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7)

#2

최근 예준은 많이 다운된 상태였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졌지만, 멤버들 모두 눈치껏 모르는 척했다.

스물다섯이 갑자기 서른여섯으로 변했는데 똑같은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예준의 마음가짐도 한몫했다. 이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변을 좀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스물다섯. 그룹의 맏형. 리더. 예준은 나름 무거운 직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린 동생들 사이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커 보였을 뿐, 어린 건 마찬가지였다.

나서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게 좋고, 희생하는 것보다 욕심내는 게 더 좋았다. 하지만 지금의 예준은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살 만큼 살았고 버틸 만큼 버텼다.

“잘 부르려고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불러봐.”

“그냥요?”

“도입부니까 약하게 들어가도 돼. 일단 불러봐. 시작.”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예준의 친절함은 보컬 연습 때 더욱 빛을 발했다. 답답함을 꾹 참아가며 어르고 달래서 수록곡 녹음까지 수월하게 마치고, 신나게 녹음 부스에서 나오는 준에게 정성이 가득한 칭찬도 해줬다.

예준이 친절하게 준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걸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나머지 멤버들도 이제 익숙해졌는지 별말 하지 않았다.

“형, 솔직히 말해봐요.”

“뭘.”

녹음을 끝내자마자 안무 연습에 들어가기 직전, 아주 잠깐 주어진 휴식에 바닥에 늘어져 있는 예준에게 준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무슨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듯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우리 몰래 보컬 연습 받아요?”

“안 받아.”

“숨기지 말고요. 이러다가 형이랑 나랑 자리 바뀔 것 같단 말이에요.”

준이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며 예준의 팔을 툭 쳤다. 그 작은 터치에 예준이 손바닥으로 준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바뀌긴 뭐가 바뀌어. 너 랩 잘해?”

“당연히 그건 아니죠! 근데 형이 노래까지 잘하니까 저 빠지고 보컬라인 들어와도 될 것 같잖아요.”

“난 랩만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연습이나 해.” 

준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때린 예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어디 가요?”

준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고 손바닥만 흔든 예준이 그대로 연습실로 향했다. 다른 멤버들보다 먼저 연습을 시작한 하현이 잠시 거울에 기대 서 있었다.

“어때?”

“안무 다 땄어요.”

세상에서 스스로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는 예준은 타인을 쉽게 인정하는 법이 없었다. 하현은 그런 예준이 생각하는 몇 없는 잘난 놈의 범주에 포함되는 사람이었다.

재능을 타고났는데 노력까지 어마어마하게 하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잘생긴 게 예준의 인정을 받는 데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본인의 얼굴을 누구보다 큰 장점으로 생각하는 예준은 뼛속까지 외모지상주의에 물든 인간이었다.

“야, 연습하다가 속 터져도 좀 쉬엄쉬엄해.”

“무슨 소리예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혼자 연습하느라 몸이 조금 뭉쳤는지 하현이 몸 여기저기를 두들기며 물었다. 대충이나마 다른 멤버들 파트까지 연습해 두고 알려주려니까 남들보다 몇 배는 피곤할 게 분명했다. 

“우리 지금도 다 잘하고 있으니까 천천히 하자고.”

자상한 리더의 한 마디에 하현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심증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예준이 이상해졌다. 세워 뒀던 가설들을 다시 떠올려 볼 필요가 있었다.

첫째, 예준이 아무도 모르게 혼자 사고를 당해서 어딘가 이상해졌다. 둘째, 예준의 몸에 다른 누군가가 빙의했다. 

“나 나가서 아이스크림 좀 먹고 온다.”

아니, 아닌 것 같기도. 하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음악을 재생했다.

* * *

준의 표현을 빌려서, ‘자칫 숨이 넘어갈 뻔했던 연습’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분주하게 움직인 덕에 빠른 시간 내에 안무를 숙지할 수 있었다. 겨우 하현의 오케이를 받아내고, 한숨 돌릴 시간도 없이 바로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공항으로 갔다.

공개된 스케줄이 아니라 조용히 비행기에 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정보가 새어 나갔는지 카메라를 든 팬들이 있었다. 편하게 후줄근한 차림으로 손까지 흔들어준 예준이 얌전히 비행기에 탔다.

“형 어디 앉을 거예요?”

평소 통로 쪽 자리를 선호하는 휘영이 물었다. 지구랑 하현은 이미 나란히 앉았고, 준이 창가 자리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러면 중간이잖아.

답답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예준은 항상 창가나 통로 쪽에 앉았다. 눈치를 보며 묻는 휘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예준이 얌전히 가운데 앉았다.

“너 거기 앉아.”

“괜찮아요? 형 맨날 통로 아니면 창가 앉잖아요.”

“우연히 앉은 거야. 나 원래 자리 신경 안 쓰는 거 몰라?”

어깨를 으쓱이는 예준을 보며 휘영이 잠시 작년 말의 비행을 떠올렸다. 서로 창가에 앉겠다며 다투던 준과 예준의 모습이 아직까지 눈앞에 선했다. 너무 유치하게 싸워서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였다. 미심쩍은 눈빛으로 예준을 보던 휘영이 그냥 통로 쪽에 앉았다. 앉으라는데 뭐.

좌석에 앉아 벨트를 채운 예준이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비행은 언제나 불편했다. 어릴 때 자주 해외여행을 다녔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좌석에 앉아서 가본 적은 없었다. 물론 지금 앉은 자리도 일반석보다는 훨씬 좋은 자리지만 예준은 만족하지 못했다.

- 편안한 비행 되세요.

머리 위에서 방송이 울려 퍼졌다. 그래, 딱 저 방송처럼 언제나 편안한 비행이었다. 침대나 다름없는 의자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높은 칸막이에, 자리마다 따로 에어컨과 공기청정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쾌적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예준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널찍한 테이블과 그에 맞춰 나오는 고급스러운 기내식이었다. 편안한 식사를 마치고 눈을 감았다가 뜨면, 어느 순간 지구 반대편에 있었다.

회사의 주가를 쑥쑥 성장시키는 대형 신인이라고는 해도, 비행마다 일등석에 태워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비를 써서 자리를 옮길 수는 있었으나 예준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렇게 해볼까 생각이 들었다. 회귀 전에는 연차 쌓인 국내 최정상 아이돌로 언제나 일등석을 타고 다녔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다운그레이드가 익숙해지지 않았다.

예준은 불편했지만 놀랍게도 비행기가 뜨고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셋이나 잠들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빳빳하게 앉아서 눈을 뜨고 있는 건 지구였다.

오랜 시간을 같은 팀으로 활동하면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함께 비행기를 탔지만, 장시간 비행이 아니면 자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마저도 최소한만 눈을 붙이는 게 대부분이었다.

“안 자냐?”

조금 떨어져 있는 좌석에 앉은 지구를 향해 예준이 넌지시 물었다. 그리고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인 준의 담요를 가슴팍까지 다시 끌어올려 줬다.

“형 요즘 준이 엄청 챙기네.”

갑작스러운 예준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가 담요를 다시 덮어주는 모습을 발견한 지구가 저쪽에서 고개를 내밀어 물었다. 목소리가 작아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예준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이렇게 작게 말해?”

“하현이 형 깰까 봐.”

다분히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옆자리를 내려다보는 지구를 바라보던 예준이 싸하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한두 번도 아니고.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은 이들과 10년을 함께 해온 듬직한 리더이기 때문에, 이제 저런 것들은 못 본 척 넘겨줄 수 있어야 했다.

“챙기는 건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거 아니냐?”

하현이 덮고 있는 담요를 정리해주고, 텅 빈 품 안에 베개 하나를 놓아준 지구가 말을 이었다.

“원래 안 그랬으니까 그렇지.”

“나 원래도 잘 챙겼잖아.”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끌어올려 주는 정도는 아니었잖아.”

지구가 눈짓으로 자고 있는 준을 가리켰다. 예준은 동생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아기 새처럼 챙겨주지는 않았다. 본인이 쓰는 공간도 잘 치우지 않고 대충 살아서,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물건을 정리해 줄 정도였다.

“신경 쓰여서 그렇지?”

“뭐가.”

“병원.”  

전부 다 스태프들이고, 딱히 들을 사람도 없지만 아무래도 주변을 생각해서인지 주어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예준은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먼저 물어보려고 하지 마.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눈치 없어 보이냐?”

“형 눈치 빠른 건 아는데 혹시 몰라서. 말 못 할 사정, 남한테 숨기고 싶은 이야기 하나쯤은 다 있잖아.”

맞는 말이었다. 당장 예준 스스로도 부모님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화제를 돌려버리니까. 특별히 부끄럽거나 상처가 되는 이야기인 건 아니지만, 굳이 남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고 관심을 받기도 싫었다.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니 말해주기 전에 묻지 않는 것은 당연한 예의였다.

