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5/7)

외전 1

아침부터 숙소가 분주했다. 한 달 전, 데뷔 2주년을 맞이한 레브는 한참 여유로운 휴식기를 즐기는 중이었다. 다들 여가생활도 하고, 느긋하게 여행도 다녀오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숙소가 조용한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이렇게 활기찬 아침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교복을 입고 허겁지겁 방에서 나온 준이 욕실로 들어갔다. 팔을 대충 걷고, 급하게 세수하는 옆모습을 벽에 기대어 빤히 쳐다보던 예준이 한마디 건넸다.

“야, 옷 다 젖는다.”

셔츠의 소매 부분과 조끼가 흠뻑 젖었지만 준은 씻기에 바빴다. 그게 신경 쓰이는 건 예준뿐이었다. 결국 맨발로 욕실 안으로 들어간 예준이 팔을 붙잡아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려주고, 몸을 살짝 뒤로 당겼다.

“안 젖게 잘 해야지.”

“아아.”

준이 고맙다는 의미로, 막 깨끗하게 씻어 물기 가득한 볼을 예준의 볼에 비볐다.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예준은 당황하지 않고 그 애교를 마음껏 즐겼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방에 데리고 들어가고 싶은데,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준이 몇 달 전부터 손꼽아 기다려 온 졸업식이니까.

“아침 먹어.”

평소 아침을 따로 챙기는 편은 아니지만, 졸업식이니 뭐라도 먹여야겠다 싶어 휘영은 특별히 아끼던 케이크를 꺼냈다. 냉장고에서 막 꺼내서 그런지, 크림이 듬뿍 올라간 초코케이크가 차가웠다. 케이크에는 우유가 빠질 수 없으니, 친절하게 초코우유까지 놓아준 휘영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잘 먹겠습니다.”

좋다고 웃으면서 식탁 앞에 앉는 애인을 보며 예준이 차갑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이놈들은 맨날 단 것만 처먹나. 진지하게 당뇨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예준은 보이지도 않는지 준이 열심히 포크를 움직였다. 졸업식 날에 늦을 수는 없다는 듯 입에 밀어 넣는 속도가 빨랐다. 바쁜 마음에 자꾸만 다 삼키지도 않고 포크질을 하는 준의 손을, 예준이 슬쩍슬쩍 잡아 제지했다. 그렇게 허둥지둥 아침 식사를 마쳤다.

잃어버렸던 넥타이는 밤새 옷장을 뒤져 찾았지만, 끝내 마이는 찾지 못했다. 결국 그대로 위에 패딩을 걸친 준이 들뜬 얼굴로 가방을 고쳐 맸다. 한 달하고도 2주 전에 스무 살이 된 준은 여전히 앳된 모습이었다. 어딜 가나 두 살 정도는 어리게 봤고, 형들도 여전히 막내 취급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었다. 민증을 내밀면 술을 살 수 있고, 자신의 일은 보호자의 동의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도 있는. 준은 그 사실이 못내 만족스러웠다.

준이 형들에게 손을 크게 흔들었다. 특유의 밝은 분위기 덕에 자칫 부산스럽게 보일 수 있는 동작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먼저 갈게요, 형들! 이따 봐요!”

“이따 안 갈 건데?”

운동화 안으로 발을 구겨 넣던 준이 멈칫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벌써 다 씻은 주제에, 안 갈 거라며 거짓말을 하는 애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준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나가버렸다.

“저거 지금 그냥 나간 거야?”

“그러게 왜 먹히지도 않는 장난을 쳐요.”

6살 연하의 애인에게 한심하다는 눈빛을 받은, 올해 스물여섯이 된 예준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준이 남긴 케이크를 먹었다. 저 형은 진짜 나이를 거꾸로 먹나. 맞은편에 앉아 휴대폰을 하던 하현이 황당하다는 듯 예준을 쳐다봤다.

“졸업식 몇 시였더라?”

“10시.”

“그럼 지금 빨리 준비해야겠네.”

