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70)화 (270/348)

#270

걸음을 멈춘 채 멍하니 서 있던 재겸이 입술을 달싹였다.

“윤태희.”

그러자 의자 등받이에 등을 푹 기대어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던 윤태희가 고개를 들었다. 재겸을 발견하고서는 작게 멈칫하더니 기댔던 등을 세웠다.

“…….”

얼마간 말없이 재겸을 바라보고 있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설핏 인상을 썼다.

“비 맞았니?”

재겸은 아무 말 없이 윤태희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자정이 지난 병원 복도는 조용했다. 윤태희가 훌쩍 몸을 일으켰다. 우두커니 서 있는 재겸에게로 다가온 윤태희가 물었다.

“어디 갔다가 오는 거야? 전화 안 받던데.”

그건 재겸이 할 말이었다. 재겸은 품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몇 분 간격으로 윤태희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시간을 보니, 본청을 나와서 병원에 걸어오고 있을 때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었다. 수향과 재회한 여파로 정신이 없어서 전화가 왔었는지도 몰랐다.

“…….”

재겸은 눈앞에 서 있는 윤태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다행히 다친 데 없이 멀쩡해 보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다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차분하고 엄숙해 보였고, 한편으로는 어딘지 묘하게 음울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때, 윤태희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재겸과 눈높이를 맞췄다.

“왜 그래?”

윤태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재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재겸은 형용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비에 푹 젖은 탓일까? 마치 어항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자꾸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속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곱씹어도 끝내 소화하지 못한 진실들이 목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입을 열면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할 것 같았다.

분명 할 말이 많은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례청장을 만났다는 것, 청장의 정체는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수향이었다는 것, 조영우를 꾀어내 곁에 두고 있었다는 것, 수향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고로 우리의 계획은 실패했다는 것, 수향으로부터 죽여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네가 아니냐.’

네가 어쩌면 벽사단의 주인일지도 모른다는 것.

“…….”

재겸은 입술을 위아래로 꾹 겹쳐 물었다. 수향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뇌리를 맴돌고 있었다. 줄곧 떨쳐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뱀처럼 간사하고 교활한 목소리는 떠나질 않았다.

‘너는 그 아이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느냐?’

아까 전, 수향은 말했다.

‘돌이켜 보면 요즘처럼 소란스러운 때가 또 있었나 싶어. 나례청은 철옹성이나 다름없었거든. 나례청 안팎으로 역적이 동시에 나타났으니, 참으로 공교롭구나.’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포석을 두는가 싶었다. 그와 별개로 수향이 윤태희를 함부로 입에 담는 게 불쾌하기만 했다.

‘혹시 말이다. 어쩌면 전부 태희 그 아이가 꾸민 짓은 아닐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데, 뒤이어 흘러나온 말은 정말이지 난데없는 이야기였다.

‘왜인지, 그 아이가 벽사단을 이끌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말이야.’

황당할 정도로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 재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때로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는 것도 식견을 넓히는 데 좋은 방법이지. 하여, 만약 내가 태희 그 아이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단다.’

잠시 말을 멈췄던 수향이 눈을 접으며 비밀스레 속삭였다.

‘너는 아주 탐나는 인간이 아니냐. 죽지도 늙지도 않으며,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너를 통해서라면 세상 못 할 일이 없지. 내가 그 아이였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너를 붙잡아 둘 것이다. 이용할 가치가 무궁무진한데 순순히 놓아줄 수야 없지.’

‘…….’

‘해서, 혹시 그 아이가 너를 속이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말이야.’

‘…….’

‘게다가 벽사단의 주인은 베일에 감춰져 있다고 하니, 그럴 듯하지 않는가.’

‘…….’

‘하하, 험악한 표정하고는.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란다. 그저 네가 마음의 갈피를 잡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꺼낸 이야기일 뿐이니, 오해는 말았으면 좋겠구나.’

재겸은 수향의 말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괜한 빌미를 만들어 저와 윤태희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사실은 마음 한편으로 두려움이 솟았다. 과거 저와 묘정의 사이가 틀어졌던 원인은, 수향이 진실을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수향은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 그저 숨겨둔 진실을 들춰냈을 뿐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치워.’

때문에,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수향의 말을 마냥 헛소리로 치부하지 못했다.

