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윤태희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재겸은 화장실로 뛰어가 먹은 것을 전부 게워냈다.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둔 말들은 구역질의 형태로 나타났다. 먹은 것을 전부 토해냈을 때 재겸은 완전히 지쳐 있었다. 몸도 마음도 기진맥진하여 침대에 몸을 눕혔으나 잠이 오지를 않았다. 밤새워 뒤척이고, 선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어느덧 깊은 새벽이었다.
모로 누운 재겸은 가물거리는 시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윤태희는 본청에서 일하고 있을까.
“…….”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던 재겸은 어느 순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할 일이 떠올랐다. 방을 뒤적거린 끝에 하얀 종이와 연필을 하나 챙겨 들고 거실로 나갔다.
식구들이 깰까 까치발을 세우고 나온 재겸은 식탁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방에 책상이 없으니 식탁에 앉아서 쓰기로 했다. 주방의 작은 불 하나를 켜고 종이에 글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또박또박 글을 쓰다 말고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때, 어디선가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주무시고 뭐하십니까요?”
재겸이 멈칫하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발치를 내려다보니 유남생이 자다 깼는지 퉁퉁 부은 얼굴로 재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편지를 숨겨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정주와 메산이라면 몰라도, 유남생은 누가 올려주지 않는 이상 식탁에 올라오지 못한다. 그러니 내용을 들키지는 않을 것이다.
“잠이 안 와서 글씨 연습을 했어.”
“저도 옆에 있어도 되겠습니까요?”
재겸은 대답 대신 옆자리의 식탁 의자를 빼서, 그 위에 유남생을 올려주었다. 이 정도 높이라면 내용이 보이진 않을 것이다.
유남생에게 곁을 내어준 재겸은 마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다시 연필로 글씨를 적어 내려가는데 사각사각, 소리를 듣고 있던 유남생이 물었다.
“혹시 유서입니까요?”
재겸이 글씨를 쓰다 말고 우뚝 멈췄다.
“…….”
굴러들어온 돌 유남생은 뻔뻔하고, 식탐도 많고, 살짝 철딱서니가 없다. 그런데 신기한 건, 가끔은 여우인 정주보다도 눈치가 빠르다는 것이다. 유서라면 유서가 될지도 모른다.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어떻게 알았어?”
“어째서 그런 걸 쓰시는 겁니까요….”
유남생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네 말대로 원래 사는 데에는 이유가 없을지도 몰라.”
재겸은 손에 쥐고 있던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해봤는데, 난 그게 잘 안 됐어.”
“무엇이 말입니까요?”
“어떻게 해도 왜 살지? 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으니까.”
유남생은 언젠가 말했다. 삶을 살아가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럴싸한 말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겸의 경우는 달랐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오래 살았어. 원래대로라면 진작에 죽었어야 하고.”
남들의 몇 배를 살아가는 동안, 재겸의 마음은 그 세월만큼이나 풍화되어 있었다. 먼지가 내려앉고 마모된 마음을 갈고 닦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삶의 이유를 묻게 되었다. 이 질문이 남아 있는 이상 재겸은 영영 괴로울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지쳐 있었던 재겸은 이런 고통을 안고서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재겸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건 그렇습니다요.”
유남생은 작게 수긍하더니, 뭐라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 후로 유남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곁에 조용히 앉아서 재겸이 편지를 쓰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편지를 다 쓴 재겸은 종이를 챙겨 몸을 일으켰다.
“다 쓰셨습니까요?”
“그래. 가서 자라.”
재겸이 소곤소곤 말했다.
“알겠습니다요.”
“애들한텐 말하지 말고.”
“예에.”
방으로 들어온 재겸은 다 쓴 종이를 단정하게 접었다. 편지를 전해줄 날이 올 때까지 들키지 않고 잘 간직하려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보관해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재겸은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작은 서랍이 있었다. 이 서랍 속에 편지를 넣어둘 생각이었다. 옷장 앞에 쪼그려 앉아 허리를 굽히고 서랍을 열었다. 반듯하게 접은 편지를 넣으려다가, 재겸은 불현듯 멈칫하고 말았다. 서랍을 열자마자 눈에 띈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태희가 준 오르골이었다.