“형이 유독 신경 쓰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지구가 정확히 봤다. 예준이 느끼는 죄책감은 멤버들이 느끼는 것에 정확히 105배쯤 됐다. 

정말 아끼는 동생인데 한 번 회귀를 하면서까지 몰랐다는 사실이.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도, 관심을 가져볼 생각도 안 했다는 게 미안했다. 

“신경 안 쓰니까 너도 얼른 자라.”

일단은 위태로운 몸을 받쳐 주기로 했다. 스스로가 털어놓을 마음이 생긴다면, 그때 가만히 들어주는 게 리더의 본분이었다. 일단 문제없이 촬영만 잘 마치고 돌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영 불안한 기분에 예준이 창문을 한 번 힐끔 쳐다봤다. 잘 찍고 가겠지. 과거와 전혀 다른 일들이 자꾸 생기는 상황에서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예준이 잔뜩 불편한 상태에서 잠을 자든, 뒤척이든 신경 쓰지 않고 비행기는 계속 나아갔다. 다음 비행에서는 기필코 자리를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화면 꺼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옆에서 무언가 꿈틀꿈틀 움직였다. 막 잠에서 깨어난 준이었다.

“타이밍 딱 맞춰서 일어나네.”

“얼마나 남았어요?”

눈이 생각처럼 잘 떠지지 않는지 한참을 끙끙대는 준을 가만히 바라보던 예준이 휴대폰 화면을 켰다. 그리고 착륙 예정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얼마 안 남았어. 곧 착륙할걸.”

“와.”

곧 착륙한다는 말에 준이 창문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어차피 아직 높은 상공이라 아무것도 안 보일 텐데, 당장 눈앞에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펼쳐진 것처럼 이리저리 살피는 뒷모습이 산만했다.

“머리 정리나 하고 구경해.”

여기저기 뻗친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툭툭 정리해 주다가 예준이 잠깐 멈칫했다. 형 머리 좀 보라며, 라면을 먹다 말고 킥킥대던 준이 떠올라서였다.

쓸데없는 생각을 빠르게 털어낸 예준이 나머지를 마저 정리했다. 투박한 손길이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는데도 준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진짜 예쁘던데.”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볼록 올라온 광대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해외 투어를 다니면서 많은 나라들을 돌았는데도 준은 아직도 설렐 게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 만날 풍경에 대한 기대감은 조금도 없는 듯한 형들과 비교가 됐다.

소지품을 챙겨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준비된 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데뷔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아이돌이 받을 수 있는 대우는 절대 아니었으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는 특수한 시스템으로 데뷔한 그룹은 특별했다. 신인임에도 연차가 쌓인 유명 아이돌들과 다를 바 없는 인지도를 가지고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촬영하고 다시 갈 거야. 넉넉한 일정 아니니까 몸 관리 잘하고.”

매니저가 키를 두 개 건네줬다. 키를 건네받은 건 당연히 가장 꼼꼼하고 물건을 잘 챙기는 지구였다. 예준은 스스로의 몸과 휴대폰만 잘 챙기는 편이라 그런 지구를 항상 신기하게 생각했다. 별것도 아닌 일들마저 참 귀신같이 기억해서.

“배고픈데 밥이나 먹을까요?”

역시나 가장 먼저 밥 얘기를 꺼낸 건 준이었다. 꽤 오래 비행을 했으니 허기질 만도 했다. 룸서비스 아무거나 시키라며 예준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음식을 고를 의지조차 없어 보이는 모습에, 예준의 몫은 하현이 대충 고기가 들어간 걸로 주문했다.

곧 도착한 음식들은 제법 먹음직스러웠다. 입이 짧은 하현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대체적으로 가리는 거 없이 잘 먹는 편이라,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어릴 때부터 여러 나라의 음식을 접한 예준은 독특한 향이 나는 고기 조각을 포크로 찍어 아무렇지 않게 먹었다.

“잠시만, 저 통화 좀요.”

그때 갑작스러운 진동 소리와 함께 잘 먹고 있던 준이 오른손으로 슬그머니 휴대폰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여기서 통화하기 곤란하니 나가봐도 좋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하현이 얼른 다녀오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이 금방 돌아오겠다며 키를 챙겨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다. 전화가 끊길까 걱정하는 것처럼 다급한 걸음이었다.

예준이 알기로 준에게는 연락하는 친구가 딱히 없었다.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같은 학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교성도 좋고, 성격도 쾌활해서 주변이 시끌벅적하다는데 정작 휴식기에 나가서 노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가끔 학교를 다녀와도 친구들 얘기는 하는 법이 없고.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났을 때,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었던 걸 떠올리면 사교성이 좋은 건 사실인 것 같은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통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웬만한 연락은 다 메신저로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상대방은 정해져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왜 이렇게 불안하냐.”

“뭐가요 형?”

옆에서 숟가락질을 하던 휘영이 작은 중얼거림을 용케 들었는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은 예준이 젓가락을 들어 고기 몇 점을 덜어냈다. 입맛도 없네.

젓가락을 내려놓은 예준이 내려놨던 휴대폰을 다시 집었다. 오랜만에 게임이나 해야겠다 싶어 앱을 실행시키는 순간 문이 열렸다.

“통화 끝났어?”

휘영의 다정한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불안정한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예준이 막 로딩되기 시작한 게임 화면에서 눈을 뗐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준의 눈을 보자마자 예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째 불안한 예감이 틀리질 않았다.

“형. 우리 한국 언제 돌아간다고 했죠?”

준이 예준의 앞에 다가와서 물었다. 촬영 끝나면 간다고 이야기해주면 되는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예준이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행인지 준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런 예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이런 걸 묻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방금 전에 걸려온 전화가 안 좋은 소식을 담고 있었겠지.

방금 막 짐을 풀었는데 다시 비행기를 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건 일이니까. 수십 명의 스태프와 돈이 움직이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옳은 판단을 해보려고 머리를 굴리던 예준은 일단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아이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이러다가 준이 먼저 병원에 실려 갈 것 같았다.

“진정하고.”

“이게, 그러니까….”

“숨 쉬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낮은 목소리에 준이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예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등을 두드렸다. 힘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은 손길이 규칙적으로 전해졌다.

“숨 쉬라고.”

예준이 단호하고 무서운 목소리를 냈다. 마치 어린아이를 혼내는 것 같은 말투에 준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서서히 자세를 낮췄다.

이러는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지만,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티 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서 그냥 물었다.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도와주지.”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별일 아닌데 그냥 잠깐 놀라서.”

“뭘 잠깐 놀라. 똑바로 말을 해.”

준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멍청하게 행동한 것 같았다. 형들도 다 스케줄이 있고, 이게 다 일인데.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전에 들은 의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이러다 정말 잘못되면. 며칠씩이나 여기 있어야 하는데, 이게 정말 마지막이 되면…….

“병원에서 전화가 와서…….”

결국 준이 입을 뗐다. 심각한 상황인 것 같아서, 항상 묵묵하게 숨겨 왔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두려움이 모든 이성적인 판단들을 다 이겼다. 

예상했던 말에 예준이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버지에게 연락해서 헬기라도 띄워주고 싶은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뮤직비디오 촬영이라 예준이 대신해줄 수 있는 스케줄도 아니고, 그렇다고 준을 빼고 찍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

한국까지 왕복으로 다녀오는 동안 모든 스태프들이 다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는?”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 물을까 말까 머릿속으로 백 번쯤 고민한 예준이 결국 입 밖으로 질문을 내뱉었다. 심각한 예준의 눈을 마주한 준이 시선을 아래로 처박았다. 여전히 숨은 불안정하게 내쉬고 있는 상태였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는지…… 몰라요.”

어디 있는지 모른다. 단순히 따로 산다는 말이 아니라는 건 바보라도 눈치챌 수 있었다.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어서 대충 사연이 있구나, 생각하긴 했지만 상황이 너무 긴박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다급한 심정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질문에 스스로를 질책하며, 다시 한번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은 없냐고 물으려다가 예준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애초에 공연 중에 뛰쳐나가려고 했을 리도 없고, 미성년자인 애가 혼자 다 감당하고 있을 리도 없었다.

“그래, 알았어.”

예준은 어른이었다. 그러니까 애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그 누구보다 침착하게 행동해야 할 사람이었다. 정신 차리자.

눈을 세게 감았다 뜬 예준은 태어나 처음으로 뇌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 같은 두통을 느꼈다. 스스로 짊어지겠다 다짐한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절절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준아.”

부드러운 부름에 준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예준이 사람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휴대폰 줘봐.”

