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
“윤 도령님.”
이튿날 아침, 메산이는 말했다.
“저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메산이는 윤태희에게 자신을 고향에 데려다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왜?”
다소 갑작스러운 부탁이었다. 윤태희는 메산이에게 왜 갑자기 고향에 가고 싶어졌느냐고 이유를 물어보았다. 잠시 눈을 굴리며 우물쭈물하던 메산이는 ‘그… 그냥, 예전에 살던 곳에 가 보고 싶어서요…….’ 하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윤태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갔다가 언제 돌아오나요?”
메산이는 하루면 된다며,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요, 정주 님께는 비밀이에요…….”
메산이는 정주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걱정을 사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메산이의 고향은 태백산맥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어느 골짜기라고 했다.
주말이 되자 윤태희는 메산이를 조수석에 태우고 태백산맥 자락으로 향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산세가 우거진 초입에 이르렀을 때, 메산이는 이쯤에서 차를 세워달라고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윤태희는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제아무리 험한 산에서 나고 자란 산삼 동자라고 해도 혼자 보내는 건 위험할 것 같았다. 그런데 메산이가 ‘그건 안 된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제 고향에 인간은 들어갈 수 없어요.”
대신에 같은 영물인 유남생이 동행하기로 했다. 메산이와 유남생은 일찌감치 말을 맞춰 둔 상태였다. 메산이는 주머니 안쪽에 유남생을 집어넣고, 등에는 개구리가 그려진 작은 가방을 메고 차에서 내렸다. 가방 안에는 윤태희가 싸준 주먹밥과 물이 들어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메산이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산속으로 씩씩하게 사라졌다.
차를 세워놓고 메산이가 돌아올 때까지 대기하기로 했다. 윤태희는 운전석을 뒤로 젖혀 놓고 미리 챙겨 온 책을 읽었다. 그 후로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새벽에 도착했으니 온종일을 기다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윤태희가 책 한 권을 거의 다 읽을 때까지도 메산이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러다 메산이가 나타난 것은 해 질 녘이었다.
“윤 도령님!”
산을 넘다가 만만찮게 고생을 한 모양인지 메산이는 온몸이 꼬질꼬질했다.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뎌서 진흙이 잔뜩 묻었다. 메산이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다소 지쳐 보이긴 했으나 표정만큼은 달덩이처럼 환했다.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윤태희는 고향에 가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메산이에게서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다.
왜냐하면 메산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쿨쿨 잠을 잤다.
메산이가 고향에서 돌아온 다음 날이었다.
서울에 가 있던 정주가 왔다. 정주는 당분간 스케줄이 없어서 며칠쯤 지내고 갈 것이라고 말했다. 메산이는 언제나 그랬듯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정주를 열심히 반겼다.
정주 모르게 비밀을 간직한 메산이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냈다. 식탁에서 다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고, 마당에 나가서 놀다가 깨끗이 목욕도 하고, 글공부도 열심히 했다.
밤이 깊어 잘 시간이 되었을 때 메산이는 정주의 방으로 가서 똑똑, 노크를 했다. 문을 여니 자다 깬 정주가 비몽사몽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메산이가 말했다.
“정주 님, 저도 같이 자도 될까요?”
정주는 하품을 하면서, 이리 들어오라는 듯이 이불을 들추어 보였다. 침대에 누운 메산이는 정주의 곁에 파고들었다. 메산이가 품에 답싹 안기자, 정주는 메산이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어이구, 우리 풀떼기.”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애기라니까…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그새 응석을 부리는 메산이가 귀여웠다. 정주는 메산이를 간지럽히며 장난을 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눈부신 햇살에 잠에서 깼을 때 정주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잠에서 깬 정주는 품에 메산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찌감치 일어나서 놀러 나간 모양이었다. 기지개를 켜던 정주는 부스스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오래간만에 푹 잔 것 같았다.
“메산아.”
정주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놀러 나갔을 메산이를 불렀다.
“메산아.”
그런데 다다다, 소리를 내며 달려와야 할 메산이가 조용했다.
***
소년은 탁 트인 들판을 따라서 하염없이 길을 걷고 있었다. 자신은 무얼 위해 걷고 있는지, 이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소년은 자신이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힘이 들지도 않았다. 이곳에선 밤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걷다 보니 돌 위에 누가 앉아 있었다.
키가 작은 어린아이였다.
길을 걷던 소년은 아이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힐끗 눈길을 주었다. 아이는 발을 동동거리며 소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뭘 봐.’
소년이 심드렁하게 시비를 걸자, 아이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보고 싶어서요.’
‘뭐?’
‘그래서 봤어요.’
말문이 막혔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
코앞으로 다가온 아이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소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콩알만 한 게 말대답은….’
‘나리, 어어, 저요! 고향에 다녀왔어요!’
‘고향?’
‘예전에 모시던 산신님을 찾아뵀어요.’
‘산신님?’
‘네! 산신님께서 방법을 알려 주셨어요!’
‘뭔 방법?’