버리려고 했으나, 끝내 버리지 못했다.
“…….”
멍하니 오르골을 바라보던 재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재겸은 슬리퍼를 꿰어신고 그대로 집을 뛰쳐나왔다.
새까만 어둠이 걷히고, 멀리서 희미하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윤태희는 어제저녁에 재겸을 집까지 데려다준 뒤, 본청으로 출근하겠다고 했었다. 그러니 지금쯤 본청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재겸은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큰 길가로 나와 되는대로 택시를 잡아 탔다. 다행히 새벽이라 차가 막히지 않아서 금세 종묘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재겸은 정신없이 내달렸다.
재겸이 사무실에 벌컥 들이닥치자, 강이빈이 토끼 눈을 떴다.
“어! 재겸이?”
갑작스러운 등장에, 다른 팀원들 역시 하나같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한 채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겸은 한눈에 보기에도 경황이 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잠에서 깨자마자 옷을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바로 뛰쳐나온 탓에, 집에서 입고 있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모두가 정복을 입고 있는 와중에 재겸 혼자만 반바지에 반팔 티 차림이었다.
“막내 오늘 휴무잖아, 왜 왔어?”
재겸은 대답할 정신도 없이 재빨리 사무실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문이 열려 있던 수석실 안은 비어 있었고, 윤태희는 이곳에 없었다. 재겸이 황망한 얼굴을 할 때였다.
“재겸아, 왜 그래?”
무언가 큰일이 생겼다고 판단했는지, 팀원들이 심각한 얼굴로 재겸의 곁에 모여들었다. 재겸은 팀원들을 붙잡고 윤태희는 어디에 간 거냐고 고함을 치듯이 물었다.
“수석님은 아까 세 시쯤에 일찍 퇴근하셨어. 왜?”
그 말을 듣자마자 재겸은 팀원들을 물리치고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등 뒤에서 “어어, 재겸아! 어디 가!”하고 붙잡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재겸은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본청 밖으로 나온 재겸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윤태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윤태희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윤태희는 이미 두 시간 전쯤에 퇴근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연락이 안 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쩌면 저번처럼 샤워를 하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재겸은 다시 택시를 잡아 탔다.
윤태희가 사는 아파트 입구에서 내린 재겸은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허술한 슬리퍼를 신고 달리다 보니 걸음이 꼬여서 한바탕 넘어지기도 했다. 바닥에 쾅 엎어지는 바람에 턱이 깨졌다. 피가 났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윤태희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태희야!”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부서지라 두들겨 보았으나 안에서 들려오는 기척은 없었다. 문고리를 잡고 덜걱덜걱 흔들어대는데, 불현듯 머릿속에 스친 숫자가 있었다.
1333. 언젠가 흘려들었던, 도어 록 비밀번호였다.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입력하자 도어 록에서 삐리릭,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재겸은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불이 꺼져 있는 집 안은 어두웠다.
“윤태희!”
재겸은 창백한 낯으로 윤태희를 찾아 헤맸다.
집안의 모든 불을 켜고 온 방을 뒤졌다. 욕실도 열어보았고, 침실에도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윤태희는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여전히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어디 간 거지?
순간,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수향이 그새 무언가 손이라도 쓴 걸까?
수향은 일주일의 시간을 주었다. 재겸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입장이었고, 수향은 그걸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적어도 그 시간 동안만큼은 수향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태평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윤태희가 사라졌다.
본청에도 없고, 집에도 없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 필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어쩌면 그새 수향이 마음을 바꾸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예 방향을 틀어 윤태희를 인질로 붙잡아 놓고 선택을 종용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일주일의 시간을 주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 제 잘못이었다. 수향은 뱀처럼 교활하고 간사한 인간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안개처럼 희뿌옇던 불길한 예감은 어느덧 뚜렷하고 선명한 확신이 되어 재겸의 목을 조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재겸이 털썩 주저앉으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공포와 불안감이 마구 뒤엉켜 머릿속이 마비되었는지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마침내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올랐다.