준이 벌벌 떨리던 호흡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건넸다. 망설임 없이 통화 목록을 뒤져 병원 쪽으로 다시 전화를 건 예준이 준의 어깨를 끌어당겨 감싸 안았다. 조금이나마 안정을 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커다란 손이 한쪽 어깨를 다 덮었다.

“괜찮으실 거야.”

신호음이 잠시 이어졌다. 그 잠깐의 틈을 타 준의 얼굴을 확인한 예준이 말했다.

“형 믿지.”

준의 대답을 듣지 않고 예준이 일어났다. 반대편에서 누군가 전화를 받았는지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침착하게 대꾸하며 예준이 걸음을 조금씩 옮겼다. 오른손에는 여전히 준의 휴대폰을 쥔 상태였다.

같이 있어 주는 것과 정확한 상황을 들을 수 없도록 자리를 뜨는 것. 잠시 고민했지만 어떤 소리가 들릴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후자가 나을 것 같았다.

예준이 주변에 둘러앉은 나머지 멤버들에게 눈짓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 어쩔 줄 모르는 휘영을 대신해 하현이 준의 왼손을 잡았다. 그리고 예준에게 고갯짓을 했다. 어서 통화해 보라는 의미였다.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던 예준이,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떨어뜨리고 말했다.

“금방 안정되실 것 같대.”

아직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냥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든 안정을 시키려는 이유도 있었고, 곧 그렇게 될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적어도 5주년 콘서트 전에 장례식 소식을 들은 적은 없으니까.

예준이 떨리는 손을 감추려 급히 문을 닫았다. 모든 일이 과거와 다르게 흘러가고 있지만 이것만큼은 아니었으면 했다. 아직 제대로 묻지도 못했는데 설마.

예준은 살면서 불안이라는 감정을 절절하게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수업 시간에 엎드려서 자느라 들은 게 없는 머리로 시험 전날 벼락치기를 할 때도 이러진 않았다.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이 정말 자신의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예준이 커다란 손으로 심장이 위치한 왼쪽 가슴을 짓눌렀다.

“네. 말씀하세요.”

예준은 한참 문밖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자세한 사정을 저가 들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진 않았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이미 숨도 똑바로 쉬지 못하는 상태인 준이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 자신이 해야 했다.

준의 어머니의 현재 몸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설명하는 의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예준이 문에서 조금 더 멀어졌다. 혹시나 준이 따라 나와 들을까 싶어서였다.

상황을 전해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예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준이 불안해할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상황이 많이 안 좋았다.

“지금 어떻게 될지 장담은 못 하신다는 거죠?”

- 매우 불안정한 상태이시긴 하나 아마 수술만 성공적으로 끝내면 안정을 찾으실 겁니다. 

“그럼…….”

예준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짓눌렀다. 

“일단은 잘 부탁드립니다. 일이 끝나면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담당 의사를 마음대로 찾아가겠다고 말한 뒤 예준이 전화를 끊었다. 오지랖이 넓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들어 스스로가 무척이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예준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준이 거의 달려들다시피 다가왔다. 그리고는 다급한 표정으로 발꿈치까지 들고 물었다.

“뭐라, 뭐라고 하세요?”

“수술 끝내면 안정 찾으실 거래. 진정해.”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날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예준의 말에 조금 안심이 된 듯 준이 깊은숨을 내쉬며 살짝 떨어졌다.

그런 준의 손에 휴대폰을 쥐여준 예준이 텅 빈 식탁을 바라봤다. 그사이 싸늘하게 식은 음식을 더 이상 먹고 싶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뮤직비디오 촬영은 원래 계획대로 진행됐다. 멤버들 모두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스케줄이었기에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멤버들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매니저는 오늘 왜 이렇게 다운되어 있냐며, 힘 좀 내라고 신나는 음악을 틀었다.

원테이크로 진행되는 촬영이라 한 명이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했다. 4분이 넘는 노래를 실수 없이 끝내기란 힘들었기에 다들 반나절 정도는 찍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높은 곳에 있는 나라인데 촬영 장소는 더 높았다. 고산지대라 그런지 숨 쉬는 게 제법 힘들었다. 벌써 세 번째 촬영인 예준은 미리 캐리어에 넣어 챙겨둔 핫팩을 꺼내서 주위에 돌렸다. 아무래도 크게 고생할 것 같았다.

“시작할게요!”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도입부를 맡은 하현이 카메라 앞으로 뛰어들었다. 춤이 제일 뛰어난 멤버답게 지적할 만한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10초가 조금 넘는 파트를 끝내고 준이 바로 들어갔다. 그리고 5초도 채 지나지 않아서 촬영이 멈췄다.

“준아!”

“아.”

날카로운 부름에 준이 자리에 멈춰 섰다. 바싹 굳은 몸이 여기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춤 무슨 일이야. 정신 안 차릴래?”

“죄송합니다.”

팔 뻗는 것도 너무 짧고, 뒤로 물러서는 부분에서는 주춤거리기까지 했다. 춤을 잘 추는 편도 아니고, 안 그래도 겨우 따라오는 애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기까지 했으니 안무가 기억이 날 리 만무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예준이 계속 이어지는 지적을 바라봤다. 

결국 준의 파트를 넘겨보지도 못하고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안절부절못하는 다리를 빤히 바라보던 예준이 준을 부르며 생수 뚜껑을 열었다.

“이리 와봐.”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준이 허겁지겁 예준에게 달려갔다. 예준의 발 앞에 얌전히 선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예준은 준에게 언제나 무르고 만만한 형이지만, 생긴 게 사나워서 무표정한 얼굴은 남들의 세 배 정도 무서웠다. 게다가 예준이 화내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을 테니 놀라고 겁먹은 것도 당연했다.

예준이 일단 화를 낼 생각이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해 친절하게 준의 손에 뚜껑을 연 생수통을 쥐여줬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시는 것까지 눈으로 확인한 뒤에 입을 뗐다.

“어머니 걱정되는 건 나도 알아. 근데 이거 일이잖아. 네가 계약서에 도장 찍었어.”

“맞아요.”

준이 시선을 바닥에 처박은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소 같으면 더 열심히 하겠다면서, 죄송하다고 스태프들에게 애교 부리고 있을 애가 기운이 너무 없으니 혼내기도 뭐 했다.

저번 생의 촬영에서는 준이 실수할 때마다 장난치고 웃느라 바빴다. 아마 놀리니까 화가 나긴 하는데, 자기 실력이 모자란 건 사실이라 뭐라 반박할 말이 없으니 울상이 되는 게 귀여워서 그랬던 것 같았다. 

예준도 마음 같아서는 다그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은 애한테 바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촬영을 하라니. 아무리 비즈니스라지만 못할 짓이었다.

하지만 촬영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애써 목소리를 깔았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편이 준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네가 계속 실수하면 안 끝나. 여기 스태프들이 몇이야. 그리고 앞쪽에서 계속 틀리니까 박하현 지금 똑같은 부분만 스무 번 넘게 하고 있잖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을 마시는 하현을 힐끔 바라봤다. 촬영이 길어질 것을 예상하고 온 것 같았다. 날카로운 예준의 지적에 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래도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확 덮쳐온 것 같았다.

“얼른 가서 연습해.”

냉한 말투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준이 허둥지둥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안무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져서인지 아까보다는 동작이 정확해졌다.

운도 없다. 하필 오늘 같은 날에 원테이크 촬영이라니. 괜히 하현에게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예준은 자식이 잘못해서 대신 사과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하현에게 다가갔다.

“괜찮냐?”

“괜찮으니까 준이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

“일단 정신은 차리게 해야지. 여기서 텐트 치고 잘 거야?”

“그건 아니지만.”

하현은 잔병치레가 잦은 편이었다. 예준의 기억에 이 촬영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하루를 앓았다. 이번에는 3일은 족히 앓을 것 같았다. 예준은 하현에게서 시선을 돌려 지구를 쳐다봤다. 애인이 알아서 잘 돌봐주겠지, 뭐. 

“자, 다시 시작할게요!”

준이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들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점점 완성도가 떨어지는 안무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해가 지고 있는 게 가장 문제였다.

결국 주변이 어두워지는 바람에 내일 다시 와서 촬영을 하기로 했다. 촬영 날짜마저 과거와 다르게 흘러갔다. 예준이 복잡한 얼굴로 숙소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탔다.

* * *

이틀째 촬영은 바람이 너무 불어서 더 고군분투했다. 다행히 전날 밤을 꼴딱 새워 춤을 연습한 준 덕분에 흐름은 나쁘지 않게 흘러가서, 겨우 해가 지기 전에 촬영을 마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마친 뒤에 다들 반쯤 시체가 된 상태로 차에 올라탔다. 도입부를 몇백 번쯤 춘 하현은 차에 타자마자 거의 쓰러지듯 눈을 감았다. 휘영 역시 고개가 이미 뒤로 넘어간 상태였다. 두 명이 죽어가는 모습을 차례로 본 예준이 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준은 아무래도 자신의 실수 때문에 일정이 어긋난 게 신경 쓰이는 듯 잠을 자기는커녕 휴대폰 액정을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던 예준이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늘 방을 좀 옮겨야겠다.

