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형. 오늘 병원 갔다 오면 안 돼요?”
준의 말에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예준이 작게 눈을 떴다. 그리고 습관처럼 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며칠을 품 안에 끌어안고 살았더니 이제야 조금 자연스러워졌다. 예전 같았으면 놀라서 고개를 털어냈을 준도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준의 손바닥에 머리카락을 더 비볐다.
“아직 다 안 깼어요?”
하여간 애교도 많다. 남들이 보기에 어떤지는 관심 없고, 일단 예준이 보기에는 그랬다. 연애를 시작한 이후로 준이 애교가 많아진 건지 자신의 눈에 뭐가 씐 건지 모르겠지만.
1인용 침대에서 준과 깍지까지 끼고 잠들었던 걸 하현과 휘영에게 들킨 이후로 예준의 행동은 점점 더 거침이 없어졌다. 어차피 휴식기라 다들 자기 할 일 하기에 바빠서 더더욱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지구는 여전히 숙소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길고, 휘영은 오늘 스케줄 때문에 나갔다. 아무 일정도 없는 하현은 워낙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얌전히 방에 있었다. 아마 먼저 부르지 않는 이상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형 피곤하면 혼자 갈게요.”
“맨날 쉬는데 피곤하겠냐. 가자.”
예준이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금방 씻고 나오겠다던 예준은 정말로 10분 만에 샤워를 마치고 머리까지 감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털며 아침부터 남은 마카롱을 주워 먹는 예준을 보며 준이 입을 벌렸다. 형은 정글에 떨어뜨려놔도 잘 살 거야. 예준은 단 한 번도 험난한 환경에서 자라 본 적 없는 고상한 도련님이었지만, 일단 지금 저 모습만 본 준의 감상은 그랬다.
예준이 대충 머리를 말리는 동안 준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팬들이 선물해 준 옷 중 하나를 아무 생각 없이 들고 나오는데, 예준에게 반려 당했다.
“그거 말고 좀 클래식한 느낌으로 입자.”
“……뭔 소리예요?”
이렇게 예준은 가끔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팬들이 보낸 옷은 전부 예뻤다. 준에게 잘 어울릴 옷을 몇 번이고 고민을 거듭해 골랐을 테니. 그러니까 준이 입으면 더 예쁜 게 당연했다.
하지만 미친 새끼가 도사리고 있는 병원에 갈 때는 옷차림을 단정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준에게는 아주 평범한 옷을 입히고, 자신은 가장 비싼 옷을 꺼내 입은 예준이 여유로운 손길로 택시를 불렀다.
“형은 왜 병원 가는데 그렇게 차려입은 거예요.”
팬들 앞에 서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병원만 다녀오는 거라 그냥 예준의 말에 따라 조용히 옷을 갈아입은 준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준은 어머니를 보러 가는 거지만 예준은 목적이 달랐다.
“나 이렇게 입고 다니는 거 한두 번 보냐.”
“그건 그래요.”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스쳐가듯이 봐도 눈에 띄는데 얼굴 때문에 더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꼴을 한 번 내려다 본 준이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예준이 멋있게 보일수록 스스로가 자꾸만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렇긴 하지만. 준이 조용히 창밖을 내다봤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병원 구조가 많이 익숙해진 준이 빠르게 병실로 향했다. 예준은 택시비 계산을 마치고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갔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준을 따라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엄마!”
“또 왔어?”
“오랜만에 온 건데?”
준이 병실 문을 열자마자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마치 신나서 공원을 뛰어다니는 강아지 같았다. 예준은 조용히 준이 열어두고 간 문을 닫고 들어왔다.
예준은 부모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이었다. 사이가 나쁘거나 한 건 아니지만 예준이 일방적으로 속을 썩였다. 그래서 저렇게 부모와 살갑고 가까운 모습은 조금 낯설었다. 어떤 곳에서든 스태프들에게 예쁨 받는 준의 성격은 어머니 앞에서도 여전했다.
“엄마. 음료수 다 마셨어?”
“우리 아들이 사다 준 건데 당연히 다 마셨지.”
“음…….”
냉장고를 열어 본 준이 주머니를 한 번 뒤졌다. 손에 지폐 몇 장이 걸렸다. 예준을 힐끔 바라본 준이 몸을 일으켰다.
“음료수 뽑아 올게요. 형, 잠깐만 기다려요!”
그리고 예준이 말리기도 전에 준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렇게 넓은 VIP 병실에는 예준과 준의 어머니 둘만 남았다.
순식간에 어색해진 공기에 예준이 터지려는 기침을 겨우 참아냈다. 답지 않게 손가락을 이리저리 꼬는 예준에게 준의 어머니가 먼저 말을 걸었다.
“예준 학생은 참 착한 것 같아.”
“아, 아닙니다.”
“아니긴. 병원에도 이렇게 같이 와주고. 준이 혼자 보내도 되는데.”
병원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줄은 꿈에도 모르시겠지. 속으로 선욱을 걷어차는 폭력적인 상상을 하고 있는 예준의 손을, 준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잡았다.
“정말…… 고마운 게 많아. 준이가 속 많이 썩이지?”
“아니요.”
“애가 어리광이 심해.”
어리광이 심하긴. 준이 혼자 끌어안아 온 시간들을 두 번씩이나 봐 온 예준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일부러 어리광을 부리는 거라면 모를까, 준은 정말 힘들 때는 입을 꾹 닫고 절대 먼저 열지 않았다.
한참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던 예준이, 귓가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VIP들만 이용한다고는 하지만, 여긴 노래방이 아니라 병실이었다. 웬만해서는 바깥소리가 잘 들리지 않지만 바로 문 앞에서 대화하고 있는 거라면 얘기가 달랐다.
“잠시만요, 어머니.”
정중하게 인사한 예준이 병실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준과 선욱이 마주 보고 있었다. 준이 갈아 마신 배 음료를 선욱에게 내밀었다.
“한 캔 드릴까요?”
“아니, 그런 거 안 마셔.”
“아, 네.”
예준은 소유욕이 심한 편은 아니었다. 왜냐면 애초에 자신의 것을 뺏으려 든 사람도 없었고, 딱히 가질 수 없는 걸 원해 본 적도 없으니까. 그런데 준이 남과 같이 서 있는 모습만으로 화가 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색다른 기분을 경험한 예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준을 불렀다.
“준아.”
“형.”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준이 캔 하나를 떨어뜨렸다. 바닥을 구르는 캔을 주워 든 예준이 답지 않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랑 얘기 좀 하려고 하니까 들어가 있어.”
친구의 사전적 의미를 마음대로 바꾼 예준이 손가락으로 병실을 가리켰다. 준이 저와 선욱이 친구라고 믿고 있으니, 지금만큼은 그냥 친구 하기로 했다.
“형 막 싸우고 그러는 거 아니죠.”
“나 싸우는 거 못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
“아…….”
