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7)
  • #3

    아침 일찍 눈을 뜬 준이 느린 발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치약을 짠 칫솔을 입에 넣으며 거울을 봤다. 어제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비쳤다.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더 늦게 잠들었으니 당연했다.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잠은 더 멀어지고 얕아졌다. 해 뜨는 걸 보고 잠들긴 했지만 세 시간은 잤는데, 아예 밤을 새운 것보다 더 피곤했다.

    양치를 하는 동안에도 얄미운 예준의 얼굴은 화장실 이곳저곳을 떠다녔다. 준이 신경질적인 얼굴로 허공에 대고 발길질을 했다. 그러다 좁은 화장실 벽에 발을 부딪치고 그만뒀다. 

    “휴…….”

    잠을 못 자서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예준을 두고 벌어지는 이상 현상을 알아보기 위해서 이런저런 짓을 다 해봤다.

    틈틈이 인터넷으로 저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글을 읽고, 사연 라디오까지 청취했다. 하지만 한 번도 이런 고민 따위 해 본 적이 없으니 남들 이야기를 들어도 확실히 와닿는 건 없었다. 

    거의 2년을 봐온, 한두 살도 아닌 6살이나 연상인, 심지어 형. 걸리는 요소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하며 준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10년 불알친구가 갑자기 예뻐 보인다는 글도 보긴 했지만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준이 한숨을 쉬며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했다. 예준은 한참 거실 침대에 엎어져 자는 중이고, 자신은 어머니를 만나러 가기 위해 막 나가려는 참이었다. 컴백을 하고 나면 당분간은 시간이 전혀 안 날 테니까 갈 수 있을 때 빨리 가서 얼굴을 봐야 했다.

    예준이 갈 때 꼭 같이 가자고 하긴 했지만 차마 병원까지 함께 갈 용기가 없었다. 갈 때도, 올 때도 같은 차를 타야 하는데 그럼…… 이 이상한 감정에 대한 답을 내리기가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며칠째 잠을 설치고 있는 준이 피곤한 눈 밑을 꾹꾹 누르며 옷을 입었다. 휘영이 본다면 기겁할 만큼 상의와 하의가 어울리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연예인처럼 보이지 않아서 정체를 숨기기에는 적합했다.

    “어디 가?”

    “병원이요. 금방 갔다 올게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휘영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휴대폰 앱으로 택시를 부르며 준이 대답했다. 아직 눈을 뜨지 못한 휘영은 보지 못할 텐데도 손까지 붕붕 흔들고 방을 나섰다.

    병원 1층 편의점에서 음료수까지 잊지 않고 구매한 준이 씩씩한 발걸음을 옮겼다. 좋은 병원이라 그런지 괜히 엘리베이터도 빠른 것처럼 느껴졌다.

    함께 탄 사람들은 모두 4층, 5층에서 내리고 준만 높은 층으로 쭉 올라갔다. 아무래도 1인실이다 보니 다른 병실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확실히 큰 병원이라 그런지 방문자 신원까지 확인을 했다. 일단 직원에게 얼굴을 한 번 비치고 방문 기록을 작성한 후에, 소독까지 해야 병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1인실이 확실히 좋긴 하구나, 새삼 생각하며 준이 깨끗하게 소독을 마쳤다. 그리고 병실 문을 벌컥 열었다.

    “엄마!”

    문을 열자마자, 침대에 기대 책을 읽고 있던 준의 어머니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렸다. 당장이라도 뛰어들 것 같은 기세로 달려가던 준은 코앞에 도착하자 몸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어머니를 안았다.

    “곧 컴백이라면서 왜 또 왔어.”

    “엄마 보고 싶어서 왔지.”

    애교스러운 아들의 목소리에 어머니가 기분 좋게 웃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살이 조금 오른 것 같았다. 어머니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핀 준이 주름진 볼에 자신의 볼을 느리게 비볐다. 

    “병원이 참 좋더라.”

    어머니가 한참 병원 시설에 대해 놀라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 번 치료할 때 간호사가 몇 명씩 들어오고, 밥도 깜짝 놀랄 정도로 정갈하고 순하게 잘 나온다고 했다.

    “우리 아들이 돈 벌어서 엄마 이런 병실도 쓰게 해주고. 살면서 이런 호강 처음 해 보네.”

    “더 열심히 벌어 올 거니까 엄마는 걱정하지 말고 빨리 나을 생각만 해. 병원 말고 좋은 여행지 가서 호강해야지.”

    준이 어머니의 마른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온 음료수를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넣어두고, 서툰 손길로 어질러진 것들도 정리한 준이 한참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슬슬 연습할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야겠다. 활동 끝나고 또 올게.”

    “활동 끝나면 쉬어야지, 뭘 또 와.”

    “엄마랑 있는 게 쉬는 거지. 뭐가 또 쉬는 거야. 나 또 온다? 오지 말라고 해도 올 거야.”

    눈을 한껏 접어서 웃어 보인 준이 손을 발랄하게 흔들며 병실 밖으로 나왔다. 상태가 호전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밝아진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던 준이 익숙한 얼굴에 걸음을 멈췄다.

    “아.”

    “어, 또 보네.”

    상대방이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익숙한 얼굴을 빠르게 훑은 준이 곧 어디에서 봤는지를 떠올려냈다. 전에 예준과 함께 왔을 때 만났던 취업 준비생이었다. 준이 허리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욱이 눈앞에 선 준을 위아래로 쭉 훑었다. 얘도 연예인 병 걸렸나. 얼굴이 겨우 살린다고 할 만큼 준의 패션은 매우 독특했다.

    “아이돌인데 시간 많은가 봐? 한가해 보이네.”

    “아직 컴백 전이라 괜찮아요.”

    “아아, 맞다 좀 있으면 컴백하지?”

    선욱은 아주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고 있었지만 준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첫 만남에 예의 없는 사람들이 한둘도 아니고. 수십 번의 알바 경험으로 이런 진상들은 익숙했다. 이럴 경우에 왜 존댓말을 하지 않냐고 트집을 잡으면 괜히 큰일로 번질 수도 있었다.

    “내가 연예계에 또 관심이 많거든. 그쪽 일하는 지인들도 많고.”

    이 병원을 스쳐 지나간 유명인들만 한 트럭이었다. 금메달 딴 국가대표, 해외 시상식에서 수상한 감독, 사회면에 얼굴을 자주 비추는 정치인까지. 그 안에 연예계에서 일하는 사람이 없는 게 더 이상했다. 

    “너희 그룹도 방송에서 많이 봐서 알아. 잘 나가던데.”

    “감사합니다.”

    “근데 그룹에서 네가 제일 떨어지지?”

    딱히 친하지도 않고, 한 번 스쳐 가면서 본 사이에 불과한데도 선욱은 필터를 거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뱉었다. 그룹 내 인지도 문제는 예민한 사안이었다. 특히 그룹 자체는 인기가 많은데, 그 안에서 제일 인지도가 떨어지는 멤버라면 더더욱. 

    “그러면 자존심 상하고 그러지 않아?”

    어릴 때부터 유독 재수 없게 굴던 예준의 아이돌 데뷔 소식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기사를 찾아봤던 선욱은 그 뒤로도 쭉 레브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니 어떤 멤버가 가장 인기가 많고, 어떤 멤버가 상대적으로 팬이 적은 지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욱이 간과한 점이 있다면 준은 그런 쪽에 자격지심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저한테 왜 그런 걸 물으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제일 못하는데 당연한 거 아닐까요?”

    준이 진심으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얘기했다. 고작 두 번째 만나는 데다가, 모르는 사이인데 이런 말을 왜 하는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하현은 춤을 잘 추고, 지구는 노래를 잘하고, 휘영은 둘 다 잘하고, 예준은 랩을 잘했다. 능력치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건 자신뿐이었다. 준은 그냥 멤버들과 같은 그룹인 게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그리고 전 지금도 좋아요.”

    멤버들만 있어도 행복한데, 자신이 노력할 때마다 많이 늘었다고 칭찬해 주고 아껴주는 팬들까지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애정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받기 힘든 건지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더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 아쉬운 게 많을 것 같은데.”

    “글쎄요……. 근데 취업 준비하신다는 분이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양예준 그 새끼가 그래?”

    취업 준비생이 초면에 대뜸 유명해지고 싶지 않냐고, 무슨 드라마에서 본 스폰서처럼 굴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선욱이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그 새끼라는 날카로운 호칭에 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또박또박 따졌다.

    “예준이 형은 친구 아니라고 하던데 왜 함부로 이 새끼, 저 새끼 하세요?”

    “뭐라고?”

    준이 움찔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마구 언성을 높여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배우기도 했고, 애초에 남에게 쓴소리할 성격도 못 되었다. 하지만 방금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먼저 나갔다. 

    “그래, 미안하다. 자, 사과.”

    근데 진짜 내 취향이란 말이야. 두 손을 장난스럽게 들어 올리며 선욱이 준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훑었다.

    얼굴도 이목구비 또렷하니 잘생겼고, 게이가 아닌 것도 좋고, 무엇보다 미성년자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애가 순하고 착해 보여서 꼬드기기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런 애들이 은근히 한 번 불을 붙여주면 무서울 정도로 욕심을 냈다.

    “걔가 뭐라고 했는지는 훤히 보이는데 나 걔랑 모르는 사이 아니거든. 우리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야.”

    물론 친구가 아닌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이라니 서운했다. 한 다섯 살쯤 처음 봤으니까 벌써 20년 전인가. 적어도 준보다는 선욱이 예준을 오랜 시간 봐왔다. 그래서 예준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벌써 제자리에서 선욱과 몇 마디나 대화를 나눈 준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굳이 여기 가만히 서서 얘기를 들어줘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몇 마디 받아치다 보니 시간이 벌써 꽤 지났다. 슬슬 자리를 뜨려는데 선욱이 다시 말을 시켰다.

    “근데 너네 정산 어지간히 많이 받긴 했나 보다. 저기 너희 어머니 병실이지?”

    선욱이 고갯짓으로 앞에 보이는 병실을 가리켰다. 눈에 띄게 경계하는 태도에도 신경 쓰지 않고 선욱이 묻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하루 입원비가 200만 원이 넘는데 낼만 한가 봐?”

    “네?”

    뭔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준이 눈을 깜빡였다. 방금 자신이 알고 있던 입원비와 너무 다른 금액이 선욱의 입에서 떨어졌다. 

    “얼……마요?”

    “네가 내는 거 아니야? 얼만지 몰라?”

    “아니……. 200만 원이요?”

    “어.”

    준이 머릿속으로 예준에게 이체해줬던 금액을 떠올렸다. 정확히 51만 원. 아는 사람이 있어서 할인된다더니, 이건 할인의 범주에 있는 액수도 아니었다. 누가 반의반 값으로 할인해 주냐고.

    설마 이렇게나 비싼 1인실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순순히 믿고 금액을 이체한 자신이 멍청했다. 상식적으로 전 병원 1인실이랑 비교도 안 되는데 가격이 비슷한 것부터가 이상했는데.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어지러워서 표정 관리가 잘 안 됐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나도 숨기지 못한 준이 고개를 숙였다. 잔뜩 으르렁대면서 경계해 놓고, 갈 때는 또 예의 바르게 인사까지 하는 모습에 선욱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예준 이거 또 거짓말했나 본데. 예준이 가차 없는 성격이긴 해도 나쁜 놈은 아니라는 건 진짜 나쁜 놈인 선욱이 제일 잘 알았다. 통장에 남아도는 돈으로 대신 내준 게 분명했다.

    급하게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선욱이 휴대폰을 흔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복도에서 뛰면 안 되는데. 전화번호는 다음에 받아야겠네.

    * * *

    택시를 타고 오는 내내 준은 다리를 덜덜 떨었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가는데 택시가 많이 흔들려서 머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생각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멀미를 해서인지 속이 안 좋았다. 아까 병실에서 어머니랑 나란히 한 병씩 마셨던 음료수가 금방이라도 올라올 것 같았다. 150만 원이면 학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매일매일 아르바이트 뺑뺑이를 돌아도 모으기 쉽지 않은 돈이었다.

    준은 미성년자가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는 시간에도 꾸역꾸역 카운터를 지켰고, 당연히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졸다가 선생님에게 혼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게 일했는데도 150만 원이라는 돈을 만져본 적은 없었다. 

    돈은 들어오기만 하면 통장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근데 저 금액을 매일 낸다니. 정산 받은 금액을 털면 가능하겠지만 타인에게 그만한 돈을 써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예준이 도대체 왜 그랬을까. 하루 입원비가 어마어마한 이런 좋은 병원을 소개해 주고, 굳이 그 비용까지 몰래 부담해준 이유가 뭘까. 또 긴장한 것처럼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학생, 어디 안 좋아?”