“야.”

“왜?”

예준은 방금 떠오른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앞자리에 앉은 지구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지구가 귀에 꽂아 놓은 이어폰을 빼고 물었다.

촬영이 많이 힘들었는지 완전히 방전된 자기 애인과 다르게 멀쩡해 보였다. 대단한 체력에 새삼 감탄하며 손짓으로 오늘 방을 바꾸자는 신호를 보냈다. 눈치 빠른 지구는 다행히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예준의 부탁을 잘 알아들은 지구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들은 것도 별로 없는 캐리어를 닫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하현의 옷을 가지런히 접어서 챙기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떠날 채비를 하는 지구 때문에 잠이 깬 듯, 하현이 눈을 똑바로 뜨고 물었다.

“우리 내일 가는 거 아니야?”

의아한 하현의 물음에 지구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그제야 문 앞에 자리 잡고 선 예준을 발견한 듯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함께 남은 짐을 마저 챙기기 시작했다. 곧 옆방으로 캐리어를 든 두 사람이 들이닥쳤다.

“뭐야, 갑자기?”

아무래도 당이 부족했는지, 식탁에 앉아서 챙겨온 간식을 뜯고 있던 휘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눈빛으로 상황을 전달한 두 사람이 각각 준과 예준의 침대 옆에 캐리어를 놓았다.

그 일사불란한 모습을 지켜보던 예준이 준의 침대로 다가갔다. 많이 피곤했는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자고 있었다. 

“야. 일어나. 우리 방 바뀌었어.”

“네……?”

아직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 졸음이 잔뜩 달라붙은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는 준을 예준이 질질 끌다시피 옆방으로 데려다 놨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바닥에 흩어진 짐들을 챙겨왔다.

“먼지 뒤집어쓰고 와서 그냥 자면 어떡하냐.”

“어차피 하룻밤만 잘 건데…….”

“하룻밤 복도에서 재워줘?”

말도 안 되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준은 조용히 갈아입을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챙긴 옷가지를 들고 욕실로 기어가는 모습이 영 위태로웠다. 옷으로 바닥청소를 하고 있네.

결국 바닥을 기어가는 몸을 한 손으로 일으켜 얌전히 욕실에 넣는 데 성공한 예준이 식탁 의자에 앉았다. 씻다가 넘어져서 머리 깨지면 어떡하지. 말도 안 되는 걱정까지 들었다.

“앉아봐.”

준이 씻고 나오자마자 예준이 자신의 맞은편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은 준이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방금 씻고 나온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질 것만 같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예준은 입을 열지 않았다. 뚫릴 것 같은 시선이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아서, 준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병원에서…….”

병원에서, 로 시작한 준의 이야기는 예준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어릴 때 집을 나가서 소식을 모르는 아버지와 3년 전부터 몸져누운 어머니. 책임감 없이 떠난 남자의 빈자리를 대신 채우던 이모부마저 빚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면서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아이돌에 뜻이 없던 애가 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왔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출연료가 크진 않았지만, 돈이 모자라 허덕이던 아이에게는 충분히 크게 느껴졌을 테니까.

“지금 계시는 병실이 오래전부터 다른 아주머니들하고 같이 사용하시던 거예요. 다들 평생을 입원하셔야 하는 분들이라……. 정산받자마자 1인실로 옮겨드리겠다고 했는데 싫다고 하셨어요. 외롭다고…….”

준이 두 손을 모아 얼굴을 가렸다. 작은 얼굴이 커다란 손에 의해 전부 가려졌다. 예준이 턱을 매만지며 통장에 들어왔던 액수를 떠올렸다.

고등학생이었던 준에겐 통장을 받자마자 기함을 했을 정도로 큰 금액이었지만, 예준에게는 1년 뼈 빠지게 활동한 대가치고 너무 적게 느껴졌다.

“돈을 받긴 했는데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그냥 빚 갚고 병원비 내고…… 어머니 좋아하시는 거 사 드리고 그랬는데.”

준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지식이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 세상에는 미성년자를 등 처먹는 놈이 너무 많았다. 인터넷으로 알음알음 찾은 병원에 3년이나 입원했다는 말에 가만히 듣기만 하던 예준이 입을 뗐다.

“일단 한국 돌아가면 같이 병원 가.”

“형이랑요……?”

“나 말고 또 누가 있어?”

자신이 병원장 아들은 아니지만 충분히 도움이 될 수는 있었다. 적어도 저런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병원보다 좋은 곳으로 옮길 수는 있겠지. 일단 할 말은 모두 마친 예준이 아까부터 거슬렸던 부분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울 거면 좀 똑바로 울어.”

지적을 받은 준이 눈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한 세 번쯤 반복하니까 알아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을 열어 큰 소리로 우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똑바로 울라는 예준의 말이 도화선이 됐다.

예준이 소리 내서 우는 준을 가만히 바라봤다. 우느라 부옇게 흐려진 시야에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예준의 얼굴이 담겼다. 준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면서 생각했다.

최근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더 다른 느낌이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촬영 시기까지 합치면 거의 2년을 함께했다. 정말 많이 친해져서 이제는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달라진 예준과 눈을 마주치며 준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안 되는데. 남 앞에서 우는 거 아닌데. 이렇게 부끄럽게 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태어나서 어머니가 아닌 타인의 앞에서 울어본 건 처음이었다.

몇 분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는 울음이 숨이 넘어갈 듯 버거워 보여서, 예준이 의자에서 일어나 발을 옮겼다.

그날 호텔 방의 조명을 받은 예준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딱딱하고 냉할 것만 같았던 예준의 품이 생각보다 따뜻해서, 그래서 준은 그날 잠을 잘 수 없었다. 

* * *

준이 아버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건 돌이 막 지난 무렵이었다. 워낙 어렸을 때라서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집 안에 사진이 있긴 한데, 매일 보고 있어도 꾸준히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냥 남 같았다.

심지어 어머니를 빼닮은 준의 얼굴에서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준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아버지를 잊지 못한 어머니가 자신의 얼굴을 보다 우는 일은 없어서.

아버지는 회사원이라고 들었다. 취업을 준비할 때부터 만나서, 안정적인 직장을 갖게 됐을 때 어머니에게 청혼을 했다고. 준이 생겼을 때는 평생 잘하겠다며 무릎 꿇고 울었다는 말도 들었다.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 흐리멍덩한 눈으로 이야기하는 어머니를 보며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는 입에 담지 못할 저주를 퍼부었다. 

신혼집을 마련하느라 받았던 대출을 갚아가는 일도 오로지 어머니의 몫이 됐다. 적은 액수도 아니었다. 달콤한 신혼을 기대하며 샀던 집을 다시 팔고 이사를 갔지만 빚은 줄어들지 않았다. 어린아이를 키우는데 들어가는 돈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준이 어릴 때부터 일을 참 많이 했다. 

“준아, 이모부 왔다.”

하나 있는 이모가 일찍 죽고, 혼자 간간이 어머니와 연락해 온 이모부는 자주 집을 찾아왔다. 말없이 집을 나간 아버지를 대신해 부모의 자리를 채워 줬지만, 회사일이 바빠서 일주일에 두어 번 올까 말까 했다.

이모부가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준은 얼마 가지 않아 달력에 엑스 표시를 하는 것을 그만뒀다. 기대는 항상 실망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미리 너무 기대를 하면 안 좋았다.

행복하지 않은 가정 탓인지 준은 썩 밝은 성격도 못 됐다. 말수가 적고 모든 일에 무관심했다. 어머니의 한숨의 원인이 그 무표정한 얼굴 때문이었을 정도로.

공부에도 취미가 없는 듯 보였고, 또래와의 교류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보통 학교에서 돌아오면 준은 홀로 공상의 시간을 가졌다. 햄버거 먹고 싶다. 피자도. 생각의 주체는 대부분 음식이었다.

“준아, 책 한 번만 읽어보자. 배워야지 잘 살지.”

어머니는 준에게 자주 책을 내밀었다.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는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준은 책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잘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또래들은 다 하는 것조차 못 했다.

글을 쓰는 것도 느렸고,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한참 됐지만 여전히 구구단을 못 했다. 워낙 일을 하느라 바쁜 어머니는 주의 깊게 봐줄 시간도 없었다. 그냥 학교에서 가르쳐주니 잘 배우고 있겠거니 했다. 