일반 고등학교에서 진행하는 졸업식인 만큼 팬들은 물론이고, 기자들까지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진이 찍히지 않을 리는 없었다. 재학생들이 휴대폰으로 열심히 촬영할 테니까. 막내의 졸업식을 위해 평소보다 신경 써서 차려입은 네 형이 옹기종기 식탁에 모여 앉았다.

“꽃다발은요?”

“예약했으니까 가지러 가기만 하면 돼.”

“식당도요?”

“예약했지.”

지구가 졸업할 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던 예준이 이번에는 코스까지 다 짜왔다. 약 1년 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준을 챙기긴 했지만, 최근에는 그게 더 심했다. 심지어 저번 달에는 31일 중에 둘이서만 20일이 넘게 외박을 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휘영은 그냥 준의 어머니 때문인가, 어렴풋이 예상할 뿐이었고 사실을 아는 하현만 매일 아침마다 예준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어린 애 등쳐먹는 것 같다는 이미지를 싹 지우려면 준이 스물 후반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뭔가 싱숭생숭하지 않나?”

잠시 이어진 침묵을 깨고 휘영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냐는 듯 여섯 개의 눈동자가 휘영에게 꽂혔다.

“준이 처음 봤을 때가 열일곱 살이었는데, 벌써 졸업한다는 게.”

다른 멤버들도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모두 다 성인인 가운데 혼자 줄곧 미성년자였던 터라 준의 이미지는 조금 특별했다. 어린 나이에, 그룹 내 막내 포지션에, 마냥 해맑은 성격까지 삼박자가 딱 맞아떨어지는 준이 드디어 교복을 벗는 날이니 몇 년간 지켜본 형으로서 특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이상하게 뿌듯한 기분도 좀 들고.”

“네가 왜 뿌듯해?”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휘영의 말을 예준이 단칼에 잘라냈다. 이 타이밍에 질투하는 건 아니겠지. 하현이 설마 하는 눈빛으로 예준을 쳐다봤다. 끄떡도 하지 않고 눈빛을 튕겨낸 예준이 턱을 괴고 식탁에 몸을 기댔다. 진심으로 준의 졸업식이 뿌듯하고 행복한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예준이었다. 저녁에 들어오자마자 교복부터 버려야지. 

예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가 없는 준은 오랜만에 입는 교복을 매만지며 매니저 차에서 내렸다. 평소 입는 비싼 옷들과 다르게 천이 뻣뻣하고 거친데도 기분이 좋았다. 매니저에게 인사한 준이 교문을 통과하려는 찰나에 어디선가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정준!”

고개를 들자마자 누군가 뒤통수를 꾹 눌러왔다. 그리고 준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듣고 몰린 학생들이 그의 주변을 둥글게 감쌌다.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던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다가와서 친근하게 스킨십을 했다.

“졸업식은 왔네?”

“졸업장은 받아야지.”

형들 앞에서는 마냥 어린아이처럼 보이던 준도, 또래 친구들과 섞이니 평범한 학생이 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무리였던 친구가 어깨에 팔을 두르고 휴대폰을 흔들었다.

“너 바쁘다고 이제 연락도 안 받더라!”

“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미안!”

준이 양손을 모으고 사과했다. 사실 시간이 없어서 안 본 게 아니라 연락하는 행위 자체가 피곤하고 귀찮았을 뿐이지만, 졸업을 한다고 해도 좋은 친구로 남아야 앞으로의 생활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솔직하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오르막길을 오르고,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교실에서 학생들이 이리저리 고개를 내밀었다. 예술 고등학교도 아니고 평범한 일반 고등학교 학생 중 아이돌이 있는 건 굉장히 드문 케이스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잘나가는 아이돌이. 고작 두 시간가량 졸업식을 하기 위해 한겨울에 끌려 나온 학생들에게 이보다 더 즐거운 이벤트가 있을 리 없었다.

