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네가 바라는 대로 이뤄 주겠다.”
그 순간, 재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
윤태희가 일생을 바쳐 세워 온 계획이 완전히 탄로 난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도 전에 날아든 제안이었다. 어느샌가 입가에 머금고 있던 미소를 거둬 낸 수향은 매우 진지한 기색이었다. 인자한 주름 속에 감추어져 있던 날카로운 눈매가 재겸을 응시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란다. 그 아이를 대신해서 내가 직접, 네게 안식을 주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재겸은 다리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문득 뼛속 깊이 탈력감이 엄습했다. 윤태희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일까? 아니면,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토록 염원하고 갈망해온 ‘죽음’을, 수향은 너무도 손쉽게 입에 담았다.
“네가 삶에 지쳤다는 것을 안다. 그 어떤 영약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독약이 되는 법이지. 그렇다면 죽지 않는 삶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네가 정말로 죽음을 얻어 내기 위해서 나례청에 들어온 것이라면, 내 수중에 있는 방상시의 탈을 이용해서 너의 삶을 끝내주겠다.”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멍하니 굳어 있던 재겸은, 이내 흐트러진 호흡을 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우두커니 서 있던 재겸이 스르륵 몸을 무너트리더니,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
만감이 교차했다. 대체 이 감정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충격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계획을 간파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재겸은 이미 심적으로 매우 버거웠다.
“…어째서?”
고개를 떨군 채, 간신히 숨을 고르던 재겸이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어째서냐니?”
“다 떠나서, 너는 내가 나자가 됐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계속 지켜보고만 있었지. 그런데 하루아침에 불러들여서 갑자기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나례청을 무너트리려는 계획을 간파했다면, 당장 윤태희와 저를 잡아 가두거나 저지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수향은 엉뚱하게도 원하는 바를 직접 이뤄 주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수향의 의중을 알고 싶었다.
수향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재겸은 수향이 뱀처럼 교활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과거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물론, 수향은 재겸이 몰랐던 묘정의 실체를 알려주었고, 덕분에 재겸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재겸은 그것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그 진실을 계기로 삶이 완전히 망가졌기 때문이었다. 재겸은 모든 것을 잃었다.
“아직까지 내게 앙금이 남아 있는 모양이구나.”
그때, 수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아무리 오래전의 일이라고 해도 흉터는 계속 남아 있는 법이지. 상심이 컸을 줄 안다. 결과적으로는 너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준 셈이니, 그때 일은 사과하도록 하마.”
“입 닥쳐. 그딴 소리나 들으려고 꺼낸 말이 아니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재겸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나한테 바라는 게 뭐냐고.”
재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향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긴 세월을 살았어도 소년의 눈빛만은 영락없이 그대로였다. 수향은 소년의 눈동자에 넘실거리는 적대와 불신을 보았다. 수향은 작게 실소했다. 그저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고 허울 좋게 구실을 대볼까, 잠시 고민도 해 보았으나 그래봤자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인제 와서 거리낄 게 뭐 있겠니.”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수향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육신을 내게 주렴.”
수향은 의외로 솔직하게 목적을 털어놓았다.
“너는 아주 훌륭한 제물이 될 것이다.”
제물? 재겸의 눈매가 설핏 일그러질 때였다.
“이번 그릇은 나름 제법 쓸 만한 제물을 써서 만든 그릇인데도, 역시나 세월 앞에서는 장사 없는 법인지 몸 곳곳이 말썽이구나. 그래도 저번보다는 꽤 오래 버티긴 했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수향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를 주물거렸다.
“이 육신은 내 것이 아니란다. 벌써 여섯 번이나 갈아치운 그릇이지.”
수향이 죽지 않고 지금껏 살아있는 이유는 금술 덕분이었다.
금술의 핵심은 대상이 지닌 속성을 고스란히 뺏어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얻은 생명력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을 살았다. 허나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극한까지 노화하는 신체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숨만 붙어 있을 뿐이지, 시간이 흐를수록 걷는 것조차 어렵고,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체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러니 수향에게 있어 늙지 않는 재겸의 몸은 정말이지 탐나는 제물이었다. 대상이 지닌 특성을 녹여 내는 금술을 이용하여 불로불사의 육신을 재료로 그릇을 새롭게 만든다면, 노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
재겸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향의 말인즉슨, 방상시의 탈을 이용하여 알맹이는 하늘로 환혼하고, 남은 껍데기인 육신을 제물로 써서 진정한 불로불사를 얻겠다는 뜻이었다.
“헌데, 너는 왜 늙지 않는 것이니?”
“몰라.”
재겸의 즉답에, 수향이 눈매를 가늘게 좁혀 떴다.
‘묘정이 필시 무슨 수를 쓴 모양이군.’
수향은 내심 실망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다면, 알아내면 그만이다. 저 육신을 얻게 된다면 제물로 쓰기에 앞서 연구하는 방법도 있었다. 늙지 않는 이유를 밝혀내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소년은 거짓말에 능한 편은 아니었다.