하지만 준은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누구랑 친해졌는지, 학교에서는 뭘 배우는지, 집에 오면 뭘 하는지, 빠짐없이 모두 감췄다. 아들이 대체 하루 종일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던 어머니는 결국 준의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선생님이 준을 불렀다. 친구들은 모두 운동장에서 뛰어놀거나, 어제 본 예능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며 떠들기 바쁜 점심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준을 앉혔다.

“준이는 집에서 뭐 하니?”

“그냥 있어요.”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다 불려온 준이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림을 그리냐는 말에도, 만화책이나 TV를 보냐는 말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했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마주치려고 해도 자꾸만 시선을 피했다.

“공부는 안 하고?”

“네…….”

“교과서 가져가서 배운 내용 복습해 보는 건 어떨까?”

아직 10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 성적 타령을 하는 건 옳지 않지만, 준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졌다. 받아쓰기나 단원평가를 할 때면 항상 20점을 겨우 넘겼다. 수업 시간에 잠을 자거나 딴짓을 하는 건 아닌데, 어머니도 왜 공부를 안 하려고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듯싶었다.

“모르겠어서…….”

아이다운 솔직한 대답이었다. 정말 몰라서 안 했다. 읽는 것도 힘든데 쓰는 걸 시키고, 쓰는 것도 힘든데 계산을 하라고 하니까. 모르겠다는 한마디에 바로 이유를 알게 된 선생님이 급히 질문을 바꿨다.

“뭐 갖고 싶은 건 없어?”

무언가 가져본 적이 없어서인지 준의 소원은 또래 친구들의 몇 배나 됐다. 스스로의 소원이 제일 많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가보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입이 근질거렸지만 결국 밖으로 표출된 것은 도리질뿐이었다.

“아니요.”

“진짜? 선생님이 보기에는 아닌 것 같은데.”

“어……. 햄버거 먹고 싶어요.”

스스로가 판단하기에 가장 소박한 소원이었다. 어린아이의 때 묻지 않은 솔직한 대답에 선생님은 준을 돌려보내고 휴대폰을 들었다. 

어머니는 그날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준의 손을 잡고 외식을 나갔다. 그렇게 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햄버거였다. 야무지게 콜라에 빨대를 꽂아 마시고, 속이 꽉 찬 햄버거를 크게 베어 물었다. 내용물이 부실했지만 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식사였다.

“맛있어?”

“응.”

생전 처음으로 행복해 보이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어머니는 그날 밤새 울었다. 준은 그날을 아직까지 기억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처음으로 기억도 안 나는 아버지 사진을 박박 찢어버렸으니까. 

“우리 아들은 부족한 거 하나도 없어. 엄마가 부족해서 그래.”

“나 부족한 거 많아.”

“아니야, 없어. 하나도 없어. 공부 못 해도 돼. 그런 거 뭐가 대수라고.”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그저 공부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동화책 한 권 제대로 읽어준 적 없으면서, 다 하는 흔한 학습지 한 번 시켜준 적 없으면서 그냥 알아서 잘하겠지 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제대로 신경 한 번 써주지 못했다. 그렇게 준은 공부와 점차 거리가 멀어졌다. 이미 모르는 것들과 혼자 수십, 수백 번 사투를 벌이고 포기한 아이를 아무것도 모르고 재촉했던 것을 생각하니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끌어안고 우는 어머니의 품에서 준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나는 엄마만 있으면 돼. 손을 들어 올려 어머니의 등을 느리게 토닥이면서, 다시는 선생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 *

졸업식 전날, 아이들은 롤링 페이퍼를 주고받았다. 선생님이 시켜서 시작했지만 다들 즐거워 보였다. 돌고 돌아 자신의 주인을 찾아온 준의 롤링 페이퍼는 텅 비어 있었다. 한두 명이 잘 지내라고 써 주긴 했다.

교류가 조금도 없었으니 쓸 말이 없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혹시 누가 볼까 종이를 구겨서 주머니에 넣고 집에 가다가, 혹시나 어머니가 볼까 봐 중간에 버렸다.

학비부터 교복까지 모든 것을 지원받아 다니게 된 중학교는 초등학교보다 두 배는 컸다. 다니던 초등학교와 꽤 멀어서 등교도 버스를 타고 해야 했다.

하지만 준은 한 시간 일찍 나와 걸어서 교문을 통과했다. 아침 공기를 마시면서 걸으면 상쾌하고 좋았다. 버스비는 모아뒀다가 중요한 일이 생기면 쓸 계획이었다.

분명 오늘 처음 만났을 텐데, 아이들은 이미 저들끼리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준은 그들을 지나쳐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준이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예쁘게 생긴 여자애였다. 타인과 대화하는 법을 잘 모르는 준이 멍청하게 쳐다만 보고 있다가 뒤늦게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여자애와 함께 다가온 무리 중 한 명이 커다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야, 너 존나 잘생겼다.”

“응?”

“너 잘생겼다고.”

이리저리 눈을 찌르던 머리카락을 잘라 정리하니 반듯한 얼굴이 전부 드러났다. 거기에 막 새로 꺼낸 교복은 때 탄 곳 하나 없이 깨끗했다.

또래 평균 정도였던 키도 겨울방학 동안 몰라보게 컸다. 잘 먹고 자라지 못했음에도 유전자를 잘 타고났는지 준은 벌써 170cm를 넘긴 상태였다. 대충 봐도 잘난 외모에 여기저기서 칭찬이 쏟아졌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관심과 함께 친구를 잔뜩 사귀었다. 잘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금세 무리의 중심이 됐다. 친구의 권유로 SNS를 시작하고, 친구가 찍어 준 사진을 프로필로 내걸자 친구 신청이 몰려들었다.

그제야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외로웠는지 알게 됐다. 주변이 북적거리니 맛있는 걸 먹지 못해도, 장난감을 갖지 못해도, 자신이 멍청하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와도 우울하지 않았다.

모든 일의 중심은 준이었고, 모두 당연하다는 듯이 준의 근처로 몰려들어 떠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관심이 주는 달콤함을 맛본 준은 성격도 쾌활하게 변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았다. 억지로 뜯어고친 성격은 만족스러웠다.

일부러 먼저 말을 걸고, 친절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친구들이 과한 장난을 쳐도 털털한 척 웃으면서 넘겼다. 쾌활하고 착한 성격의 준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밝아진 조카에게 오랜만에 이모부가 찾아왔다. 이모부에 대한 기억 중에 나쁜 건 하나도 없었다. 준은 아무렇지 않게 반겼고, 이모부는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하나 했다.

“너 알바 하나 할래?”

“무슨 알바요?”

돈 이야기에 준이 귀를 쫑긋 세우면서 물었다. 돈이라는 건 참 징그러운 거였다.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어머니를 죽도록 괴롭게 만들었으니까. 자신이 돈을 좀 벌어오면 어머니가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모부가 이번에 쇼핑몰 시작했거든. 근데 모델이 마땅치 않아서……. 내가 입을 수는 없잖아.”

이모부가 불룩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쇼핑몰은 이모부가 회사에서 잘리고 퇴직금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뭘 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그냥 주는 옷을 입고 사진만 찍으면 된다고 했다. 얼굴도 안 나온다고 하니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사진 진짜 잘 나왔는데?”

엄지를 치켜들고 찍은 사진들을 보며 칭찬하던 이모부는 어느 순간 쇼핑몰을 접고 사라졌다.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말하기도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국으로 나갔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는데, 딱히 아쉽다거나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아르바이트비라도 주고 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뒤늦게나마 공부를 해 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시험을 칠 때마다 시험지 위에 내리는 비를 보고 준은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대학 갈 사정도 안 되는데 오히려 다행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 시간에 아르바이트 하나 더 하는 게 나았다. 물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최저시급보다 더 낮춰 부르거나, 일을 더 시키거나 하는 일이 태반이었다.

한 번은 뷔페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편의점으로 옮겼는데, 사장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부른 적도 있었다. 청소를 하다가 영문을 모르고 끌려간 준은 갑자기 터지는 고함에 깜짝 놀랐다.

“시제가 하나도 안 맞잖아! 일을 이렇게 하면 써?”

“네?”

“일 이런 식으로 하면 월급 못 주지.”

분명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계산했는데, 시제가 안 맞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이것저것 인수인계도 잘 받았고 열심히 했는데. 사장은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고 화만 냈고, 준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편의점을 나왔다.

“어떡하지.”

경찰서를 가야 하나. 아니, 그냥 다시 돌아가서 조금만이라도 주시면 안 되냐고 빌어 볼까. 친구가 많이 생겼지만 준은 그대로였다.