    “네, 네?”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 위에 손을 올려두고, 한참 심호흡을 하고 있던 준에게 택시 기사가 말을 걸었다. 갑자기 말을 시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준이 당황해서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디 아픈 사람 같아서.”

    “아니에요. 그냥 어제 잠을 못 자서…….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보는 사이에 걱정까지 해 주는 택시 기사에게 웃으며 인사를 한 준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색한 분위기가 부담스러워서 말이라도 몇 마디 더 해 볼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아, 그거 때문인가 보다. 준은 방금 전 자신의 대답을 통해 드디어 이렇게 심장이 뛰어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며칠째 적당량을 채우지 못한 수면이 원인인 것이 분명했다.

    바로 연습실로 가야 했지만, 계속 이 상태면 연습에도 지장이 생길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준이 심각한 얼굴로 막 도착한 택시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길에 거울을 한 번 봤다. 안경과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야, 너 내가 병원 혼자 가지 말랬잖아.”

    준이 현관문을 열자마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예준이 벌떡 일어났다. 예준의 침대에서부터 현관까지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준의 바로 앞에 서는데 세 걸음이면 충분했다. 아무래도 많이 기다렸는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거의 빛의 속도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준이 어디 갔냐며 찾는 예준에게, 휘영은 병원에 갔다고 솔직하게 대답해줬다. 그 대답에 이상한 점은 하나도 없었는데 예준은 갑자기 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더니 안 받는다고 난리를 쳤다.

    서로의 외출은 한 번도 터치한 적이 없었는데, 갑작스러운 예준의 행동에 멤버들이 이상함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전화는 왜 안 받아?”

    “무음이라 몰랐어요.”

    간략하게 대답한 준이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예준은 준을 졸졸 쫓아 방 안까지 따라 들어갔다.

    그 광경을 고스란히 보고 있던 지구가 생각했다. 뱁새 쫓아가는 황새 같다. 준은 다리가 길지만 그냥 걸을 때는 보폭이 작은 편이었다. 그래서 더 그렇게 보였다.

    “예준이 형 왜 저래.”

    휘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방 안까지 들렸다. 밖에서 들리는 멤버들의 목소리를 싹 무시한 예준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병원비 왜 51만 원이라고 거짓말했어요?”

    준이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말했다.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에 예준이 잠시 눈을 깜빡였다. 생각이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예준이 급하게 입을 열어보려는데, 이번에도 준이 더 빨랐다.

    “혹시 잘생김 할인이 150만 원이라고 할 건 아니죠?”

    예준이 정곡을 찔렸다. 넉살스럽게 거짓말을 했던 과거의 자신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 밥 먹듯이 거짓말하는 입을 한 대 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헛소리까지 같이 주렁주렁 늘어놔서는. 

    답지 않게 당황하는 예준을 보며 준이 길게 심호흡을 했다. 화가 나거나 자존심이 상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자존심 같은 거 세우는 편도 아니고. 지금 이런 기분이 느껴지는 건…….

    “저한테 대체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예요?”

    “야, 동생이잖아. 우리 그룹 막내고.”

    동생. 친한 동생. 그룹 막내. 준은 이제 그런 단어로는 납득할 수 없었다. 왜 납득할 수 없냐고 이유를 묻는다면 그냥 그랬다. 적어도 준의 상식 안에서는 친한 동생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친한 동생한테 하루에 150만 원씩 내줘요?”

    준이 울 것 같은 눈으로 예준에게 따졌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냥 친하기만 한 동생한테 하루에 150만 원씩 한 달이고, 반 년이고 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준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오니까 예준은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형, 정확한 금액 다시 얘기해요.”

    “됐어. 말도 안 하고 내가 낸 건데.”

    “싫어요. 형 돈 많은 건 아는데……. 그러지 마요. 형한테도 하루에 150만 원씩 나가는 거, 적은 돈 아니잖아요.”

    큰돈은 더 아니었지만 뭐라고 더 입을 열면 안 될 것 같아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거짓말하지 말고 얘기할 걸 그랬나.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는 걸 간과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당연히 들킬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확한 입원 금액은 준의 어머니도 모르시니까…….

    예준이 멈칫했다. 그럼 누가 굳이 입원비를 이야기한 거지. 이미 한 달 치를 냈는데 간호사가 갑자기 다가와서 얘기했을 리도 없고.

    “잠깐만. 너 누구한테 들었어?”

    “뭐를요?”

    “입원비 얼마인지 누구한테 들었냐고.”

    “……형이 말했던 그 취업 준비하는 친구요.”

    일 났네. 예준이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덮었다. 분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없는 틈을 타서 이때다 싶어 말을 건 게 분명했다. 예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발로 안 차고 뭐 했어?”

    “누가 초면인 사람을 발로 막 차요.”

    “초면인 사람한테 친한 척 말 거는 놈은 차도 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예준이 하니까 장난처럼 느껴졌다. 이 상황에서도 장난을 치는 게 미워서 정강이를 한 대 차 주려다가, 막 생각난 사실에 준이 덧붙였다. 

    “근데 형 왜 또 거짓말한 거예요?”

    “또 뭐?”

    예준이 머리를 거칠게 헝클면서 되물었다. 거짓말 좀 작작 칠 걸 그랬네. 이러다가 예전에 몰래 훔쳐 먹고 시치미 뗐던 과자 얘기까지 들킬 판이었다.

    예준은 어린 시절, 거짓말을 하고 부모님에게 불려갔을 때도 언제나 당당했다. 그런데 지금은 손에 땀이 나는 것 같은 이상한 착각까지 느껴졌다.

    “그 취준생이요. 몇 번 마주쳤다면서, 그쪽은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라던데.”

    아, 씨발 최선욱. 애 앞에서 대체 어디까지 얘기한 거야. 예준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마약범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는 상상을 했다. 

    병원장 아들인데 이 몇 개 나가도 금방 붙여주지 않을까. 그 잘난 200만 원짜리 병실에 입원하면 되겠지. 이래서 병원 갈 때 꼭 같이 가자고 한 건데, 도대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 피해 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 사람 취준생이라는 것도 거짓말이죠. 무슨 취준생이 200만 원짜리 병실 앞을 그러고 돌아다녀.”

    “그거는…….”

    “왜 이런 것까지 거짓말을 해요?”

    “야, 걔랑은 진짜 친구 아니야.”

    그저 선욱과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인 점을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뭔가 숨기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도 친구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다 자신을 밀어붙이는 준의 말에서 트집 잡을 것을 찾아낸 예준이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근데 너 왜 그 새끼 말은 믿고 내 말은 안 믿냐?”

    “형이 입원비 거짓말해서 신뢰도가 떨어졌어요.”

    “너니까 해준 거지, 너니까. 내가 길바닥에 막 돈 뿌리는 사람처럼 보이냐?”

    너니까. 그 말에 막 뒤를 돌려던 준이 멈칫했다. 그래, 저런 말들이 문제다. 자신이 무슨 특별한 사람인 양 대우해 주는 거. 꽉 쥔 주먹이 떨려 왔다. 며칠 동안 어두운 밤을 뜬눈으로 보내면서 생각한 것들이 울컥울컥 흘러넘쳤다.

    “형이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자꾸 헷갈리잖아요.”

    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직 완전히 벗지 않아서 턱에 걸려 있던 마스크가, 한쪽 귀에만 간신히 걸린 채로 덜렁거렸다.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시야를 방해하는 마스크를 벗어서 바닥에 떨어뜨린 준이 입술을 깨물면서 주저앉았다.

    “야, 야.”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예준이 준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같이 몸을 낮췄다. 다리가 길어서인지 쭈그려 앉는 것도 힘들었다. 고개를 틀고 준의 얼굴을 확인하려던 예준이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

    “너 혹시 우는 거 아니지?”

    숨소리가 이상한데. 얼굴을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는데 아주 무참히 내쳐졌다. 아니, 걱정돼서 확인해 보려고 한 건데. 준에게 이렇게 거절당한 건 처음이었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예준이 답지 않게 조용히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준이 고개를 들었다. 발갛게 변한 눈을 마주한 예준이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진짜 우네.

    “지금도 봐요. 그냥 내버려 두지.”

    일부러 온 힘을 다해서 세게 쳤는데. 혼자 많이 처울라며 방을 나가 버렸으면 속이 후련했을 텐데, 예준은 그러지 않았다.

    준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예준이 방을 나가는 것보다 먼저였다. 어린 시절 햄버거 못 먹었을 때 이후로 이렇게 별거 아닌 이유로 서러운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형 원래 이렇게까지 잘해주진 않았잖아요. 진짜…… 갑자기, 갑자기 변했어요. 그러니까 더 헷갈려요.”

    준이 말하는 갑자기의 기점은 데뷔 1주년이 분명했다. 그때 회귀를 했으니까. 준을 1년간 알아 온 양예준과, 10년간 알아 온 양예준은 당연히 달랐다. 괴리감을 느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준이 예준의 몸을 일으켰다. 평소 같으면 꼼짝도 하지 않을 예준의 몸이 종잇조각처럼 딸려 올라갔다.

    “살면서 친절하게 대해 주는 사람 진짜 많이 봤거든요?”

    그냥 서비스로 줄 테니까 가져가라던 사람, 돈 다 내줄 테니까 같이 놀자던 애들. 중학교에 올라오고 나서는 모두가 준을 좋아했다. 그들이 좋아한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잘생긴 얼굴이겠지만 어쨌든 과한 친절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금전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근데 형이 제일 이상해요.”

    말을 마치자마자 예준을 밖으로 밀어낸 준이 문을 닫았다. 쫓겨나서 문 앞에 선 예준이 입을 서서히 벌렸다. 아무리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려고 해도 지금 저 태도랑 말은…….

    그제야 준이 왜 자신을 피했는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쟤 지금…….”

    항상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마냥 예뻐서, 아끼는 동생이 고생하는 게 보기 싫어서. 필요 이상으로 꺼내 놓은 친절이 이상한 감정을 싹 틔운 것 같았다. 데뷔 10년 차쯤 되면 표정 관리는 프로처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마음이 잘 숨겨지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느끼는 혼란은 어른이 붙잡아 제 길을 찾아줘야 마땅했다. 복잡한 생각이 이리저리 얽혔다.

    예준은 생각이 복잡할 때마다 머리를 마구 헝크는 게 습관이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자주 엉켰다. 마구 엉킨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풀어내면서 예준이 문 앞에서 몇 걸음 물러났다.

    원래 나이가 어릴수록 애정에 약하다. 현실적인 조건을 따질 때는 아니니까, 당연히 잘해 주는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겠지.

    너무 신경 쓰여서, 불안 불안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참을 수가 없어서 자꾸 몸이 먼저 뛰쳐나간 게 화근이었다.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진짜. 예준이 애써 풀어낸 머리카락을 다시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

    준이 저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내뱉은 것 같긴 한데. 아마 방 안에서 방금 뱉은 말을 후회하고 있을 게 뻔했다.

    남자가 남자에게 고백한다는 것 자체도 이미 어려운 일이지만, 앞으로 몇 년을 함께 활동해야 하는 같은 그룹의 멤버인 만큼 후에 벌어질 상황들을 감당하는 건 더 힘들 테니까.

    “형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방에서 쫓겨난 예준을 보며 하현이 물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예준이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근데 나 좀 피곤하니까 연습은 저녁부터 하자.”

    “늦잠 자놓고 무슨……. 컴백 코앞인데 그러면.”

    “지금 충전해 놓고 이따 두 배로 열심히 하는 게 더 좋지.”

    하루 종일 해도 모자랄 마당에. 하현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최근 예준의 춤 실력은 뭐라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저보다 더 빨리 숙지한 것도 놀라운데, 노래만 틀면 거의 날아다녔다.

    “그럼 들어가서 보던 거나 마저 봐야겠다.”

    연습을 주도하는 하현의 허락에 휘영이 의자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망설임 없이 방으로 들어가려는 휘영을 예준이 다급하게 불렀다.

    “야, 야 잠깐만.”

    “왜요?”

    “게임 한 판만 하자.”

    “……피곤하다면서 게임이요?”

    다급한 마음에 앞뒤가 맞지 않는 제안을 해버렸지만 이제 와서 취소할 수는 없었다. 결국 현란한 말솜씨로 휘영을 거실에 잡아두는 데 성공한 예준이 서랍에 넣어둔 게임기를 꺼냈다.