올해 졸업하는 학년은 거의 절반이 준의 친구라지만, 1, 2학년은 몇 번 보지 못했을 테니 신기할 만도 했다. 마침 딱 종업식이 끝나 먼저 학교를 나오던 수많은 후배들의 휴대폰 카메라가 이쪽을 향했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으로 반에 도착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인사가 쏟아졌다. SNS에 올릴 거라고 사진 좀 찍자는 친구들의 말에, 복도에 있는 모든 3학년 반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 준 준이 기진맥진해져서 책상에 엎어졌다.

“야, 나 싸인 좀 해 주라.”

“나도 자랑 좀 하자.”

사진 촬영이 끝났더니 이제는 싸인이라니. 그러나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전부 정성스럽게 싸인을 해 준 준이 이제 됐냐며 다시 책상에 머리를 쿵 박았다. 

“걸그룹 많이 보냐? 예뻐?”

“하여간 그런 것만 궁금하지.”

“당연하지! 존나 부럽다.”

“혼자 아이돌 돼서 인생 역전해버리네.”

자주 오지 않으니 어색함이 클 텐데도, 반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게 편한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 이 모든 일에는 준이 쌓아 놓은 이미지가 큰 몫을 했다. 한참 학교에 다닐 때, 입학한 지 반년밖에 안 됐는데도 모르는 애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한참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준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학교의 그 누구도 모르지만, 레브가 데뷔할 때부터 하현을 좋아해 온 담임 선생님이 활짝 웃으며 오랜만에 학교에 온 제자를 맞이했다. 솔직히 말하면 제자보다는 최애의 동생 정도로 보였다.

“강당으로 이동할 거야. 겉옷 다 두고, 몸만 가. 몸만. 교복 단정하게 입고.”

담임 선생님의 말에 준이 멈칫했다. 마이 안 가지고 왔는데. 강당에 들어서자 마이를 안 입은 건 저뿐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이를 두 개 가지고 있는 애가 있을 리가 없고, 무엇보다 졸업식에 여벌을 챙겨올 리가 없었다. 

결국 빌리는 것을 깔끔하게 포기한 준이 자리에 앉았다. 저 뒤에서 보면 혼자만 다른 색일 텐데……. 그래도 눈에 확 띄니까 형들이 알아보긴 좋겠다.

“야, 야!”

졸업식이 시작하기 10분 전, 갑작스럽게 소란스러워진 강당에 준이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예상대로 멤버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 형들 다 훤칠해서 바로 눈에 띄네. 졸업식 주인공은 자신인데 시선은 이미 전부 저쪽으로 쏠려 있었다. 여기저기서 짜기라도 한 듯 올라오는 휴대폰을 보며 준이 입을 네모나게 만들어 웃었다.

“형!”

익숙한 밝은 목소리에 네 명의 시선이 전부 준이 앉은 쪽으로 꽂혔다. 혼자만 마이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예준이 속으로만 질책했다. 그러니까 자기 물건 좀 잘 챙기라니까. 하현이 들었으면 형이나 잘하라며 한마디 했을 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맨 뒤쪽에 앉은 학생들이 환호하며 손을 뻗어오자, 예준이 여유롭게 인사를 건넸다. 평범한 학교 졸업식에 등장한 아이돌의 모습에 강당 전체가 들썩였다. 졸업식이 시작하기도 전에 엄숙한 분위기가 박살 나서, 선생님들이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제지했다. 

와중에 준의 담임 선생님은 뒤쪽에 서 있는 자신의 최애에게서 눈을 떼질 못하다가, 다른 선생님이 뭐하냐고 묻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애들이 밝고 좋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예준이 감상평을 꺼내 놨다.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보다 훨씬 밝고 에너지가 있었다. 당장 쟤만 해도……. 눈을 가늘게 좁힌 예준이 저 멀리 앉아 있는 제 애인을 빤히 바라봤다.

한 번 신나게 인사하더니, 더 이상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바빠 보였다. 나보고 친구 많다더니 자기가 더 많네. 예준에게 관심을 주는 건 준을 제외한 다른 학생들뿐이었다. 

