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윤태희의 입안에서 터진 피를 빨아먹은 재겸이 퉤, 침을 뱉으며 방을 나갔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윤태희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던 윤태희가 손을 들었다. 입가를 슥 훔치자, 손등에 피가 묻어 나왔다.
“…….”
윤태희는 손등에 묻은 피를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별안간 꿈을 꾼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분명 재겸의 말과 행동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놓쳐 버리고 말았다.
과부하에 걸려 잠시 멈췄던 사고가 둔중하게 움직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윤태희는 서둘러 재겸을 뒤쫓아 나갔다. 복도로 나오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재겸의 등이 보였다.
“재겸아.”
윤태희는 멀어져 가는 재겸을 불러 세웠다. 그러나 재겸은 들은 척도 않고 성큼성큼 멀어지고 있었다. 윤태희는 하는 수 없이 큰 보폭으로 걸어가 재겸의 뒤를 따라 잡았다.
“재겸아.”
윤태희는 재차 목소리를 내며 재겸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에 어깨가 닿기가 무섭게 윤태희의 손길을 싸늘하게 쳐낸 재겸은, 윤태희에게 시선 한 톨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손 대지 마.”
“겸아.”
그 순간,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것이 울컥 치솟았다. 재겸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윤태희를 돌아보았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
여태껏 저를 그렇게 부른 사람은 묘정과 윤태희, 오직 둘 뿐이다. 두 사람은 제 마음을 배신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었다는 점 말고도 이런 부분까지 닮아 있었다.
“너 같은 새끼 꼴도 보기 싫어.”
그렇게 말하는 재겸의 눈동자는 서릿발처럼 싸늘했다.
“따라오지 마. 따라오면 다시는 너 안 봐.”
재겸은 윤태희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윤태희도 알 수 있었다. 재겸은 진심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윤태희가 묘정만큼이나, 아니 묘정보다도 미웠다. 애초에 변명하고 사과할 기회를 걷어찬 건 윤태희였다. 윤태희를 노려보고 있던 재겸이 등을 돌렸다.
“.......”
그에 윤태희는 다시금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으나, 이내 뭔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재겸에게 가닿지 못했다. 그렇게 윤태희는 끝내 재겸을 붙잡지 못했다. 원망과 증오라도 상관 없으니 네 마음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그래서 애초에 기대도 후회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윤태희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윤태희는 재겸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 그대로 못박혀 재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재겸이 복도에서 완전히 빠져나가자, 한동안 홀로 복도에 남아 있던 윤태희는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렇게 윤태희는 얼마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재겸이 제 곁에 남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더 가까워지기는커녕 그대로 서로를 지나쳐, 외려 양극단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불현듯, 이대로 놓쳤다가 재겸이 어디론가 훌쩍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상상일 뿐인데도 재겸이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니 손끝이 떨리고, 속이 뒤틀리며 구역질이 올라오려고 했다. 윤태희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입술 거스러미를 만지작거리며, 불안한 걸음으로 복도를 이리저리 배회하던 윤태희가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다.
“흑제야.”
윤태희의 부름에, 흑제가 신기루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예, 부르셨습니까.”
흑제가 잠시 자리를 떠나 있었던 사이, 방 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찻잔과 다기가 깨지며 파편 조각이 발밑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엎지른 찻물로 인하여 바닥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흑제는 어지러운 방 내부를 보고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상황을 묻지도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어디 간 건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어느덧 윤태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역시나 우려했던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듯했다.
어지러운 풍경과 그 속에서 힘없이 자세를 무너트린 채 혼자 앉아 있는 윤태희의 모습은 파국을 짐작케 했다. 단주는 눈에 띄게 상심한 기색이었다. 흑제는 묵묵히 단주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한참만에야, 윤태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조용히 흘러나온 말에, 흑제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윤태희의 눈동자는 어둡고 음습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일견 감정이 메마른 비정한 인간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흑제는 알 수 있었다. 현재 윤태희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
흑제는 애써 난색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단주의 의중을 눈치챈 탓이다. 소년이 산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데려오라는 뜻이었다.
당장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재겸을 붙잡아 두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산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직접 따라붙을 수는 없으니, 영귀를 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윤태희는 이대로 재겸이 떠나가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단주가 필요 이상으로 소년에게 집착한다는 것을, 흑제도 알고 있었다.
흑제가 고개를 숙인 뒤,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흑제는 무언가 할 말이 남았는지, 선뜻 문간을 나서지 못하고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흑제가 천천히 몸을 돌리고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헌데, 그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묘정이라는 자에 대해서 말입니다.”
말해보라는 듯이, 윤태희가 간단히 눈짓을 했다. 아까 전 묘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재겸의 방문으로 대화가 끊겼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흑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까닭에 계속 마음에 걸렸던 참이다.
“응, 얘기 해.”
“묘정이라는 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를 만났습니다.”
잠시 말을 멈췄던 흑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묘정이라는 이름은, 선대 방상시가 쓰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이어진 흑제의 말에, 윤태희가 멍하니 되물었다.
“……뭐?”
***
어느덧 산중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누각을 빠져나온 지 한참이 지났다. 그러나 재겸은 산중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아까 전부터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평소보다 체력 소모가 빨랐고, 팔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있는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걸어도 걸어도 같은 풍경 속에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재겸은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재겸은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길을 잃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감정이 마구 널뛰고 있었고, 머릿속이 꽉 차서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누각을 나온 이후로 재겸은 휘몰아치는 감정을 삭여내며 무작정 걷기만 했다. 그렇게 같은 자리를 빙빙 맴도는 사이 날이 저물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재겸이 아는 한, 이제 남아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마지막 희망이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윤태희를 향한 배신감과 분노로 인하여 재겸은 평정심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저를 속인 윤태희가 실망스러웠고, 유일한 돌파구라고 생각했던 것은 처음부터 썩은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며, 죽음보다 앞세웠던 결심과 맹세는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아직 끝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수향이 말한 일주일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더이상 헤맬 시간이 없었다. 무엇이든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그러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재겸은 어느 때보다도 심신이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윤태희에게 속았다는 충격이 워낙에 컸기에, 당장은 바닥을 딛고 일어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도 의욕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정처없이 걷던 재겸은 어느 순간 발길을 멈췄다. 몸이 천근만근이어서, 더는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재겸은 나무 밑에 털썩 주저 앉아 등을 기댔다. 찬 기운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코를 훌쩍이던 재겸은 쪼그린 무릎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생각을 내려두고 지금은 잠시 쉬고 싶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체감상 고작 몇 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재겸은 다시 눈을 떴을 때 완전히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깜빡 잠든 사이에,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았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재겸은 당황하여 번쩍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재겸은 이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다.
아까 전에 왔었던, 벽사단의 누각이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어쩌다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눈을 감기 전까지만 해도 재겸은 분명히 산속에 있었다.
방 한쪽으로 이부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누군가 저를 일부러 데려다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정확히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무언가 수를 썼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기척을 알아챌 수 없는 거리에서 재겸을 지켜보고 있던 흑제는 재겸이 잠에 든 것을 확인하자마자 누각으로 옮겨놓은 상태였다. 재겸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까 있던 곳과는 다른, 처음 보는 방이었다. 방 안쪽에는 커다란 책꽂이 몇 개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한쪽에는 병풍이 놓여 있었고, 병풍 앞에는 처음 보는 검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당황한 얼굴로 서 있던 재겸은 곧장 문간으로 다가갔다. 일단은 이곳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아무리 힘을 주고 잡아당겨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