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93)화 (293/348)

#293

휘림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타난 일로 자선원은 오전 내내 시끄러웠고, 그 소란은 반나절이 지난 후에야 잠잠해졌다.

묘정은 수향에게 가서 휘림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정말이야? 휘림이 돌아왔다고?”

수향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수향은 휘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휘림은 자존심이 강하고 지는 것을 싫어하여 무언가를 한 번 결정하면 번복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휘림이 제 발로 돌아온 것이다.

묘정의 뒤를 따라서 곧장 휘림에게 향했을 때였다. 휘림을 발견한 순간, 반가움에 젖어 있던 수향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너, 머리가…….”

휘림의 짧은 머리를 본 수향은 깜짝 놀랐다.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니?”

수향이 덜컥하여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데 머리가 왜 그래?”

“내 스스로 잘랐어.”

“스스로 잘랐다고? 어째서?”

“그냥, 갑갑해서.”

수향은 저도 모르게 낯을 굳혔다.

“…….”

휘림은 안 그래도 자선원 안에서 유별난 취급을 받았고, 특히 또래들 사이에서는 눈엣가시였다. 무리에서 겉도는 건 물론이고 툭하면 시비에 휘말리는 탓에 다툼도 끊이질 않았다. 정돈된 길에 돌부리가 튀어나와 있다면 걷어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말? 갑갑해서? 고작 그 이유뿐이야?”

문득 수향은 형용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뭐가 그렇게 갑갑하고 불만인 건데?”

자선원을 떠나 있던 며칠 사이에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휘림이 제발로 돌아왔다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일선에서 타협하게 되었거나 비로소 욕심을 내려놓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수향은 자신의 예상이 틀렸음을 알았다.

휘림은 기어코 지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휘림, 너는 대체 뭘 바라는 거야?”

날 선 반응에, 휘림이 멈칫할 때였다.

“세상에는 정도(正道)라는 게 있어.”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어렵고 험한 길을 자처할 필요는 없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건 당연하듯이,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야.”

수향이 차분히 한숨을 쉬었다.

“이건 너를 아끼는 벗으로서 하는 말이야.”

“너는 정해진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게 괴롭지 않아?”

“응, 나는 괴롭지 않아.”

“어째서?”

“나는 너랑 달라. 너처럼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까. 네가 괴로운 이유는 너무 많은 걸 바라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욕심을 버려.”

수향의 충고에, 휘림이 천천히 인상을 썼다.

“너야말로 솔직해지지 그래?”

“뭐?”

“너는 욕심이 없는 게 아니야.”

휘림이 또렷한 눈으로 수향을 응시했다.

“네가 욕심을 내지 않는 건, 반대로 누구보다도 욕심이 많아서 그런 거야. 왜냐하면 욕심내봤자 어차피 가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원한다는 생각조차 안 하려는 거야.”

수향의 낯에서 차츰 표정이 사라졌다.

“…….”

수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혀 서 있을 뿐이었다.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수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휘림이 어느 순간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휘림은 우두커니 서 있는 수향을 뒤로한 채 문이 있는 곳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묘정은 곤혹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멀어져 가는 휘림과 멈춰 서 있는 수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묘정은 이내 휘림의 뒤를 쫓았다.

휘림이 향한 곳은 냇가였다.

휘림은 냇가로 오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묘정은 휘림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줄곧 눈치를 살폈다. 사소한 언쟁 이후로 휘림이 심란해한다는 것을 묘정도 알 수 있었다.

휘림과 수향이 말다툼을 벌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갈이 깔린 물가 근처로 내려온 휘림은 적당히 납작한 돌멩이 하나를 골라서 손에 쥐었다. 자세를 비스듬히 낮추고 물수제비를 던지자, 돌멩이가 툭툭 튀어 오르며 멀리 날아갔다.

“너도 해 봐.”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알려줄게.”

휘림은 손수 시범을 보였다. 묘정은 어설프게 휘림의 행동을 따라했다. 처음 한두 번은 시늉에 불과하였으나 이내 금세 감을 잡았다. 고작 몇 번 연습한 끝에 휘림보다 멀리 던지게 되었다.

“봐, 맹해 보여도 넌 뭐든 잘한다니까.”

