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320)화 (320/348)

#320

고요한 숲속에 여섯의 인영과 단 하나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면사를 쓴 영귀들과 이매탈을 쓴 단주였다. 패현은 고개를 돌려 단주를 바라보았다. 탈 속으로 언뜻 보이는 눈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스스스…….

한차례 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벽사단은 방상시를 수호하라.”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가자.”

운명이 격투하는 밤이 시작되었다.

***

강이빈은 음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늦은 저녁이었다. 강이빈은 본청에서 멀지 않은 어느 카페에 앉아 있었다. 멍하니 턱을 괸 채 빨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길을 오가는 행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모처럼 있는 휴무였다. 쉬는 날이었음에도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요즘 사무실 분위기가 좋지 않은 탓이었다.

“…….”

창밖을 바라보던 강이빈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숙였다.

며칠이 넘도록 재겸과 윤 수석은 연락두절된 상태로 본청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재겸이야 지금까지 몇 번 전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윤 수석은 이렇게 무책임하게 자리를 비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느슨한 것처럼 보여도 자기관리가 철저했고, 제 몫을 칼같이 해냈다.

섬에 갔다가 크게 다쳐서 돌아온 일이 얼마 전의 일이다. 그 사고로 윤태희는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팀원들에게 윤태희의 공백은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다.

“무슨 일 생기신 거 아니야?”

“혹시, 또 저번처럼…….”

팀원들은 지난 며칠간 전전긍긍하며 윤 수석의 연락을 기다렸다. 수십 통이 넘게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결국, 불안감에 시달리던 제1팀 팀원들은 어제 석주련을 찾았다. 연락이 되지 않는 윤 수석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석주련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그 녀석은 앞으로 나오지 않을 거야.”

“…네?”

강이빈이 멍하니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얼마 전에 그만두겠다고 하더군.”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팀원들은 하나 같이 믿을 수 없다는 눈이었다. 지금껏 어떤 내색도 없었다. 농담도 주고받고, 허물없이 지냈으나 윤 수석에게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강이빈은 새삼 윤 수석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팀원들은 부정했다. 비록 그만두겠다고 말을 흘렸다고는 하더라도, 이렇게 하루아침에 말도 없이 무단으로 퇴사를 할 정도로 무책임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석주련은 윤태희가 떠난 것에 대해서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다.

“그럼, 왜 붙잡지 않으셨어요?”

강이빈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반려하셨어야죠, 저희한테는 말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내가 왜 붙잡아야 하지?”

“…네?”

“그 녀석 한 명 없다고 나례청이 망하기라도 할 것 같은가 보지?”

석주련은 이대로 윤 수석이 나오지 않는다면 퇴직 처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게 끝이었다. 제1팀 팀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무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석주련은 말도 없이 떠난 윤태희가 돌아오길 바라는 것 같지도 않고, 아쉬워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강이빈은 그런 석주련을 보면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실망감과 분노를 느꼈다. 윤 수석이 얼마나 노력하고 헌신해 왔는지 알고 있으면서, 부하직원을 손쉽게 놔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돌이켜보니 이런 감정은 전에도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잡힌 놈은 내버려 두고, 남은 놈들이라도 나와.’

예움아트센터에서 있던 일 이후로, 강이빈은 심적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 일을 계기로, 나자로서 활력이 넘치던 삶을 살던 강이빈은 어느 순간부터 재미 없는 문제집을 푸는 것처럼 조금씩 고요해졌다. 그런 마당에 윤 수석이 말도 없이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례청은 윤 수석을 버린 걸까. 어쩌면 저번처럼, 어디론가 넘겨버린 게 아닐까…….

지난 몇 년간 나례청의 일원인 것에 자부심을 가지며 살았다.

그러나 강이빈은 요근래 처음으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윤 수석이 없는 팀이라면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그건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로 만난 사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었다. 나자가 아닌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강이빈이 다시 한숨을 쉴 때였다.

그때, 통으로 된 유리창 바깥으로 무언가 쓱 지나갔다. 강이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오늘 무슨 날인가…….”

조금 전, 거리에서 잡귀 무리가 우르르 지나갔다. 오늘로 벌써 네 번째였다.

예전 같았으면 업무 중이 아니더라도 눈에 보이는 대로 당장 따라 나가서 잡귀를 내쫓거나 치워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보내는 일이 늘었다.