예준이 귀하게 자라온 건 대충만 봐도 느껴졌다. 예능에서도 열심히 움직이는 꼴을 본 적이 없을 정도니까. 살짝 납득한 준과 다르게 진실을 알고 있는 선욱은 뻔뻔한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믿음이 가진 않지만 준이 순순히 발걸음을 병실 안으로 옮겼다. 문까지 닫는 걸 확인한 예준이 선욱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동무를 하고 자연스럽게 장소를 옮겼다. 170cm가 조금 넘는 선욱과, 190cm에 가까운 예준이 함께 걸어가니 꽤 우스운 광경이 연출됐다.
“팔 치워.”
혹시라도 누가 볼까 싶어 선욱이 급히 예준의 팔을 쳐냈다. VIP 병동 복도에 함부로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지만 공연히 마음이 조급했다. 작은 키는 선욱의 콤플렉스였다. 클럽이나 바에서 놀 때도 이놈의 키 때문에 항상 첫인상이 엉망이었다.
“깔창 더 끼우는 게 좋겠네.”
“…….”
이미 신발에 깔창 두 개를 끼워 넣은 선욱이 말을 아꼈다. 본인도 부끄러운 게 분명했다. 조언 한 마디로 선욱의 자존심을 잔뜩 구겨 버린 예준이 멈춰 섰다. VIP 병동 복도 끝에 마련된 휴게실이었다.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웬만한 6인실 병실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예준은 이제 준의 일에 합법적으로 설쳐도 되는 사이였다. 그러니까 이 새끼는 오늘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으로 들어오자마자 예준이 입에 걸어 놨던 봉인을 풀었다.
“약 빨다 미쳤냐?”
“야, 내 취향 아는 놈이 왜 그러냐.”
너무 잘 알아서 더 안 된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귀여운 건 남들에게도 귀여워 보이겠지만, 굉장히 불쾌했다.
“그리고 내가 뭘 했다고 그래. 그냥 마음에 들어서 말 몇 번 건 게 다잖아.”
“왜 올 때마다 여기 있는데?”
“내가 관리하는 곳인데 여기 있어야지.”
병원장 아들이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줄 알았더니 아예 관리직을 맡아서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직원들 감시나 하러 오는 거겠지만. 예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걔 미성년자인 거 알지. 그래서 천천히 그냥 좀 해 보겠다고. 너한테 그러는 것도 아닌데 왜 난리야?”
솔직히 준이 그냥 귀여워서 좋은 건지 조금 고민했는데, 지금 보니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더 열이 나는 걸 보니까. 미성년자인 걸 알면서 건드리려는 뻔뻔한 태도에 화가 났던 예준은 곧 선욱과 자신이 동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딱 2초간 양심의 가책을 느낀 예준이 곧바로 아무렇지 않게 협박을 감행했다.
“병원 문 닫고 싶냐?”
“뭔 씨발, 네가 무슨 수로 우리 병원 문을 닫아?”
선욱이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돈은 예준만 많은 게 아니었다. 전 세계 시장을 손바닥에 쥐락펴락하는 집안도 아니고, 무엇보다 예준은 외동이면서도 회사를 포기한 천하의 미친놈이었다. 부모 속을 까맣게 태우고 문예창작과에 진학하더니, 뜬금없이 아이돌로 데뷔한 이야기는 재벌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네가 그렇게 잘난 줄 알아? 회사도 걷어 찬 새끼가.”
남들은 친척에게라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는 마당에, 그걸 그냥 버리고 나온 것부터 예준은 별거 없는 놈이었다. VIP 병동 관리를 맡은 자신과 아이돌 딴따라나 하고 있는 예준은 엄연히 다른 위치였다. 자신감을 얻은 선욱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누가 돈 쓴대?”
예준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들고 있는 음료수 캔이 갑자기 위협적으로 보였다. 이건 다 예준의 키가 큰 탓이었다. 인상이 센 것도 한몫했다.
선욱이 침을 삼켰다. 부디 이 소리가 예준에게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고작 한 걸음 다가왔다고 바로 기가 죽은 선욱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명백한 패배였다.
한참 선욱을 내려다보던, 곱게 자라서 싸움을 잘 못하는 온실 속의 화초가 천천히 입을 뗐다.
“다 때려 부숴서 문 닫게 해준다고. 나랑 한 번 깊게 얽혀 보고 싶어?”
무시무시한 예고였다. 세상 그 무엇보다 진심인 눈빛이었다. 양예준 이 새끼라면 당장 내일이라도 충분히 골프채든, 야구 배트든 들고 와서 값비싼 의료기기를 때려 부술 것 같았다. 다음 날 사회 1면에 자기 얼굴과 이름이 나오든 말든. 아마 그중에서 가장 우선으로 부서지는 건…….
오싹한 기분에 선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자기 입으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 싸움을 못 한다고 말하던 예준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아, 알았다고. 앞으로 아는 척 안 할 테니까 나와.”
아쉬움을 뒤로 한 선욱이 예준을 지나쳤다. 돈 주면 하룻밤을 함께 해주는 놈들이 사방에 널렸는데, 굳이 못 먹는 떡을 계속 노릴 필요는 없었다. 예준과 얽혀서 좋은 꼴을 볼 리도 없고. 선욱이 졸업한 지 몇 년 된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같은 반도 해 본 적 없고, 친하지도 않아서 예준은 몰랐겠지만 선욱은 그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래서 예준의 이야기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 나름 성실하게 나오는가 싶다가도 안 내키면 안 나오고, 학교 행사도 참여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항상 부모님의 뜻대로만 살아 온 선욱의 눈에는 그저 양아치일 뿐인데, 놀랍게도 선생님들은 다 예뻐했다.
성적이 괜찮아서인지, 아니면 잘생긴 외모 탓에 눈에 띄어서인지. 집안이 좋은 놈들은 많았는데 예준은 유난히 특별 취급을 받았다. 굳이 자신이 끼려고 하지 않아도 다른 애들이 어떻게든 끼워주지 못해서 안달인 놈. 늘 함께 다니는 무리와 고등학교 3년을 함께한 선욱이 그걸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예준은 모르는 게 당연했다.
선생님과 학우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예준은 하고 싶은 걸 다 했다. 시답잖은 랩 가사나 쓰면서 문예 창작과 진학이라니. 부모 잘 만나서 가정도 풍족하고, 하고 싶은 일도 마음대로 하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재수 없고, 이유 모를 증오까지 느껴졌다.
“근데 왜 그렇게 날을 세워. 사귀냐? 내가 임자 있는 걸 건드렸나?”
사귀는 거 티 나나. 잘 어울리나 보네. 태연하게 자신과 준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던 예준이,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너 같은 새끼는 어제 막 사귄 친구도 소개 안 시켜줘, 씹새끼야.”
갑작스럽게 씹새끼가 된 선욱이 황당함에 몸을 굳힌 사이에 예준이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장 병실로 들어갔다.
“얘기 잘 하고 왔어요?”
문을 열자마자 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손으로는 어머니 어깨를 야무지게 주무르는 중이었다. 기특하네. 준의 등을 툭툭 두드려 준 예준은 그렇게 병실에서 한참을 함께 있었다. 검사 시간이 되어서 들어온 간호사가 정말 가족처럼 보인다고도 했다.