    이게 무슨……. 한숨을 쉬며 예준이 게임을 시작했다. 물론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않아서 인공지능에게 자꾸만 죽었다.

    “형 눈 감고 게임해요?”

    “아니?”

    “이런 식으로 할 거면 그냥 그만해요. 어제 보던 거 마저 보는 게 더…….”

    “아니, 아니 다시 해. 내가 다 조진다 진짜.”

    예준이 황급히 게임기를 고쳐잡으며 삐딱하게 앉아있던 자세를 고쳤다. 성실하게 게임기를 두드리며 예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연습 가야지.”

    결국 1시간이 넘게 게임을 했다. 이 정도면 준이 충분히 울었을 것 같아 예준이 게임기를 내려놨다. 처음에는 투덜거리더니, 중반부터는 푹 빠져서 재밌게 플레이를 하던 휘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게임기를 정리했다. 

    “연습 가자.”

    자신이 먼저 준을 살짝 들여다보려던 예준의 계획은, 곧장 방문을 벌컥 열어버린 하현 때문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문이 열리는 순간 예준이 답지 않게 움찔했다. 하지만 예준의 상상과는 다르게 준은 아무렇지 않게 문밖으로 얼굴을 살짝 내밀었다.

    “잠시만요, 금방 옷 입을게요!”

    밝게 외치는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언뜻 들으면 막 일어난 것 같기도 한데, 진실을 알고 있는 예준에게는 누가 들어도 울다 지친 목소리로 들렸다.

    “자다 일어났어?”

    “네. 피곤해서.”

    괜히 뒷머리를 정리하는 시늉을 하며 준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대로 그냥 연습을 하러 가게 되면 뭐라 말도 못 하게 어색해질 것만 같아서, 예준이 충동적으로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괜찮냐?”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듯이 물은 말에 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옷장을 뒤적이는 뒷모습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예준은 어른이고 팀의 리더였다.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하고, 당장 눈앞에 닥친 컴백을 잘 준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까 네가 무슨 뜻으로 얘기한 건지는.”

    “형도 알겠죠, 바보도 아니고.”

    입을 만한 편한 옷을 찾았는지 준이 뒤를 돌았다. 손에는 예준이 귀엽다고 칭찬했던, 팬에게 선물 받은 노란색 티셔츠가 들려있었다. 입고 있으면 꼭 계란말이같이 보이는 옷이었다.

    “이게 아니라는 거, 안 된다는 거 아는데…….”

    방 안에서 생각을 정리했는지 훨씬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운 지 얼마 안 돼서 눈가가 붉고, 입술이 갈라졌지만 표정은 덤덤했다.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가 봐요.”

    “당연하지. 생각대로 마음이 흘러가면 그게 사람이냐.”

    예준이 최대한 준의 말에 공감해 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준이 건조한 눈을 들어 예준을 봤다. 기분 나쁜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기분 나빠하거나 충격을 받았을 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방 밖으로 내쫓은 건데. 

    “기분 나쁘지 않아요?”

    “뭔 소리야. 기분이 왜 나빠.”

    “같은 남자가 좋아하면 좀, 소름 끼치고.”

    “야, 미쳤다고 그런 생각을 해? 내가 그럴 사람 같냐?”

    예준이 어이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무슨 인간 말종도 아니고. 무척 억울했다. 예준은 사랑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형이 꼭 그렇다는 건 아닌데, 근데 많이들 그렇게 생각한대요…….”

    “누가?”

    동성애자인 친구라도 있나. 예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학교에서는 워낙 친구가 많다고 들었으니 있을 만도 했다. 멀쩡한 이성애자한테 다가가서 만지고 보는 새끼도 있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고백하는 게 무슨 잘못이라고. 

    “인터넷에서요.”

    준이 마른세수를 하며 출처를 꺼내 놨다. 인터넷이라는 단어에 예준의 왼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안 봐도 뻔했다. 지식인이나 돌아다니면서 썰 같은 거 봤겠지. 예준이 한숨을 쉬었다. 코앞에서 터지는 한숨에 움찔한 준이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금방 정리할 거예요. 그러니까 형도 저한테 잘해 주지 마요.”

    또 눈물이 나려고 하는지 준이 손등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예준은 특별히 준을 특별 대우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행동한 적은 없었다. 그냥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어서 마음이 가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생각대로 마음이 흘러가면 그게 사람이냐고. 예준이 스스로가 뱉었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알았어.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순순히 사과하는 모습에 더 열이 올랐다. 예준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그냥 이유 없이 미웠다. 그냥 잘해 주지 말라고 했을 뿐인데 사과는 왜 하냐고. 예준이 보이지 않는 선을 쭉 그은 것처럼 느껴졌다. 

    “연습하러 가야지.”

    예준이 먼저 방 밖으로 나갔다. 몇 초 간격을 두고 준이 나왔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모르는 멤버들은 이상하게 점점 서늘해지는 분위기에 의문을 표했다.

    연습실에 도착해서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면서도 세 사람은 계속 시선을 교환했다. 둘 다 얼굴에 기분 나쁜 기색은 없어 보이는데 급격히 말이 줄었다. 그 분위기는 당연하게도 연습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됐다.

    씻을 순서를 정하는 가위바위보에서 무참하게 패배한 예준은 제일 마지막으로 밀려났다. 가장 먼저 씻고 나온 준이 방으로 쏙 들어가자마자, 두 번째로 씻을 차례였던 지구가 하현을 억지로 욕실로 밀어 넣었다. 쟤는 언제 봐도 진짜 사랑꾼이네. 예준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지구가 얌전히 소파에 앉더니 휴대폰을 꺼냈다. 인터넷도 안 하고, 남들이랑 연락도 잘 안 하는 게 뭘 보나 싶어서 예준이 고개를 살짝 뺐다.

    갤러리로 들어간 지구가 사진이 가득한 폴더를 열었다. 폴더 안에는 유독 한 사람 사진이 가득했다. 예준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야.”

    “왜?”

    막 저번 행사 때 사진을 넘겨 보던 지구가 대답했다. 예준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전까지 봤으면서 또 보고 싶냐?”

    “하현이 형이 자기 사진 보는 거 싫어해서 이럴 때 봐야 돼.”

    저런 사진은 대체 언제 다 주워 놓는 건지, 똑같은 날에 찍힌 사진들이 몇백 장이나 줄줄이 들어 있었다. 저렇게나 좋을까.

    마치 친동생의 연애를 지켜보는 기분으로, 사진을 넘기는 지구를 가만히 쳐다보던 예준이 문득 아까 봤던 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 갈라진 마른 입술을 자꾸만 우물거리던 모습을.

    예준이 침대 쪽으로 다가가서 상자를 뒤졌다. 여기 어디쯤 있었던 것 같은데……. 곧 손에 원하는 물건이 걸렸다.

    “정준한테 이거 좀 바르고 자라고 해.”

    아직 뜯지도 않은 립밤을 지구에게 건네던 예준이 멈칫했다. 이런 행동이 더 헷갈리게 한다고 했지. 그냥 가만히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예준이 고개를 저으며 제대로 지구의 손에 립밤을 쥐여줬다.

    “내가 줬다고 하지 말고 네가 준 걸로 하자.”

    아침 드라마 대사 같은 말에 지구가 눈을 깜빡였다. 지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아까부터 계속 분위기가 심상치 않긴 했지만……. 

    “형이 무슨 우렁각시야?”

    싸웠으면 그냥 풀릴 때까지 가만히 있든지, 사과를 하든지. 몰래 챙겨주려는 이 행동은 대체 뭐란 말인가.

    예준의 행동을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지구는 얌전히 립밤을 준에게 전해줬다. 대체 뭐냐며 준이 눈빛으로 물어왔지만, 안타깝게도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어 그냥 방을 나왔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음악방송 촬영일이 다가왔다. 생방송은 당연히 아니고, 방송이 나가기 전에 미리 찍는 사전 녹화였다. 이미 무대 앞쪽에는 선착순에 드는 데 성공한 팬들이 빡빡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장 먼저 준비를 끝내고 앉은 예준이,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겨우 자리를 잡고 앉은 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컴백 후 첫 번째 음악방송이니 당연히 떨릴 만도 했다.

    아무래도 긴장 때문에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지 자꾸만 입술을 움찔거렸다. 느리게 움직이는 목울대까지 빤히 쳐다보고 있던 예준이 바로 옆에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하현을 툭툭 건드렸다.

    “야.” 

    “왜요?”

    하현은 뭘 보고 있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대꾸했다. 예준이 여전히 시선은 준에게 고정한 상태로 다시 한번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물 좀 마시라고 해.”

    “형이 직접 말하면 되잖아요.”

    하현이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몇 주째 이 상태였다. 사람이 무슨 말 전하는 기계도 아니고.

    “지금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무슨 사정인데요?”

    “어쩔 수 없는 사정인데 너한테 말할 수 있겠냐.”

    예준을 한 번 흘겨본 하현이 순순히 앞에 있는 물통을 들었다. 안 그래도 준이 평소보다 긴장을 배로 한 것 같아서 걱정이 되는 참이었다. 의자에 앉아서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준의 앞으로 하현이 불쑥 다가갔다.

    “물 좀 마셔.”

    “고마워요, 형.”

    준이 밝게 웃으며 두 손으로 하현이 건넨 물병을 받아들었다. 걱정한 것보다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역시 예준이랑 싸워서 그런가. 하현이 괜히 손을 뻗어 준의 어깨를 몇 번 쓸었다. 

    “오글거리게 왜 그래요.”

    “아니, 힘 좀 내라고. 떨지 말고.”

    “몇 마디만 부르고 후딱 들어오면 되는데요, 뭐. 형이 더 힘내야죠!”

    준이 양손으로 주먹을 쥐고 크게 외쳤다. 씩씩한 목소리에 하현이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예준이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일부러 오버한다 저거.

    예준이 준과 이 상태를 유지한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덕분에 24시간 함께하는 멤버들만 죽어나고 있었다. 제일 열심히 장난치고 싸우던 둘이 조용하니까 그룹 분위기 자체가 확 죽었다. 

    “수정 메이크업 할게요.”

    메이크업이 조금 지워진 휘영이 질질 끌려 거울 앞에 앉혀졌다. 조용한 분위기에도 예준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 생각의 주제는 준의 어머니가 머무는 병원과 최선욱이었다.

    지금은 활동 기간이라 괜찮겠지만, 휴식기에 들어가면 분명 제일 먼저 병원에 들를 게 분명했다. 쟤가 복도에서 빨빨거리면서 혼자 돌아다니는데 최선욱 그 새끼가 말을 안 걸 리가 없지.

    준은 남을 잘 쳐내는 성격도 아니었다. 이제 와서 진짜 마약 하는 변태라고 해도 안 믿을 것 같고, 알아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받아줄 게 뻔했다. 하지만 보다시피 이런 상태라 예준이 함께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갈 때 몰래 쫓아갈까. 병동이 무슨 시상식장 입구도 아니고, 쓸데없이 빨간색 카펫을 깔아 놔서 빨간 옷 입고 가면 보호색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진지한 얼굴로 계획을 세우는 예준을 준이 툭툭 쳤다.

    “형, 올라가기 전에 잠깐 얘기 좀 해요.”

    준은 마지막 점검까지 다 마쳤는지 흐트러진 곳 없이 멀쩡한 상태였다. 맨 위 단추 하나를 제외하고, 꼼꼼하게 잠긴 단추를 무의식중에 눈으로 훑어본 예준이 한 박자 늦게 몸을 일으켰다.

    나름 데뷔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고, 준이 대기실 복도를 제집처럼 돌아다녔다. 대기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대화를 나눌 만한 곳이 있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대화는 최대한 빨리해야 했다. 

    “형. 자꾸 뒤에서 그럴 거예요?”

    준의 말에 예준이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뒤를 돌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과 제스처는 덤이었다. 준이 주머니에 넣어뒀던 립밤을 꺼냈다.

    “이것도 형이 준 거죠. 형이 쓰는 거잖아.”

    “야, 무대 올라가야 되는데 그걸 주머니에 넣어 놓으면 어떡하냐.”

    “올라가기 전에 뺄 거예요.”

    “내 거는 맞는데 온지구가 준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다 알고 온 것 같으니 더 이상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별생각 없어 보이는 표정에 열이 오르는 건 준이었다. 아랫입술을 한 번 짓씹은 준이 고개를 푹 숙여 발끝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확 고개를 들어 올렸다. 크나큰 결심이라도 내린 것처럼 보였다.

