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재겸의 마지막은 점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점 하나에서 시작된 환한 빛이 번져 나가더니, 시야가 온통 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재겸은 자신이 이 땅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온몸이 가벼웠다. 존재하지 않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선잠의 경계에 섰을 때처럼 의식이 점점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했다.
백색 도화지를 펼쳐놓은 것처럼 온통 하얗기만 하던 시야에 색채가 스며들기 시작하더니,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장면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재겸은 자신이 환영을 보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이 수향의 가장 빛나는 기억이라는 사실도.
때는 초여름이었다. 수향은 휘림과 함께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을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러 멈춰 섰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잠시 쉬었다 갈래?”
이마에 맺힌 땀을 닦던 휘림이 수향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수향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양지바른 곳을 찾아낸 휘림이 털썩 주저앉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치맛자락을 정돈하고 앉은 수향의 시선이 어디론가 향했다. 바위 틈 사이로 하얀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꽃이다.”
한 뼘 크기로 자라난 순백의 꽃은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수향이 가리킨 꽃을 발견한 휘림이 고개를 숙였다. 꽃을 유의 깊게 관찰하던 휘림이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바람꽃이야.”
“바람꽃?”
“응.”
손을 뻗어 꽃을 건드리던 휘림이 갑자기 줄기를 뚝, 꺾었다. 그에 놀란 수향이 타이르듯이 속삭였다.
“꽃을 꺾으면 어떡해.”
“뭐 어때.”
휘림은 주변을 돌아보며 짓궂게 웃었다.
“잠깐 손 좀 줘 볼래?”
수향은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다. 휘림은 꺾어낸 바람꽃 한 줄기를 수향의 손가락에 대고 이리저리 매만졌다.
“어때? 예쁘지?”
휘림이 완성한 것은 하얀 바람꽃을 엮은 가락지였다. 제 손을 들여다보던 수향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으며 놀란 눈을 했다. “예쁘지?” 휘림이 고개를 들고 수향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가끔 이렇게 해 주셨거든.”
“응, 아주 예뻐.”
수향이 고개를 끄덕이자, 휘림이 웃으며 말했다.
“넌 뭘 해도 곱구나. 잘 어울려.”
“아깝다. 내일이면 시들어 버릴 텐데.”
“아깝긴. 꽃은 원래 시드는 거야.”
“영영 간직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휘림의 말을 속으로 곱씹던 수향은 하늘에 대고 손을 뻗었다. 들꽃을 엮어 만든 가락지를 낀 손을 눈에 꼼꼼히 담다가 생각했다. 이 꽃이 영원히 시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애구는 잘 따라오고 있을까?”
“또 해찰하는가본데.”
휘림이 왔던 곳을 돌아보며 대꾸했다.
“걸음이 느리니까 기다려 주자.”
“그래.”
휘림이 기지개를 켜며 풀밭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꽃과 풀이 가득한 동산에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곳곳에서 흰 나비가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다리를 세우고 앉아 있던 수향은 드러누워 있는 휘림을 힐끗 곁눈질했다. 잠시 고민한 끝에 나란히 곁에 누웠다.
그러던 어느 순간, 휘림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저기 좀 봐.”
저 멀리, 들꽃을 한 아름 안고 오는 애구의 모습이 보였다.
“하하, 뭐야. 우리 준다고 꽃을 꺾어오느라 늦었나 봐.”
“애구한테도 가락지를 만들어 줄까?”
“좋아! 우리 셋이 나누어 끼는 거야.”
휘림이 손뼉을 쳤다.
“좋은 생각이야.”
그에 수향도 소리 내어 웃었다.
야아, 얼른 와! 여기야…….
휘림이 멀리서 걸어오는 애구를 향해 손짓했다가, 다시 풀썩 드러누웠다.
“이런 날이 또 올까?”
“내년 봄에 또 오면 되지.”
“그래.”
먼 데서 살랑살랑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아아, 볕 좋다…….”
수향과 휘림은 묘정을 기다리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재겸은 조용히 웃었다.
***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날이 흐렸다.
계절이 바뀌며 마당에 깔려 있던 잔디는 어느새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이 불 때마다 헐벗은 나무들은 몸을 떨었다. 오후 무렵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다.”
창문에 이마를 붙이고 있던 메산이가 환한 얼굴을 했다. 메산이가 이마를 붙이고 있던 차가운 유리창에는 메산이의 온기가 남아서 동그란 자국이 생겨 있었다. 다다다, 거실로 달려 나온 메산이가 정주의 방 앞에서 멈춰 섰다. 발을 동동 구르던 메산이는 정주를 불러냈다.
