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36)화 (336/348)

#336

“태희를 지켜 줘.”

지금껏 재겸은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진 채 살아왔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는 삶이어야 했다. 삶의 기둥을 만들지 않는다면 꺾일 일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재겸은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삶을 떠받드는 손길을 느꼈다.

재겸은 메산이에게 치유를 받고 있던 윤태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릎 한쪽을 굽히고 앉은 재겸은 윤태희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러자 윤태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재겸을 바라보았다.

재겸을 마주한 순간, 목 끝에서 불덩이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온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재겸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수향이 원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 자체만 놓고 본다면 윤태희에게는 불운한 일이었다.

윤태희는 자신이 재겸을 불러들이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향이 원하는 것은 재겸이었다.

“태희야.”

재겸은 윤태희의 뺨을 움켜쥐었다.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상처투성이가 된 윤태희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조여드는 것처럼 아팠다.

“뭘 원해?”

윤태희는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앞의 재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서 무얼 원하느냐고 묻는 소년을 마주하는 광경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뭘 원하냐고?

마음 한구석이 허물어져 내리는 듯했다. 추락하는 동시에 벅차오르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제 뺨에 닿은 손을 움켜쥐며, 윤태희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윤태희는 양손으로 재겸의 손등을 움켜쥐었다. 경배를 올리는 것처럼, 고해성사하는 것처럼 이마를 묻었다.

나는…

이름을 되찾기를 원해.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이 모든 인과를 끊고, 너와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원해. 네가 계속 내 옆에 있어 주기를 원해. 그게 내 삶이기를 원해…….

“그래. 알았어.”

재겸은 윤태희의 뒤통수를 둥글게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그렇게 해 줄게.”

흔들림 없이 대답한 재겸은 몸을 일으켰다.

먼발치에 서 있는 수향을 바라보았다. 먼 거리였지만 수향과 눈이 마주쳤음을 알았다. 재겸은 손에 들고 있던 활대를 어깨에 멨다.

수향을 향해 몇 발자국 가까이 다가서자, 수향이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렴.”

태연하게 인사를 건넨 수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산삼 동자에 여우를 달고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꽤나 기묘한 일이구나.”

재겸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향을 응시했다.

“하마터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마음이 섰느냐?”

수향은 재겸에게 일주일의 시간을 줌으로써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수향은 영생을, 재겸은 죽음을 원했다. 서로가 가진 것을 맞바꾸는 거래였다. 그리고 재겸은 마침내 결심했다.

“그래, 마음이 섰어.”

재겸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수향을 바라보았다.

“전부 없던 일로 하겠어.”

언젠가 들어 본 듯한 대답에, 수향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생각해보면 수향은 늘 저를 시험에 들게 했다. 서낭당에서 만났던 날에도 그랬다. 그날도 재겸은 전부 없던 일로 하겠다고 말했다. 그때 탈을 뺏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재겸은 활에 화살을 메겼다. 턱 끝까지 활시위를 당겼다.

손을 놓는다면 당장이라도 수향의 이마를 꿰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재겸은 손을 놓았다. 그러자 눈 깜짝할 사이에 수향의 앞에 초인이 나타났다. 수향 대신 화살에 맞은 친위대의 얼굴에 쩍, 금이 가더니 얼굴에 쓰고 있던 흰 가면이 부스러져 내렸다. 그런데 파스스 흩어진 가면이 사라졌음에도 지푸라기 인형은 원형을 유지한 채로 눈앞에 서 있었다.

재겸의 눈가 한쪽이 설핏 구겨졌다.

뭐지? 왜…….

재겸은 다시 한번 화살을 쐈다. 화살이 꽂히는 순간이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지푸라기로 사람의 형상을 흉내 냈다고는 하지만, 살아있는 것의 살가죽에 화살이 꽂히는 느낌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재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재겸이 멈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피를 흘리면서도 다가오는 저것들은 지푸라기로 만든 인형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사람이었다.

재겸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또다시 활시위를 메기려던 손이 멈칫했다.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이제까지 해 왔던 대로 활을 쏠 수가 없었다.

