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그래, 방상시의 탈을 빼앗아 널 죽여주겠다고 하던?”
그 순간, 재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듯했다. 발끝이 무너지며 어디론가 추락하는 듯한, 아찔하고도 선득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벌떡 몸을 일으킨 채 수향을 내려다보고 있던 재겸은 뒷통수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수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하하, 뭘 그리 놀라느냐.”
수향이 작게 웃음을 흘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 세월을 살았으니 노련함이라고 해두마. 헌데, 그건 그렇고.”
수향의 예리한 눈동자가 재겸을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예전에는 망아지처럼 마구 날뛰어대더니, 이제는 그러지 않는가 보구나.”
재겸을 지그시 바라보던 수향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하긴, 네 안에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되었으니 이제 녀석도 제법 안정이 되었겠지.”
얼핏 들어서는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내 재겸은 수향이 제 안에 든 것을 겨냥하여 던진 말임을 알아차렸다. 감정이 마구 널뛰거나 격양되면 재앙신의 붉은 귀기가 흘러나오던 과거의 일을 빗대어 한 말임이 틀림없었다.
마침내 재겸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수향은 대체 무엇을, 얼마나,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수향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압도되어 우두커니 굳어 있던 재겸은, 떨림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말아쥐었다. 지금까진 당혹스럽기만 했다. 묘정의 벗이었던 수향이 어떻게 나례청장이 되었는지, 어떻게 죽지 않고 여태 살아왔는지 의문이 들었던 탓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재겸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수향이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향은 재겸이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재겸의 안에 재앙신이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말하지 않았니, 오래전부터 널 기다렸다고 말이야. 아무리 사람을 풀어도 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지. 네가 그렇게 두문불출하였던 것은 아마 속세를 등진 까닭이겠지.”
수향이 빙그레 웃으며 재겸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때마다 나례청에 입청하는 이들의 신상을 받아 본단다. 두껍게 묶인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네 얼굴을 발견했을 때, 그때의 경탄과 놀라움은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말한 수향은, 수향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네가 필시 나자를 증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는 묘정을 믿고 따랐으니까 말이야. 묘정과 그런 일이 있었으니 인간과 귀재, 더 나아가 나자에게 악감정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러나 너는 나자가 되어 이곳에 왔어.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싶어서 내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단다. 설마 삶이 지루하고 무료하여, 마실이라도 나오는 셈치고 나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닐 테고 말이야. 하하, 필시 이유가 있었을 테지.”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네가, 나례청 전체에 원한을 품고 어쩌면 나례청을 무너트리기 위해 나자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엉뚱한 헛다리를 짚은 셈이었지.”
“…….”
“나례청을 무너트릴 마음을 품은 건, 네가 아니라 너를 나례청에 데려온 ‘태희’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단다. 나도 늙기는 늙었구나, 하고 말이야.”
“…….”
마침내 재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경련했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수향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수향은 윤태희가 방상시의 탈을 빼앗아 죽여주겠다는 제안을 내걸고 저를 나례청으로 인도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나례청을 상대로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까지,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 네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때, 수향이 탁자 밑의 서랍을 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수향이 꺼낸 것은 작고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마개로 입구를 막은 유리병 안에는 시꺼먼 벌레가 들어 있었다. 길쭉하고 검은 몸체를 가진 것은 일견 거머리처럼 보였다.
“이건 고충(蠱蟲)이라고 한단다.”
재겸은 눈을 크게 뜨고 병 안에 든 벌레로 시선을 주었다.
고충(蠱蟲)이 무엇인지는 재겸도 알고 있었다. 조축고독살인. 이는 조선시대 때 횡행하였던 무고의 방법 중 하나로, 동물이나 곤충의 독을 이용하여 독살하거나, 주술을 거는 행위를 뜻했다. 조선시대에서는 이것을 엄벌로 다스렸으며 극형에 처했던 죄목 중 하나였다.
고충을 다루는 것은 사술의 영역에 속했다.
