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
“묘정이 나를 많이 사랑해줬어…….”
재겸은 푸른 하늘 아래에서 한참을 울었다.
내가 묘정을 사랑했듯이 묘정도 나를 사랑했구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감각. 그 감각을 알아차린 순간, 막막한 환희와 서글픔이 몰려왔다. 재겸은 문득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럼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저를 사랑해 주었던 묘정이 그리워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재겸은 무릎을 감싸안은 팔에 이마를 뭉갰다.
“묘정이 보고 싶어.”
처음엔 묘정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다. 모든 게 제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죄책감과 죄의식, 스스로를 향한 분노와 증오가 홍수처럼 범람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비가 그치고 찾아온 것은 눈부신 하늘과 햇살 같은 그리움이었다.
“딱 한 번만이라도 좋아. 묘정을 다시 만나고 싶어.”
“흠, 그건 아무리 나라도 해줄 수 없는 일이야.”
알고 있었다.
묘정은 돌아오지 않는다. 영영, 다시는 만날 수 없다.
재겸은 한때 저와 묘정 사이에 무언가 끈이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묘정은 가족을 이루고 싶어했다. 묘정이 꿈꾼 그 ‘가족’속에는 재겸이 있었다. 저와 마찬가지로 묘정 또한 끈을 가지고 싶어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기쁘고, 슬펐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묘정이 보고 싶어…….”
한편으로는 끝내 진실을 알려주지 않고 떠난 묘정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한때 묘정은 자신의 전부였고, 세계 그 자체였다. 자신이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제물로 바쳐져서 재앙신의 그릇이 되었고, 살아서는 안 될 존재였다는 것쯤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나는 묘정만 있으면 됐는데.”
얼굴도 모르는 부모에게 버려졌다는 사실보다, 제 안에 재앙신이 있다는 사실보다도, 묘정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는 것이 더 아프고 슬픈 일이라는 걸 묘정은 정말 몰랐던 걸까?
묘정이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고, 자신이 죽는 날 재앙신을 품고 있는 저를 함께 데려가겠다고, 함께 이 땅을 떠나자고 말했더라면. 재겸은 아마도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는 묘정만 있었으면, 묘정만 있었더라면…….”
“오히려 그래서 그런 거였을지도 모르지.”
그때, 소년이 기지개를 켜며 건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묘정 자기가 네 전부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랬던 걸지도 몰라.”
그 말대로 묘정은 재겸이 죽음까지 따라오리라는 사실을 알기에, 이 저주받은 삶과 운명을 졸졸 쫓아올 아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떠난 것인지도 몰랐다. 묘정이 없었더라면 재겸은 혼자서 살아갈 마음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헤어짐은 재겸의 세계를 파괴시켰다.
“그래도… 이렇게 남겨져서 사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그렇다면 묘정은 대체 나를 남겨둠으로써 무엇을 바랐는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그렇게 떠나버리면 나는 뭐가 돼……”
묘정은, 내가 그 모든 걸 극복하고 이겨내리라고 생각했던 걸까?
“내 손으로 묘정을 죽였어…… 그런데도 묘정은 내가 그 모든 일을 다 훌훌 털어버리고, 혼자 잘 먹고 잘살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야?……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재겸이 눈을 질끈 감으며 양쪽 귀를 붙잡을 때였다.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르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묘정이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영영 알 수 없을 거야.”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며 장난을 치면서, 소년이 덧붙였다.
“근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뭐?”
“그냥, 묘정은 네가 계속 살아가길 바랐나보지.”
재겸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은 자기가 언제 죽을지 알고 있었어. 반대로 너는 네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어쨌든 그 녀석은 네가 본인하고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란 거겠지. 그 녀석은 평생을 무기력하게 살았어. 주어진 시간은 짧고, 바꿀 수 있는 건 없으니까. 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잖어.”
소년의 말에, 재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겸아. 네 삶의 주인은…….’
이제까지 이 삶의 주인은 묘정이었다.
묘정은 언제나 본인 몫의 밥을 덜어 주었다. 뒷짐을 지고, 걸음이 느린 저를 기다려 주었다. 시린 냉골 같던 유년에 온기를 주었다. 그리하여 긴 세월을 지나 재겸은 이곳에 있었다.
묘정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의 말대로 중요한 것은, 묘정은 자신의 생기를 나눠주면서까지 재겸을 이 땅에 붙들어 놓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재겸이 멍하니 말을 곱씹었다.
“계속 살아가는 것…….”
재겸은 고개를 들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주 받은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형벌과도 같은 삶이라도 생각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긋지긋한 삶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삶이었다. 재겸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살지?> 그러나 왜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사실 누구보다도 살고 싶은 사람이다. 재겸은 언제나 간절했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살아야 할 이유가 필요했었다.
“그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재겸은 마침내 그 이유를 찾아냈다.
“이제부터 내 삶의 주인은 태희야.”