“형. 아까 그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욕실에 들어가서 손을 씻고 나온 준이 물었다. 수건으로 닦고 나오지 않았는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한 번 쳐다본 예준이 욕실로 들어가면서 대답했다.
“별 얘기 안 했는데.”
막 들고 나온 수건으로 예준이 준의 손을 닦아냈다. 답지 않게 세심한 손길에 준이 열이 오른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을 귀신같이 발견한 예준이 웃으며 볼을 툭 건드렸다.
원래 연애하고 나면 다 귀여워 보이고 그러나. 연애 경험이 별로 없는 예준에게 요 며칠 일어난 감정의 변화는 굉장히 특별한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모두 예준을 오해했다. 여자 삼천 명쯤 거느렸을 거라는 둥, 반나절 사귀고 걷어차인 애도 있을 거라는 둥,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이 마구잡이로 돌아다녔다. 그러니 굳이 소개해 주지 않아도 줄을 설 거라며 소개팅 주선도 잘 안 해 줬다. 몇 번이나 연애 경험도 별로 없고, 여자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도 믿어주지 않았다.
“넌 아까 음료수 뽑고 온다더니 왜 걔랑 얘기하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말을 거는데 무시할 수는 없잖아요.”
“넌 평범한 사람 아니고 연예인이잖아.”
“연예인이 무시하면 더 욕먹잖아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예준이 잠시 말을 멈췄다. 무시할 수 없다면 가시라도 좀 세울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예준이 준을 바닥에 앉혔다.
“정색하는 법을 좀 배우자.”
“왜요?”
“웃고 있으면 더 만만하게 본다. 너도 거울 보면 알겠지만 웃으면 분위기가 너무 물러져.”
“근데 이렇게 웃으면 다 좋아해요.”
준이 양쪽 입꼬리를 올렸다. 입 모양이 귀여웠다. 위로 밀려 올라간 볼을 손가락으로 누른 예준이 물었다.
“누가 좋아하는데?”
“애들이나, 선생님이나, 그냥 지나가다 만나는 사람들이나.”
준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지나가다 만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대체 무슨 상관인지 예준은 알 수 없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싫은 사람한테도 나쁘게 굴면 안 돼요. 다 잘해줘야지.”
“싫은 사람한테 왜 나쁘게 굴면 안 되는데?”
“어…….”
준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모순된 말이기 때문이었다.
“미움 받는 게 싫어?”
“싫은 것보단, 되게 오래…… 혼자였으니까. 그때로 돌아가기도 싫고…….”
장장 5년 가까이 품고 있는 생각이었다. 겨우 얻게 된 인연들이 등을 돌리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무서웠다. 당장 예준만 해도 항상 당당한 사람인데, 우울하고 보기만 해도 기운 빠지는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나 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데도 잘 살잖아.”
“형은 원래 그래도 되는 사람이고요…….”
“원래 그래도 되는 사람이 어디 있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예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자존감이 왜 이렇게 낮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존감으로는 남에게 져본 적 없는 예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통 잘생긴 애들은 자존감이 높았다. 살면서 외모 덕을 수없이 봤을 테니까. 스스로가 잘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해도, 무의식중에 당당함은 묻어나기 마련이었다. 준도 분명히 어느 정도는 그걸 누리면서 살았을 텐데도 이상할 정도로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다.
“형은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모여 들잖아요.”
준이 노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 케이스라면, 예준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주목을 받았다. 근본이 다르니까 예준은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예준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해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준의 일이니까.
“사람들이 뭐가 중요해.”
“형은.”
“가만히 있어도 내가 가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예준의 말에 준이 살짝 떨궜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놀라울 정도로 당당한 소리인데, 준에게는 세상 그 어떤 위로보다 더 크고 다정하게 들렸다.
무엇보다 예준이 먼저 저런 말을 해줬다는 게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물론 놀릴 게 분명해서 정말 울지는 않았다. 울렁거리는 목구멍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입 안의 여린 살을 몰래 깨물었다. 눈가가 욱신거리고 몸이 홧홧했다.
“나 봐, 우리 사귀잖아.”
“어…….”
아직 몸을 제대로 진정시키지 못한 준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흐렸다. 예준도 저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저런 다정한 말까지 해 줬으니까 사귀는 게 맞을 텐데 솔직히 준은 아직 예준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언제나 똑같아서. 가끔 저를 따뜻하게 쳐다보다가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야기하는 걸 보면, 그냥 여전히 멤버 형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근데 형. 이런 거 물어보면 화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화날 것 같은데 꼭 해야겠냐?”
“궁금하니까. 형은 그냥…… 내가 왜 좋은데요?”
예전에 예준이 준에게 물었던 질문과 똑같았다. 준은 그때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 예준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느라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준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형한테는 좋은 거 하나도 없잖아요. 특별히 잘난 것도 아닌데 남자이기까지 하고…….”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말에서 묻어났다. 몇 날 며칠, 잠도 자지 못하고 끙끙댔을 머릿속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실제로 온갖 인터넷을 뒤지며 동성애자들의 사연을 수집하고 다녔던 준이 예준의 얼굴을 힐끔 살폈다.
“나는 그냥, 형이 잘해줘서, 형이 하는 행동들이 다 좋아서, 그러다가 어쩌다 보니까 그런 건데……. 형한테는 그런 이유도 없잖아요.”
“전에는 이유 없다더니 다 있네.”
“어디가 좋은지 뭐라고 콕 집어서 말은 못 하니까요. 근데 형은 있을 거 아니에요.”
“나는 왜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형은, 어, 나를 그만큼 안 좋아하니까…….”
준의 말에 예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반박할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예준은 입을 열지 않았다.
“형이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내 속은 형한테 다 들킨 것 같은데, 나는 형 계속 보고 있어도 잘 모르겠으니까.”
준이 예준의 눈치를 보며 계속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예준은 그걸 제지하지 않았다.
“그냥 친한 동생인 것 같고.”
“내가 그냥 친한 동생한테는 이렇게 안 해준다니까.”
드디어 예준이 말을 끊어냈다. 친한 동생이라는 말을 그냥 넘기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나름 표현한다고 한 건데. 남과 몸을 붙이고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 자신과 이만큼 붙어 있었으면 충분히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전달이 잘 안 된 모양이었다.
“넌 내가 되게 착한 줄 알지?”
“그건 아니에요.”
바로 떨어지는 대답에 예준이 머쓱하게 말을 멈췄다가, 두어 번 기침을 하고 다시 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나 안 착하잖아. 근데 내가 어떻게 해 주는지 보고도 널 안 좋아한다는 소리를 해?”
예준이 괘씸하다는 듯 준의 볼을 살짝 아프게 꼬집었다. 이번에는 조금 아프긴 했는지 준이 손을 들어 예준의 손이 다녀간 오른쪽 볼을 살짝 쓸어내렸다.
“아니, 형 그게…….”
예준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준이 황급히 변명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예준은 그걸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쨌든 표현을 안 하니까 모르겠다 이거지?”