    “헷갈리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형이 먼저 약속 어긴 거예요.”

    틀린 말은 분명 아니었다. 신경을 끌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다. 그걸 무시한 건 예준이었다. 준은 조금 더 시간을 두려고 했다. 예준과 거리를 벌리고, 가만히 기다리면 자연스럽게 옅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뒤에서 물 좀 마시라고 하라는 목소리가 그대로 귀에 꽂혀 들어와서 어쩔 수 없었다.

    분명 고백을 했다. 예준도 그걸 단순히 형으로서 좋다는 감정이 아닌 다른 쪽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러니까. 준이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이건 다 예준의 잘못이다.

    “그러니까 나도 이제 마음대로 할 거예요.”

    “슬슬 올라갈 준비 할게요!”

    준의 마지막 말과 동시에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넋을 빼놓고 있는 리더 형을 챙기지 않고 준은 혼자서 대기실 쪽으로 가버렸다.

    홀로 남은 예준이 눈을 세 번 깜빡였다. 쟤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와중에 립밤은 또 질질 흘리고 갔네. 허리를 숙여서 바닥에 떨어진 립밤을 집어 든 예준이 고개를 한 번 털어냈다.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턱까지 얼얼했다.

    녹화는 타이틀곡 세 번, 수록곡 두 번으로 총 다섯 번 진행됐다. 그리고 그동안 예준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머릿속이 지저분해서 안무와 동선들까지 다 엉키고 꼬였다. 10년 넘게 해 온 본업을 프로답지 않게 말아먹을 뻔한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긴 예준이 혼이 다 빠진 상태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형. 이리 와서 모니터링해요.”

    대기실에 들어오자마자 준이 먼저 예준의 팔을 끌어당겼다. 갑자기 친근해진 태도에 나머지 멤버들이 다시금 시선을 주고받았다. 호흡 가다듬기도 바쁜 무대 위에서 갑자기 화해를 했을 리는 없으니, 아무래도 둘이 잠깐 나갔을 때 잘 해결한 모양이었다.

    다닥다닥 붙어서 촬영된 영상을 확인하는데, 준이 예준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평소에도 한 번도 한 적 없는 짓이었다. 예준이 어깨 위로 올라온 준의 팔을 밀어서 치웠다. 

    밑으로 툭 떨어지는 팔을 느낀 준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어딘가 불만이 있는 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어딜 형 어깨 위에 손을 막 얹냐.”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 예준의 자신의 팔을 들어 준의 어깨 위에 올려놨다. 그제야 준의 표정이 살짝 환해졌다. 그 차이가 너무 극명하게 보여서 예준이 속으로만 웃었다. 이렇게 겉으로 다 티 나는 놈이, 그 긴 시간 동안은 어떻게 숨겼을까.

    “다 확인했으면 가자. 촬영해야 하는 게 한가득이야.”

    컴백을 했으니 라디오도 나가야 하고 예능도 촬영해야 했다. 아무거나 덥석덥석 집어오던 데뷔 초와 다르게 지금은 프로그램을 가려서 받는 편이었다.

    어차피 게스트고, 빵빵 웃겨야 할 필요도 없으니 상대적으로 부담감은 적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숨만 쉬어도 피곤했다. 물론 10년을 카메라 앞에서 보낸 예준은 어떤 것이든 프로처럼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촬영 어떤 건지 다 들었지? 반응만 적당히 잘해.”

    오늘 촬영하는 예능은 출연자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딱히 곤란한 질문을 받을 일도 없고, 무난하기 그지없어서 많은 아이돌들이 컴백 홍보용으로 자주 찾았다. 보통은 멤버 한두 명만 출연하는데, 컴백하고 첫 예능이니까 완전체 출연이 더 나을 거라고 해서 다 함께 출연하게 됐다.

    그래, 이것도 바뀌었잖아. 이 예능에 몇 번이나 출연했던 예준이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제대로 바뀌었다. 원래대로라면 예준과 지구 둘이서만 촬영해야 하는 예능이었다. 

    “아직 시간은 괜찮긴 한데 그래도 미리 가 있자. 준비할 시간도 필요하니까.”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매니저가 어서 이동하자며 재촉했다. 각자 짐을 챙겨 대기실을 나와서, 주차장을 코앞에 둔 순간, 갑자기 휘영이 손바닥을 탁 부딪혔다.

    “아, 챙기는 거 깜빡했다.”

    “뭔데? 같이 가자.”

    말을 꺼내자마자 방향을 튼 걸 보면 다시 가지러 가야 할 만큼 중요한 물건인 것 같았다. 금방 뛰어갔다 오겠다는 휘영을 하현이 같이 가자며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보던 매니저가 함께 방향을 틀었다.

    “너네끼리 보내기 불안하다. 그냥 다 같이 갔다 오자.”

    “전 먼저 차에 가 있을게요.”

    예준이 매니저에게 차 키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원래 가고 있던 방향으로 발을 쭉 옮겼다.

    사이에서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던 준이 예준을 따라왔다. 평소 같았으면 형들 따라 쫄래쫄래 같이 대기실로 갔을 텐데. 예준이 워낙 보폭이 커서 거리가 금방 벌어졌다. 결국 준이 뛰어서 그 거리를 좁히고 나란히 걸었다.

    예준은 준이 쫓아온 걸 알고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냥 잠겨 있던 차 문을 열고, 긴 다리를 굽혀서 길쭉한 몸을 차 안으로 구겨 넣었다. 아직 차에 타지 않은 준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고개만 빼꼼 들이밀며 물었다.

    “형, 옆자리에 앉아도 돼요?”

    갑자기 이런 걸 왜 묻나 싶어 예준이 물끄러미 준을 쳐다봤다. 평소에는 아무 데나 잘 앉는 놈이 갑자기 왜 물어보나 싶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에 준이 물었다.

    “싫어요? 막 기분 나쁘고 불쾌해요?”

    “아니, 왜 그렇게 극단적이냐고.”

    예준이 억울하다는 듯 양손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 싫다고 말한 적도 없거니와 아직 입도 벙긋대지 않았다.

    “내가 언제 너 기분 나쁘댔냐?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타.”

    “그래서 앉아도 돼요?”

    “앉아, 앉아. 네가 그런 걸 언제 물어봤다고 그러냐.”

    예준이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말하자, 준이 그제야 차 안으로 들어왔다. 예준이 손으로 건드린 자리에 편하게 주저앉은 준이 양쪽 다리를 번갈아 가면서 흔들었다. 

    뭐라고 더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서 저러는 게 뻔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예준이 먼저 말을 걸었다.

    “네 마음대로 한다며? 앉아도 되는지는 왜 물어보냐?”

    “내 마음대로 다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형 좋아하기만 할 거라는 뜻이거든요.”

    준이 아랫입술을 씹으면서 대답했다. 무대 때문에 입술에 발라놨던 틴트가 조금씩 지워졌다. 손가락을 뻗어서 입술을 툭 건드린 예준이 말했다.

    “씹지 마라. 그거 네 거 아니고 네 팬들 거다.”

    “……알았으니까 만지지 마요.”

    자신이 건드려놓고도 솔직히 조금 놀란 예준이 순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사과도 했다. 

    “알았어, 미안.”

    준은 무관심에 쉽게 상처받지 않았다. 외롭지 않을 외모를 타고났지만 모두가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고, 끝까지 함께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꽉 붙잡는 편이었다. 어머니도,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가족 같은 형들도. 이렇게 자란 것은 모두 어릴 적 성장환경의 영향이 컸다. 남들 눈에 띄지 않고 보낸 시간이 더 기니까.

    그런데 예준은 자꾸 기대를 하게 했다. 원래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설렐 정도로 잘해주지도 않았는데. 1주년 즈음이었나. 그때부터 예준이 뭔가 이상해졌다. 다른 사람처럼.

    어쩌면 예준이 이상해진 게 아니라 자신이 이상해진 걸지도 몰랐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 갑자기 잘생겨 보이고, 똑같은 행동인데 자꾸만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원래 사랑이라는 게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거라고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갑작스러워도 되나 싶었다. 예준을 단순히 재미있고 좋은 형으로 생각했던 1년이 넘는 시간이 그대로 돌아와서 준을 괴롭게 했다.

    “형은 내가 고백한 게 별로 신경 안 쓰이나 봐요. 아무렇지도 않고.”

    준이 중얼거리듯이 말을 하자마자 차 문이 열리고 멤버들이 들어왔다. 대기실이 멀지 않아서 금방 돌아온 것 같았다. 줄줄이 자리를 잡는 멤버들 때문에 예준은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존나 신경 쓰인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안 좋았다. 그래서 말 못 한 거다.

    방송국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뤄졌다. 협찬받은 옷으로 갈아입고 망가진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시작된 촬영도 아주 평온했다.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적절한 반응만 잘해 주면 짓궂은 질문을 받을 일도 없었다. 촬영 막바지에 방청객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신곡 무대를 한 번 간단하게 보여주고 나니 게스트로서의 역할이 완전히 끝났다.

    스케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슨 응원 영상도 찍고, 팬들에게 공개할 영상도 스튜디오에서 따로 촬영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활동이 시작된 것도 아닌데 일정이 빡빡했다. 국내 콘서트가 끝난 뒤로 쭉 쉬다가 갑자기 찾아온 바쁜 일상이라 더 힘들게 느껴졌다.

    “얘들아, 고생 많이 했다. 가서 푹 쉬어둬.”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매니저가 말했다. 예준이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멀쩡하게 앉아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데뷔하고 나서 워낙 살인적인 스케줄을 많이 견뎌와서인지 이 정도는 거뜬해 보였다. 모두를 한 번씩 훑은 예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아갔다.

    예준은 성인이었다. 준보다 훨씬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빨리 바로잡아야 맞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일단 신경을 끄는 것부터 못 하겠는데 뭘 더 하겠냐고. 예준이 옆에서 꼼지락거리며 뭔가를 계속 먹고 있는 준을 곁눈질로 살짝 살폈다. 그걸 느꼈는지 준이 고개를 돌렸다.

    “왜요? 형도 먹고 싶어요?”

    “어? 어.”

    “입 벌려봐요.”

    준이 하나씩 계속 까먹던 것의 정체는 비타민이었다. 저게 저렇게 한 번에 많이 먹으라고 있는 게 아닐 텐데.

    예준이 얌전히 입을 벌렸다. 그냥 내놓으라며 뭐라고 할 줄 알았던 예준이 순순히 입을 벌리자 오히려 놀란 건 준이었다. 

    “그냥 형이 까먹어요.”

    입에 넣어줄 것처럼 말하더니, 뜯지 않은 비타민을 통째로 건네는 준에 예준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와중에 귀가 새빨개져 있어서 더 웃겼다.

    귀는 진짜 못 숨긴다니까. 예준은 빨갛게 변한 귀를 손가락으로 잡아보고 싶다고 잠깐 생각했다.

    비타민을 통째로 건네받고 어이없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예준의 시선을 피한 준이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메이크업을 다 지웠는데도 더 잘생긴 것 같았다. 

    비타민을 씹던 행위를 멈춰서인지 갑작스럽게 졸음이 밀려왔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 준이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웬일로 멀쩡하게 앉아있나 싶더니. 숙소 앞에 멈춰선 차에서 준을 끌고 내린 예준이 흔들리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숙소 들어가서 자, 들어가서. 알았냐?”

    예준의 손을 꼭 붙잡고 숙소에 들어온 준은 많이 졸린지 방까지 가지도 못하고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어디 말릴 새도 없이 스르륵 잠이 들었다. 머리를 대자마자 자는 걸 보니 진짜 피곤한 모양이었다.

    준은 체력은 나쁘지 않은데 정신력이 약했다. 피곤하면 정신을 잘 못 차리고 빌빌거리기 일쑤였다.

    “야, 방에 가서 자.”

    예준이 차마 몸은 건들지 못하고 소파 다리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딱딱한 소파는 예준의 발을 튕겨내고 충격을 흡수했다. 덕분에 준의 몸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편안하게 유지됐다. 발끝에서 찌르르 느껴지는 통증은 고스란히 예준의 몫이었다.

    “그냥 내버려 둬. 자라고.”

    “좁은데 불편하게.”

    “형이 자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지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본인이 자는 것도 아닌데 과하게 신경을 쓰는 것 자체가 웃겼다.

    결국 예준은 준을 침대로 옮기는 걸 포기했다. 그런데 자꾸만 눈에 걸려서, 거실 구석에 있던 담요를 끌고 와 대충 몸 위에 덮어줬다.

    “하현아. 잠깐만 이리 와봐.”

