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32)화 (332/348)

#332

“윤가의 수향 선생.”

칼날처럼 잘 벼린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수향의 낯이 천천히 굳었다.

“…….”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결에는 짙은 능소화 향기가 실려 있었다. 달빛이 밝은 밤, 너른 정원에서는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수향은 문득 등골이 오싹해졌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불쾌한 위기감이 온몸에 엄습하는 듯했다. 어떻게 나의 이름을 아는가.

“나는 당신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어요.”

윤태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수향이 물었다.

“넌 대체 뭐 하는 녀석이지?”

수향이 윤태희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설 때였다.

“그 애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 알아요.”

‘그 애’라고 한다면 아마도 재겸을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 애는 오지 않을 겁니다.”

“…뭐?”

“잠이 많은 친구거든요.”

“…….”

진심인지 장난으로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나치게 태평하게 들리는 대답이었다. 윤태희는 정말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아무래도 재겸이 윤태희에게 자신과 나눴던 대화와 그간 숨기고 있던 것을 전부 털어놓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너는 그 아이에 대해서 무얼 알고 있느냐?’

그때까지만 해도 둘 사이에는 희미한 불신 같은 것이 느껴졌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손을 잡았으나 완전히 믿지 못하는 상태라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이건 예상 밖이었다.

“…….”

수향의 낯에 선명한 균열이 생겼다.

“설마, 죽음을 포기하고 영원히 살아가겠다 작정이라도 했다는 건가?”

“그건 잘 모르겠어요. 나도 그 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윤태희는 느릿느릿 말을 늘어트렸다. 붙잡아도 붙잡히지 않고, 손아귀에 거머쥔 것 같다고 생각해도 막상 눈을 떠 보면 소년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일쑤였다.

“탈을 가지고는 있어도 그 힘을 쓸 수 없으니, 당신은 방상시가 아니에요.”

“내가 힘을 쓰지 못한다는 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수향의 물음에, 윤태희가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방상시의 권능을 쓴다면, 시험하거나 불신할 것도 없이 명령에 따르게 하면 될 겁니다. 하지만 석 부장님은 길을 열어줬죠.”

수향의 주변에는 온통 인간이 아닌 것들뿐이다.

“인간은 머리 검은 짐승이고,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하셨죠. 나도 그 말에 동의해요. 그래서 알아요. 당신은 인간을 믿지 못해서 누구도 곁에 두지 않은 거예요.”

윤태희는 자신의 추측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면 자신도 한때 그런 인간이었으므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윤태희는 인간보다는 귀신이 좋았고, 인간을 싫어하느냐 좋아하느냐를 떠나서 누구도 믿지 못했다. 권속으로 삼은 영귀들이 아니면 곁에 두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선을 그었다.

“만약 내가 당신이었다면, 나는 나자들을 복속시켰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죠. 오히려 뜬금없게 범인인 김예권이나 조영우처럼 약해빠진 귀재들만 골라서 조종했고.”

수향을 지키는 친위대도, 수향이 감싸고 도는 저 고양이도 인간이 아니었다. 윤태희는 인간 대신에 귀신과 가깝게 지냈지만, 귀신을 증오하는 수향은 귀신도 인간도 아닌 지푸라기 인형 따위에 주술을 걸고 저를 지키게 했다. 물론 수향의 곁에도 시중을 드는 인간이 몇몇 있었다. 조영우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그건 고충을 씀으로 주술로서 조종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게 계속 궁금했어요.”

수향이 곁을 내준 존재는 고양이 한 마리뿐이다.

“당신은 왜 방상시의 권능으로 나자들을 전부 복속시키지 않았나. 그리고 왜 약해빠진 인간들만 골라서 고독을 썼을까. 탈로 부리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을 조종하는 고독도 나자들에게 전부 심어 놨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가장 쉽고, 간단하고, 편한 방법이니까요.”

“…….”

“근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뭐겠어요?”

잠시 말을 멈췄던 윤태희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당신은 그러지 않은 게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거예요.”

“…….”

