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
이제 걷는 거야.
걸어.
걸어 가.
재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걸음마를 배운 사람처럼 발을 뗐다.
재겸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순간은, 현실에서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재겸은 눈을 크게 뜨고 장대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 리 바깥, 아주 멀리서 일어나는 일이 눈에 보였다.
마치 캐비닛 안에 꽂아놓은 수많은 문서를 한 번에 열람하는 것처럼 좌라락, 엄청나게 많은 장면들이 겹쳐 있었다.
찰나와도 같은 순간에 지천의 수많은 정보가 오감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아주 먼 곳에서 죽음을 앞둔 이의 가녀린 신음 같은 것이 들리기도 했다. 풀숲에서 우는 풀벌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고,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환청인 것 같았으나 마치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것처럼 소리가 달라졌다.
이것이 소년이 말한 ‘화경’이라는 것을, 재겸은 알아차렸다.
화경은 비단 눈으로 보는 것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감각이었다.
몸에 의지를 집어넣고 간신히 두 발로 선 순간,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재겸은 자신이 마침내 소년과 하나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건 그냥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머릿속으로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도 전에, 하나가 됨으로 모든 감각 자체가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 수 없는 기쁨과 환희, 절망, 고독함 그리고 허공에 표류하고 있는, 감정이라고 명명되지 못한 수많은 마음들이 활짝 열린 오감을 타고 둑이 터진 것처럼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세상의 진리, 그리고 이 땅을 둘러싼 모든 법칙들을 이해하게 된 것만 같았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으며, 무엇이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었는지도.
재겸은 숨 한 번에 지난 세월의 비밀과 역사를 전부 생생히 체험했다.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몹시도 기이한 체감이었다.
아주 이상한 차원에 속해 있는 느낌이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무수한 시간들이 거미줄처럼 연쇄된 채 얼기설기 켜켜이 얽혀 있었다. 세상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물과 제 존재가 낯설게 느껴지는 한편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소리 내서 크게 웃고 싶기도 했고, 목놓아서 엉엉 울고 싶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지렁이처럼 꼬불꼬불 쓰인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정체불명의 술식들이 눈앞에서 투명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재겸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었다.
이 땅에는 언제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규칙이 있다.
이를테면 부적의 술식이 되는 형상과 글자들, 짐승의 생 피를 내어 부정을 쫓는 일, 정해진 시간에 자시(子時)에 기도를 올리는 일 따위였다. 이런 일은 반드시 ‘언제’, ‘어디서’, ‘무엇을’과 같은 특정한 조건을 충족해야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정보와 힘은 소수에게만 허락되었다. 이것은 세간에서 ‘미신’이라 불리며 세상을 풍미하게 되었고, 만신이나 영험한 자가 행하는 주술, 술법, 혹은 방법(方法)의 원천이자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현존하는 주술이나 방법들은 까마득하게 오래전부터 말(曰) 또는 책으로 전해져 내려왔으나, 그 최초에는 뭐가 있는지 재겸도 알지 못했다.
언젠가 묘정이 말하길 대부분의 주술은 귀신, 혹은 신(神)이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꽃가루처럼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인과와 법칙이 떠돌아다니는데 귀신, 혹은 신적인 존재가 그것을 인간에게 전해주고, 신을 보고 들을 줄 아는 인간을 거쳐 세상에 나오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재겸은 자신이 지금 신(神)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지렁이처럼 떠돌아다니는 알 수 없는 형상들, 그리고 만물의 고유한 기(氣)가 실재의 형태로 눈에 보였다. 지금 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인간에겐 보이지 않는 세상의 본질이었다.
그리하여 재겸은 이제 더 이상 그 무엇도 궁금하지 않았다.
마치 진리를 깨우친 사람처럼.
마침내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 방상시의 탈을 가진 수향을 대적할 방법, 그리고 저와 하나로 섞여버린 녀석에게서 벗어나서 이 몸을 거머쥘 수 있는 방법을.
“…….”
두 발로 선 재겸이 어느 순간 입술을 달싹였다.
“태희야.”