“고충(蠱)을 만드는 방법은 꽤 까다롭지. 온갖 벌레를 모아 항아리에 담고, 빛이 들지 않도록 밀봉하는데, 이때 먹이는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에 항아리를 열어 보면 서로를 잡아먹고 최후에는 제일 강한 한 마리만이 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고충이지.”
따라서 고는 인위적으로 만든 요괴의 일종이었다. 이렇게 만든 고는 독살에 쓰는 것이 보통이나, 쓰임과 종류에 따라서는 주술을 걸어 누군가를 세뇌하거나 조종할 수도 있었다.
“이 작은 것이 바로 나의 수족이요, 나의 눈이다. 내가 만든 고는, 제 몸으로 보고 들은 정보를 나에게 와서 전해준단다. 이것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많으니 참 요긴한 물건이야.”
재겸은 말을 잃고 유리병 속에 담긴 고충을 바라보았다.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은 말로만 전해 들었지, 고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눈도, 입도 없이 그저 꾸불거리며 몸을 뒤채기만 하는 모양새가 어딘지 징그러웠다.
수향은 고를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김예권 소유의 아트 센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것도 벌레 덕분이었다. 암행부 나자를 구출하기 위해 아트 센터에 잠입했던 윤태희가 인질로 붙잡혀 김예권의 계략에 빠져 넘어갔을 때의 일이었다.
김예권은 수향이 나례청 밖에서 따로 부리던 하수인이었다.
당시 김예권의 몸속에는 벌레가 심겨 있었다. 김예권은 그날 목숨을 잃었으나, 안에 심어 두었던 벌레는 무사히 살아서 수향에게 돌아왔다. 덕분에 수향은 그날 김예권이 보고 겪은 것을, 벌레의 몸에 남은 정보를 통해서 전부 알 수 있었다.
그날, 재겸은 윤태희를 구하러 왔다.
재겸은 당시 피를 많이 흘린 탓에 폭주하여 붉은 귀기에 휩싸여 있었다. 윤태희는 재겸의 폭주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윤태희가 재겸의 추천인이라는 사실은 수향도 알고 있었으므로 이로 미루어볼 때, 애초에 재겸의 정체와 힘을 알고서 나례청에 데려왔다는 뜻이 된다. 이 사실을 나례청에 숨긴 채 재겸을 데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수향은 그때 처음으로 재겸과 윤태희의 사이가 무언가로 엮여 있음을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게다가 알게 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향은 그날, 윤태희는 영귀를 다룬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자가 귀신과 내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귀신도 아니고, 무려 영귀였다. 영귀는 명백히 윗사람을 받들어 모시는 것처럼 윤태희를 대하고 있었다.
윤태희가 영귀를 부리는 광경을 본 석주련이 윤태희와 벽사단의 연관성을 떠올렸듯이, 수향 또한 윤태희가 벽사단의 주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역모. 두 글자를 떠올린 수향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태희 그 아이는 나례청에 원한이 있는 모양이더구나. 아마 목패를 되찾고 싶었을 테지. 이름에 주술이 걸려 있는 상태에서 나례청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제약이 많으니 말이야.”
수향이 찻잔에 입술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허나 직접 회수하기는 어려우니, 너의 손을 빌려서 목패를 되찾고, 이후 역모를 일으킬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지만, 어때. 제법 그럴싸하지 않으냐?”
정확했다. 수향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시야가 어그러지는 듯했다. 윤태희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수향은 몹시 태연하고, 평온해 보였다.
수향은 윤태희의 계획을 전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재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하나였다.
윤태희의 계획은 실패했다.
수향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나례청을 무너트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너를 이해한다.”
그때, 수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너는 아마 진작에 세상을 등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몰랐을 터. 나자를 증오하는 네가 나자가 된 까닭은, 그 아이가 네게 방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냐?”
나자를 증오하며 속세를 떠나 살았던 재겸이 나자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졌을 것이니, 분명 두 사람 사이에는 오고 가는 것이 있었을 게 분명했다.
“나는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수향이 손에 쥔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죽음. 혹은 영원한 안식.”
수향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재겸과 눈을 맞췄다.
“네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