친구들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월급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진 어머니 때문에 그때 받지 못한 월급이 죽을 만큼 아깝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미안하다며 대출을 더 받았다. 안 그래도 낮았던 신용이 더 낮아지고 집안 살림은 더 거덜 났다. 살면서 했던 나쁜 일이라고는 어릴 적에 집 나간 아버지를 저주했던 것뿐인데, 그거에 대한 대가라기에는 너무 컸다.

일단 모아 둔 아르바이트 비용을 털어 내고, 사람이 가득한 6인실에 어머니를 입원시킨 준은 며칠이나 울고 토하고를 반복하다가 결국 생활기록부에 무단결석을 잔뜩 남기고 말았다. 그러나 의지할 사람이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준은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고, 이를 악물면서 살았다. 그 와중에도 친구들이 다가오면 환하게 웃어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기.”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병원으로 가던 어느 날에 방송국 스태프를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정말 기막힌 우연. 평소보다 뒷정리를 빨리 끝냈으니 마주쳤지, 아니었다면 길이 어긋났을 게 분명했다.

“한 번 나와 볼 생각 없어요?”

스태프는 이번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혹시 참가해 볼 생각이 없냐며 말을 건넸다. 잠깐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며 설명을 하더니,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자리를 옮길 수 있냐고 물었다.

“혹시 밥 안 먹었으면 같이 먹으면서 얘기해도 좋고. 아, 물론 제가 사는 겁니다.”

스태프의 말에 준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디가 좋냐며 묻는 스태프의 말에 눈앞에 있는 프랜차이즈 햄버거집을 가리켰다. 어차피 법인카드라 아무거나 시켜도 된다길래 처음으로 값비싼 세트 메뉴를 시켰다. 

“이게 아이돌 뽑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거든요.”

스태프가 설명한 프로그램은 준이 알고 있는 단순한 예능이 아니었다. 퀴즈쇼 정도일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아이돌이라니. 기획사에서 길거리 캐스팅은 몇 번 받아봤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막 나온 햄버거를 한입 크게 베어 물며 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바이벌 ID. 아이돌.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춤도 못 추고 노래도 못하는데 무슨. 그래도 제안을 받은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병원 가서 이야기하면 좋아하실까.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다가 아주 우연히 골을 넣었다는 시답잖은 말을 해도 기뻐하는 어머니는 분명 좋아하실 것 같아서, 준은 오늘 밤에 가서 자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 제가 노래를 잘 못해서…….”

밥까지 얻어먹고 무조건 안 한다고 하기 미안해서 준이 슬쩍 변명을 꺼내 들었다. 노래도 못하고 춤도 못 하는데 아이돌을 할 수는 없으니까. 

“고등학생이면 용돈 부족할 거 아니에요. 소정의 출연료도 있으니까…….”

말을 잘라먹고 튀어나온 스태프의 이야기에 준이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투표로 데뷔하는 시스템이라고 했으니까, 그게 자신이 될 가능성은 극히 드물었다. 세상에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럼 저 나갈게요.”

그렇게 덥석 수락한 프로그램은 제법 스케일이 컸다.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언젠가 연예인 할 줄 알았다며 낄낄 웃었고, 병실 침대에 누운 어머니는 준이 뭘 하든 다 좋다고 웃었다.

물론 길거리에서 제안을 받은 것도 칭찬해줬다. 다 우리 아들이 잘생겨서 그런 거라며. 정말 기분이 좋은지, 병실에 있는 다른 아주머니들에게도 자랑을 했다.

“우리 아들이 이번에 연예인 뽑는 프로그램에 나가요.”

“준이 아주 훤칠하고 잘생겼지.”

“내가 언젠가 연예인 될 줄 알았다니까.”

“감사합니다. 진짜 연예인 되면 맛있는 거 사들고 제일 먼저 달려올게요!”

여기저기서 말을 얹은 아주머니들에게 준은 평소처럼 웃으며 인사했다. 애교스러운 말투과 공약은 덤이었다.

그렇게 팔자에 없던 아이돌을 준비하게 됐다. 처참한 실력이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연습을 하고, 미리 사인을 받아 두겠다는 친구들에게 장난스럽게 사인을 해주기도 했다. 

일단 첫 프로필 촬영에서 아는 사람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잘생긴 형이었다. 저런 사람들도 나오는데 제까짓 게 데뷔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꼭 데뷔하겠다는 마음가짐도 없으면서 준은 계속해서 촬영장에서 아는 형들을 늘려나갔다. 그중에서도 유독 인상이 사나운 형이랑 제일 친해졌는데 생각보다 착하고 성격도 좋았다. 무엇보다 당당하고 할 말 다 하는 성격이 내심 부럽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다른 참가자들과 친해졌지만 준은 여전히 세상에서 어머니 다음으로 몇 번 먹어보지도 못한 햄버거가 제일 좋았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게 정확히 열일곱의 가을이었다.

* * *

울다 지친 준을 침대로 끌고 가 눕힌 예준이 옆 침대에 누웠다.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힘든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애 보는 일이 체력 소모가 심하긴 하지.

열아홉 살을 마음대로 아기로 만들어 버린 예준이 넓은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준이 누워 있는 침대 쪽을 향해 고개를 고정시켰다.

“잘도 자네.”

어제 밤을 새워서 연습하고, 오늘 하루 종일 욕 먹어가면서 춤추다가, 온몸에 물을 다 빼낼 기세로 울기까지 했으니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빨갛게 부은 눈가를 빤히 쳐다보던 예준이 이마 위로 손등을 올려놨다. 왜 이렇게 심장이 답답하고 기분이 이상한지 모르겠다.

준을 오랜 시간 동안 아낀 건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남인데. 아무리 10년 넘게 봤다고 해도 그냥 친한 동생 정도인 게 정상인데.

예준은 성격이 나쁜 편이었다.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멤버들을 제외한 누가 봐도 그랬다. 친한 사람과 아닌 사람. 세상 모든 사람들을 두 개로만 나누는 예준은 얼굴이 두 개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고 친한 사람에게도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지는 않았다. 손을 잡아 일으켜 주긴 해도, 괜찮냐고 묻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근데 이건 좀…….”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보이지 않나? 갑작스럽게 밀려온 생각들에 예준이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좆같지?”

뭔가 좀 쌓인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그러고 보니 여자 안 만난 지 얼마나 됐더라.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애초에 예준은 딱히 여자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누가 더 예쁜 여자와 사귀는지 앞다퉈 자랑하는 놈들을 혐오했기 때문에 연애를 선호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혼자가 편하고 좋으니까.

그럼 진짜 안 한지 오래돼서 그런가. 손을 슬슬 아래로 내리던 예준의 시야에 옆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는 준의 얼굴이 담겼다. 잠깐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느라, 이 방에 누가 있는지 잊고 있던 예준이 손을 멈췄다.

“아, 씨발.”

욕설을 내뱉은 예준이 벌떡 일어났다. 준이 자고 있어서 다행이다. 정말 쓰레기 같은 어른이 된 기분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한국 땅을 밟자마자 예준은 준과 함께 병원부터 가기로 했다. 수술이 아주 잘 돼서 지금 안정적으로 회복하는 중이라는 희소식을 전달받은 상태였지만, 곧 컴백이라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매니저에게 데려다 달라고 할 수가 없어서, 예준은 어쩔 수 없이 전에 준을 태우고 드라이브를 했던 차를 다시 꺼냈다.

중요한 자리에 갈 때는 복장을 단정히. 어릴 때부터 확실히 교육받은 내용을 예준은 충실히 지켰다. 매년 생일마다 정장을 선물하면서 아버지는 똑똑히 강조했다.

네가 어느 위치의 사람인지, 누구의 자식인지 옷이라도 보면서 기억해라. 가업을 이어받지 않고 밖으로 나돌고 있지만 예준의 출신은 변하지 않았다.

“형, 웬일로 정장 입었네요.”

휘영이 마카롱을 먹다 말고 말을 걸어왔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에 거의 매일 트레이닝복만 입고 굴러다니던 예준이 이렇게 차려입는 건 오랜만이었다. 평범한 옷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예준은 굉장히 극과 극의 패션을 선호하곤 했는데, 오늘은 고급스러움의 극치였다.

“어디 가요?”

휘영의 물음에 대답을 하는 대신 예준은 탁자 위에 있던 마카롱을 집어 먹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휘영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한 마카롱은 필링이 두껍고 컸다. 무엇보다 모양이 아기자기했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마카롱을 몇 개 더 집어 든 예준이 걸음을 옮겼다.

“그거 어디서 사 온 거냐? 올 때 한 박스 사 올게.”

“인터넷 주문한 건데요.”

“계좌로 돈 보내줄까?”

반이나 사라진 마카롱 박스를 보던 휘영이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아는 예준은 절대 남의 것을 뺏어 먹고 사다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대로 아무렇지 않게 나간다면 모를까. 