예준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앞머리가 흐트러진 탓에 드러난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입술을 떼자마자 예준은 곧바로 또 후회했다. 양심이 너무 가끔씩 돌아오면 이런 문제가 있었다. 굉장히 충동적인 사람이 된다는 점. 삶은 후회의 연속이라지만 찾아오는 횟수가 너무 잦았다.
애가 사랑받는 줄 모르고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예준이 이마를 짚고 방금 전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안, 감았던 눈을 살짝 뜬 준이 눈을 깜빡였다.
“형, 이리 와 봐요.”
말 안 하고 뽀뽀했다고 혼나는 거 아니냐. 예준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준이 예준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 젖살이 빠진 지 오래인 어른의 볼에, 아직 채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야.”
“아, 몰라요.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참지 못한 웃음을 터트리며 예준이 준의 머리를 헤집었다. 금방이라도 불에 탈 것처럼 빨개진 귀를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건드렸다가 울기라도 할까 봐 참았다.
“맨날 업어달라고 달라붙어서 징징대더니 많이 컸네.”
“그거는 어릴 때잖아요…….”
“스물두 살에도 그러던데?”
“언제…… 스물두 살이요?”
준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예준의 눈에는 지금도 어리면서 열일곱 때를 어릴 때라고 칭하는 것도 웃기고, 갑자기 튀어나온 스물두 살이라는 말에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빡이는 것도 웃겼다.
태어나 처음 느껴본 감각이 신기한지 준이 자꾸만 이마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예준의 입술에 닿았던 부분이 뭔가 뜨겁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했다. 꼭 모기에 물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란히 앉으면 키 차이 때문에 준의 시선이 딱 예준의 입술에 닿았다. 저도 닿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형, 입술에 한 번만 대봐도 돼요?”
“스무 살 돼서 해. 스무 살.”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요?”
눈이 애교스럽게 접혔다. 아, 이거 진짜. 잠깐 사이에 왠지 준의 표정을 구분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이건 진짜 웃는 얼굴이었다. 예준이 곤란하다는 듯이 입 안의 여린 살을 살짝 깨물었다. 딱 3초 동안만.
“그래, 해.”
애가 먼저 하고 싶다고 한 거니까 괜찮은 거겠지. 바닥을 짚은 두 손이 간지러웠다. 한 번 심호흡을 한 예준이 눕기 직전의 비스듬한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준이 다가오기 전에 먼저 몸을 앞으로 숙였다. 가만히 기다리는 건 적성에 안 맞았다.
아, 몰라. 두 번 회귀했다고 40살이랑 사귈 수는 없잖아. 예준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와서 양심이니 뭐니 하면 뭐 하냐, 이미 얘는 내 건데.
대체 언제 양심 타령을 했냐는 듯, 빠르게 진도를 뺀 예준은 그제야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하현이 방에 있다는 걸 잊었다.
그리 크게 얘기한 것도 아니고, 방문도 굳게 닫혀 있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아닌가. 인기척도 없이 조용한 걸 보니 자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깨어있더라도 하현은 거의 이어폰을 꽂고 있으니까 듣지 못했을 거고.
“자냐?”
잠시 준을 세워두고 아주 조심스럽게 방문을 연 예준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침대에 당황했다. 하현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 넓지도 않은 방에 숨을 곳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아무도 없는데 하현이 혼자 옷장에라도 들어가서 숨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다녀온 사이에 나간 모양이었다.
[어디 갔냐?]
예준이 하현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한참 답이 없었다. 혼자 갈 곳이 없을 텐데. 하현은 예준 못지않게 바깥 활동을 즐기지 않았다.
특별히 게으르거나 한 것도 아닌데. 직업이 연예인이다 보니 밖에 마음대로 나돌아 다니는 게 쉽지 않은데, 하현은 멤버 중에 답답함을 호소하는 빈도수도 제일 적었다.
“하현이 형 없어요?”
“없는데?”
마지막으로 침대 위의 이불을 한 번 들춰본 예준이 말했다. 막 돌아다니다가 사람들한테 깔리면 어쩌려고. 그때 마침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웬일로 빠른 답장이었다.
[지구 만나러요]
아, 어딜 갔나 했더니. 휴대폰에 뜬 딱딱한 글씨에서 흘러넘치는 사랑이 느껴졌다. 어디 멀고 험한 곳에 촬영하러 간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작업하는 프로그램인데 그사이를 못 참고. 예준이 혀를 차며 메신저 창을 밑으로 내렸다.
“형 어디래요?”
“온지구 만나러 갔대.”
“형들 사이 진짜 좋은 것 같아요.”
저렇게 티를 내는데 모르나. 하긴 예준은 워낙 눈치가 빨라서 금방 알아차리긴 했지만, 동성의 같은 그룹 멤버 둘이 사귄다고 생각을 하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러니까 나랑 얘랑 사귀는 것도 평생 모르겠지. 부디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예준은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사이좋잖아.”
방금 전까지 벽에 등이 닿을 정도로 밀어붙여 놓고, 예준이 평온한 얼굴로 준의 뒤통수를 감쌌다. 이마에 짧게 한 번 더 뽀뽀한 예준이 한 손으로 느긋하게 답장을 보냈다.
[즐사^^]
즐겁게 사랑하라는 뜻에서 보낸 문자였으나 슬프게도 무참히 씹혔다.
* * *
“프로그램 들어왔어.”
불쑥 숙소로 찾아온 매니저가 예준을 불러 꺼낸 말이었다. 이맘때쯤 한 게 뭐였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본 예준이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 바뀌었지. 대체 이번에는 뭐가 다르길래 아예 다른 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일련의 사건들이 변하는 건지 궁금했다.
“정글 가는 프로그램이 들어왔는데.”
“정글이요?”
상상만 해도 끔찍해서 예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맨바닥에서 자는 것도 등 배겨서 싫은데. 예준이 혈압을 올리는 짓을 할 때도 부모님은 화를 내면 냈지, 단 한 번도 아들에게 이겨 보거나 체벌한 적이 없었다. 그 말인즉슨 예준은 살면서 한 번도 고단한 환경에 처해 본 적이 없다는 소리였다.
프로답지 못하게 싫다고 안 갈 수는 없고. 예준이 미간을 살며시 찌푸리며 TV에서 봤던 정글의 모습을 그렸다. 커다란 생선 한 마리를 잡아서 열 명 가까운 사람들이 나눠 먹는 정다운 장면을.
고작 한 장면 그려 보고서 예준이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냥 프로 안 하면 되지, 뭐.
“형, 저는 정글은 좀.”
“그래서 막내 캐릭터로 준이가 어떨까 해서…….”
“애한테 그런 걸 왜 시켜요?”
예준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 해외여행 가는 프로그램 보내자는 것도 아니고 정글이라니. 조심성 없는 게 돌아다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니, 다치는 것도 문제지만 먹을 것도 똑바로 못 먹을 텐데.
어떻게든 팀을 띄워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도 아니고 이미 승승장구하고 있는 마당에 정글이 웬 말인지 예준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야, 네가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흥분해?”
매니저가 진심으로 당황스럽다는 듯 예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언제나 태평한 예준이 흥분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드문 것이었다. 놀란 기색이 완연한 매니저의 얼굴에 그제야 아차한 예준이 평소의 느긋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신기할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아니, 애를 꼭 보내야 하나 그런 말이죠. 딱히 갈 필요 없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거절했어.”