    “어?”

    춥지도 않은 날씨에 예준이 준에게 담요를 덮어주는 동안, 방으로 들어가려던 하현을 휘영이 잡았다. 눈을 크게 뜨며 하현이 되묻자 휘영이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거실 한복판으로 질질 끌고 갔다.

    “나 옷 좀 골라주라.”

    휘영은 그룹에서 가장 옷 센스가 좋았다. 언제나 무난한 것만 골라 입는 하현과 지구나, 편한 거 아니면 정장밖에 모르는 예준이나, 그냥 못 입는 준과는 어딘가 달랐다. 무작정 명품을 걸치는 패션보다 저렴하더라도 예쁜 옷을 조합하는 패션을 더 선호했다.

    “나 옷 보는 눈 없잖아.”

    “그래서 내가 괜찮은 것만 따로 골라놨지, 한 번만 봐봐.”

    사이좋게 바닥에 앉은 하현과 휘영이 휴대폰을 하나를 가운데 놓고 머리를 맞댔다. 단짝 같은 동생들의 모습을 구경하며 예준이 겉옷을 벗어 거실 구석에 놓인 전용 옷걸이에 걸었다. 옷걸이에는 쓸데없이 화려한 정장부터 강렬한 색의 저지까지 눈에 안 띄는 게 없었다. 예준은 그런 사람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지구가 걸음을 멈추고 식탁 앞 의자에 앉았다. 부엌과 거실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식탁 앞에 앉아도 거실이 한눈에 보였다. 왜 방에 안 들어가고 저러고 있는지, 이유가 뻔히 보여서 예준이 몰래 혀를 찼다.

    “하루 종일 박하현만 보고 있냐?”

    예준의 지구의 옆자리에 슬쩍 앉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눈앞에 없으면 휴대폰으로 볼 정도니까 말 다 했지.

    둘의 연애를 10년 넘게 봐 온 예준에게는 그 무엇보다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볼 때마다 신기했다. 이렇게까지 한결같이 좋아할 수가 있나 싶어서. 꽃도 중간에 지는 때가 있듯 변하기 마련인데 지구는 그런 게 없었다.

    “좋아하면 계속 신경 쓰이지 않아?”

    지구가 식탁 위에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예준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좋아하면 신경 쓰인다고. 예준이 소파에 누워서 자고 있는 준을 힐끔 바라봤다.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누구랑 있는지, 뭐 하고 있는지 신경 쓰이고…….”

    지구는 대화하는 상대를 쳐다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계속 같은 곳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지구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또 무의식적으로 다른 곳을 쳐다본 예준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나는 그렇던데.”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지구의 옆모습을 힐끔 쳐다본 예준이 식탁에 느리게 고개를 파묻었다. 방금 전까지 멀쩡했던 몸에 갑자기 이유 모를 피로가 찾아와서였다. 

    예준이 식탁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 건 휘영과 하현이 옷을 다 골랐을 때였다. 피로함과 함께 두통까지 겹쳐서 속이 울렁거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웠지만 예준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저기서 아무 생각 없이 자고 있는 놈 때문에…….

    “이제 씻고 자야겠다.”

    하현과 나란히 몸을 일으킨 휘영이 소파를 노려보는 예준을 발견했다. 저 형 왜 또 저러고 있어.

    아무래도 찝찝한 몸으로 침대에 눕기는 싫고, 소파에 앉고 싶은데 준 때문에 못 앉는 것 같아 보였다. 완벽하게 착각을 한 휘영이 조심스럽게 예준을 툭툭 쳤다.

    “형 안 씻어요?”

    “너네 먼저 씻어라.”

    홀랑 들어가서 몸을 씻을 기분이 나질 않았다. 차라리 나머지를 다 씻겨서 들여보내고, 혼자 여유롭게 씻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예준이 고개를 저었다.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더니, 옷을 고르는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하현과 휘영이 가만히 멈춰 서서 예준의 얼굴을 살폈다.

    “그냥 형들이 먼저 씻어요. 예준이 형이 나중에 씻는다니까.”

    지구가 하현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제야 하현이 고개를 돌려서 휘영에게 말했다.

    “너 먼저 씻어.”

    “아냐, 너 먼저 씻지.”

    “나는 조금 이따가 씻어도 돼.”

    하현의 배려에 휘영이 고맙다며 옷을 챙기러 방으로 들어갔다. 그 잠깐 사이를 못 참고 지구가 하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도 없다 이거냐. 졸지에 투명인간 취급을 받은 예준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주…… 좋아 죽어라 이 새끼들아.”

    예준의 말에 뒤를 돌아본 하현이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를 덮은 손에 깍지를 껴서 아래로 끌어내렸다. 동시에 휘영이 옷을 챙겨 방에서 나왔다. 욕실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럼 들어갈게, 형.”

    한 마디 했다고 지구가 하현을 챙겨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어른 공경도 모르나. 스물다섯의 몸으로 어른 공경을 운운한 예준이 의자에서 일어나 TV 앞으로 걸어갔다. 소파에 누운 준은 많이 피곤했는지 미동도 없었다.

    씻고 자야 되는데 깨우기가 좀 그랬다. 어차피 내일 아침에 씻을 거니까 그냥 내버려 둘까. 예준이 준이 자고 있는 소파 앞을 왔다 갔다 했다.

    휘영이 욕실에서 나와서 하현을 부를 때까지, 그다음으로 지구가 씻고 나올 때까지 예준은 계속 거실을 걸었다. 무슨 산책하는 것도 아니고. 하염없이 반복되는 행동에 방으로 들어가려던 지구가 한 마디 했다.

    “형 안 씻어?”

    그제야 예준이 고개를 돌렸다. 아직 제대로 마르지 않은 머리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넋이 빠진 것 같아서 지구가 친절히 손가락으로 욕실을 가리켰다.

    “어, 씻어야지.”

    갈아입을 옷도 챙기지 않고 욕실로 들어간 예준의 뒷모습을 보며 지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까먹은 건지, 아니면 그냥 벗고 나올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속옷이라도 가져다줄까 싶어 발을 뗀 지구를 하현이 붙잡았다.

    “다 씻었어?”

    그러더니 목덜미에 대고 입술을 눌렀다. 흰 피부가 순식간에 목에서부터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진짜 귀여워. 뒤에서 웃음소리까지 들리자 지구도 더 이상 참을 재간이 없었다. 예준의 속옷 따위 저 구석으로 밀려서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지구와 하현이 방으로 들어가고, 약 30분 후의 예준은 욕실에 알몸으로 덩그러니 서서 갈아입을 옷을 들고 오지 않은 걸 죽도록 후회했다. 지금 소파에서 자는 놈 있잖아. 예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새끼 진짜.

    * * *

    컴백 후 첫 팬 사인회가 시작됐다. 사인회는 활동 때마다 빠지지 않는 스케줄 중 하나였다. 당첨자는 구매한 앨범의 개수만큼 응모를 하면 추첨을 통해 나오는 시스템인데, 다들 기본 몇백 장씩 사서 오기 때문에 추첨은 별 의미가 없었다. 진짜로 한 장, 두 장으로 당첨되는 사람들은 사인회에 온 200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했다.

    “안녕하세요!”

    실내 팬 사인회라 외부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을 일도 없고, 팬들도 질서를 잘 지켜줘서 순탄하게 진행이 됐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멤버들을 한 번 쭉 살핀 예준이 펜을 들었다. 다들 컨디션도 좋은 것 같고.

    “준아, 오늘 왜 이렇게 귀여워?”

    팬과 양손을 붙잡고 손을 이리저리 흔드는 준을 보며, 사인을 하다 말고 예준이 옆으로 힐끔 시선을 줬다. 오늘 좀 귀여운가? 고데기를 해서 약간 곱슬곱슬한 머리에, 쓰고 있는 베레모는 얼굴보다 더 컸다. 전체적으로 예쁜 의상이었다.

    “에이, 아니에요. 아까 거울 봤는데 평소랑 똑같던데요!”

    “꼭 귀여운 애들이 맨날 자기 아니라 그래.”

    귀엽네, 진짜. 귀엽긴 하다. 의상이 예뻐서 그런가. 내년이면 성인이 되는 남자한테 귀엽다는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어딘가 잘못됐다는 걸 예준도 알고 있었다. 근데 그렇게 보이는 걸 어떡하냐고. 

    잠시 정신이 팔려 있던 예준이 재빨리 자신의 앞에 선 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손을 붙잡고 최고의 팬 서비스를 선물했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선글라스를 써 달라는 팬의 요구도 거절하지 않았다. 

    “어때요?”

    “잘 어울리죠! 오빠 선글라스 완전 잘 어울리잖아요! 오빠 폰으로 셀카 한 번만 찍어주면 안 돼요? 아, 이런 것도 안 되나?”

    “왜 안 돼요.”

    여유로운 미소로 선글라스를 낀 버전과 벗은 버전을 모두 촬영한 뒤, 예준이 팬에게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그리고 뛸 듯이 기뻐하는 팬에게 나중에 공식 카페에 업로드해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옆으로 이동하는 팬에게 손을 흔들어준 예준이 앞에 선 팬을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예준아, 혹시 요즘 팬들 사이에서 회귀설 도는 거 알아요?”

    “……그게 뭔데요?”

    순간 입꼬리가 이상하게 움찔대는 걸 팬이 봤을지 모르겠다. 예준이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하고 웃으면서 물었다. 연상의 팬은 아무렇지 않게 양예준 회귀설이 제기된 배경을 설명했다.

    “예준이 이번 컴백 음방 보고 다들 놀랐잖아요.”

    “진짜요?”

    “막 아이돌 최소 3회차라고. 갑자기 어떻게 그렇게 늘어요?”

    팬은 아무 생각 없이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인데 혼자 괜히 찔려서, 예준이 어색하게 웃었다. 남들 눈에도 회귀 두 번쯤 한 걸로 보이나 보네. 하긴 멤버들도 실력이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늘 수가 있냐면서 많이 놀랐다.

    “잠재된 능력이 슬슬 나오는 거죠.”

    “맞아요, 예준이 완전 잘났지.”

    뻔뻔한 소리를 하는데도 착한 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해줬다. 손잡아도 괜찮냐는 말에 깍지까지 껴 준 예준이 조심히 가라고 상냥하게 인사했다. 

    예준이 진짜 천사야. 하늘에서 내려왔나 봐. 잔뜩 감동 받은 팬이 심장을 부여잡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큰일 없이 팬 사인회가 끝났다. 팬들이 모두 나가자마자 매니저가 곧장 받은 선물들을 가져갔다. 어떤 위험한 물건이 섞였을지 모르니 일단 직원들이 1차로 확인을 하기 위함이었다. 데뷔 초부터 팬 사인회가 끝나면 꾸준히 거쳐온 절차였다.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예준은 생각에 잠겼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옆에서 휴대폰을 하는 준을 살폈다.

    이쯤 되면 예준도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준이 아니면 절대 안 될 정도의 마음은 아니지만 좋아하긴 하는 것 같다고. 그렇게라도 인정하지 않으면 계속 신경이 쓰여서 미칠 것 같은 이유를 댈 수가 없었다. 

    좋아하면 신경 쓰인다니까. 사실 그거뿐만 아니라, 준이 다른 사람과 연애 했을 경우도 생각해 봤다. 처음에는 실수로 선욱을 떠올리는 바람에 앉은 자리에서 베개를 발로 걷어찼다. 

    준의 옆자리가 꼭 자신은 아니더라도 그 미친 새끼는 절대 안 된다. 만약 진짜 애를 꾀어내면 귀찮음을 무릅쓰고라도 직접 삽을 들고 가서, 산에 구덩이를 판 뒤 묻어 버릴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뭐 하냐?”

    아까부터 휴대폰에 푹 빠져서는, 액정 안으로 빨려 들어갈 기세인 준의 앞으로 예준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준이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예준은 그 잠깐 사이에 액정 화면에 떠 있는 자신의 사진을 분명히 봤다. 뭐야, 내 사진 줍나. 황급히 다시 집어 들고 화면을 끈 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닌데요!”

    이렇게 대놓고 당황한 티를 내는데 못 본 척을 해줘야 하나. 예준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짓이 귀여워서 그냥 넘어간다. 누군가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건 모두가 흔히 경험하는 매우 평범한 감정이지만, 예준은 문득 방금 전의 느낌이 어딘가 묘하다고 생각했다. 뭔가, 조금 과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예준은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잤다. 감정 소모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끔찍할 정도의 피곤함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한참 죽은 듯이 잠을 자던 예준이 깼을 때는 사방이 조용했다. 당연히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하현이 소파에 반쯤 누운 자세로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너 왜 나와 있냐?”