멀찍이 서 있던 윤태희가 고개를 돌려 재겸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방법이 있어.”
재겸은 팔을 들어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눈물과 땀, 피가 한데 뒤엉켰다가 궤적처럼 흐린 자국을 남겼다. 이제 복수 같은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지난 세월의 분노와 증오는 눈 녹듯이 사라져 있었다. 딱히 모든 걸 용서하기로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이제는 그런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재겸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단 하나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딛고서 살아가는 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묘정이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순간, 저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 뭐였는지, 묘정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 세상을 살다 간 누군가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위대한 삶의 경이와 비로소 맞닥뜨리게 된 순간이었다.
겸아, 명심하거라.
네 삶의 주인은…….
너란다.
재겸은 깨달았다.
삶의 의미는 몹시도 초라했고, 동시에 위대했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 누군가를 만나고, 상처받고, 작별하고, 그 사소한 순간들을 위해 이 땅에 왔다. 영웅이 되거나 신처럼 거창한 것이 되지 않아도, 위업과 성취를 이뤄내지 않아도 좋다.
길가에 피어난 꽃 한 송이의 소중함을 알고 주어진 시간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위하여, 그리하여 찬란하게 시들기 위해서 나는 이토록 괴롭게 깨어있는 것이다.
이제 와서 전부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건 어차피 의미 없는 가정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순간을 지나서 지금의 ‘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나뭇가지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듯이 살아온 인생에서 무언가를 소거한다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재겸은 어떤 기억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재겸은 걸었다.
윤태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윤태희, 잘 들어.”
재겸은 윤태희의 어깨를 잡고 ‘모든 것을 끝낼 방법’을 말해 주었다. 넋이 나간 채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재겸에게 귀를 내주었던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틀어 재겸을 응시했다. 그게 정말이냐고 묻는 듯했다. 그에 재겸은 그대로 윤태희의 곁을 지나쳐 걸으려 했다.
수향에게 볼 일이 남아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윤태희가 서둘러 재겸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같이 죽겠다는 거야?”
그러나 재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재겸아!….”
윤태희의 애원은 점점 발악이 되었다.
“재겸아, 정 그렇다면 내가, 내가 죽을게….”
윤태희는 반쯤 정신을 놓다시피 울부짖었다. 문득 자신이 이렇게까지 무너지고 손을 빌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맨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너 대신 죽는 것은 나여야 한다.
“나 죽어서 영귀가 될게.”
재겸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푹 숙이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러니까 제발, 제발… 우리, 이제 그만하자.”
재겸아, 나 죽어서 영귀가 될게. 모든 원한과 슬픈 기억을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귀신이 될게. 귀신이 되어도 나는 분명 또다시 너에게 반하겠지.
어김없이 첫눈에 반해서는 나비처럼 네 주변을 맴돌게 되겠지. 그렇게 이유도 모르는 채로 널 쫓아다니다가, 언젠가처럼 우거진 가로수 밑에서 정강이를 걷어차일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만약 언젠가 네 눈에 내가 보이지 않고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나는 너를 따라다니겠지, 어쩌면 나는 귀신이 되어서도 네 발밑에 붙은 그림자마저 시기하고, 질투하는 구질구질한 새끼일지도 몰라, 그래도 상관 없어, 영원히 네 곁을 맴돌아도 되니까….
“그러니까 제발… 제발 그만하자.”
윤태희는 쓴 물을 삼킨 듯이 미간을 일그러트린 채 울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윤태희는 자신이 이토록 엉망으로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재겸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서 머리를 조아리고 싶었다.
“도망가자, 재겸아. 그냥 다 그만하고….”
윤태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사실쯤은 윤태희라고 모르지 않을 것이다. 재겸은 윤태희의 손등 뒤에 제 손을 겹쳤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윤태희를 응시했다.
“아니,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야. 비켜.”
재겸은 아주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서 못 박혀 지냈다. 인생을 비관하고 세상을 탓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며 화살을 돌리려고 애썼으나 결국 그런 삶을 선택한 것은 저 자신이었다.
재겸은 오랫동안 그 평안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곳은 평화롭고 고요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