 맞지?
└ 백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