소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이를 내려다볼 때였다. 갑자기 아이가 소년의 허리춤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이는 “나으리. 저 잊으시면 안 돼요. 아셨죠?” 하더니, 모든 용무가 끝났다는 듯이 홀가분하게 떨어졌다. 아이는 그대로 소년을 지나쳐서 척척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야? 지 할 말만 하고 가버려?…….
소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이를 돌아보았다.
“…….”
소년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이 있었다.
‘메산이.’
홀연히 뱉은 말이 들렸는지, 멀어져 가던 아이가 발걸음을 멈췄다.
‘메산이?’
그때,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기쁜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맞아요, 나리. 저는 메산이에요. 메산이에요!’
신나서 방방 뛰던 아이가 소년에게 다다다 달려와 안겼다.
‘저한테 이름을 주셔서 감사해요.’
소년은 엉겁결에 아이의 작은 몸을 안아 주었다.
‘그동안 많이 괴롭고 힘드셨지요? 이젠 다 괜찮을 거예요.’
씩씩하게 가려고 했는데, 제 이름을 불러주니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메산이는 턱을 일그러뜨리며 흑흑 울었다. 옷소매로 눈물을 닦은 메산이는 양팔을 벌려 소년의 목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이렇게 소년을 안아 주는 건 처음이었다.
‘나으리.’
‘응?’
‘안녕히 계세요.’
그 순간, 품에 안고 있던 아이의 몸에서 환한 빛이 번쩍이더니 명치 끝이 뜨거워졌다. 마치 불덩이를 끌어안은 것 같았다. 이내 가슴 속으로 무언가가 쑥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어?”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꿈에서 깨어난 재겸은 몸을 일으켰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에 붙어 있는 옷걸이에는 대륭 고등학교 교복이 걸려 있었다. 머리맡에 놓인 협탁 위에는 예쁜 오르골이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멍하니 눈을 감았다 뜨던 재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지.
이상한 꿈이었다.
살다 살다 이젠 별 개꿈을 다 꾼다. 재겸은 등허리를 긁적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방에서 나오자 밥 냄새가 났다. 정주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방에 서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재겸을 돌아본 정주가 “일어났어?” 하고 물었다.
“어? 어….”
기분 탓인지, 정주를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뭐 해? 얼른 앉아. 밥 먹게.”
“응.”
재겸은 머리를 긁적이며 식탁 앞에 앉았다. 왠지 현실감이 없었다. 이상한 꿈을 꾸고 난 직후라서 그런지 기분이 묘했다. 재겸은 멀뚱멀뚱 잘 차려진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메뉴는 애호박을 큼직하게 썰어 넣은 된장찌개였다. 평소에 재겸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수저를 들던 재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메산이는?”
“잠깐 어디 나갔어.”
“어디?”
정주는 별말 없이 찌개를 한술 뜨더니 “좀 짜네.” 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어디 갔는데?”
정주가 대꾸하지 않자, 재겸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정주는 이번에도 듣는 둥 둥 마는 둥 하며 숟가락질을 하더니 “곧 온댔으니까 넌 신경 끄고 밥이나 먹어.” 하고 말했다.
재겸이 설핏 눈가를 구겼다.
“야. 애 어디 갔냐고.”
“아 밥 좀 먹자.”
정주가 갑자기 짜증을 내더니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이골이 난 것처럼 이마를 틀어쥐고 있던 정주가 한숨을 푹 쉬며 눈가를 문질렀다.
“재겸아, 그냥 밥 먹자… 응?”
재겸이 멈칫하며 정주를 바라볼 때였다.
“…….”
어느 순간, 재겸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정주는 울고 있었다. 아니, 울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있었다.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고,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너 왜 울어?”
정주가 갑자기 눈물을 보이자, 재겸은 당황했다.
“…….”
재겸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정주를 바라보다가, 불에 덴 것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메산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메산아.”
재겸은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메산아?”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메산아!”
정주는 계속 울고 있었다.
거실 한쪽,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화분과 종이 한 장이었다. 흙이 담겨 있는 화분에는 콩알만 한 씨앗이 놓여 있었는데, 석류알 하나를 떼어낸 것처럼 붉은색이었다. 작고 동그란 씨앗은 영롱한 구슬처럼 빛나고 있었다. 재겸은 황급히 화분 옆에 놓여 있던 종이를 살펴보았다. 종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무언가 쓰여 있었다.
나으리께
나으리 안녕하세요 저 메사니 이에요
저는 꽃 피는 봄이 오면 다시 오겠습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마니마니 사랑해요
메사니 올림
재겸의 손에 들려 있던 편지가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주야, 이거 뭐야?”
언제 이렇게 글이 늘었는지 모를 일이다.
“야, 이거 뭐냐고…….”
멍하니 앉아 있던 재겸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꿈에서 메산이를 안았을 때 가슴에 불덩이 같은 것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마치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간지럽고 뜨겁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건 평범한 꿈이 아니었던 거다.
재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가슴을 내리눌렀다.
마침내 모든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