    “지구 작업 중이라 집중하는 데 방해될까 봐요.”

    “내가 자는데 방해될 거라는 생각은?”

    “한마디도 안 하고 조용히 있었는데요.”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예준은 잠에서 깬 후에도 하현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할 말을 잃은 예준이 다른 말을 꺼냈다.

    “영감 받으려면 네가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예준이 어깨를 으쓱대며 깐죽거렸다. 예준의 장난과 놀림에는 이미 익숙해진 하현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형 나중에 연애하면 두고 봐요.”

    “…….”

    왠지 모르게 오싹해진 예준이 말을 아꼈다. 그때 갑자기 도어록 눌리는 소리가 나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매니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오, 끈적끈적해.”

    팬 사인회에서 받은 선물들이 한 번에 집 안으로 들어왔다. 더위가 가신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매니저가 구슬땀을 흘렸다. 양손 가득 든 짐의 무게가 상당할 것 같았다. 현관 앞에 쇼핑백들을 내려놓은 매니저가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한 번 더 내려갔다 와야 돼.”

    “저랑 같이 가요.”

    의자에 앉아 있던 하현이 몸을 일으켜 매니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에 예준이 방문을 열어 멤버들을 거실로 불러냈다. 스탠드 하나 켜 놓고 집중하고 있던 지구도 하던 것을 멈추고 밖으로 나왔다. 

    “하현이 형 어디 갔어?”

    “매니저 형이랑 남은 선물 가지러.”

    잠깐 없다고 칼같이 찾네. 엘리베이터 타이밍이 잘 맞았는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하현과 매니저가 바로 들어왔다. 남은 쇼핑백을 모두 내려놓고 하현이 곧장 지구의 옆에 앉았다.

    쇼핑백이 이리저리 섞였지만 각자의 이름이 적혀 있어서 찾기 어렵지는 않았다. 아까 팬이 줬던 괴상한 선글라스를 찾은 예준이 반가운 마음을 느꼈다.

    “다음 역조공은 더 좋은 걸로 해야겠어요.”

    팬들이 준 선물을 소중하게 열어 본 준이 말했다. 지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도 더 추가하자고 했다. 바로 전 역조공 때도 간식 차를 몇 대나 불렀지만, 받는 것들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이런 마음가짐 덕분에 연차가 쌓일수록 역조공을 할 때마다 화두에 오르곤 했다. 

    “형 이거 엄청 귀엽죠.”

    준이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반듯하게 선 토끼 모형이 귀를 까딱이고 있었다. 별다르게 쓰이는 용도는 없는 것 같고, 그냥 장식품 같았다. 양손으로 소중하게 선물을 붙잡은 준이 대답 없는 예준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귀엽지 않아요? 어디서 가져오셨는지 궁금하다.”

    예준은 혹시 얼굴이나 귀가 빨개지지 않았는지 걱정했다. 존나 귀엽네 진짜. 토끼 귀가 까딱이는 타이밍이랑 준이 눈을 깜빡이는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서 더 그랬다. 예준이 손등을 이마에 가져다 대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휙휙 저었다. 

    “저리 치워봐.”

    “……형은 귀여운 거 보는 눈이 없는 거 같아요.”

    준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토끼 모형을 치웠다. 예준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자신의 눈은 아주 멀쩡했다. 괜히 더워져서 예준이 부엌으로 향했다. 컵에 차가운 물을 가득 따른 예준이 벌컥벌컥 들이켜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예준이 차가운 물로 방금 전에 겪은 충격을 몰아내는 동안, 다른 쇼핑백을 뒤적인 준이 화색이 도는 얼굴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뭔가 싶어 빤히 쳐다보던 예준이 물건을 보자마자 컵을 떨어뜨렸다. 다행히 다 비운 상태라 쏟아지는 건 없었다.

    “저 학교 갈 때 쓰라고 주셨나 봐요.”

    준이 꺼내 든 물건의 정체는 학용품 세트였다. 그것도 굉장히 비싸고 좋아 보이는. 열어 보니 필기구는 물론이고 색연필까지 들어있었다.

    준이 학생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직접 명찰까지 제작을 했는지, 교복에 달면 딱 앙증맞고 귀여울 것 같은 노란색 명찰도 함께였다. 

    “명찰 신기하다. 이런 건 어떻게 만드시는지 모르겠어요.”

    “너네 학교 진짜 명찰보다 예쁘다.”

    “그렇죠! 아크릴이라 그런 것 같아요. 지금 학교는 부직포 명찰이거든요.”

    준이 얼마나 기뻐하든 말든 예준은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예준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귀여움이고 뭐고 느낄 새도 없었다. 공부를 안 해서 쓸 일이 없을 것 같다며 아쉬워하던 준이 바닥에 떨어진 컵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형?”

    자신을 부르든 말든, 준과 자신의 나이 차이를 계산하던 예준이 멈칫했다. 암산 잘하지도 않는데 이럴 때만 머리가 프로펠러처럼 잘 돌았다. 그냥 스물다섯이어도 쓰레기인데 거기에 회귀를 두 번……. 

    “왜 그래요?”

    ……이거 완전 희대의 씹새끼 아니냐?

    “아니. 손이 미끄러졌네.”

    누가 들어도 어색한 말투로 예준이 넘어진 컵을 들어 올렸다. 그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보고도 준은 그냥 넘어갔다. 빠르게 주어진 무관심에 예준은 그 짧은 순간에도 섭섭함을 느꼈다. 

    형이 손이 미끄러져서 컵을 떨어뜨렸는데 관심도 없냐. 그런 한심한 생각이나 하다가 뒤늦게 떠오른 나이 차이에 다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형, 왜 저래 진짜.”

    멤버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든 말든, 예준은 일단 몰려온 자괴감을 몰아내야 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준이 미성년자라는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회귀하자마자 멤버들 나이부터 전부 계산했으니까.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눈으로 보고 그걸 마음으로 느끼는 건 달랐다. 눈앞에서 학용품 세트와 명찰을 보니까 그게 너무 확실하게 다가왔다.

    “정신 사나우니까 정리하면서 봐라.”

    결국 묘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예준이 학용품 세트를 보이지 않게 쇼핑백 안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언제부터 그렇게 깔끔했다고, 자신의 선물을 대신 정리하는 예준을 보며 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리와는 거리가 먼 예준이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티가 날 정도로 지저분했다. 지구가 가끔 거실에 나와서 어질러진 것들을 주워줄 정도였다.

    황당하게 쳐다보든 말든 선물 확인을 뒤로 미룬 예준이 소파 위로 올라가 누웠다. 그리고 눈앞에서 사라진 학용품 세트에 안심하며 뇌를 깨끗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마음은 서른여섯이지만 얼굴은 스물다섯이니까. 예준이 깔끔하게 자기 합리화를 끝냈다. 회귀한 것도 본인만 알고 있으니까 조용히 있으면 그냥 스물다섯이었다.

    물론 미성년자라는 점도 걸리긴 하지만, 어차피 준이 성인이 되기까지 반년도 안 남았다. 곧 나무들이 붉고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가을이 올 거다. 그러면 그때부터 세 달 정도만 지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예준은 본래 양심이 있는 타입도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그대로 베껴서 숙제를 해 놓고 자기가 했다고 하거나, 귀찮아서 입으로만 때워 놓고 제일 열심히 한 것처럼 굴곤 했다.

    괜히 양심 찔렸네. 한 번뿐인 인생 뻔뻔하게 살자는 자신의 모토에 맞지 않는 상념에 잠시 잠겼던 예준이 반성하며 몸을 일으켰다.

    “뭘 쳐다봐.”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준의 시선을 느낀 예준이 삐딱하게 말했다. 그리고 팬이 선물한 선글라스를 주워서 꼈다. 얼굴은 우스꽝스럽게 변했지만 적어도 눈은 가려졌다. 뭔가 지금은 눈이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갑자기 주섬주섬 선글라스를 끼는 예준을 보며 준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바로 얘기할 수도 있지만 예준은 조금 미루기로 했다. 웃긴 소리지만 이번만큼은 바로 말부터 뱉고 싶지 않아서, 천천히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 *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3주나 지났다. 그 사이에 공식적인 활동은 끝났고, 이제는 자잘한 스케줄만 꾸준히 들어왔다. 몸에 무리가 가거나 크게 피곤할 만한 일정은 아니라 웬만해서는 숙소에 있었다.

    “형도 뭐 마실래요?”

    “나 아이스티.”

    갑자기 평소에는 줘도 안 마시는 아이스티라니. 의아한 주문에도 친절한 휘영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아이스티를 타줬다. 컵을 받아 든 예준이 좋아하지도 않는 아이스티를 홀짝이면서 굳게 닫힌 방문을 노려봤다. 어제 새벽에 갑자기 잠이 안 오니까 같이 좀 있어 달라며, 밤새 예준을 괴롭힌 준은 한참 늦잠을 자는 중이었다.

    벌써 회귀한 지 반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그냥 지옥 같았는데, 익숙해지니까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이게 원래 팔자려니 싶었다. 또 첫 번째 회귀 때와는 다르게 일련의 사건들이 조금씩 변해서 지루하지도 않았다. 예준은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그냥 잊어 보기로 했다. 그래야 완벽한 스물다섯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지금 일어나냐?”

    누가 봐도 막 일어난 모양새로 하현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얼음을 씹으며 예준이 괜히 말을 걸어 봤지만, 하현은 그대로 무시하고 욕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침마다 깨워주는 애인이 자리를 비워서인지 평소 기상 시간보다 한참이 늦었다. 

    지구는 활동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비웠다. 개인 스케줄 때문이었다. 휴식기 동안 음악 관련 프로그램만 다루는 채널에서 무슨 방송을 촬영한다고 들었는데 정확히는 몰랐다. 예준은 원래 남의 스케줄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아는 건 오늘 밤에 안 들어온다는 것뿐이었다.

    “얼굴은 다 부어 가지고.”

    “새벽에 저랑 같이 라면 끓여 먹어서 그래요.”

    평소와 다르게 부은 하현의 얼굴을 보며 예준이 곧장 지적했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휘영이 굳이 끼어들어 설명해 줬다.

    “알지. 자다 깨니까 라면 냄새가 진동을 하던데.”

    라면 먹고 싶다는 생각을 뒤로 미루고 겨우 다시 잠들었더니,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준이 깨우는 바람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가만히 누워서 양을 좀 세어보라고 했더니 싫다고 예준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데 하는 짓이 귀여워서 때리지도 못하고, 결국 영화 한 편 결제해 준 다음에 간식까지 꺼내 먹였다. 

    3주 동안 준은 놀랍게도 더 귀여워졌다. 얼굴이 변한 건 아닌데 행동이 그랬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좋은 걸 못 숨겨서 자꾸만 겉으로 티를 내는데, 그게 정말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예준은 단 것에도 약하지만 귀여운 것에는 더 약했다. 키우지는 못하지만 어릴 때부터 강아지, 고양이도 좋아했다.

    곧 하현이 욕실에서 나왔다. 세수를 했는지 얼굴이 멀끔해졌다. 예준이 계획대로 뜬금없는 제안을 꺼냈다.

    “너네 오늘 놀러 갈래?”

    어제 그 투정을 다 받아 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로 날을 정했으니까. 언제나 멤버들 개개인에게 중요한 일이 있으면 앞장서서 자리를 비워 준 게 예준이었다. 참된 리더의 역할을 10년이나 수행했으니 이제 슬슬 그 호의를 돌려받을 때가 왔다.

    “어딜 놀러 가요?”

    “호텔.”

    “……갑자기 뭔 호텔…….”

    두 명이 동시에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예준은 개의치 않았다.

    “내가 미리 예약해 놨거든. 택시 타고 가서 하루 푹 쉬다 와. 룸서비스 시키면 이걸로 계산.”

    미리 준비해 둔 카드까지 꺼내 드는 예준의 행동에 하현과 휘영이 시선을 교환했다. 죽을 날 통보라도 받았나. 아니면 뭔가 잘못한 일이 있거나. 이유 없이 이럴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휘영이 카드를 유심히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여서, 예준이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겨우 가다듬고 말했다.

    “한도 안 넘었고 위조카드도 아니다.”

    “갑자기 왜 그래요, 형 뭐 잘못했어요?”