“정주님, 눈이 와요!”
“눈?”
정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거실로 나왔다.
“어, 진짜네.”
진눈깨비처럼 흩날리던 눈은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있었다. 들뜬 얼굴로 거실을 서성이던 메산이는 마당에 나가서 놀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정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감기 걸려.”
얼마 전 첫눈이 왔을 때의 일이다.
눈이 와서 신났던 메산이는 하루종일 마당에서 놀다가 감기에 걸렸다. 만병을 치유한다는 산삼 동자라도 스스로를 낫게 하는 방법은 없어서, 그날로 며칠을 꼬박 앓아 누워야했다.
“너 지난번에 아팠던 거 잊었어?”
정주의 엄한 태도에, 메산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거실 통유리창 앞에 쪼그려 앉았다. 유리창에 대고 호오오, 입김을 뱉더니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 작은 등이 몹시 슬퍼 보였다.
“…….”
정주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리 와.”
하는 수 없지. 정주는 메산이에게 두꺼운 외투를 입히고, 손모아 장갑과 털모자를 씌워주었다. 목도리까지 꼼꼼이 매어줌으로써 중무장을 마쳤다. 메산이는 한층 두툼해져 있었다.
정주는 바닥에 있는 유남생에게 물었다.
“깽알아, 너도 나갈래?”
“예에. 아무렴요.”
정주는 작은 머플러를 펼쳐 유남생을 올리고, 김밥을 말듯이 둘둘 굴렸다.
“대신 추우면 바로 들어와야 해.”
“네에.”
“네엡.”
신이 난 메산이는 눈이 쌓인 마당으로 한달음에 뛰쳐나갔다. 미닫이문 창틀을 넘던 유남생은 앞발에 눈에 닿자마자 꺅, 소리를 지르더니, 동상에 걸린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정주는 거실 창틀에 몸을 기댄 채, 흐뭇한 얼굴로 눈밭을 굴러다니는 둘을 구경했다.
“야잇, 메산아!”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밖을 내다보던 정주가 얼굴을 구겼다. 잠시 전화를 받느라고 방에 들어갔다가 나왔더니만,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메산이는 하늘에 대고 입을 왕, 벌리고 있었다.
“그걸 왜 먹어? 눈 먹으면 안 돼!”
“왜요?”
“요즘은 예전처럼 눈이 깨끗하지 않아서 먹으면 안 돼.”
“하, 하지만 이렇게 새하얗고 깨끗한데….”
“그래도 안 돼.”
요즘은 먼지도 많고, 저게 다 산성비예요, 산성비……. 정주는 통탄스러운 낯으로 한참 동안 잔소리를 해댔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예전에는 눈밭을 뒹굴고 다녀도 감기 한 번을 안 걸리던 메산이가 며칠 아팠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환경오염 때문인 게 분명했다.
“알았지? 눈 먹지 마.”
정주가 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엥….”
입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는 게 솜사탕을 먹는 것 같아서 좋았는데… 메산이는 정주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눈 먹기를 포기하고, 쌓인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참을 열심히 씨름한 끝에 메산이는 생수병 크기 만한 눈사람을 만들어냈다. 제법 그럴 듯했다.
“잘 만들었는데?”
눈사람을 발견한 정주가 웃으며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찰칵.
“재겸이 오면 보여 주자.”
“네에!”
코가 빨개진 채로 메산이가 헤헤 웃었다.
한겨울이 되면 낮은 짧아지고, 밤은 길어진다. 늦은 오후가 되자 금세 해가 떨어졌다. 바깥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정주는 메산이와 유남생을 불러들였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오후 내내 눈사람을 만들며 놀았던 메산이와 유남생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목욕을 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무렵이었다.
도어락 소리를 듣자마자 메산이는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정주도 기다렸다는 듯이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리자, 정주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태희 씨, 오셨어요?”
“윤 도령님! 다녀오셨어요!”
카멜 색 롱코트를 입은 윤태희가 목에 걸치고 있던 머플러를 벗으며 현관에 들어섰다.
“네. 다녀왔습니다.”
정주와 인사를 주고받던 윤태희가 메산이를 훌쩍 안아 올렸다.
“동자님, 잘 놀았어요?”
“네!”
“뭐하고 놀았어요.”
“어어, 눈사람을 만들었어요!”
“눈사람? 멋진데?”