“지금부터 졸업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조용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강당은 교장 선생님이 단상에 걸어 나와 마이크를 잡자 금방 정적이 찾아왔다. 졸업하는 스무 살 중에 눈물을 보이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지긋지긋한 학교에서 벗어난다는 해방감에 가득 찬 얼굴로 소곤소곤 떠들기 바빴다.

지긋지긋한 절차가 지나가고 드디어 준이 졸업장을 받을 시간이 왔다. 혼자만 허전한 어깨가 마음에 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교복사이트에라도 들어가서 미리 찾아보고 사둘걸. 머쓱한 기분에 눈가를 긁적이는데, 앞자리에 앉은 친구가 준을 툭툭 쳤다. 방송에 나가기 전부터 친했던 친구였다. 

“내 거 입어라.”

마이를 툭 던져주며 눈을 찡긋하는 친구에게, 준이 환해진 얼굴로 손 하트를 만들어 보냈다. 친구는 꺼지라고 인상을 찡그렸지만 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마이를 입었다. 체격이 비슷한 데다 이름표까지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으니 완전 자기 것처럼 보였다.

마이를 구해서 마냥 기쁜 준과 달리, 뒤에서 지켜보는 예준은 온갖 감정에 휩싸인 상태였다. 손 하트……. 나한테도 안 해주는 게 친구들 앞에서는 술술 나오네. 저렇게 남의 걸 냉큼 빌릴 줄 알았으면 공장이라도 돌려서 구해오는 건데.

저, 저……. 예준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점점 앞으로 기울였다. 곧 뒤통수가 뚫릴 기세로 준을 뜨겁게 쳐다보는 예준을 발견한 하현이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형, 여기서 뛰쳐나가면 진짜 없어 보이는 거 알죠.”

애들 졸업식 망치면 안 돼요. 혼신의 힘을 다해 하현이 예준을 붙잡은 사이, 준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와중에 저 순간을 놓칠 수는 없어서 예준이 곧장 똑바로 일어나 카메라를 들었다. 큰 키가 이럴 때는 참 도움이 됐다. 휘영에게 빌린 카메라로 저 먼 단상 위를 어렵지 않게 찍어 낸 예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뒤는 관심 밖이었다. 찍은 사진들을 돌려보는 예준의 근처로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사진을 확인한 멤버들의 반응은 모두 똑같았다. 진짜 사진 못 찍네.

“대체 어떻게 찍어야 이렇게 죄다 흔들려요?”

“그냥 약간 흔들린 거지.”

“약간이 아니거든요.”

이 중요한 순간을 놓칠 수 없다는 듯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찍어놓고, 결과물이 다 이 모양이라니. 할 말을 잃은 멤버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예준은 그저 뿌듯해 보였다.

“그냥 제가 찍을 테니까 형은 가만히 있어요.”

카메라를 가로챈 휘영이 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하지만 준의 자리가 애매한 곳에 있어서 찍기 힘들었다. 학교 강당이 못해도 2층은 돼야지. 천장만 쓸데없이 높은 구조를 비판하며 휘영이 까치발도 살짝 들었다.

“아니, 팔을 더 들어봐.”

“그냥 제가 할게요.”

“싸우지 말고.”

성인 남자 넷이서 카메라 하나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제법 눈에 띄었다. 자녀의 졸업식을 축하하기 위해서 온 부모님들도 가끔씩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메라 하나를 두고, 한참을 옥신각신하는 사이 졸업식이 끝났다. 이상하게 어수선한 분위기에 교장 선생님이 빠르게 마무리를 했다.

“……이상으로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의 인사와 함께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그 누구도 마지막 순간에 대한 미련은 없어 보였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같은 반 친구들과 떠들며, 가족에게 가기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 사이로, 예준이 당당히 발을 들여놨다.

바로 옆을 지나가는 연예인의 모습에 학생들이 너도나도 큰 목소리를 냈다. 준의 반 옆에 서자마자 학생들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모두의 시선이 갑작스럽게 한곳에 쏠리는 것을 보고, 어렵지 않게 예준이 왔음을 알아챈 준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막 입을 벌려 예준을 부르기도 전에,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오빠 저 악수 한 번 만요!”