보통 거절했다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나. 말의 기승전결이 너무나 확실한 매니저의 화법에 예준이 황당함을 겨우 감췄다.
고작 거절했다는 말을 전하려고 숙소까지 왔을 리는 없고. 예준의 생각이 맞았는지 매니저가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다른 걸 받았는데.”
“뭔데요?”
“서바이벌 프로그램.”
“서바이벌은 지긋지긋해서 싫은데요.”
이미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거쳐 데뷔한 예준은 더 이상 그런 치열한 경쟁에 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생각도 해 보지 않고 거절하는 예준에, 매니저가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네가 참가하는 거 아니고 심사위원이야.”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힙합 프로그램이라는데.”
다섯 멤버 중에 굳이 자신을 집었을 때부터 대충 느낌은 왔지만 정말일 줄은 몰랐다. 다른 것도 아니고 힙합이라니. 랩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바로 수락할 수는 없었다. 예준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그쪽에서 저 부른 거예요?”
“어. 딱 집어서 너.”
꼭 아이돌을 이런 자리에 부르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 있었다. 프로그램은 예준의 실력이 아닌 인기에 더 주목했다. 이런 자리에 아이돌을 하나씩 끼워 넣으면 기사 내기도 좋고, 초반 화제성을 끌기에도 좋았다.
물론 거의 15년이 넘게 랩을 해 온 예준은 박자를 제법 타고 가사도 잘 썼다. 나름 비트도 찍어보고, 혼자 작업물도 몇 번 냈다.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없는 게 아닌데도 예준이 망설이는 이유가 있었다.
“인정 못 한다고 난리 날 거 아니에요.”
예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새끼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힙합판에, 아이돌이 심사위원으로 끼는 것부터가 이미 욕을 먹어도 백 번은 먹을 일이었다. 실제로 예전에 하현이 춤추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진행했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멘토로 초청됐다가, 아이돌이라고 온갖 무시만 당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고,
춤이든, 노래든, 랩이든. 그 어떤 분야에서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돌은 좋은 취급을 못 받았다. 예준도 알고 있기 때문에 썩 내키지가 않았다.
“설마 너보고 심사를 하라고 하겠냐. 특별 심사위원이래. 그냥 리액션이나 좀 해주고 오면 되는 거야.”
특별 심사위원은 또 뭐야. 벌써부터 피곤했지만, 어쨌거나 직접 평가하는 위치는 아닌 것 같아 예준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걸로 전달하겠다며 매니저가 허겁지겁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대화 중간에 나와서 예준이 어디 출연하는지 들은 준이 다가왔다.
“형 뭐 나가요?”
“그냥 뭐 랩 하는 프로그램. 병풍처럼 박수만 치다 오면 된대. 간식 사다 놨으니까 가서 먹어.”
예준이 별거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준을 부엌으로 보냈다. 간식이라는 얘기에 방금 자신이 뭘 물어봤는지도 잊어버리고, 신나게 봉지를 뜯는 걸 보면서 예준이 편하게 누웠다.
모르겠다, 알아서 되겠지. 준을 보자마자 방금 전의 일을 싹 잊어버린 예준이 입을 벌려 웃었다.
* * *
그렇게 눈 깜빡할 사이에 촬영 날이 찾아왔다. 예준이 나온다는 기사는 이미 나갔고, 역시나 댓글에 별 헛소리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예전에 힙합 프로그램에 나갔던 일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레벨도 안 되는 게 여길 왜 나오냐는 국힙 팬들과, 요즘 우리 오빠 실력 폭주하는 걸 너네들이 아냐며 실드 치는 팬들이 몇 시간이나 싸웠다. 예준은 그걸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팬들 얼굴에 먹칠 안 하려면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보다 더 화려한 정장을 찾아 입고, 오랜만에 숍에 들른 예준이 완벽한 연예인의 모습으로 촬영장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스태프들에게 한 명 한 명 인사한 예준이 대본을 받았다. 매니저의 말대로 예준이 하는 일은 딱히 없었다. 그냥 리액션만 잘 해주면 되겠네. 대본을 내려놓은 예준이 준비된 자리로 가려고 발을 틀었다. 그때 누군가 예준의 이름을 불렀다.
“양예준!”
한눈에 보기에도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빨갛게 염색한 머리가 어깨 위에서 거칠게 흔들렸다. 파격적인 옷차림은 주변인들의 관심을 한 번에 샀다. 남다른 색감을 자랑하는 알록달록한 티셔츠를 한 번 휘날린 지예가 예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 누나.”
“웬일이야, 여기는.”
지예는 예준의 먼 친척이었다. 몇 촌이나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친척. 솔직히 말하면 남이라도 봐도 무방한 사이지만 일단은 피가 섞였다고 괜히 친근하게 느껴지긴 했다. 성격도 좋은 편이고.
“너 여기 나오냐? 아이돌도 나오는 프로였어?”
“내가 뭐가 아쉬워서 여길 나와. 심사위원으로 나온 건데 기사 못 봤나 보네.”
“심사위원? 어쩐지 옷이.”
정장을 차려 입은 예준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지예가 자신의 이마를 쳤다.
“아니다, 너 평상시에도 그렇게 오버 떨면서 입고 다니지. 까먹었네.”
“뭘 새삼스럽게. 누나는 왜 왔는데?”
“난 친구 응원하러 왔지.”
“일반인이 막 방청해도 되는 거야?”
예준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오늘 촬영하는 프로그램은 방청 신청을 따로 받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참가자와 심사위원만 무대를 볼 수 있는 방송이었다.
예준의 물음에 지예가 당당하게 주머니를 뒤져 카드를 꺼내 들었다.
“돈 있으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조용히 앉아 있다 갈 거야.”
“그러던지.”
“열심히 해라.”
지예가 발뒤꿈치를 들고 예준의 어깨를 두드린 후에 참가자 석으로 향했다.
세트장에는 심사위원들이 차례로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다섯 개 있고, 그 앞에 커다란 무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2층에 참가자들이 순서대로 앉아 대기했다. 방해가 되지 않게 가장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던 지예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분명 예준과 같은 그룹의 멤버였다. 촬영한다고 응원해 주러 왔나. 계단을 타고 올라온 준이 곧장 난간을 붙잡고 예준의 이름을 불렀다.
“형!”
막 정해진 자리에 앉은 예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니겠지, 설마. 안 본 지 세 시간이 넘어서 환청이 들리는 거겠지 싶어 예준은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분명 들렸을 것 같은데. 무대가 넓긴 하지만 참가자석과 그렇게 많이 떨어져 있진 않았다. 난간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고 예준을 불렀던 준이 갸우뚱했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고, 난간을 손으로 짚으면서 몸을 앞으로 뺐다.
“형!”
두 번 부르자 이제야 예준이 고개를 돌렸다. 설마 잘못 들었겠지 싶었는데 진짜 준이 있었다. 그것도 신나게 손까지 흔들면서. 마냥 해맑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준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 손으로 난간을 짚고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란 예준이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야, 너 거기서 안 내려와?”