“싫어? 그럼 됐고.”

휘영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예준이 미련 없이 손을 흔들고 멍하니 서 있던 준을 끌고 나가버렸다. 내가 저럴 줄 알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휘영이 남은 마카롱을 정리했다. 예준은 그대로 예준이었다.

현관문을 닫은 예준이 준에게 방금 전 휘영에게서 훔친 마카롱을 쥐여줬다.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잘 받아먹는 준을 차에 태우고 주소를 받아 내비게이션을 찍었다.

도착한 병원은 대충 봐도 큰 규모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많았다. 의사나 간호사들은 물론이고, 돌아다니는 환자와 보호자들도 가득했다. 

“병원 올 때마다 아무도 안 알아보냐?”

준은 항상 휴가가 주어질 때마다 어머니에게 갔다. 그렇다면 며칠씩 이 병원에 있었다는 말인데, 병원에서 아이돌 얼굴을 알아보는 일이 드물다고는 해도 레브 정도의 인지도면 아무도 몰랐을 리가 없었다. TV에 그렇게 많이 나왔는데.

“그냥 모자 눌러쓰고, 안경 쓰면 못 알아보는 것 같던데. 의사 선생님이나 간호사분들은 알고요.”

준이 가져온 모자를 꾹 눌러 쓰고, 언제 챙겨왔는지 동그란 안경을 꼈다. 눈을 감싸는 동그란 안경테가 빈말이 아니라 정말 귀여웠다. 180cm라는 키가 무색하도록.

가만히 있으면 나름 분위기 있는 얼굴인데 표정만 생기면 금방 동글동글해졌다. 이렇게 벌써 연예인 태가 나는데 아무도 못 알아봤을 리가 없었다.

“그래?”

그냥 병원에서 아는 척하는 무개념이 되기 싫었던 것 같은데, 준은 정말로 못 알아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예준은 동조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선글라스를 꺼내 들었다.

“와, 형 실내에서.”

“누가 실내에서 쓰면 안 된대?”

“이름부터 선글라스인데…….”

준은 말꼬리를 점점 흐리더니 곧 입을 다물었다. 정장에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예준은 마치 영화에 나오는 첩보 요원 같았다. 아니, 곧 여름인데 이 형은 덥지도 않은가…….

모든 이의 시선을 잡아끄는 착장으로 예준은 당당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통과해서 병실로 들어갔다.

“연예인인가 봐. 훤칠허네.”

복 도 의자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막 앞 병실로 들어간 예준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여, 재벌이여.”

“뭔 재벌이 이런 병원에 와. 주치의 부름 되는걸?”

“방금 옷 못 봤어? 젊은 연예인이 저런 걸 어떻게 사 입어. 딱 보니 유명하지도 않아 뵈는데.”

남편의 말에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했다. 밖에서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 알 리가 없는 예준은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선글라스를 벗었다.

준의 어머니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모자지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닮아서였다.

“안녕하세요.”

예준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미리 이야기를 들은 준의 어머니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인사에 예준이 답답한 넥타이를 풀었다.

분명 시원하긴 한데 생각보다 숨이 막혔다. 공기가 텁텁했다. 좁은 병실에 침대 여섯 개가 놓여 있으니 답답함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와중에 어머니가 누워 있는 침대 근처에 어울리지 않는 명품들이 몇 개 보였다. 보통 명품이라고 하면 딱 생각나는 브랜드의 가방과 지갑이었다. 정산 받고 선물로 사 온 것 같았다. 

좋은 걸 선물하고 싶은데 아는 건 없고, 무작정 매장에 찾아가서 사 왔겠지. 어떤 마음으로 사 왔을지가 뻔히 보여서 예준이 시선을 돌렸다.

“그 멤버 형?”

“네, 어머니.”

같은 그룹 멤버 형이 함께 온다는 연락을 미리 받은 어머니가 예준에게 말을 걸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예준과 눈을 마주한 어머니의 감상은 이랬다.

일단 키가 상당히 컸고, 인상이 사나웠으며, 이 더운 날에 정장을 입고 있었다. 연예인이라 그런지 잘생겼네. 아들과 같은 팀이라기에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지만, 막상 나란히 서 있는 걸 보니 그림이 좋았다.

아들의 잘생긴 친한 형은 곧 적절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입을 열었다. 양아치처럼 생긴 얼굴과 다르게 낮고 진지한 목소리였다.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오지랖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어머니만 괜찮으시다면 괜찮은 병원을 알고 있습니다. 옮기시는 게 몸 관리하시기에 훨씬 좋을 것 같아요.”

천천히 말문을 연 예준이 한참 준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눴다. 설득은 길지 않았다. 외로워서 병실을 바꾸고 싶지 않다던 준의 어머니는 순순히 침대를 정리했다.

아직 어린 아들을 두고 죽을 수 없다는 어머니의 의지가 눈빛에서 보였다. 어머니가 준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입을 뗐다.

“오래 살아야죠. 고맙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일단 수술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조금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뒤 거의 3년을 사용해 왔던 병실에서 자리를 뺐다.

쌓여 있는 살림들을 챙겨서 예준이 추천한 병원으로 옮기는 데 정확히 일주일이 걸렸다. 크기부터 전에 있던 병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병실은 안 그래도 넓은 병원의 제일 높은 층에 있었다. 

컴백 준비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예준은 사람을 불러 어머니의 입원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컴백 전에 잠시 시간을 내서 준과 함께 병원을 다시 찾았다. 어디 입원하셨는지 꼭 자기 눈으로 봐야겠다고 하길래, 귀찮음을 무릅쓰고 택시를 잡았다.

“형, 무슨 병원 복도에 카펫이…….”

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 병원은 어릴 때 예준이 잠깐 입원한 곳이었다. 어린 시절, 하나뿐인 외동아들이 쓰는 것은 숟가락 하나조차 함부로 사지 않던 부모님이 고르고 골라 선택한 곳이었다. 그 정성으로 키운 아들이 이렇게 속을 썩일 줄은 몰랐겠지만.

어머니와 만난 준은 넓은 병실을 보더니 눈을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렸다. 온갖 것들이 다 갖춰져 있는 공간은 병실이라기보다는 집에 더 가까웠다. 준이 살던 집보다 더 큰 것 같았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더 컸다.

“형 이게 병실이에요?”

커다란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언젠가 막 정산을 받았을 때, 준은 당연히 1인실을 알아보러 갔었다. 가격도 물어보지 않고 일단 제일 비싼 병실로 보여 달라고 했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다.

준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 정도 병실이면 얼마 정도 하지. 6인실이 보험 적용받고도 하루에 만 원 정도였으니까……. 아니, 다 같이 쓰던 6인실보다 크고 좋은 걸로 봐서 어쩌면 이전 병원비의 60배일지도 몰랐다.

어쩐지 엄마가 입원비 낼 수 있는 곳이냐고 문자를 보냈더라. 준이 최대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방송국이 먼저 일정 금액을 가져가고, 소속사에서 가져가고, 남은 금액을 또 5분의 1을 해서 정산 받은 금액이었음에도 상당히 큰 액수였지만 확신이 서질 않았다. 얼마인지 예준에게 미리 물어봤어야 했는데, 자신의 실수였다.

“엄마, 나중에 또 올게.”

어머니와 인사를 하고 나오자마자 준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빨리 가격을 묻고 싶어 달싹거리던 입술이 열렸다.

“형……. 계좌번호 알려주면 바로 돈 보낼게요.”

“돈?”

얼마인 줄 알고 보낸대. 하루 입원비만 이백만 원 언저리인데, 한 번 수술할 때마다 그 비용은 어떻게 부담하려고.

내년, 내후년이 되면 점점 정산 받는 돈이 늘어날 테니 괜찮겠지만 아직은 혼자 내기에 무리였다. 병동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거기에 이 병실은 보험 적용도 못 받는 곳이었다.

원래 온갖 재벌들이 법원에 출석할 때가 되면 앞다투어 입원하는 곳이라 자리가 없을 때도 태반이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나 여기랑 아는 사이라 할인받았어.”

예준은 준에게 거짓말로 금액을 잔뜩 낮춰 불렀다. 반의반밖에 안 되는 금액이었다. 현질 좀 안 하지 뭐, 원래부터 많이 하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정산 받은 금액도 쓸 일이 없어서 통장에 고스란히 쌓여 있으니 그걸 쓰면 됐다.

준은 순순히 이야기한 금액을 이체했다. 애가 너무 아는 게 없고 순수해서, 예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얘 진짜 누가 등 처먹으면 어떡하냐. 통장을 하나 만들어서 따로 돈을 관리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데 병원비를 할인해줘요?”

“잘생김 할인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뱉던 예준의 앞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어, 야. 너 오랜만이다.”