종로 거리 일대에는 정결한 힘이 있어 귀신에게는 매우 삼엄한 기분을 주는 곳이었다. 이 바닥에서는 치안이 매우 좋은 곳이어서, 비유하자면 경찰서 앞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그러니 기가 약한 잡귀나 객귀들은 지하나 건물 안에 숨어 있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저렇게 떼를 지어서 종로 일대를 활보하듯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자꾸만 눈에 띄었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으나, 강이빈의 생각은 미처 거기까지 가닿지 못했다.

강이빈은 한숨을 쉬며 바깥으로 나왔다. 주말의 늦은 밤이었다. 회사와 빌딩이 많은 종로 거리는 평일에는 북적거리지만, 주말이 되면 사람이 비어 비교적 한산했다. 말없이 거리를 터덜터덜 걷던 강이빈이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어둠에 잠긴 북악산 자락이 보였다.

그런데, 북악산 자락에 푸른 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라?”

강이빈은 눈을 비볐다. 봉수대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푸른 불꽃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봉화를 피워 올린 것 같았다. 몇 년이 넘도록 이곳에 살면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오래 전 과거에는 산마다 봉화를 올리는 봉수대가 있었다. 변란이 일어나거나 문제가 있을 때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쓰였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기념물로만 남게 된 지 오래였다.

“뭐, 뭐야, 저거.”

강이빈은 당황했다. 틀림없이 푸른 불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갈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례청에 보고를 해야겠다는 직감이 섰다. 휴무라 호출기는 가지고 나오지 않아서, 아까 영화를 보느라 잠시 꺼두었던 휴대전화의 전원을 켰을 때였다. 몇 시간 사이에 엄청난 숫자의 부재중 전화가 걸려와 있었다. 팀원들에게서 온 전화였다. 강이빈의 낯이 덜컥 굳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엄습할 때였다.

맞은편에서 잡귀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걸로 벌써 다섯 번째였다. 강이빈이 멈칫하며 곁을 지나친 잡귀들을 바라보았다. 아까 보았던 잡귀들이었다. 잡귀들은 양팔을 벌린 채 폴짝폴짝 뛰면서, 마치 어디선가 배워온 노랫말을 흥얼대듯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례청이 무너진다네!”

“나례청도 끝장이라네!”

“나례청이 무너진다네!”

“나례청도 끝장이라네!”

……어?

강이빈은 이상한 공포를 느꼈다. 저도 모르게 본청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다행히 멀지 않은 위치였다. 종묘 광장과 공원을 지나 본청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저 멀리, 굳게 닫힌 종묘의 문이 보였다.

서원이나 향교, 사당 등 삼문三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종묘의 외대문 또한 세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문을 셋으로 나누어 놓은 것은 신의 출입과 사람의 출입을 구분하기 위함이다. 삼문의 중앙, 가운데 문은 혼령이 드나드는 신문(神門)이라고 하여 산 자는 쓰지 않으며 항상 닫아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람은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예에 따라 들어갈 때는 오른쪽, 나올 때는 왼쪽으로 출입해야 하며, 이는 나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평소라면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정중앙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뭐지?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이빈은 숨을 덜컥 들이켜며 재빨리 종묘 내부로 들어갔다. 서둘러 열려 있던 문을 닫았다. 낡고 육중한 소리가 났다. 대체 왜 문이 열려 있던 거지……? 혹시 그사이에 뭐가 들어온 게 아닐까…… 그러나 이곳은 조선 왕가의 사당이었다. 종묘는 산 자의 공간이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한 신성한 공간이었다. 삿된 것이 함부로 발을 디딜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강이빈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잔잔한 연못이,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오두막처럼 생긴 매표소가 보였다. 정면에는 어둠이 있었고, 돌로 된 길이 곧게 뻗어 있었다. 박석을 깔아 만든 돌길은 3개의 길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길 위에는 작은 팻말이 놓여 있었다.

<이곳의 가운데 길은 신로(神路)입니다. 보행을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삼도三道라고 하여, 정중앙의 길은 신도(神道)로서 신이 지나다니는 길이라고 했다. 나자들이 종묘에 출입하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 중 하나가 있었으니 이 길을 보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강이빈의 시선이 신로 끝에 닿았다. 그런데, 어둠 속 길 위에는 누군가 서 있었다.

강이빈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적색 두루마기를 입은 뒷모습이 보였다. 강이빈이 목소리를 내자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일그러진 이매탈. 그리고 한 손에 든 검.

“……윤 수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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