갑자기 튀어나온 인영에 깜짝 놀란 준이 휘청거리는 바람에 의자가 덜컹거렸다. 겨우 균형을 잡고 정신을 차린 뒤 얼굴을 확인해 보니, 예준이 최애인 다른 반 친구였다. 이름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바이벌 ID 촬영 당시에 제발 예준을 투표해 달라고 했던 것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얼마나 열심히 영업을 하는지, 홍보지를 뽑아서 여기저기 붙이고 문자 투표를 해 주면 밥까지 사준다고 했었다. 학교 친구들 대부분이 준을 뽑는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념으로 예준을 데뷔권에 무사히 안착시키는 데 일조한 진성 팬이었다.

“그래요.”

언제나 팬서비스가 후하기로 유명한 예준답게 거절 없이 곧장 손을 잡아줬다. 예준과 3초간 손을 맞잡고 있던 친구가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시작으로,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전부 몰려들었다. 

준은 예준이 친구들의 주목을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가 봐도 시선이 갈 정도로 잘생겼고, 거기에 연예인이니 관심이 안 가는 게 이상한 일이지만 그래도…….

그냥 팬들도 아닌 같은 학교에 다닌 친구들이라 기분이 더욱 묘했다. 당연한 건데도 예준에게 말 안 걸었으면 좋겠고, 대답도 안 해 줬으면 좋겠고…….

“형, 잠시만요.”

결국 준이 잔뜩 몰린 학생들 사이에서 예준을 끄집어냈다. 조금 멀어지자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학생들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선을 잘 지키는 모습에 감탄하는 예준에게 준이 작게 속삭였다.

“오늘 내 졸업식인데 왜 형이 더…….”

“애인 졸업식이 내 졸업식이지.”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인 예준이 한발 물러났다. 당연한 걸 뭘 묻냐는 표정까지 잊지 않았다. 내 졸업식인데 왜 형 졸업식인 것처럼 들떠 있냐고 한마디 하려고 했던 준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뭐라 말이 나오질 않았다.

꾹 다문 입을 보며 예준이 속으로만 웃었다. 진짜 귀엽고, 귀엽고, 다 좋은데, 아직도 벗지 않은 남의 마이가 유일하게 거슬렸다. 

“끝났으니까 이제 슬슬, 아!”

준이 이제 그만 가자고 말하려는데, 갑작스럽게 전해지는 무게에 몸이 휘청거렸다. 고개를 돌려 뒤쪽을 보니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친구가 준의 어깨를 감싸며 매달리고 있었다. 바로 앞에 서 있던 예준은 당연히 뒤로 밀려났다.

“왜 이래.”

“야, 시간 없어? 졸업식인데 오랜만에 놀자. 스케줄 있나?”

“아니, 없긴 한데.”

예준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지금 보니까 아까 마이 빌려준 놈이네. 준을 대신해서, 졸업하는 순간 친구 사이는 다 끝나는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체면이 있으니 일단 참았다. 어차피 마지막으로 보는 걸 텐데 잠깐 노는 것 정도는…….

“준아, 형들 저기서 기다리잖아.”

당연히 안 되지. 대학에 가도 있고, 모임에도 있고, 직장에도 있고, 경로당에도 있는 게 친구인데 그게 꼭 준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아까 보니까 다른 친구들도 많아 보이던데 거기서 한 명 빠진다고 티도 안 날 것 같았다. 

“아. 맞다. 형들하고 일 있어서 안 될 것 같아.”

“그래?”

“가자. 친구한테 교복 돌려주고.”

어깨를 툭툭 치고 손수 마이를 벗겨낸 예준이 친구의 손에 잘 쥐여 줬다. 순수하게 같이 놀고 싶었을 뿐인,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린 학생을 성공적으로 견제한 예준이 준을 데리고 멤버들에게로 돌아갔다.