    스물다섯이 열아홉이랑 사귈 생각하는 게 잘못이긴 하지. 예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약 30분 뒤, 준비를 끝낸 하현과 휘영이 하루 종일 잘 놀고 오겠다며 손을 흔들고는 숙소에서 나갔다. 예준이 돈을 내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예준은 준을 깨우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시간은 많으니까 알아서 깰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기다린 게 무려 3시간. 준은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방 밖으로 나왔다.

    잠은 다 깼는지 멀쩡한 얼굴이었다. 이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더니, 다시 들어갈 생각인지 망설임 없이 발을 옮겼다.

    “야. 정준.”

    예준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돈 뜯는 깡패처럼 준을 불러 세웠다. 건들건들한 목소리와 태도에 뒤를 돌아본 준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래. 그래도 부르는데 무시하고 갈 수가 없어서 물었다. 

    “왜요?”

    “이리 와봐.”

    마치 애완동물을 부르듯이 건방진 말투였다. 심지어 손은 양쪽 주머니에 꽂아 넣은 상태였다. 저런 재수 없는 부름에도 아침부터 설레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힘차게 양쪽으로 고개를 저은 준이 말했다.

    “그렇게 재수 없게 부를 거면 안 갈래요.”

    단호하게 선언한 준이 등을 돌렸다. 그제야 예준이 손을 주머니에서 뺐다. 더 이상 재수 없는 자세로 서 있지 않음을 알리기 위해서 양손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린 예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발 한 번만 이리 와주라.”

    말뿐이긴 하지만 예준의 애원 섞인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던 준이 곧장 걸어왔다. 보폭을 최대한 크게 해서 두 걸음 만에 코앞까지 왔는데……. 씨발 진짜 눈에 뭐 끼었나. 왜 이렇게 귀엽지. 최근 들어 비속어 사용이 과하게 늘어난 예준이 속으로 진심 가득한 욕설을 내뱉었다.

    “잠 다 깼지?”

    “일어난 지 좀 됐어요.”

    비몽사몽 잠결에 들었다고 착각하면 곤란하니 미리 확인 절차를 거쳤다. 준의 눈앞에 손을 몇 번 흔든 예준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 나 어디가 좋은데?”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진짜 재수 없는 거 알아요?”

    “일단 말해봐. 좋은 일 생길 거야.”

    좋은 일은 무슨. 본인 무덤만 파는 꼴이라는 걸 알고 있는 준은 입을 열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닫힌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살 간지럽히고 싶다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황당한 충동을 급하게 밀어낸 예준이 다시 협상을 시작했다.

    “믿어봐, 진짜. 얼굴? 아니면 몸?”

    “뭔, 뭔 몸이에요. 형 제발 자신감 좀 그만 내려놔요!”

    “내가 나 좋아하는 게 뭐 잘못이라고.”

    준이 은근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확실히 몸이 좋긴 하지. 키도 커서 멀리서 보면 꼭 모델 같았다. 그래서 옷태도 잘 살고.

    사실 몸도 몸이지만 화려한 얼굴도 한몫했다. 외모적인 걸 보고 좋아한 건 아니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예준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뭐라 하나 꼬집어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없어요.”

    “좋은 데가 없다고?”

    예준이 재차 물었지만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으니까 없다고 하는 게 맞겠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한 예준이 문득 과거에 들었던 어이없는 말을 떠올렸다.

    “그래, 고작 햄버거보다 좋은 정도인데 좋은 데가 뭐 있겠냐.”

    “형이 엄마 바로 다음이에요.”

    예준이 바뀌었을 줄 알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환호하는 중이었다. 햄버거 위에서 어머니 바로 밑이라니. 진실이 뭔지도 모르고, 예준은 무사히 준의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조정했다는 기쁨을 만끽했다.

    “근데 나만 이러면 뭐해요. 형한테 나는 100명 중에 82등은 되려나.”

    준은 스스로를 너무나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일단 예준의 지인은 100명이 안 된다. 과거에 친구였던 사이, 당장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아슬아슬한 사이, 가볍게 인사만 하고 지내는 사이 등을 전부 합치면 솔직히 천명도 되겠지만 이런 건 다 제외하는 게 맞다. 심지어 몇 주 전에 같이 놀던 사람들하고 절교까지 했으니 더 줄었다.

    “아니, 너 1등인데.”

    “거짓말하지 마요. 이제 보니까 거짓말이 그냥 일상이야.”

    “전에 병원에서 거짓말한 거 가지고 혼났잖아. 이제 안 한다니까 진짜.”

    예준의 얼굴에 드물게 진정성이 보였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준이 눈을 깜빡이며 다음 대사를 생각했다.

    사실 뒤에서 1등이야, 혹은 1명 중에 1등이야. 이미 예준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친 것도 그렇지만 누가 들어도 번지르르한 거짓말이었다. 

    “진짠데 안 믿네?”

    예준이 밖으로 꺼냈던 손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고, 상체를 비스듬하게 숙였다. 그러자 준과 눈높이가 딱 맞았다.

    “나 좋아한다면서 왜 이렇게 반응이 밍밍하냐?”

    “형 지금 장난하는 거예요?”

    “아닌데.”

    진지하게 무게 잡고 말하면 괜히 꼰대처럼 느껴질 것 같아서 일부러 가벼운 분위기를 만든 건데, 아무래도 당사자가 믿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었다.

    예준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미 자신에게 고백한 상대에게 말하는 건데도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원래 두 달 있다 말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뭐 말하려고요?”

    “나 좋아한다며. 연애하자.”

    굉장히 진지한 표정에, 진심을 담아서 뱉은 고백이었다. 하지만 준이 보기에는 너무나 태연해 보여서,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깜빡였다.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던 예준은, 커다란 눈이 빨갛게 변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준이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뭐야, 왜 울어.”

    “형은, 형은 진짜……. 진짜 사람이 왜 그래요.”

    그러더니 주먹으로 가슴팍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가해지는 고통에 예준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작지도 않은 애가 매달리니까 균형 잡기도 힘들었다.

    “야, 야.”

    “내가 형 좋아하는 게 웃겨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놀리는 거잖아요, 지금.”

    “아니, 아니라고. 야. 얘기 좀 듣고.”

    “내가 형한테 좋아해 달라고 언제 그랬냐고요. 나만 혼자, 그냥 혼자…….”

    서러움을 이기지 못한 준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잠깐 사이에 얼마나 운 건지 얼굴이며 눈이며 잔뜩 빨개졌다. 말을 하다가도 억울했는지 목소리가 점점 울음에 묻히더니, 결국 고개까지 숙이고 혼자 몇 번이고 눈물을 삼켰다.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예준이 한숨을 내쉬며 무릎을 굽혀 준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으로 눈을 맞추고, 방금 전의 자신을 반성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거짓말 안 한다니까. 진짜야. 진짜라고. 해명할 시간도 안 주고 울면 어떡하냐.”

    “형이, 지금…….”

    “진짜 좋아한다니까. 왜 이렇게 사람을 못 믿냐. 이번에도 거짓말이면 지금 저기 베란다로 뛰어내릴게.”

    “…….”

    극단적인 말까지 동원하고 나서야 신뢰가 생겼는지 준이 눈물을 멈췄다. 코를 훌쩍이며 손등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더니,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진짜 농담하는 거 아니죠?”

    “농담 안 한다니까. 나 봐봐.”

    예준이 준의 볼을 붙잡고 그대로 눈을 마주쳤다. 눈빛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진정성을 확인하라는 뜻이었으나 준은 다른 의미로 놀랐다.

    커다란 손이 양쪽 볼을 붙잡고 있으니까 벗어나지는 못하고, 부끄러운 감정은 자꾸만 치고 올라오니까 당연하게도 귀부터 빨개지기 시작했다. 

    “맨날 귀부터 빨개지더라.”

    드디어 준의 귀를 검지와 엄지로 잡아본 예준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제 믿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대신 옆에 얌전히 좀 붙어 있어라. 너 계속 돌아다니는 거 신경 쓰여 뒤지겠어.”

    “……신경 쓰여요?”

    “어. 불안하니까 혼자 돌아다니지도 말고, 제발 부탁인데 병원은 나랑 같이 가자.”

    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받은 예준이 안도했다. 이제 최선욱은 걸리면 파묻어 버릴 일만 남았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예준의 가슴팍으로 준이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예전 같으면 툭 밀어 버렸을 예준이 손을 뻗어 머리를 감싸 안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

    그 다정한 행동에 깜짝 놀란 준이 겨우 그쳤던 눈물을 다시 터뜨렸다. 이렇게 안아 준 사람이 어머니 이후로 처음이라서, 그게 예준이라서.

    한참 눈물을 쏟아내다 겨우 그친 준이, 뒤늦게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해봤자 예준의 가슴팍은 이미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마르겠지만 예준은 갈아입는 것을 선택했다. 

    “옷 갈아입을 거니까 먹고 싶은 거 시켜.”

    예준이 휴대폰을 툭 던지며 말했다. 그제야 준이 시계를 봤다. 아침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두 시가 넘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햄버거 말고 다른 걸 먹어볼까.

    메뉴를 생각하며 휴대폰 화면을 켰는데 비밀번호가 걸려 있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슬라이드 해서 잠금을 해지한 준이 아직 울음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연예인 휴대폰에 비밀번호가 없으면 어떡해요.”

    “귀찮은데 꼭 걸어야 되냐?”

    “누가 주워서 보면 어떡하려고요.”

    휴대폰을 주워봤자 사진 찍는 걸 즐기지 않으니 갤러리가 털릴 일도 없고, 지인들과 나눈 메신저 내용도 이상한 건 하나도 없었다. 예준은 스스로 굉장히 당당했다.

    아, 메신저 앱에 있는 아버지 프로필 사진이 들키면 조금 곤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저분하긴 해도 덜렁거리는 성격은 아니라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예준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럼 네가 걸어.”

    “네?”

    “네가 하고 싶은 비밀번호 해.”

    준의 얼굴에 천천히 화색이 돌았다. 지금 저에게 전적으로 자신의 비밀번호에 대한 권한을 주겠다는 말이었다. 예준에게는 별거 아닌 일일지도 모르지만, 방금 막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직후라 뭔가 특별한 일처럼 느껴졌다.

    “진짜요? 마음대로 해도 돼요?”

    “어. 마음대로 해.”

    “바꾸면 안 돼요.”

    “알았어.”

    예준에게 휴대폰 화면이 보이지 않게 등을 돌린 준이 비밀번호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사이 갈아 입을 옷을 찾은 예준이 축축하게 젖은 옷을 벗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막 벗을 텐데, 괜히 신경 쓰여서 살짝 뒤를 돌아 가려진 커튼 쪽을 봤다.

    “걸었어요.”

    고민도 안 했는지 준이 30초 만에 비밀번호를 설정했다. 그리고 신나게 뒤를 돌았는데 예준이 한참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앞모습이 아니라 등만 보였다.

    팬들은 예준의 몸에 대한 칭찬을 자주 했다. 어깨도 넓고, 허벅지도 탄탄한데 몸이 두껍지는 않은 게 완벽한 연예인이라고. 이렇게 보니까 진짜 모델 같았다. 괜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에 준이 시선을 돌리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다 했냐?”

    옷을 다 입자마자 예준이 뒤를 돌아 물었다.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뭘로 바꿨어.”

    “그건 형이 맞춰야죠. 자요!”

    준이 휴대폰을 건넸다. 익숙한 금이 간 액정이 눈앞에 들어왔다. 전에 준이 병원에 가야 한다며 급하게 스케줄을 펑크 냈던 날 깨진 액정이었다. 준의 한 손에 아슬아슬하게 들어가는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며 예준이 생각했다. 만지다가 손 다치겠네. 무심코 튀어나온 걱정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언제부터 이런 걸 신경 썼다고. 예준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비밀번호를 맞추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준이 생각할 만한 숫자라고는 기껏해야 자기 생일이거나 오늘 날짜일 것 같았다. 혹은 뭔가 특별한 날일 수도 있겠다.

    먼저 준의 생일부터 입력해 본 예준은 허무하리만치 바로 풀리는 잠금에 어이없이 웃었다. 투명하네. 다 보인다, 진짜.

    “네 생일?”

    “어, 형 내 생일 어떻게 알아요?”

    “내가 네 생일도 모르는 바보냐.”

    11년을 챙겼는데 모르는 게 바보였다. 아니, 애초에 같이 데뷔한 멤버 생일을 모르는 게 쓰레기잖아.

    물론 데뷔 1년 차의 예준은 멤버들 생일을 몰랐다. 다른 멤버들이 알아서 누구 생일이니까 챙기자고 하면, 예준은 그제야 원래 알았다는 듯 슬그머니 카드를 꺼내는 역할을 해 왔다.