재겸의 눈동자에는 어느덧 섬뜩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결국 수향은 약속을 어긴 것이다. 만약 윤태희에게 손을 댔다면, 절대로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정주와 메산이에게 호문을 열고 피신해 있으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수향에게 찾아갈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재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킬 때였다.
현관에서 삐리릭,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너….”
우두커니 서 있던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현관으로 시선을 던지자, 센서 등 불빛을 받으며 굳어 있는 윤태희가 보였다. 윤태희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디 갔다가 와?”
멍하니 상황을 파악하던 윤태희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뭐?”
“어디 갔다가 오냐고.”
“나 운동하고 왔는데….”
그 말대로 윤태희는 검은 티셔츠에 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샤워까지 하고 온 것인지 축축한 샴푸 냄새가 났다. 이 아파트에는 입주민이 이용할 수 있는 전용 피트니스 시설이 있었다.
“전화는 왜 안 받아?”
“휴대폰 집에 놓고 갔었어.”
“전원은 왜 꺼 놨는데.”
“배터리가 다 됐나 봐.”
그때, 재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윤태희가 다가왔다.
“너… 얼굴이 왜 이래?
재겸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턱이 깨져서 피가 나고 있었고, 달리다가 넘어지면서 무릎에도 상처가 생겨 있었다. 내내 맨발로 달려오느라 상처가 잔뜩 나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윤태희가 낯을 굳히며 재겸의 팔을 잡을 때였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이래?”
재겸이 이를 악물고 윤태희 손을 탁, 쳐냈다.
“건드리지 마.”
“무슨 일이야?”
“없었어. 아무 일도. 그러니까 놔.”
그러나 윤태희는 어김없이 재겸의 팔을 붙잡아 왔다.
“재겸아.”
“놔.”
“왜 그러는 건데?”
“놓으라고.”
재겸의 가슴팍이 마구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윤태희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줘도 윤태희는 재겸의 손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놔, 놓으란 말이야, 이 씨발새끼야!”
재겸이 몸을 뒤채며 강한 힘으로 윤태희의 손을 뿌리쳤다.
“진정해!”
그러나 윤태희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며 한바탕 몸싸움을 벌어졌다. 손길을 뿌리치고 거세게 밀치던 재겸은 감정이 격양된 나머지 손을 휘둘러 윤태희의 뺨을 후려쳤다. 불시에 따귀를 맞은 윤태희가 휘청이며 뒤로 물러설 때였다.
재겸이 씩씩거리며 윤태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왜, 너는 왜 놓으라고 해도! 놓으라고 해도 놓질 않는 거야! 왜!”
재겸이 윤태희의 멱살을 잡아 쥐고 그대로 벽 쪽으로 밀쳤다. 재겸의 힘에 떠밀린 윤태희는 소파 팔걸이에 다리가 걸리고 말았다. 우당탕, 중심을 잃은 윤태희가 소파 위에 털썩 넘어졌다. 재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윤태희에게 올라타더니 멱살을 잡아 쥐었다.
재겸에게 얻어맞는 것은 한두 번도 아니라, 윤태희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매서운 주먹이 날아들었어야 할 뺨에, 어느 순간 조심스럽게 와닿는 온기가 있었다. 그에 윤태희가 멈칫하며 감았던 눈을 뜰 때였다. 윤태희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재겸이 울고 있었다.
“너, 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윤태희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뺨에 와닿은 손바닥은 열감이 남아 있어서 뜨거웠다. 윤태희의 뺨에 가만히 손바닥을 갖다 대고 있던 재겸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울었다. 턱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고,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미안해.”
재겸이 양손으로 윤태희의 뺨을 감싸 쥐며 말했다.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윤태희는 말을 잃고 재겸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
씩씩거리던 재겸은 윤태희의 가슴팍을 움켜쥐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았다. 손아귀에 잡힌 옷자락이 험하게 구겨졌다. 재겸은 우느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사실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태희야. 내가, 내가 네 10년을 망쳤어.”
전부 다 내 잘못이라고, 내가 모든 걸 망쳤다고 말하고 싶었다.
“버리려고 했는데. 오르골 버리려고 했는데, 못 버렸어.”
하지만 그 전에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미안해. 널 좋아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재겸이 울음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