마침내 수향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탈의 권능도, 고독을 쓴 것도 마찬가지죠. 당신은 방상시의 권능을 쓸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고충도 귀재가 아니거나, 귀기가 약한 사람에게는 통하지만 나자가 될 정도로 귀기가 강한 인간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거겠죠. 혹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던 걸 수도 있고. 그러니까 김예권이나 조영우처럼 평범하거나 약해빠진 사람들을 데려와서 그런 걸 쓴 겁니다.”

나자들에게는 고충 같은 게 통하지 않으니 한 명 한 명 전부 이름을 받아서 금기의 주술을 건 것일 터. 방상시의 탈이 수중에 있음에도 수향은 인간을 조종하는 고충을 쓰고, 이름을 빼앗는 목패를 담보로 거머쥐고 있었다. 여차하면 죽이거나 제압할 수 있는 방편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권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의 방증이었다.

“여기까지가 제 생각인데, 혹시 틀린 부분이 있다면 정정하세요.”

말을 마친 윤태희가 손에 들고 있던 탈을 휙 벗어 던졌다.

“…….”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적이 이어졌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고, 찰나의 순간처럼 짧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수향이 입꼬리 한쪽을 끌어올렸다.

“지나치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아이구나.”

“뭐,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비뚜름한 칭찬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윤태희가 픽 웃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당신이 뭘 원하는지 알아요.”

윤태희가 다시 한번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 애의 육신을 원한다고 들었는데… 그 애는 여기 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만약 나를 볼모로 협상할 생각이었다면 포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하지만 너무 낙담할 필요는 없어요. 그 애를 데려와서 제물로 삼지 않더라도 당신이 불로불사가 될 방법은 있어요.”

“…불로불사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네, 당신이 써먹는 그런 금술 같은 건 아니고… 그 애가 왜 불로불사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조사하다가 그러다 알게 됐어요. 재겸이에게 쓴 방법을 당신에게 쓰면 되는 거겠죠.”

“틀림없이 그 아이의 스승이 무슨 수를 쓴 거겠지.”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이지?”

윤태희가 얼굴에 쓰고 있던 탈을 완전히 벗었다.

“궁금해요?”

무표정한 맨얼굴을 드러낸 윤태희가 말을 덧붙였다.

“제 목패를 돌려주세요. 그럼 알려 드릴게요.”

반듯하던 수향의 미간에 천천히 주름이 잡혔다.

“…….”

잠시 말이 없던 수향이 천천히 눈을 치켜떴다.

“지금 나와 흥정을 하자는 것이냐?”

“흥정이라기보단 협상에 가깝죠.”

태연하게 대꾸한 윤태희가 벗은 탈을 휙 던지며 말을 이었다.

“방상시의 탈을 내놓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목패인데 고민할 게 뭐 있습니까? 내가 지금 바로 목패를 되찾는다고 해도 당장에 뭘 할 수는 없다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이곳에서 윤태희 혼자 혈혈단신이었으며, 금기를 어긴 대가로 신체 또한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목패를 돌려받는다고 해도 당장에 수향을 대적할 방법이 생겨나는 건 아니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그렇게까지 목패에 집착하는 것이냐?”

“그야…….”

입술을 달싹이려던 윤태희가 말을 멈췄다. 금기를 깨고 나례청을 돌파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으나, 이렇게 청장과 마주한 이상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야 내 이름이니까요.”

말을 마친 윤태희는 청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뜬 순간, 윤태희는 청장의 친위대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흰 가면을 쓴 수십 명의 초인이 나타나 윤태희를 둥글게 포위한 채 검을 겨누고 있었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

목을 겨눈 수많은 칼날들. 이것이 청장의 답변이었다.

“아무래도 협상 결렬인가 보네요.”

윤태희는 힐끗,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아쉽네요. 이렇게 절절한 제 진정성을 몰라주시고.”

청장이 비식 웃으며 가볍게 혀를 찼다.

“난 놈이기는 난 놈이구나, 늙은이를 홀리려는 것을 보니.”

“역시 산 세월이 있으셔서 그런지 현명하시네요.”

청장은 오랜 세월 동안 함께 한 석주련조차 믿지 않았던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어떠한 담보도 없이 불확실한 약속을 덥석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윤태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냐하면 윤태희는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수향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정말로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수향은 끝내 윤태희를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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