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악귀다! 악귀야, 귀신이야아아악! 아악!”
임효문이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벽사단?”
재겸이 제 눈을 의심하며, 희뿌연 연기 너머로 벽사단을 바라볼 때였다. 재겸이 어느 순간 상체를 웅크렸다. 놀란 것도 잠시, 땅을 딛자마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불력의 영향이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재겸이 헛구역질을 하며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으윽….”
가슴에 불덩이가 있는 것 같았다. 땅에 엎어져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재겸이 가슴팍을 쥐어짜듯이 움켜쥐었다. 그에 단주가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반보 앞으로 성큼 나왔다가 멈칫했다. 반사적인 반응이었으나, 곁에 선 영귀 말고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재겸이 땅에 쓰러지자, 꽥꽥거리던 임효문이 숨을 덜컥 들이켰다.
“칠칠아! 괜찮아?”
어쩌지?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어느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벽사단의 영귀가 한 놈도 아니고 두 놈이나 있다. 그것도 한쪽은 적색 옷을 입고 있었다. 붉은색 두루마기를 본 순간, 사고가 정지한 느낌이었다. 벽사단의 영귀들은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는데, 단주는 적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정말로 눈앞에 있었다.
설마 이렇게 맞닥뜨리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호랑이를 만났어도 이보다 놀랍진 않을 것이다. 그런 데다가, 칠칠이는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적과의 조우에, 당장은 공포가 컸다. 게다가 임효문과 재겸에게는 어떠한 무기도 없고, 귀신을 상대할 제구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에 반해 벽사단의 영귀는 손에 검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임효문이 가지고 있는 거라곤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는 부적뿐이었다.
임효문은 임시방편으로 허둥지둥 품속에서 부적을 꺼냈다. 일단은 뭐든 해야 했다. 엄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귀기를 흘려보내자 부적이 빳빳하게 변했다. 임효문을 저 멀리 단주가 서 있는 방향으로 축퇴부를 표창처럼 쏜살같이 쏘아 날렸다.
그러나 부적은 단주에게 어떤 해도 입히지 못했다. 단주에게 닿자마자 그대로 후루룩 타오르더니, 잿가루도 남기지 않고 허공에서 흩어져 버린 것이다.
잡귀에게 써먹는 하급 축퇴부가 아니라, 상부의 승인을 얻어서 받아낸 꽤 높은 등급의 부적이었음에도 영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유일한 무기였던 부적이 영귀에게 별 타격도 주지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자, 임효문이 망연자실해졌다.
영귀는 귀신 중에 가장 강하다더니 그 말은 사실인 듯했다.
부적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단주는 날아오는 부적을 쳐내거나 피하려는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한 치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검은 면사로 인해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시선을 이쪽을 두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때였다. 줄곧 망부석처럼 굳어 있던 단주가 곁에 선 영귀를 향해 슬쩍 고개를 기울이는가 싶더니, 뭐라 속삭이듯이 말을 전했다. 그러자 영귀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주를 보좌하듯 한 걸음 앞으로 나온 영귀가 입을 열었다.
“도망쳐도 좋다.”
한껏 내리깐 목소리는 딱딱했고, 음산하게 들렸으나, 벽사단의 영귀는 의외로 선심을 베풀고 있었다. 무사히 살아서 돌아가기는 글렀다고 생각하던 차에 웬걸, 구사일생이었다. 넙죽 엎드려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하는 상항이었다.
그러나 왜인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임효문은 마음속에 가득 찼던 공포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공포보다 앞선 감정이 똘똘 뭉쳐서 욱하고 올라왔다.
도망쳐도 된다고?…
“웃, 웃기지 마.”
사실, 임효문은 다혈질인 데다가 기질 자체가 호전적인 편이었다.
임효문은 성실한 성격이었으나 본디 나자로서 특별한 자의식이나 사명감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원했던 것은 평생직장. 그리고 연금과 철밥통. 그러나 도망쳐도 된다는 말은 임효문의 가슴 속에 있던 무언가를 건드리고 말았다.
임효문은 벽사단 영귀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냉철하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선심을 베풀어 봐주려는 것처럼 도망치라고 해놓고, 뒤에서 공격을 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영귀의 농락에 넘어갈 수는 없었다. 차라리 그냥 개죽음이 낫다. 비굴하게 농락당하다가 죽느냐, 그냥 죽느냐. 임효문의 선택은 후자였다.