소년에게는 올곧은 면이 있었다. 여태 자신이 건넨 추측과 의문에 대하여 부정도 긍정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만약 이유를 알고 있었다면 이번에도 함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자신이 왜 늙지 않는지,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헌데….”
그때, 불현듯 수향의 머릿속에 스친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벽사단의 영귀를 부린 것도 너희가 꾸민 일인 것이냐?”
수향은 때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질문을 던졌다.
재겸이 공주 지부 현장에서 벽사단의 단주와 검을 겨루었다는 소식은 수향도 이미 전해 들은 상태였다. 문득, 재겸이 윤태희가 벽사단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두 사람이 눈속임을 위하여 서로 대치하는 그림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도 있었다. 정확히 알아보아야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수향은 재겸을 떠보기로 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야.”
마찬가지로 흘러나온 즉답에, 수향의 눈이 부드럽게 접혔다.
“…….”
수향은 눈치껏 노련하게 정보를 얻어 냈다. 윤태희는 소년에게 모든 계획을 털어놓지 않은 듯했고, 소년은 윤태희가 벽사단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수향은 생각했다.
‘서로를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구나.’
제법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수향은 즐거워졌다. 서로 이익을 위해 손을 잡고 있으나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만약 소년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배신감을 느낄 것이 분명했다. 다만, 수향은 당장에 이 사실을 들춰낼 생각은 없었다. 치우친 정보는 될 수 있으면 유리하게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이럴 때 가장 좋은 방식이 무엇인지 수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수향이 갑자기 기침을 했다.
“이 몸도 이제 곧 버릴 때가 되었어.”
수향은 사실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릇이 점점 낡기 시작하면서 자꾸 여기저기 탈이 났다. 게다가 금술의 부작용으로 인해 갈수록 토혈이 심해지고 있었다. 수향은 가재 수건으로 입술을 막고, 몇 번 기침을 뱉었다.
“아가, 약을 좀 갖다주겠니.”
수향이 살짝 고개를 치켜들고 어디론가 넌지시 말을 던졌다. 그러자 바깥에서 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미닫이문이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탕약이 담긴 그릇을 쟁반에 받쳐 온 시중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재겸의 곁을 지나쳐 수향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르신, 약을 가져왔습니다.”
재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중에게로 향할 때였다.
“…….”
시중을 들어온 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재겸이 그대로 굳었다.
그러나 시중은 재겸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시중은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놓더니, 품속에서 작은 단검을 꺼냈다. 시중은 아주 익숙한 손놀림으로 단검으로 손목에 상처를 내더니 탕약이 담긴 그릇 안에 자신의 생피를 흘려 넣기 시작했다. 이내 시중이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다 되었습니다.”
그때, 멍하니 굳어 있던 재겸이 목소리를 냈다.
“조영우?”
그러자 시중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재겸에게 시선을 주었다.
“네, 네가 왜 여기에….”
청장의 시중을 들어 온 이는, 다름 아닌 조영우였다.
그런데 조영우의 눈동자는 혼탁하였고, 초점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분명 그 조영우가 맞는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저번에 본청 앞에서 조영우를 본 것은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재겸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조영우가 왜 이런 곳에 있단 말인가?
“…….”
조영우는 무릎을 꿇은 채 말없이 재겸을 바라보다가, 이내 흐리멍덩하게 시선을 돌렸다. 조영우는 재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자아가 없는 인형처럼 느껴졌다.
조영우는 재겸을 본체만체하더니,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조, 조영우!”
재겸이 황급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조영우는 재겸의 부름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조영우가 나가고, 재겸은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불현듯, 재겸의 시야에 유리병에 담긴 검은 벌레가 걸렸다.
‘설마.’
그때, 조영우의 피가 섞인 탕약을 마시던 수향이 말했다.
“사연을 들으니 꽤나 기구하더구나.”
“…뭐?”
“유일하게 마음을 준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기별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는 모양이야. 그러다가 우연히 이쪽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말도 없이 떠난 친구가 혹시 나자가 된 건 아닐까 싶었다는구나. 그렇게 직접 수소문하여 본인 발로 나례청에 찾아왔지.”
“…….”
“그러나 초라니로 삼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소질이라, 웬만하면 그냥 돌려보내려고 했더니만 그 어떤 쓸모라도 좋으니 받아달라고 애원을 했다더구나.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
“…….”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가엾던지. 하여 제대로 힘이 자리 잡을 때까지 이곳에서 보고 배우되, 그 조건으로 내 기운을 보양하는 데 도움이 되어달라고 했지. 그럼 서로에게 이득이니 말이야. 비록 소질은 미약할지언정 귀재는 귀재인지, 나이가 어려서 혈기가 좋더구나.”
마침내 재겸의 낯이 창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