휘림이 장난스레 웃으며 묘정의 등을 툭 쳤다.

휘림이 웃음을 보이자 묘정은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휘림의 낯은 금세 어두워졌다. 풀죽은 기색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이럴 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하는지 묘정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둘은 한참을 말없이 퐁당퐁당 물수제비를 던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휘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가?]

“수향이 한 말에 대해서 말이야.”

잠시 고민하던 묘정은 조심스레 반문했다.

[너는 수향이 틀렸다고 생각해?]

“아니, 그렇진 않아.”

휘림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 애 말대로 사람 일이라는 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정해져 있는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묘정은 고개를 기울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잖아.”

세상일이 전부 정해져 있다는 게 어째서 슬픈 일이 되는지 묘정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머지않아 금세 납득할 수 있었다. 휘림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괘가 나왔을 때 묘정은 너무나도 슬펐다.

처음부터 잘못된 점괘를 낸 것인지 아니면 점괘가 틀리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점괘로 예견한 결과를 뒤엎고 휘림은 돌아왔으며, 이렇게 곁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 맞아. 슬픈 일이야.]

묘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휘림이 조용히 덧붙였다.

“수향의 말도 일리는 있어. 아무리 용을 써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나 굴레 같은 게 있다면, 그 흐름에 맡기고 살아가는 게 현명한 거겠지. 근데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되는가 봐.”

휘림은 휑한 목덜미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아무렴 아버지를 닮은 걸까.”

[아버지?]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비밀이야.”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된다는 당부와 함께, 휘림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는 예전에 민란에 가담한 적이 있다고 했어.”

휘림의 부친은 한때 제법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세상을 바꾸고자 했고, 그것이 민란에 가담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란은 당연히 실패했다. 민란에 가담한 대다수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으나 휘림의 부친은 용케 살아남아서 목숨을 부지했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멀리 도망쳐 평생을 산속에 숨어 살았다.

부친의 과거를 알게 된 휘림은 제 아비가 조금만 더 일찍 어머니를 만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친은 무녀였으므로, 앞날을 훤히 읽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으레 무당이라면 그러하듯이 조만간 큰 화를 입는다거나 우환이 든다거나 하는 식의, 커다란 흐름 정도는 내다보는 인간이었다. 때문에 민란이 실패하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부친이 덧붙인 말은 뜻밖이었다.

안 그래도 거사를 앞두고 있던 무렵에 우연한 계기로 앞날을 볼 수 있다는 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용하다는 스님을 붙잡고 물었다.

‘제가 현재 도모하고 있는 이 일이 원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그의 질문에,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허사일 것입니다. 당신은 큰 화를 입을 것이며 자칫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팔자는 몹시 사나워 일평생 노력한다고 하여도 얻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작은 복록 정도가 최선일 것입니다. 만일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면 필시 패가망신하여 고꾸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스님이 말한 대로였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신분도 재산도 전부 다 버린 채로 평생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꼭꼭 숨어 살아야만 하는 비참한 결말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앞날이 이상과 다르며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덩이를 향해서 스스로 몸을 내던진 셈이다.

휘림은 궁금했다.

그 끝이 헛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예정된 불구덩이로 걸어 들어가기를 멈추지 않는 마음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왜 잘못될 걸 알면서도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한 거야?’

부친은 빙그레 웃었다.

‘글쎄다, 내가 그런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겠지….’

조금은 쓸쓸하게 들리는 대답과 함께, 그는 휘림에게 물었다.

모든 게 정해져 있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주어진 것’이 되고,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만들어낸 것’이 된다. 주어진 대로 받들고 따르는 삶을 살 테냐, 아니면 스스로 일구어내는 삶을 살 테냐?

말을 멈춘 휘림은 얼마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고,

“너는 어느 쪽으로 하겠어?”

이내 묘정을 돌아보며 물었다.

묘정은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주어진 대로 받들고 따르는 삶과 스스로 일구어내고 만들어가는 삶 중에서 어떤 삶을 선택하겠냐는 물음은 묘정의 귀에는 아주 이상하게 들리는 질문이었다.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고를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묘정에게는 여태껏 한 번도 선택지가 주어진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묘정의 운명은 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묘정은 자신의 앞날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장차 방상시가 된다.

그리고 멀지 않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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