예준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준이 살짝 휘청거렸다. 마침 바로 뒤에 있던 참가자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준을 조용히 아래로 내려줬다.
하여간 안심이 안 돼요. 이마를 짚은 예준이 그제야 고요해진 주변을 알아차렸다.
“……죄송합니다. 계속하세요.”
예준의 말에,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던 스태프들이 다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촬영 보러 왔나. 잘 하고 오라고 하더니 서프라이즈인가. 예준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하여간 예쁜 짓 잘한다니까.
서로의 촬영장을 밥 먹듯이 들락날락하던 지구와 하현을 보며 혀를 찬 게 언제냐는 듯, 예준이 마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배부 받은 프린트를 넘겼다.
프린트에는 참가한 참가자들이 직접 적은 자기소개와 오늘 선보일 무대의 랩 가사가 적혀 있었다. 한참을 넘기던 예준이 잊을 수 없는 익숙한 얼굴에 손가락을 멈췄다.
“어.”
예준이 아이돌을 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 제공자의 사진이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랩을 듣고 갖은 비꼼과 혹평을 쏟아 낸 바로 그 새끼.
그때는 심사위원이었는데 참가자로 나왔네. 예준이 웃으며 옆에 준비된 펜을 들고 별을 크게 그렸다. 집중해서 들어야겠네.
촬영 시작이 가까워지자 진짜 심사위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착석했다. 예준은 한 명 한 명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아이돌로 데뷔하기 전에 언더에서 랩을 했던 예준에게는 모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랩을 못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당연히 전문 래퍼들이랑 비교할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겸손함을 찾은 예준이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별표를 쳐 놨던 페이지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지금 보니 굳이 자신을 특별 심사위원으로 초청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예전 그 일을, 힙합 프로그램 담당 PD가 모를 리가 없고……. 딱 봐도 시청률을 노린 캐스팅이었다.
과거 심사위원과 참가자로 만났던 악연이, 거꾸로 참가자랑 심사위원이 돼서 만난다니. 이만큼 기사 내기 좋고, 자극적인 소재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야, 양예준. 오랜만이다.”
재수 없는 프로필 사진을 빤히 쳐다보는데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돌리니 다섯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 한참 랩을 활발하게 할 때 친해진 형들 중 한 명이었다.
연락 안 한지 꽤 됐지만. 이전 생에서 3주년쯤 됐을 때 오랜만이라고 술 한잔 했던 기억이 있는데, 과거에는 없던 스케줄이 생기는 바람에 조금 빨리 만나게 된 것 같았다.
“네, 형. 오랜만이네요.”
“네가 심사위원으로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여기 다즈 나오는 거 아냐?”
“방금 봤어요.”
예준이 걔가 나오는 게 무슨 대수냐는 듯 어깨를 살짝 들었다 놓았다. 아무래도 얼굴에 미소가 만연한 걸 보니, 두 사람의 만남이 상상만 해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불난 집 구경하는 게 재밌긴 하지. 기대감 가득한 표정을 힐끗 본 예준이 슬슬 준비하자며 상대방을 자리로 돌려보냈다.
다즈는 랩을 잘 하는 편이었다. 그 또한 힙합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을 맡았을 정도니까. 그때부터 한 4년 정도 지났으니까 이제 과거의 영광인가. 예준이 볼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뛰어난 랩 실력을 다 뒤덮을 정도로 다즈는 여러 사건들을 끌고 다녔다. 막말 논란으로 한 번 매장 당하고, 문란한 사생활까지 매스컴을 타면서 인식은 더더욱 나빠졌다.
아무리 힙합판은 인성이 아니라 실력으로 팬이 되는 곳이라지만, 네티즌들의 반발 탓에 방송에 나오기는 힘들어졌다. 거기에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음주운전까지 하는 바람에 방송 인생은 송두리째 말아먹은 거나 다름없었다. 여기 참가자로 나오는 것도 힘들었을 게 뻔했다.
촬영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달은 예준이 나머지 참가자들도 빠르게 훑었다. 한때 엄청난 인맥을 자랑했던 예준답게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두 번씩이나 회귀하다 보니 이제는 이름들도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그때, 갑자기 진동으로 설정해 뒀던 휴대폰이 울렸다.
[형 열심히 해요!!!(이모티콘)]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예준이 고개를 들어 아까 봤던 참가자석을 쳐다봤다. 준이 자신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까 혼나서인지, 다행히 이제는 난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얘는 이모티콘도 자기 같은 거 쓰네. 똑같은 걸 사려고 이모티콘을 길게 누른 예준은, 특정 게임 사전예약을 하면 무료로 지급해 준다는 말을 보고 빵 터졌다. 진짜 얘답다.
아직 예준이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는데, 준이 옆에 앉아있던 참가자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높은 시력을 가진 예준의 눈에 그 모습이 뚜렷하게 들어왔다.
저거 하여간 친화력 하고는. 조금 넣어 놔도 된다니까 그러네. 이제 처음 보는 사람과 말을 트는 것 정도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신나게 이야기하는 준을 보며 예준이 눈을 찌푸렸다.
[야 너 당장 안 떨어지냐??]
[10초 안에 안 떨어지면 너랑 얘기하는 놈이 거기서 떨어질 줄 알아]
쓸데없이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해 가며 예준이 메시지를 전송했다. 다행히 소리를 켜 놨는지 준이 곧장 메신저를 확인했다. 화면에 뜬 읽음 표시와, 이쪽을 향해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는 준을 번갈아 가며 쳐다 본 예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촬영 시작할게요.”
스태프 한 명이 앞으로 나와 촬영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곧바로 심사위원 소개 영상부터 찍어야 한다며, 한 명씩 일어나서 인사를 해 달라고 했다.
예준은 특별 심사위원이라 다른 심사위원들과 살짝 떨어져 있었다. 따돌림 당하는 거 같네. 마지막으로 일어난 예준이 고개를 숙이자 박수 소리가 확 줄어들었다.
“다시 한 번 찍을게요. 호응 좀 크게요.”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방송인데 한 번에 좀 잘하면 안 되나. 예준이 속으로만 혀를 찼다. 이런 작은 일화들도 나중에 스태프들 입을 타고 다 퍼지기 마련이었다. 서로서로 안 좋은 일인데 굳이 왜 이렇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예준은 미리 전달 받은 대로 성실하게 리액션을 했다. 굳이 나서서 쓸데없이 말을 보태지도 않았고, 오버하거나 과하게 박수를 치지도 않았다. 예준이 맡은 역할은 딱 이 정도였다.
무엇보다 예준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오면 자연히 시선이 꽂힐 테니, 굳이 열심히 멘트를 할 필요가 없었다.
진행이 깔끔해서인지 참가자가 많은데도 빠르게 차례가 넘어갔다. 그리고 끝부분에 가서야 드디어 모두가 원하던 그 이름이 화면에 떴다.
“다즈, 무대 위로 올라갈게요.”