윤태희는 품에 안은 메산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메산이가 시선을 피했다. 같이 산 지 반년이 넘었음에도 메산이는, 아직도 가끔씩 낯을 가리는 것처럼 굴었다. 윤태희는 손을 뻗어 메산이의 뺨을 중앙으로 오므리듯이 가볍게 쥐었다. 장난기가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볼살이 모여서 메산이는 붕어 입술이 되었다.
윤태희가 장난을 치자 메산이는 금세 쑥스러워하면서 몸을 배배 꼬았다. 메산이는 윤태희가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지 시선을 내리며 우물쭈물한 표정을 짓고는 했는데, 그게 귀여워서 윤태희는 집에 돌아올 때마다 오늘과 같은 장난을 반복하고는 했다.
윤태희와 세 식구가 함께 살게 된 지도 어느덧 반년이 넘게 흘렀다.
그날 이후, 윤태희와 영물 식구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윤태희는 정주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재겸이 나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 그리고 재겸이 아무도 모르게 줄곧 죽고 싶어 했다는 사실까지도.
“숙제는 다 했어요?”
“네에.”
“얼마나 잘했는지 볼까?”
“네에!”
일을 마치고 돌아와 식사를 끝낸 후, 윤태희는 메산이를 안고 2층 서재로 올라갔다. 넓은 책상 앞에 앉은 윤태희는 깍두기 공책을 펴고 메산이를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매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렇게 서재로 올라와 한글 공부를 하는 게 어느새 둘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
“다음 문제. ‘눈물이 나면 어떡하지?’”
메산이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치열한 고민 끝에 연필로 또박또박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윤태희는 양손으로 메산이의 배를 가만히 끌어안고서 다 쓰기를 기다렸다.
“다 썼어요!”
윤태희는 깍두기 노트에 쓰인 삐뚤빼뚤한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나면 어떠카지?]
윤태희가 소리 없이 웃더니 “땡.” 했다.
“뭐가 틀렸는지 모르겠허요…….”
“시루떡. 콩떡. 꿀떡. 떡국. 할 때 ‘떡’.”
“아!”
연필 끝을 잘근거리던 메산이가 헤헤 웃었다.
한글 공부를 끝내고, 메산이는 잠을 자기 위해 1층으로 향했다.
윤태희는 서재에 홀로 남아 책을 읽었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사라락, 책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정적을 깨고 방문을 톡, 건드리는 소리가 났다.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윤태희가 안경을 벗으며 고개를 들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윤태희가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 서재 안으로 불쑥 걸어 들어왔다. 온몸이 새까만 검은 고양이였다.
검은 고양이는 윤태희의 다리 사이를 스쳤다가, 머리를 슥 비비고 지나갔다.
“안 잤니?”
무릎을 굽히고 앉은 윤태희는 말없이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례청이 무너졌다. 세 식구는 서울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시골 이층집으로 다시 이사를 왔다. 전에 없이 검은색 고양이 한 마리도 함께 살게 되었다. 수향이 키우던 고양이였다.
그런가 하면 윤태희의 생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크고 작은 여러 변화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눈에 띄는 한 가지가 있다면 매일 밤마다 맥주를 한 캔씩 마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상 한구석에 고양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황금색 눈이 윤태희를 바라보았다가, 이따금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윤태희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한참 동안 조용히 책을 읽었다.
깊은 새벽, 윤태희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
창밖을 내다보니 가로등 불빛 아래로 꽃잎처럼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윤태희는 아무도 없는 거실로 내려왔다. 수향이 키우던 고양이는 유독 윤태희를 잘 따랐고, 윤태희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느릿느릿 뒤따라왔다. 윤태희는 고양이와 함께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는 이유는 까닭 없이 마음이 공허한 탓이다. 내일이 오길 바라면서도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이상한 마음이었다.
맥주 한 캔을 비운 윤태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거실 한쪽으로 방문 하나가 보였다. 불 꺼진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던 윤태희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가자, 곤히 잠들어 있는 재겸의 모습이 보였다.
방 안은 아늑했으며 몹시 조용했다. 윤태희는 재겸이 깨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재겸을 내려다보던 윤태희는 스르륵 주저앉아 침대 가장자리에 팔을 포갰다. 협탁에 놓여 있는 오르골을 되감자 띠로롱, 띠로롱, 소리가 났다.
스탠드에서 번져 나오는 주황빛 조명이 재겸의 얼굴선 윤곽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오르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윤태희는 소년의 단정한 옆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잠꾸러기 왕자님.”
윤태희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일어나세요.”
그러나 언제나처럼, 재겸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재겸은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