그러나, 칠칠이까지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칠칠이에게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동생이 있고, 수입이 없는 삼촌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물론, 칠칠이가 본인 사연에 대해서 별다른 내색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학업도 포기하고 저렇게 가장 노릇을 하는데,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앞길이 창창한 칠칠이까지 위험에 빠뜨릴 순 없다.
마음을 다잡은 임효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다 보니 근처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나자 근처에 검 한 자루가 떨어져 있었다.
임효문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후다닥 주웠다. 임효문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쥐었다.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눈을 꾹 감고 있던 임효문이 말했다.
“칠칠아. 움, 움직일 수 있겠냐?”
임효문은 긴장이 역력한 낯으로, 뒤에 있는 재겸을 향해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는 내가 붙잡고 있을 테니까 너 먼저 도망가.”
땅바닥에 무릎을 대고 엎어져 있던 재겸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뭐?”
“걱, 걱정 마. 형 해동 검도 3단이야.”
“…….”
임효문은 재겸을 뒤에 두고 앞에 나섰다. 연기 너머로 영귀가 서 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임효문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심호흡을 하면서 영귀를 노려보았다.
“야, 쿨럭, 잠깐….”
“도망치라고? 이 개자식들아, 아주 개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해라!”
재겸이 뭐라 말리기도 전에, 임효문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도망치라고 해놓고 뒤통수 치려는 거 다 알아.”
임효문의 도발에, 단주가 말없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 보자 이거야, 덤벼!”
임효문이 한 차례 기합을 내지르며 단주를 향해 돌진했다. 눈을 질끈 감고 검을 마구 휘둘렀다. 그러자 단주를 보좌하던 영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단주를 지키려는 듯이 곧바로 임효문의 검을 튕겨냈다.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움직임이었다.
챙! 챙!
자욱하고 매캐한 연기 속에서, 임효문의 검과 영귀의 검이 맞붙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임효문은 아직 사물에 귀기를 싣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귀기를 싣지 않은 검으로 영귀의 검을 막아서는 것은 무리였다. 임효문은 순수한 완력으로 버티려고 했으나, 몇 번은 막아 내는가 싶었으나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결국 몰아붙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임효문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임효문의 손에서 허망하게 튕겨 나간 검은 챙그랑,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으아아….”
기회를 잡은 영귀는 검을 든 채 임효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귀의 기운이 몹시 흉흉했다. 임효문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양팔로 머리를 감쌌다.
눈앞에 주마등이 스쳤다.
엄마. 아빠. 미안해…
아니, 임순규 어머니 정덕철 아버지 죄송합니다. 저는 여기까지인가 봐요. 일하다가 죽은 거니까 산재 처리해 주려나? 인간적으로 해줘라… 아무튼 불효자 임효문이는 갑니다…….
그때, 임효문의 등 뒤에서 손이 튀어나오더니 어깨를 턱, 짚었다.
“끼야아아아악—!”
영귀가 뒤에서 노리는 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제 어깨를 잡은 건 영귀가 아니라 칠칠이었다. 임효문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재겸을 돌아보았다.
“칠, 칠칠아!”
재겸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영귀가 멈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뭐, 뭐야… 도망치라니까 왜 안 간 거야!”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울려서 토할 것 같으니까.”
“야! 나는 널 살리려고 그런 건데, 우리 둘 다 죽으면…!”
재겸은 비틀비틀 검을 주워들며 임효문의 어깨를 짚었다.
“죽긴 누가 죽어, 등신아….”
재겸은 힘겹게 몸의 중심을 잡았다. 뭐라 말릴 겨를도 없이 임효문이 달려드는 바람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영귀에게 당하느니 맞서는 수밖엔 없다는 결론이 섰다. 죽지 않는 저야 그렇다 쳐도, 임효문이 위험했다.
사실 벽사단의 단주와 만나는 상상은 몇 번 해 본 적이 있다.
단주와 만난다면 방상시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윤태희가 무사한지 확인도 못 한 데다가 곁에 임효문이 있으니, 그 무엇도 섣불리 물어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우선은 이 상황을 돌파하는 게 최선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지만, 재겸은 손에 쥔 검을 고쳐 잡으며 호흡을 골랐다. 불타는 연기로 인해 시야가 자욱하고, 눈과 코가 매웠다. 주변에 다른 나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윤태희를 지키러 왔다가 임효문을 지키게 된 셈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기회 봐서 도망가.”
재겸은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영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내가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