그때, 재겸이 멈칫하는 틈을 타 등 뒤에서 친위대의 검이 날아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느라 미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 박자 늦게 몸을 뒤로 물렸을 때였다. 메산이의 치유를 받고 있던 윤태희가 검을 튕겨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날아드는 검을 쳐내고 재겸을 보호한 윤태희가 굳은 낯으로 물었다.

“괜찮아? 왜 그래?”

“사, 사람이야.”

“뭐?”

“살아있는 사람이야.”

재겸의 말에, 윤태희가 고개를 들고 방금 전에 재겸의 화살에 맞은 초인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었다. 재차 화살을 쏴서 맞힌 부위에서는 붉은색으로 피가 번지고 있었다.

“청장이 부리는 초라니거나, 약한 귀재들일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거북함이 올라왔다.

차라리 청장의 편을 드는 나자들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해치웠을지도 모른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났는지 모를 초인들이 또다시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우니 활을 쏘는 것보다는 검으로 대응하는 게 빨랐다.

재겸은 윤태희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을 뺏어 들었다. 그다음 윤태희의 팔을 붙잡고 등 뒤로 빼돌렸다. 윤태희를 몇 걸음 밖으로 밀쳐낸 재겸은 황급히 몸을 틀었다. 곧장 초인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몇 명인지도 모르는 숫자를 베어나가며 재겸은 윤태희를 지켰다.

그때, 칼에 당한 초인 중 하나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땅바닥에 넘어진 초인은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이 벗겨져 나간 상태였다. 숨을 고르며 자세를 잡던 재겸이 고개를 들었다. 가면 속 얼굴을 본 순간이었다. 재겸의 낯이 희게 굳었다.

“조영우?”

가면 속에 있던 얼굴은 조영우와 똑 닮아 있었다. 체격은 제각각이었으나 얼굴 생김새는 틀림없이 조영우였다. 피부가 하얗고 창백해서 어딘가 병약해 보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

검 자루를 움켜쥐고 있던 재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조영우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알고 있다.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은 내가 알고 있는 그 녀석이 아니다. 조영우의 눈은 흐리멍덩했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조영우는 이곳에 있었다.

청장이 고충을 써서 사람을 조종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신을 잠식당한 조영우는 청장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칼에 쓰러졌던 조영우가 피를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그러진 시야 속에서 검을 손에 쥐고 다가오는 조영우는 마치 기계처럼 보였다.

찰나의 망설임이었다. 망설이는 순간 빈틈을 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겸은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서늘한 검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리—…

멀리서 메산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귓가에 맴도는 울음 섞인 절규를 듣던 재겸이 윤태희의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 정주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천천히 고개를 내리자, 어깻죽지를 꿰뚫고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검이 보였다. 피에 흠뻑 젖은 칼날은 환한 달빛을 머금고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겸은 그제야 자신이 검에 찔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뼘 길이만큼 삐죽 튀어나온 검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춘 듯하던 어느 순간이었다. 몸을 관통했던 검이 뒤에서 쑥 빠져나갔다. 검을 잡아빼는 반동으로 인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자, 윤태희가 재겸의 허리를 확 끌어안으며 몸을 받쳐 주었다. 가슴 한구석이 그대로 뻥 뚫려 나간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재겸은 윤태희의 가슴팍을 짚으며 고개를 들었다.

“윤태희.”

망연한 정신을 비집고 들어온 목소리가 윤태희를 현실로 끌고 왔다.

“정신 차려.”

재겸이 손바닥으로 윤태희의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대더니, 눈에 힘을 주었다.

“나 안 죽어. 알잖아.”

그리고 칼 맞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알고 있지 않으냐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재겸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안광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견딜 수 없는 졸음이라도 몰려오는 것처럼.

안 돼.

윤태희가 멍하니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재겸은 손을 들어 자신의 상처를 눌렀다.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심장이 펄떡이는 감각이 선명했다. 무릎을 꿇고 있던 윤태희는 팔을 늘어트린 채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봐야 잠깐이야. 금방 깨어날 거야.”

게다가 지금은 메산이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라고 재겸은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의식이 점멸하는 와중이었다. 속엣말로 남았는지, 입 밖으로 꺼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리!”

“재겸아!”

저 멀리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환청처럼 귓가를 맴도는 부름에 재겸은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내렸다. 한순간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재겸은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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