    “그럼 너도 비밀번호 내 생일로 바꿔.”

    “네?”

    “공평하게 해야지.”

    예준이 웃으며 자기 휴대폰을 검지로 툭툭 건드렸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말과 함께 잠금 화면이 떴다. 어서 휴대폰을 가져오라는 의미에서 턱짓으로 방을 가리켰는데, 준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우물쭈물 대답했다.

    “……이미 형 생일이에요. 한 2주 전에 바꿨어요…….”

    아 씨발. 이 귀여운 걸 왜 10년 동안 몰랐지. 그래, 지난 10년 동안 얘는 나한테 아무 마음도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혼자 힘들었을 시간을 끝까지 몰랐으니까. 변화를 통해 얻은 마음이니 회귀 전에는 뭔가 느껴졌을 리가 없었다.

    “그래, 커플 비밀번호 좋네.”

    예준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말로는 좋다면서, 표정은 세상 시름을 다 얻은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다고 판단한 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안 들어요? 형이 마음대로 하라고 해놓고.”

    마음에 존나 드는데. 열아홉 살짜리 애랑 비밀번호 좀 맞췄다고 이런 기분이 드는 걸 보면 아마 10년이나 연애를 안 한 나머지 미쳐버린 게 분명했다. 예준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뭐 먹을 거야? 지금 시키면 4시에 먹겠다.”

    예준의 말에 단순한 준이 방금 전의 상황은 모두 잊고 메뉴 선정에 열을 올렸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다른 걸 먹어야겠다며 그 좋아하는 햄버거도 제쳐두더니, 결국 고른 게 디저트였다.

    “케이크 먹으면 안 돼요?”

    “밥 시키라니까 뭔 케이크야.”

    “근데 특별한 날에는 케이크 먹는 거예요.”

    특별한 날에는 케이크라니. 빤하고 귀여운 생각에 예준의 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특별한 날에는 케이크 먹는 거라고 누가 그러냐?”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서 생일 때마다 꼭 초코파이에 초 꽂아 먹었는데.”

    해맑은 답변에 예준이 울컥했다. 어떤 씹새끼가 애 생일에 초코파이를 주냐. 이제야 준이 왜 생일 때마다 선물로 케이크를 고집하는지, 3단 케이크를 받고 울었는지 알 것 같았다. 

    “시켜 줄 테니까 밥 먹고 먹어.”

    앱을 키고 케이크를 종류별로 담아서 주문을 마친 예준이, 한식류에서 적당한 것들을 골라 늦은 점심까지 결제를 했다.

    그렇게 도착한 불고기 덮밥에는 양파와 당근이 가득했지만 준은 편식을 하지 않고 꼭꼭 씹어 싹싹 먹어치웠다. 밥을 다 먹자마자 예준이 약 30분 전에 도착한 케이크를 식탁 위에 펼쳤다.

    “……형, 뭘 이렇게 많이 시켰어요?”

    “먹고 남으면 나중에 먹어.”

    연애 첫날 기념인가. 상냥해진 예준의 태도에, 케이크를 먹다 말고 감동 받은 준이 포크를 입에 물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예준이 어서 먹으라며 포크를 입에서 빼내 손에 쥐여 줬다.

    후식까지 먹고 나서 한참을 옆에 딱 붙여 놓고 있다가, 졸리다길래 침대까지 내줬다. 그리고 자신의 침대에, 자신의 이불을 덮고 누운 걸 보면서 예준은 잠깐 정신 나간 생각을 했다. 

    “……씨발, 나 방금 무슨 생각 한 거지.”

    솔직히 자기 자신도 준을 좋아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는데, 몸이 알아서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걸 보면 제대로 넘어가긴 했나 보다. 아무리 양심 같은 건 진작 팔아넘겼다지만 이건 아니었다. 급히 정신을 차린 예준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런 기분은 느낀 적 없는데, 아무래도 침대가 시각적인 자극에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이상한 기분은 놀랍게도 몇 주 전에 봤던 학용품 세트를 생각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깨끗하게 정화된 마음과 생각으로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평온한 하루를 보낸 예준은, 다음날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아침 일찍 숙소에 돌아온 지구에게 불만 가득한 말을 들어야 했다.

    “왜 둘이 호텔을 보냈어. 방이라도 두 개 잡아 주든지.”

    “……뭔…….”

    예준이 황당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해외투어 할 때 둘이 같은 방 써도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지구는 멤버에게까지 질투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물론 예준과 하현이 붙어 있는 건 싫어했다. 아무래도 나머지 둘은 믿을 수 있고 저는 못 믿겠다는 게 분명했다. 이 깜찍한 새끼.

    “둘이 놀라고 보내는데 방을 따로 잡아 주냐?”

    “기사 이상하게 났잖아.”

    지구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식기에 멤버 둘이 함께 호텔……. 뭔가 이상한 느낌이긴 했다. 나갈 때 분명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무장한 걸 봤는데, 그걸 또 용케 알아본 모양이었다.

    게다가 호텔 직원이 직접 글을 올리는 바람에 예준의 이름으로 예약했다는 사실까지 널리 알려졌다. 무엇보다 둘의 커플링을 밀고 있는 팬들이 신났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양예줁이 방잡아줫대ㅠㅠㅠ 미쳤다 진짜 리더형이 응원하는 사랑]

    [엉엉 내가 이 호모에 주식 133432478개 박아넣었다고]

    [휴식기에 친구끼리 갑자기 호텔..? 이거 공개연애각 아니니]

    살면서 멀쩡하게 여자만 만나왔던 휘영은 졸지에 동성의 친구와 사귀는 사이가 됐다. 예준이 지구가 이것들을 찾게 된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작업하다 말고 습관처럼 애인 이름 검색하다가 찾았겠지. 인터넷이 워낙 여러 SNS와 연결되어 있어서, 멤버끼리 엮는 건 음지에서 한다고는 하지만 찾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갑자기 호텔은 왜 보낸 거야?”

    “다 이유가 있어. 네가 그럴 줄 알고 침대 두 개 있는 방 잡았잖아. 걔네는 아무 생각 없이 자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꺼져.”

    예준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어 지구를 쫓아냈다. 내가 지금까지 도와준 게 몇 갠데 은혜도 모르고.

    솔직히 휴식기에 뜬금없이 단둘이 호텔에서 하루를 보낸 건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러니까 팬들도 저렇게 난리가 난 걸 테고. 

    몰라, 뭔 상관이야. 쓸데없는 생각을 다 털어버린 예준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호기심에 쓰지도 않는 SNS에 접속했다.

    예준은 맹세코 단 한 번도 팬들의 문화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팬들이 공식 카페에 팬 아트를 올려주거나, 직접 제작한 굿즈 사진을 올려주면 댓글도 달고 했지만 한 번도 팬의 개인 계정을 염탐한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홈마가 찍어 준 사진이나 구경하는 정도였다. 잘 나온 건 가끔 저장도 하고.

    우연치 않게 본 게 하나 있긴 했다. 멤버들과 다 같이 처음 봤던 충격의 빙의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게임 로고 프로필 사진을 달고, 가정부인 김여주에게 자신의 방은 들어오지 말라며 경고하는 빙의글 연성 속의 자신을. 충격과 함께 찾아온 분노에 젖어서 한참을 날뛰었던 기억이 났다.

    음지에서, 가수가 보지 못하도록 서치 방지까지 하면서 앓는 팬들의 노력을 무시하고 예준이 그걸 굳이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 신문물을 잘 다루는 예준은 팬들이 서치 방지를 어떤 식으로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엮어도 존맛인 렙페스........ㅠㅠ]

    팬이 아련하게 적어둔 글을 보며 예준이 과거를 회상했다. 예전에 팬 사인회에서, 팬이 자신과 하현을 엮은 팬픽을 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숙소에서 발견한 지구가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게 지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버린 팬의 선물이었다. 

    SNS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저와 준을 붙여 놓은 팬의 계정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항상 자주 붙어 있던 탓인지 사진도, 움짤도, 영상도 많이 떴다.

    자신이 준에게 언제 이런 말을 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워낙 옛날 일이니까. 심지어 ‘서바이벌 ID’ 촬영 당시에, 연습하다가 한 번 업어줬던 게 방송됐는데 그 영상까지 나왔다. 이런 걸 어떻게 다 모으고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팬싸에서 최근에 제일 속 썩이는 형.. 당연 이럴줄 알았다 부부싸움했냐구^^]

    데뷔 전부터, 마지막 스케줄까지의 저와 준이 붙어 있는 것들을 전부 다 수집해 놓은 팬의 계정에 올라온 글이었다. 앞에 선 팬에게 신경을 쓰느라 몰랐는데 포스트잇에 제일 속 썩이는 형이 자신이라고 답변을 한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네. 자신의 침대에서 잘 자고 있는 준의 볼을 아주 살짝 꼬집은 예준이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Y군의 고민 / 01편]

    팔로잉을 타고, 타고 넘어가서 구경하던 예준이 어떤 글을 발견했다. 이런 팬픽을 읽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건 알지만 괜히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예준은 멍청했다.

    열아홉인 준과 스물다섯인 예준을 엮은 글에, 제목이 Y군의 고민인 이유가 뭔지 빠르게 파악을 했어야 했다. 이건 다 예준이 제목을 대충 읽은 탓이고, 망설이지 않은 탓이었다.

    [Y군은 최근 고민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흥미로운 도입부에 예준이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을 놀렸다. 오른쪽에 위치한 스크롤바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분량이 상당하다는 뜻이었다.

    [이게 다 미성년자인 애인을 둔 탓이다.]

    예준은 이 대목에서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하지만 문단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탓에, 예준이 뒤로 가기를 누르는 것보다 밑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는 게 더 빨랐다. 의도해 놓은 건지 심지어 굵은 글씨 효과도 들어가 있었다.

    [만지고 싶다고. 나도 존나 만지고 싶다고! 하지만 Y군은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다. 그러니 미성년자를 가지고 쓰레기 같은 상상을 하는 것은 아주 큰 죄다.]

    씨발, 누가 나 사찰한 거 여기다 써놨어.

    팬들의 음지 문화는 가수에게 금기였다.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고, 찾아봐서는 더더욱 안 되는. 하지만 예준은 호기심에 그 금기를 어겼다. 팬이 알게 된다면 당장 계정을 폭파시켰겠지만, 예준은 자신이 그 글을 봤다는 흔적을 그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뒤로 가기를 누르고 휴대폰을 멀리 밀어버렸다.

    나름 문예 창작과 출신인 예준은 살면서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읽어왔다. 중고등학생 필독서는 물론이고,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은 두 번 세 번씩 읽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유명 작가의 글도 읽고 뒤통수가 울린 적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 인생 처음으로 그런 글을 발견했다. 팬의 개인 공간에서.

    회귀한 시간을 제외하더라도 준과 자신의 나이 차이는 정확히 6살이었다. 팬들이 친구처럼 맨날 싸우는 게 신기하다고 할 정도로 그리 편하고 가까울 나이는 아니었다. 그런 둘을 엮어놨는데 이런 소재의 작품이 없는 게 이상했다. 

    예준이 막 연애를 시작한 6살 어린 애인을 내려다봤다. 스물셋의 준을 뚜렷하게 기억하기 때문인지 더 어리게 보였다. 진짜 도둑 새끼 같잖아. 살면서 남의 물건을 훔쳐본 경험이 전무한 예준이 처음으로 훔친 건 남의 귀한 아들이었다. 

    준이 먼저 좋다고 했는데도 왜인지 자신이 죄를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을 씻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저 멀리로 밀린 휴대폰을 가만히 바라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한 예준이 조용히 일어났다.

    “자냐?”

    잠든 지 한참 된 애한테 괜히 물어본 예준이 천천히 침대 위로 올라왔다. 1인용 침대에 다 큰 남자 둘이 누우니 당연히 좁았다.

    예준의 몸이 들어올 자리를 만드느라 준의 몸이 왼쪽으로 살짝 밀렸다. 혹시라도 떨어질까 팔을 뻗어 막은 예준이 헛기침을 했다. 멤버들이 봤다면 경악할 만한 풍경이었다.

    손 정도야 괜찮겠지. 처음으로 깍지를 끼워 본 예준이 이불을 슬쩍 끌어와서 함께 덮었다. 방금 전까지 양심 운운하면서 괴로워한 사람이라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태연한 행동이었다. 옆으로 누운 준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히는데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아서 예준은 그대로 잠들었다.

    시간 맞춰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하현과 휘영이 그 광경을 보고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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