스태프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모두의 환호가 터졌다. 볼에 새로 한 타투를 마음껏 뽐내며,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 사람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예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봤다. 카메라가 아까보다 더 바쁘게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나름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다즈가 곧장 예준에게 시선을 꽂았다. 아까 위에서부터 계속 보고 있던 게 분명했다.
쳐다보면 어쩔 건데. 오늘만큼은 참가자가 아닌, 특별 심사위원으로 초대 받은 예준이 당당하게 시선을 받았다.
“내가 하다 하다 아이돌한테 평가를 다 받네.”
이럴 줄 알았다. 원래 다즈는 하고 싶은 말을 절대 못 참는 성격이었다. 래퍼들 중에 욱하는 성질을 못 참고 방송에서 이런저런 막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다즈는 그들과 급이 달랐다. 하도 SNS에 다른 연예인들을 저격하고 다녀서 팬들이 제발 SNS 지우고 랩만 하라고 애원할 정도였다. 랩을 잘하지 않았다면 뭘 해 먹고 살았을지 솔직히 예준도 궁금했다.
“심사위원이 참가자보다 못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역시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는 인간답게, 카메라가 몇 대나 돌아가고 있는데도 입을 자유롭게 나불거렸다. 무서운 게 없어서 좋겠네. 진짜 무서운 게 없는 건 본인이면서, 태연하게 시비를 받아준 예준이 말했다.
“저는 점수 안 매기니까요. 잘하는 거 얼른 보여주셔야죠, 말만 할 게 아니고.”
예전 같았으면 같이 목소리 높이며 싸웠을 예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에 흐르는 명백한 날카로운 기류에, 주변이 묘하게 소란스러워졌다. 곧 비트가 흘러나오고 다즈가 그 위에 자연스럽게 랩을 했다.
온갖 일을 다 겪어서 그런가, 스타일 많이 바뀌었네. 한껏 치명적인 감성이 덧칠된 랩을 들은 예준의 감상은 이랬다.
“최근에 안 좋은 일이라도 겪으셨는지……. 가사가 전체적으로 우울한데, 그래서 분위기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약간 취한 채로 뻥 뚫린 도로를 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씨발.”
엄연히 칭찬으로 끝나는 말이었지만,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준의 심사가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흠뻑 취한 채로 야밤에 고속도로를 질주했던 다즈는 곧바로 마이크에 대고 욕을 했다. 이미 수많은 방송에서 욕설을 터트려 삐 처리하게 만든 사람답게 거침이 없었다. 하여간 본인 이미지 스스로 다 깎아먹는다니까.
“더럽고 자존심 상해서 못 해 먹겠네.”
금방이라도 침을 뱉을 기세로 다즈가 거칠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영어로 욕을 하며 뒤돌아섰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화를 못 참을까. 그 누구보다 분노를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던 예준이 혀를 차며, 마지막으로 앞에 놓인 마이크를 집어 들고 한마디 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승승장구하셨으면 좋겠네요.”
예준의 표정에 내려가던 다즈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에 저 끝에 앉아 있던 심사위원 한 명이 빵 터졌다. 이 자리에 최근 다즈가 여러 논란 속에 흔들다리를 건너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준이는 모를 수도 있겠네. 예준이 저 멀리 작게 보이는 얼굴을 짧게 살폈다.
“다음 분 갈게요.”
차분하게 상황까지 정리한 예준이 프로답게 표정을 관리했다. 똑같은 인생을 세 번째 살고 있는 예준은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 자신에게 유리한지 알았다. 쓸데없이 흥분해 봐야 얻는 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촬영은 무사히 끝났다. 아주 재미있는 장면을 얻었다는 듯 PD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예준에게 인사했다. 시청률이 잘 나왔으면 좋겠다며 입에 발린 말을 한 예준이 옷매무새를 정돈하는데, 준이 빠르게 달려와서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형!”
다 큰 남자 둘이 찰싹 달라붙은 모습에 주변에서 시선이 잠깐 꽂혔다가 흩어졌다. 참 사이좋은 멤버라고 생각하겠지. 예준이 준을 살짝 떼어냈다.
“아까 그 사람 말하는 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요. 어떻게 사람 면전에 대고 욕을 하고 그러지.”
형도 나쁜 말 하긴 했는데. 정곡을 찌르고 심기를 건드리는 말. 하지만 준은 뉴스를 잘 보지 않기 때문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몰랐다. 그냥 예준에게 방송에서 욕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서, 조잘조잘 자신이 느낀 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형 랩 옛날에 들은 거 빼고 한 번도 안 들었을 거면서. 방송에서 저렇게 얘기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사람이 다 각자 배울 점이 있는 건데.”
준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더 답답하고 화가 나는지 얼굴에서 이런저런 감정이 다 드러났다. 귀여워 죽겠네. 애초에 화가 나지도 않았지만, 준이 이렇게 반응하는 걸 보니 없던 화도 풀리는 기분이었다. 예준이 잔뜩 풀어진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숙소 가자.”
“네.”
준이 예준의 손을 잡았다. 작지 않은 준의 손이 그보다 더 커다란 예준의 손안에 들어왔다. 예준은 손이 커서 좋았다. 표정을 숨기지 못한 준이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손가락으로 예준의 손등을 살살 간지럽혔다.
“양예준!”
불린 건 예준의 이름인데,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본 건 준이었다.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여자 하나가 이쪽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까 참가자 석에서 본 사람이다. 워낙 눈에 띄는 스타일링을 하고 있어서 계속 시선이 가긴 했는데, 설마하니 예준과 아는 사이일 줄은 몰랐다.
“어, 누나.”
예준이 걸음을 멈춰, 준과 맞잡은 손이 아닌 반대쪽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예준에게 아는 누나가 삼천 명쯤 있다는 건 들은 적 있으나, 직접 본 건 처음이라 준이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친구의 무대를 보러 왔다가, 재밌는 구경을 한 지예가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팔랑팔랑 걷는 걸음이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웠다. 하지만 눈앞에서 짜릿하고 즐거운 광경을 본 지예는 한시라도 빨리 예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아까 다즈 내려갈 때 표정 봤냐? 저건 무조건 방송 타야 돼. 아, 근데 너 남한테 욕 들으면 바로 지랄하는 게 웬일로 침착하더라.”
“원래 어른은 막 성질내고 그러면 안 되잖아.”
예전에 프로그램 나왔을 때도 성인이었으면서 대판 싸워놓고. 갑작스럽게 성숙한 어른인 척하는 예준의 어깨를 지예가 툭툭 쳤다. 그 모습을 준이 가만히 쳐다봤다.
몰래 오는 거라, 지극히 평범한 차림으로 온 저와 다르게 지예는 아주 화려하고 반짝거렸다. 저 금색 체인 때문인가. 평소보다 배는 화려한 정장을 입은 예준과 나란히 서 있으니 뭔가 모델들 같았다.
“나 간다, 방송 꼭 챙겨 봐라. 아까 그거 카메라로 찍힌 거 봐야 돼.”
지예가 손을 정신없이 휙휙 흔들며 멀어졌다. 그때까지도 예준과 꼭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준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형, 누구예요?”
