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소질은 변변찮아도 귀재는 귀재인지, 나이가 어려서 혈기가 좋더구나.”
재겸의 낯이 창백하게 굳었다.
수향은 금술의 재료로써 귀재를 착취하며 지금껏 생을 연명해 오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조영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들끓어 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분노였다.
“그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구나.”
마침내 재겸은 알아차렸다. 이런 장소에서 조영우와 재회하게 된 건 그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조영우가 저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곁에 둔 것이 틀림없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마침내 재겸의 눈가 한쪽이 파르르 경련했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재겸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손을 뻗었다. 탁자 위에 놓인 주전자를 가볍게 쥐었다.
쾅—!
재겸은 옹기로 된 찻주전자를 손아귀에 움켜쥔 채로 그대로 탁자에 힘껏 내리쳤다. 온전한 형태의 주전자가 산산이 깨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손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재겸은 파편 가운데 가장 날카로운 조각을 손에 쥐더니, 그대로 수향을 향해 겨누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재겸의 손에 들린 파편은 수향의 목전에 이르러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불시에 튀어나온 손이 재겸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에 재겸이 음산한 표정으로 스르륵 눈동자를 굴리며 곁눈질을 했다.
눈에 보인 것은, 얼굴에 탈을 뒤집어쓴 채 저를 둥글게 포위하고 있는 수십 명이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수많은 인영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재겸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비밀리에 청장을 호위하는 친위대였다.
친위대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색 탈을 쓰고 있었다. 마치 달걀귀신 같은 꼴이라, 어딘지 기괴하고 섬뜩했다. 포위당한 재겸은 이를 악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
잠시 전세를 가늠하던 재겸이 불시에 몸을 비틀었다. 제 팔을 붙잡고 있는 친위병의 손목을 확 꺾으며 그대로 가슴에 파편을 콱 찔러넣었다. 그런데 피가 튀어야 할 자리에서 퍼석, 건조한 소리가 났다. 파편이 박힌 자리에서 튀어나온 지푸라기 조각이 허공에 나부꼈다.
재겸의 눈이 크게 뜨이는 순간이었다.
“아서라, 인간이 아니라 통하지 않는단다.”
수향이 평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손부터 튀어나오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온전히 나를 지키기 위해 있는 녀석들이거든. 그러니 험한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괜한 기운 빼지 말고 그쯤에서 멈추는 게 좋을 거야.”
그제야 재겸은 친위대의 정체를 눈치챘다.
친위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수향이 주술로 만들어낸 초인(草人)이었다. 주술에 능통한 수향은 과거 서낭당에서도 짚으로 만든 인형을 부리며 재겸을 상대한 적이 있었다.
“호기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이지.”
갑작스런 위협에도 수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구나. 물론, 너로서는 죽지 않는 몸이라 잃을 게 없겠지. 때문에 막무가내로 구는 것은 이해한다만, 네 주변인은 그렇지 않을 게 아니지 않느냐.”
짧게 멈칫한 재겸이 수향을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 보았다.
수향의 말은 협박이자 경고였다. 어느덧 나례청에 입청한 지 두 달이 넘게 지났다. 두 달이라는 시간은 뒷조사를 하거나 신상 정보에 낱낱이 접근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대로라면 정주와 메산이 또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씨근거리던 재겸이 몸에서 힘을 빼자, 뒤에 서 있던 지푸라기 친위병이 재겸을 그대로 제압했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진 재겸이 이를 악물고 수향을 올려다보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저 목을 부러뜨리고 싶었다.
“이런, 이런. 많이 놀랐나 보구나.”
그때, 수향의 뒤에 숨었던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며 재겸을 노려보았다. 수향은 태연하게 고양이를 달래고 있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수향은 아주 여유로워 보였다.
재겸은 그런 수향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 녀석을 풀어 줘.”
숨을 몰아쉬던 재겸이 낮게 뇌까렸다.
“누굴 말이냐?”
“조영우 말이야. 걔는 나랑 아무런 상관도 없어!”
고양이의 머리통을 쓰다듬던 수향이 코웃음을 쳤다.
“하하, 그래? 영우가 불쌍한 모양이로구나. 허나, 섣부른 동정과 연민은 없느니만 못한 것이지. 그러니 가엾게 여길 필요 없다. 영우 그 아이가 직접 선택한 길이니 말이야.”
“헛소리 집어치워.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영우, 그 아이를 속였다고 생각하느냐?”
수향이 설핏 인상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 참, 외려 속고 있는 건 네가 아니니.”
재겸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수향을 보았다.
“이래서야 과거의 전철을 똑같이 밟는 셈이지 않느냐.”
혀를 끌끌 차며, 수향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했다.
“내 진심으로 충고 하나 해주마. 내가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바로 인간을 진심으로 위하되, 믿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말을 이어 나가던 수향이 어느 순간, 천천히 웃음기를 거두고 정색을 했다.
“나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제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으니까 말이야. 나는 부모도, 친구도, 스승도 필요 없었다. 믿고 의지할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지.”
그렇게 말하며, 수향은 애정이 듬뿍 담긴 손길로 고양이의 등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이 고양이가 바로 수향의 ‘선생’이자, 친구이자, 동료였다. 비록 말 못 하는 짐승이라 할지라도 이 눈을 보면 그 너머를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짐승의 눈동자는 흔들리는 법이 없다.
“서로를 이해하고 믿는다는 건 허상이야. 모두가 목적과 이득으로 엮여 있으니 말이야. 헌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마음을 주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약해지는 것이지.”
잠시 말을 멈춘 수향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니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것이 현명한 법이겠지.”
얼마간 말없이 재겸을 지그시 바라보던 수향이 입을 열었다.
“해서, 어느 쪽을 선택하겠니.”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수향이 말을 이었다.
“태희 그 아이는 틀렸어. 이제 네가 원하는 것을 이뤄줄 수 없을 테니, 썩은 동아줄이나 다름없지. 그런데도 망설이는 것을 보니, 너는 필시 그 아이가 마음에 걸리는 거겠지.”
수향이 먼 곳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헌데, 그 아이는 과연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겸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입 닥쳐.”
“정녕 믿을 만한 사람인지, 과연 지켜줄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냉철하게 판단을 하라는 뜻이다. 그렇게나 믿고 따르던 스승에게 배신을 당해 놓고, 아직도 누군가를 쉬이 믿는구나.”
수향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재겸에게 시선을 주었다.
“만일 너희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해도, 결국 너는 원하는 것을 손에 얻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정녕 그 아이가 너를 동료로서 믿고 위했더라면…….”
벽사단을 따로 움직이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윤태희는 재겸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을 멈춘 수향이 피식 웃었다.
“너는 그 아이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느냐?”
수향이 선택한 방식, 그것은 의심을 불어넣는 일이었다. 전의를 망가트릴 때는 유대를 뒤흔들고 분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것을,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청장실에서 빠져나온 재겸은 어두운 길거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여전히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청장실에서 보았던 밤하늘의 풍경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다른 세계에 갔다가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어쩌면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재겸은 비가 내리는 밤거리를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고 길을 지나던 행인들이 힐끔, 비를 맞으며 걷는 재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재겸은 행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슬비를 맞으며 걷고 또 걸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걷고 걸어서 병원으로 다시 돌아오자 어느새 비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흠뻑 젖은 몰골로 병실 근처에 도착했을 때였다. 비틀거리며 복도를 걸어 나가던 재겸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병실 앞에, 익숙한 옆모습이 보였다.
“…….”
걸음을 멈춘 채 멍하니 서 있던 재겸이 입술을 달싹였다.
“윤태희.”
병실 앞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윤태희가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