‘어쨌든 너에게 안식을 주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니 진지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물론, 당장은 혼란스럽겠지. 일주일의 시간을 줄 테니 마음이 서거든 그때 보자꾸나.’

노련한 수향은 재겸의 마음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소년은 당장 죽여줄 수 있다는 자신의 제안에도 선뜻 달가워하지 않았고,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도 복수에 실패하여 홀로 남겨질 윤태희를 신경 쓰는 것이리라.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고 손을 잡은 사이라면 각자 목적에 충실하여 돌아보지 않고 냉큼 놓아버리면 될 일이다. 이런 건 역시 성가셨다. 아니나 다를까 소년은 마음이 여리고 물렀다. 고작 몇 달 알고 지낸 조영우의 일에도 저렇게 분개하는 성격이라면 그럴 만했다.

소년이 죽음을 망설이는 이유가 윤태희 때문이라면, 그 방해물을 없애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그랬다가는 반감만 살 것이었다. 그렇다면 소년이 직접 본인의 의지로 윤태희를 버리고 저를 선택하도록 만들면 될 일이다. 적당히 미끼를 던져서 등을 돌리게 만들 생각이었다. 의심의 씨앗을 심어두었으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수향은 재겸이 흔들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수향의 예상은 적중했다. 윤태희가 한때 복수와 재겸을 놓고 양쪽을 저울질하였듯이, 재겸 또한 윤태희의 복수와 죽음 사이에 어느 것을 앞세워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사실, 수향의 제안에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현재 방상시의 탈을 가지고 있는 건 수향이므로 생각지도 못한 길이 열린 셈이었다. 애초에 윤태희의 손을 잡은 이유는 그 대가로 죽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았으니 바로 수락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재겸은 수향의 제안이 영 갑작스럽고 거북하기만 했다. 사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자신이 죽고 난 후, 뒷일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나는 왜 거기서 당장 죽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청장실에서 나와 길거리로 나온 재겸은 빗속을 하염없이 걸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혼란스러운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속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그 아이가 벽사단을 이끌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말이야.’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언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공주에서 보았던 단주는 얼굴을 가린 면사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또, 누구보다 철두철미한 성격의 윤태희가 유독 벽사단에 대해서는 안일한 모습을 보여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번뜩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언젠가 도서실에서 만난 영귀였다. 윤태희는 잘 알고 지내는 영귀가 있다고 했었다.

“…….”

재겸이 입술을 꾹 겹쳐 물었다. 윤태희를 보자마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요동을 쳤다. 이래서야 묘정 때와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이 입을 열었다.

“언제 왔어?”

재겸의 질문에, 윤태희가 손목을 슥 젖히더니 시간을 확인했다.

“한 시간 전에.”

윤태희가 도착했을 때 재겸은 병실에 없었다. 간호사를 통해 재겸이 잠시 외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를 않기에 이곳에서 줄곧 재겸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왜 하루 종일 전화 왜 안 받았어?”

“차에 휴대폰 두고 내렸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겸이 곧바로 추궁하듯이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어디서, 뭐 했는데?”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윤태희가 말없이 재겸을 바라보았다.

“현장 뒷수습하는 문제로 본청에서 회의 중이었어.”

윤태희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대답했다.

“여긴 왜 왔어?”

“전화 안 받길래 무슨 일 있나 싶어서.”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는 너는 왜 왔는데?”

이번에는 윤태희가 물었다.

“뭐?”

“너는 왜 왔어? 공주에.”

윤태희는 이를 데 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말했잖아. 벽사단이 어떤 놈들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말하며, 재겸은 윤태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윤태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뭔가 이상했다. 재겸은 오늘따라 집요하게 캐묻고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잠깐 따라와. 할 얘기가 있으니까.”

그때, 재겸은 작게 턱짓을 했다. 재겸은 그대로 윤태희의 곁을 지나쳐 걸었다. 그에 윤태희는 말없이 재겸의 뒤를 따랐다. 재겸이 향한 곳은 아무도 없는 빈 병실이었다.

윤태희가 뒤따라 들어오자, 재겸은 문을 닫았다.

불이 꺼진 병실 안은 어두웠다. 윤태희는 말없이 손을 뻗었다.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기 위해서 벽을 더듬을 때였다. 재겸이 윤태희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불을 켜지 말라는 것 같았다. 그에 윤태희가 짧게 멈칫하더니 재겸을 돌아보았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재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옷 벗어 봐.”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