아, 여기 VIP 병동이지. 흰 가운을 입고 지나다니는 의사들 사이에서, 편안한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저 남자는 병원장의 둘째 아들 선욱이었다.

뜻을 알 수 없는 이탈리아어가 잔뜩 적힌 옷을 한 번 쭉 스캔한 예준이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지나가던 강도가 옷만 벗겨서 튀어도 몇 달은 먹고 살겠다.

“어. 오랜만.”

“여긴 웬일이야. 옆에는 그룹 멤버지?”

“아, 안녕하세요!”

예준의 친구라고 생각한 준이 밝은 목소리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인사성이 마음에 들었는지 선욱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실물도 귀엽게 생겼네.”

인사에 대한 답이라기엔 너무 뜬금없고 불쾌한 소리에 예준이 인상을 구겼다.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하고 걸어 다니는 저놈이 게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실제로 추접스럽게 노는 편이고, 작업 걸 때 치는 진부한 멘트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수표 하나 내밀면 놀아 줄 놈들이 가득하면서 어디 미성년자를 건드려. 같은 멤버인 거까지 아는 걸 보니 어디 인터넷에라도 찾아본 게 분명했다. 황당함에 예준이 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나 간다.”

“그래, 연락 좀 하고 지내자. 전화할게.”

무시무시한 전화 예고까지 던지고 나서야 선욱이 자리를 떴다. 비행기 모드를 켜 놓을지, 그냥 휴대폰을 끌지 고민하는 와중에 준이 어깨를 쿡쿡 찔렀다.

“누구예요? 친구?”

“아니, 여기 취업하고 싶어서 맨날 오는 취준생. 예전에 몇 번 마주쳤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선욱의 형이 눈 부릅뜨고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든 치고 들어가려고 눈치 보는 중이니까. 예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저놈 만나면 어디든 좋으니까 꼭 발로 차.”

“갑자기 왜요?”

“눈빛이 이상하잖아. 저런 애들이 꼭 마약 한다.”

실제로 선욱은 취미로 하는 마약으로 인해 피부 상태가 안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준이 듣기에는 뜬금없이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불쌍한 취업 준비생을 욕하는 예준을 보며 준이 웬일로 맞는 말을 했다.

“취준생이 마약을 왜 해요.”

그냥 수금하러 오는 조폭이라고 할 걸 그랬네. 현실적이지 못한 거짓말이었음을 깨달은 예준이 곧바로 후회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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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브 게시판] 나 뮤비촬영스탭인데

작성자 : 익명

짧게 뮤비촬영 후기푼다~~~~~! 뮤비내용이나 안무관련으로는 말못하고 후기만ㅇㅇ

일단 그냥 이번 뮤비 역대급이야 기대해라ㅋㅋㅋㅋㅋ 원테이크 촬영인데 ㅈㄴ 오래걸렸고.. 춥고 괴로웠지만 쩔더라 나 레브 이름이랑 얼굴만 대충 알고 있었는데 촬영 끝나자마자 호감돼서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난리남ㅋㅋㅋㅋㅋㅋㅋ 

촬영장소 해외인건 다들 아는거 같던데 고산지대라 진짜 더 힘들었음ㅠ 바람도 존나불고 진짜..... 사실 비행기 탈때까지만 해도 유명 아이돌 뮤비촬영하면서 겸사겸사 해외여행까지하니까 개꿀이라고 생각했는데.... 풍경은 이쁘긴한데 바람 존나불어서 머리 휘날리고 화장 다 무너지고 개꼬라지되니까 풍경이고 뭐고 하나도 안보임

근데 구경하기 시작하니까 재밌더라ㅎㅎ 프로그램으로 데뷔해서 바로 신인상 휩쓸고 ㅈㄴ 반짝 떴는데도 싸가지없는애 없고 예의바름 인사성도 바르고 촬영도 열심히함 나는 춥고 피곤해서 인성 터졌는데 쟤네는 끝까지 성실하게 잘하더라

그 춤잘추고 젤 잘생긴멤버ㅋㅋㅋㅋㅋㅋ 걘 진짜 쩔더라 일반인중에 발굴한게 신기할정도 촬영 많이 다녀봤는데 진짜 프로같아 보였어 나이도 어린데 신기함 그리고 막내 상태가 안좋아서 이틀 촬영했거든 첫째날에 멘붕왔는지 안무 틀리고 표정 제대로 못지어서 감독한테 욕 많이먹고 갔는데ㅠ 원테이크라 다른 멤버들도 같은거 계속하고.. 숙소가서 연습 많이했는지 훨씬 괜찮아져서 열심히하더라 

그래서 결과물은 개쩔어ㅋㅋㅋㅋ 진짜 피눈물흘리면서 촬영한 보람이있다 뿌듯함에 엉덩이까지 찌릿했다고ㅠ 다들 잘생겨서 그런가.. 촬영쪽 일하면서 연예인들 진짜 많이봤는데 얘네는 비주얼 구멍이 없음 원테이크인데 이렇게 잘뽑히기 쉽지않다 기대 많이해도돼!!!!

아 그리고 리더는 쩜 놀랐어 보기랑 다르게 착하더라ㅋㅋㅋㅋ 의외라서 기억남 스태프들한테 따로 핫팩도 돌렸음 멤버들도 잘 챙기던데ㅋㅋㅋㅋㅋㅋ? 같은 비행기탔는데 막내 엄청 챙기더라 보기 좋았음ㅎㅎ

댓글

└ 아니 엉덩이는 왜 찌릿한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그냥 움찔움찔하더라..... 결과물 보고 흥분했나봐

└ 아니 뭔 뮤비를 고산지대가서 찍냐 CG쓰라고

  └ 마자 예쁜건 좋은데 고생하는건 싫다고ㅠㅠㅠㅠ

  └ ATM..사람 화나게하는거 습관이야

└ 준이 아팠나??ㅠㅠ 안그래도 힘들었을텐데 욕까지 먹었어 울애기ㅠ

└ 쉬익쉬익 울 준이 국내에서도 춤추기 힘든데 해외까지 왜 끌고나가냐고여

  └ ㅆㅂ마자ㅠ 촬영장소 잡은사람이 잘못함

  └ 편집들어가는 것도 힘들어하는데 왜 원테이크 시키냐고ㅡㅡ

  └ 맞아 준이 잘못 1도없다 잘생겼으면 됐다^ㅡ^

└ 하현이 춤 개쩔지 너두 입덕해

  └ 안돼.. 제발 사람 늘리지 말란말이야

  └ 지금도 미어터지는 콘서트장에 내자리가 없는데ㅜ

└ 와 구경하러 왔다가 놀라고간다ㄷㄷ 존나 부둥부둥하네 아이돌이 춤못추는건 죄인데

  └ 그게 왜 죄니??? 아이돌은 얼굴만 잘하면돼 너 어이없다 꺼져 구경할거면 돈내

  └ 내새끼 얼굴이나 보고 얘기해줘^^♥

  └ 준이 첨 나왔을때나 심각했지.. 형들이 마니 알려줘서 늘었거든요

  └ 천재 하나 있어서 벨런스 맞추려면 어쩔수없다구

└ 막줄 뭐야 예준이가 멤버들을 챙긴다고?

  └ 멀쩡한 글을 주작의심하게 만드는 마지막 문장

  └ 춥고 귀찮다고 엎어져있는거 멤버들이 끌고온거면 ㅇㅈ

└ 리더가 예준이 말하는거 맞니? 리더처럼 보이는 애가 따로 있어서 헷갈렸을수도 있어 동글동글 하얀애 생각하는거 아니니?

  └ 어.. 아닐걸? 걔는 메인보컬 아니야? 

    └ 뭐야 멤버 다 아네 진짠가봐.....

└ 몸뚱이 챙기기도 바쁜 양예준이 핫팩을 챙겨오다니!!

  └ ㅅㅂㅋㅋㅋㅋㅋ 아니 댓글들 왜케웃기냐ㅋㅋㅋ 좀 믿으라고ㅋㅋㅋ

    └ 하지만 쌓인 멤버들 피셜이 믿을수없게 하는걸..

└ 리더가 얘 말하는거니? (사진)

  └ 맞아 얘가 막내 담요도 덮어주고 짐도 챙겨주고 계속 챙기던데?

    └ 그거 덮어주는척 하면서 몰래 꼬집은거 아냐?

    └ 짐 챙겨주는척하면서 물건 훔치고 장난쳤을지도 몰라

      └ 아니 ㅆㅂ 울예준 성격파탄자 아닙니다ㅜ

└ 아프지마 정준.. 내 허락없이 아푸지말라고 죽고십냐? 

  └ ㅆㅂㅋㅋㅋㅋ 집착광공이냐고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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