“졸업 축하해.”

하현이 웃으며 먼저 축하의 말을 건넸다. 동시에 얌전히 꽃다발을 들고 있던 지구가 자연스럽게 준의 품 안으로 넘겨줬다. 별말은 없었지만 지구가 원래 말이 많거나 표현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준은 충분히 고맙고 행복했다.

“형도 와 줘서 고마워요.”

“당연히 와야지. 축하해.”

드디어 지구에게 축하의 말을 얻어낸 준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축하한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휘영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받아냈다. 마치 고양이와 집사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예준이 헛웃음을 흘렸다. 멤버 형들이 너무 좋아서 애인은 보이지도 않는다 이거지. 저거 남들 앞에서 애교 못 부리게 해야 되는데.

휘영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준을 끌어당긴 예준이 어깨 위로 팔을 걸쳤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보이는 소유욕에 하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가자. 졸업식인데 고기 썰어야지.”

“형이 사는 거예요?”

“당연히 내가 사지. 얘네 지갑은 열린 적도 없어.”

나눠서 내자고 했더니 싫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동시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 세 명을 무시한 예준이 준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 짧은 와중에도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겠다고 준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예준은 손을 잡자는 핑계로 허공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손을 끌어내렸다.

미리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서 화기애애한 식사를 마치고, 멤버들을 숙소로 돌려보낸 뒤 대기 시켜둔 차에 올라타는 것까지 성공했다.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은 예준이 말했다.

“졸업식이니까 오늘은 너 하고 싶은 거 하자.”

“진짜요? 그럼…….”

“대신 마지막은 내가 하고 싶은 거.”

예준의 제안에 준이 입고 있던 패딩을 벗으며, 뒤로 잔뜩 젖혀진 의자 시트에 천천히 등을 기댔다. 하고 싶은 거라면 듣지 않아도 뻔했다. 

1월 1일이 되자마자 죄책감을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물리친 예준은, 완전히 성인이 됐다는 걸 확인받기 위해서 곧장 준을 호텔로 데려갔다. 그리고 거의 사람을 죽일 만한 스케줄 속에서도 약 일주일을 혼자 쌩쌩하게 돌아다녔다.

같이 하는데, 예준도 똑같이 힘들어해야 맞는데……, 혼자 휴가라도 다녀온 것처럼 상태가 좋아서 다들 비결을 묻기까지 했다. 

반면에 준은 거의 반쯤 죽어 있는 상태로 다녀서, 하현이 진지하게 조언까지 해줬다. 피곤하면 그냥 발로 차라고. 하지만 준은 조용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솔직히…… 저도 좋아요.

“그래요, 형이 하고 싶은 거 해요.”

예준은 보기와 다르게 체력이 좋은 편이니, 내일 아침에도 분명 저 혼자 기운 없이 누워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할 때만큼은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으니까, 후의 고통은 그냥 모르는 척하는 편이었다.

“대신에 뽀뽀 많이 해주기.”

준이 입술을 툭툭 치며 말했다. 여전히 몸에는 교복을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얼굴과 몸을 차례로 쳐다본 예준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괴상한 취미는 없는데 왠지 평소보다 더 피가 쏠렸다. 갑자기 마른세수를 하는 예준의 행동을,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던 준이 신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일단은 엄마 한 번 보고 가요.”

“그래, 졸업장 자랑해야지.”

예준이 가는 길도 외울 만큼 익숙해진 준의 어머니 병원으로 차를 돌렸다. 그리고 아직 중요한 말을 전달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입을 열었다. 

“잠깐만.”

“네?”

“옷 챙겨왔으니까 내리기 전에 교복 갈아입어.”

졸업식 날 입어야 해서 버리지도 못하고, 줄곧 엉망으로 구겨진 채로 옷장 속에 처박혀 있던 교복을 의류 수거함에 처박는 날만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렇게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던 양심마저 깨끗하게 털어낸 예준은 그날 새벽까지 애인의 졸업식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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