재겸은 결심했다. 묘정이 남겨준 이 생애를 윤태희에게 주겠다. 묘정에게 용서를 빌듯이, 묘정의 사랑에 보답하듯이, 묘정이 나를 사랑해 주었듯이, 윤태희를 위해 살아가겠노라고.
“묘정은 나를 구해줬어. 그렇다면 나는 태희를 구해줄 거야.”
재겸이 찾아낸 삶의 이유, 그것은 바로 ‘속죄’였다.
묘정이 남긴 것은 저와 태희. 그렇다면 그 애가 죽는 날까지, 그 애를 곁에서 지켜줄 것이다. 그 애에게 이 삶을 줄 것이다. 묘정에게 받은 사랑을 그 애에게 돌려주어야만 한다.
“앞으로는 태희를 위해 살 거야.”
재겸은 축축한 눈가를 험하게 문질러 닦았다.
“그 애가 하고 싶다는 건 내가 다 해줄 거야. 그 애의 이름을 되찾아 줄 거고, 그 애를 위해 길을 낼 거고, 그 애를 자유롭게 만들어 줄 거야…….”
그러니까 나는
“돌아갈 거야.”
태희의 곁으로…….
“그게 네가 살기로 한 이유냐?”
그러자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응.” 재겸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잠시 놀란 듯했던 소년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소년이 재밌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은 실망한 것 같기도 했고, 왠지 재겸을 비웃는 것 같기도 했으나, 이내 상관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무튼 시시하구나, 네 인생도…….”
윤태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윤태희는 재겸이 죽지 않기를 바랐다. 불로불사의 저주를 끊고 자신과 함께 살아가자고, 앞날을 약속해 주기를 원했다. 그럼 그렇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애가 원하는 것이므로.
“나는 너를 떼어내고, 태희와 함께 살아갈 거야.”
줄곧 심드렁하게 이야기를 듣던 소년의 표정이 일변했다.
“나를 떼어낼 거라고?”
“그래.”
“왜?”
“태희가 그걸 원하니까.”
그때, 소년이 갑자기 배를 잡고 웃었다.
“정말로 네가 나를 떼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묘정도 못한 일이야. 그런데 네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게다가 너 말이야.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나 본데. 내가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우리는 이미 점점 하나가 되어가고 있어.”
말을 멈춘 소년이 재겸의 양 뺨을 감싸 쥐고, 확 잡아 올리며 말했다.
“그 이후에 네 삶은 없다고. 알아듣겠냐? 너는 내가 없으면 안 돼. 게다가 너 혼자서 본향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태희 그 애는 이미 본향의 수중에 있어.”
“…뭐?”
“너 혼자 본향의 손아귀에서 태희를 빼 올 수 있을까?
”그,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재겸이 낯을 굳히며 소년을 올려다볼 때였다.
“나와 함께 가자.”
“함께 가다니… 어디를?”
코를 찌그러트리며 웃던 소년이 대답 대신에 손을 내밀었다. 재겸이 얼떨떨하게 소년의 손을 맞잡을 때였다. 강한 힘이 재겸의 손목을 확 끌어당겼다.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의 <운명>을 쳐부수어 주마.”
끌어당기는 힘에 이끌려 재겸이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침대가 출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아찔한 추락감에 놀란 재겸은 숨을 헉, 들이켜며 상체를 세웠다.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재겸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 있었다.
정신을 놓기 전까지만 해도 벽사단의 누각에 있었다. 그날 이후로 며칠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재겸은 현재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불 꺼진 어두운 방 안, 이불과 베개에서 윤태희의 향기가 났다. 이전에 몇 번 와본 적이 있는 곳이다. 윤태희의 방이었다.
“태희야.”
이곳이 윤태희의 집이라는 걸 알아차린 재겸이 목소리를 냈다.
“태희야!”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윤태희가 데려다 놓은 걸까?
당황하여 주변을 살펴보던 재겸은 헐레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와 보았으나, 어디에도 윤태희는 보이지 않았고, 집안의 모든 불이 꺼져 있어서 시야가 어두웠다.
우선은 불을 켜기 위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눌렀다. 그런데 아무리 스위치를 딸깍거려도 불이 켜지질 않았다. 정전인 건가? 당황한 재겸이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였다.
그때, 어디선가 지지직 하는 소리가 났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책꽂이 근처로 다가갔을 때였다. 알 수 없는 소음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전 속에서 건전지로 작동하는 라디오만은 살아 있었다. 이리저리 라디오를 매만지던 재겸이 멈칫하며 귀를 기울였다.
— 긴급 속보입니다…… 오늘 자정 종로구 일대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와 대규모 정전이 일어나…… 현재 소방당국에서 원인을 파악 중에 있으며…… 근처에 계신 시민 여러분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재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설마…….”
재겸은 황급히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통유리창 너머로 새까맣고 너른 밤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저 멀리, 커다란 불이 번지고 있었다. 나례청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 바보 같은 게, 등신 같은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