뭐 중요한 거라고, 국가 기밀이라도 묻는 것처럼 조심스러워 보이는 준의 목소리에 예준이 시선을 살짝 내렸다. 긴장한 고슴도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를 삐죽삐죽 세운 모습에, 눈치 빠른 예준은 이유를 금방 알아차렸다. 지예 누나 때문에 그러나 보네. 장난기가 발동한 예준이 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 영어 못하지.”
“갑자기 뭐예요……. 못 하는 거 알면서…….”
준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예준을 살짝 올려다봤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태어나 처음 본 모의고사에서 준은 당당하게 반 꼴찌를 차지했다. 심지어 영어는 찍은 것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정답만 쏙쏙 피해 가는 바람에 이루 입에 담을 수 없는 점수를 받았다.
그건 그렇고, 분명 누구냐고 물었는데 참 자연스럽게도 말을 돌렸다. 말하기 싫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준은 결국 더 묻지 않고 바뀐 화제를 받아줬다.
“형도 영어 못하잖아요.”
자칭 뭐든 다 잘하는 예준이 유독 약한 게 있다면 영어였다. 타이틀곡이든, 수록곡이든 직접 가사를 쓸 때마다 영어 잘 못 한다며 항상 한국어만 쓰는 예준을 준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귀 대봐.”
예준이 준의 귀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속삭였다. 아무리 예준이 영어를 못해도, 어릴 때부터 몇백짜리 사교육을 그렇게 처발랐는데 간단한 회화도 못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예준과 다르게 아는 단어도 몇 개 없는 준은 간단한 문장조차 해석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뜻인데요?”
“맞춰봐.”
“내가 영어 못해서 못 알아들으니까, 일부러 영어로 얘기하는 거예요?”
준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든지.
“기억해 놨다가 나중에 번역기 돌려 볼 거예요!”
깜찍한 발상에 예준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까지 잘도 기억하겠다. 벌써 화내느라 예준이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린 듯한 준의 손을 예준이 끌어당겼다.
“너 지금 까먹었지.”
“아니……거든요?”
까먹은 게 확실해 보이는 얼굴 위로 예준이 손을 덮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볼을 살짝 간지럽힌 뒤에,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방금 만난 누나, 내 먼 친척이라고.”
“…….”
준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제 한 5초 정도 세면 귀부터 빨개지겠네. 예준이 준을 붙잡지 않은 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정말 다섯 개를 접자마자 준의 얼굴에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런 건 좀 빨리 말해 주면 안 돼요?”
“그리고 너 좋다고 했는데.”
근처에는 아무도 없고, 보이는 것은 저 멀리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스태프들뿐이지만 예준은 혹시 몰라 허리를 숙이고 귓가에만 작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준을 스쳐 지나서 한 발자국 앞에서 걷기 시작했다. 잠시 뒤에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준이 급히 예준을 따라왔다.
“형 방금 뭐라고 했어요?”
“너 좋다니까.”
예준은 피하지 않고 방금 전에 했던 말을 곧이곧대로 한 번 더 해 줬다. 보폭이 빠른 예준을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다가온 준이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아닌데, 러브도 없고 라이크도 없었는데!”
“형이 그래도 문창과 나왔는데, 그런 흔해 빠진 단어를 쓰면 되겠냐?”
“한 번만 더 해 주면 안 돼요?”
이렇게 귀엽게 부탁하는데 안 들어줄 수도 없고. 재방송을 좋아하지 않는 예준은 친절하게 몇 번이고 말해 줬다. 아까 영어로 했던 말도 다시 해 달라길래 또 해 줬다.
앞으로 가지 않고 촬영장 한복판에 서서 귓속말을 나누는 두 사람에게 이따금 시선이 닿았지만, 다들 바쁜 탓에 금세 신경을 끄고 제 갈 길을 갔다.
“이제 가요.”
충분히 다 들었다고 생각한 준이 다시 예준의 손을 붙잡았다. 나란히 걸어가는 길에 준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입꼬리가 움찔거리고 심장이 간질거렸다. 목구멍이 이따금씩 따끔따끔하기도 했다. 형 너무 좋아. 진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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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뉴스] '온 더 비트' 출격…… 화려한 라인업
박종후 기자 ┃ 기사작성 : 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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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신일보=박종후 기자) 제공:SVD
SVD에서 새로운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선발된 100명의 참가자들이 심사위원 앞에서 무대를 선보이고,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생방송에 진출한다. 프리스타일, 디스배틀 등 다양한 미션들이 준비되어 있어 시청자들이 즐길 거리도 충분하다. 최종 우승 시에는 상금 2억이…… 중략.
레브의 양예준이 특별 심사위원으로 초청된다. '온 더 비트'의 김재윤 PD는 '심사위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는 있으나 직접적으로 평가를 하는 자리는 아니다. 야심한 첫 방송을 기념하여 특별히 초대했다'고 말했다. ……. (중략) 양예준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라 떨린다, 팬들에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댓글[3128]
<누가 댓글을 썼을까요?>
남자 39% 여자 61%
10대 40% 20대 33% 30대 18% 40대 이상 9%
[BEST]dwdw****
아 시발 다즈 인스타로 나간다고 스포올림ㅋㅋㅋㅋㅋㅋ 개꿀잼파티다~~~! 야호!!
└ 얘 설마 걘가요? 옛날에 예준이랑 싸운?
└ ㄴ 맞음요
└ 와ㅋㅋㅋㅋㅋㅋ 2차전 보는건가(두근두근)
└ 이게 무슨 말인지 설명해주실 분 있으신가요~?
└ └ 예준이 데뷔전에 힙합 프로그램 나왔다가 다즈라는 래퍼랑 싸웠어요ㅇㅇ
└ 이건 예준이 말도 들어봐야한다.. 다즈 나오는거 알긴 했을까ㅎㅎ
[BEST]dpwl****
피디 제대로 노렸네ㅋㅋㅋㅋㅋㅋㅋㅋ
└ 방송 재밌게할줄 아는듯
└ 아니 재밌자고 뻔히 욕처먹을거 알면서 부르냐.. 짜증나네
[BEST]nowm****
아 나 이런거 싫다고ㅠㅠ 제발.. 애들 이런데 내보내지말자ㅠㅠ 하현이때도 그렇고 또 국힙팬들이 오지게 까기 시작하잖아....
└ ㄹㅇ ㅠㅠ 아니 베댓에만 없지 좀만 밑으로 내리면 까는댓글 수두룩하다고
└ 아이돌이 참가자로 나가도 왜 나왔냐고 욕먹는데..
└ 심사위원으로 나오는거면 말다함ㄹㅇ
└ 우린 걍 억울한거죠ㅠ.ㅠ 예준이가 먼저 나가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닐텐데
[BEST]reve****
특별 심사위원이라 심사는 안한다.. 그럼 걍 병풍처럼 앉혀놓겠다는 소린데.....ㅎㅎ 굳이 그러는 이유는 안봐도 뻔하다.....
└ 어그로 한번 제대로 끄는거지ㅋㅋㅋㅋ
└ 예준.. 가서 얼굴 자랑이라도 실컷하구오자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