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57)화 (257/348)

#257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돼?”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런저런 상념으로 집중하지 못하는 재겸과 달리, 윤태희는 차분했으며 냉철하게 계획을 설명했다. 재겸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윤태희의 설명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지하 3층에 무사히 도착하면, 비상구에서 나한테 연락을 줘.”

엘리베이터 안에는 CCTV가 달려 있으므로,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는 비상계단을 통해서 지하 3층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 윤태희의 설명이었다. 본청 곳곳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고, 관제실에서 24시간으로 모니터링을 하고 있으므로 감시를 피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근데 지하 3층에는 카메라가 없는 거야?”

“아니. 있어.”

“그러면 엘리베이터 안 타는 게 무슨 소용이야? 계속 위에서 지켜보고 있다며. 계단으로 몰래 지하 3층까지 내려가봤자, 거기에도 카메라가 있으면 어차피 들키는 건 마찬가지잖어.”

“그래, 맞아.”

윤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하 3층에는 복도마다 카메라가 있어. 당연히 명부실 근처에도 있고, 그러니까 지하 3층에서는 카메라를 피해서 움직이는 게 불가능해. 어떻게 해도 화면에 잡힐 수밖에 없지.”

“그럼 어떻게 해?”

“화면에 잡힐 수밖에 없다면, 그 화면을 보고 있지 않을 때를 노리는 거야.”

재겸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눈으로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화면 속에 네 모습이 잡히고 있더라도, 그걸 눈으로 들여다보고 상황을 파악하는 건 관제실 나자가 하는 일이지. 그리고 사람이 하는 일에는 필연적으로 빈틈이 있을 수밖에 없어.”

그리고 윤태희에게는, 그 빈틈을 교묘히 파고드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관제실은 3교대 근무야. 8시간 단위로 돌아가면서 근무하는데, 관제실 업무는 암행부에서 담당하고 있어. 현장에서 은퇴하거나 승진에 욕심 없는 나자들이 주로 맡는 편인데, 현장 일에 비하면 이쪽 일은 한직(閑職)인 데다가 철밥통이라 몇 년 동안 인원 변동이 없지.”

그때, 윤태희가 또 다른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서류 속에는 관제실에 근무하는 나자들의 스케쥴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구한 건가 싶어 재겸은 내심 놀라웠다.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2시.”

스케쥴 표를 살펴보던 윤태희가 누군가의 이름 위에 볼펜으로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이 시간에 지하 3층을 포함한 C구역을 감시하는 건 ‘정한석’이라는 사람이야. 이 사람은 관제실 나자 중에서 가장 길게 일했지.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업무에 긴장감을 유지하기는 어려워. 오래 일한 만큼 인이 박였을 거야. 한 마디로 근무 성실도가 좋지는 않은 편이고.”

“근데 왜 하필 오후 2시야?”

“정한석은 점심을 먹고 나서 항상 이 시간에 담배를 피우러 나가거든.”

윤태희는 이날을 위해 관제실 나자들 개개인의 특징과 습관까지 파악해둔 상태였다.

“정한석이 잠깐 나가서 자리에 없을 때를 노린다는 거야?”

“그렇지.”

“그럼, 아예 점심을 먹으러 나갔을 때를 노리면 되잖아. 그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

“아니지. 관제실 나자들은 교대로 식사를 하러 가니까, 만약 정한석이 식사를 하러 1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면, 그때는 다른 나자가 정한석이 담당하는 구역의 화면을 보고 있겠지.”

안내도를 내려다보고 있던 윤태희가 날카로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화장실에 가거나 담배 피우러 나간 거라면 얘기가 달라져. 적당히 모른 척하고 넘어갈 거야. 가장 가까운 흡연구역에 갔다가 관제실로 돌아오는 데 기껏해야 10분이니까.”

정규로 포함된 식사 시간이라면 모를까,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시간까지 일일이 동료가 케어해주진 않을 것이다. 관제실은 24시간 모니터링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본래대로라면 감시에 공백이 없어야 하지만, 정한석은 제일 연차가 높은 데다가 적당히 요령을 피우는 성격이었다. 이는 윤태희가 지난 몇 년간 관제실을 들락거리며 직접 파악한 사항이었다.

“그러니까 명심해야 할 건, 정한석이 없는 10분 안에 모든 일을 끝내야 한다는 거야.”

설명을 마친 윤태희가 허리를 세우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이때가 눈을 피할 유일한 기회야. 나는 그 시간에 흡연구역에 가서 최대한 정한석의 발을 붙잡고 있을게. 하지만 그래 봐야 몇 분 남짓일 테니 10분 안에 해결한다고 생각 해.”

윤태희는 그날 관제실 근처에 있다가, 정한석이 나오면 우연을 가장하여 함께 흡연구역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동시에, 재겸에게 연락해 신호를 보낸다. 재겸은 비상구 안에서 미리 옷을 갈아입고 대기하고 있다가, 윤태희의 연락을 받고 명부실로 접근하는 계획이었다.

“혹시 변수가 생길 수도 있으니 내가 신호를 주면 그때 움직여 줘. 나한테 연락이 오면 비상구 문을 열고 좌측으로 나가. 명부실에 도착하면 백호 석상을 부수고, 명부실 안에 들어가면 돼. 축역부 파트에 걸려 있는 내 목패를 찾아서 위조한 목패와 바꿔치기하는 거야.”

계획의 핵심을 정리한 윤태희는 볼펜 끄트머리를 달칵거리더니, 안내도 위에 동선을 표시했다. 목패를 바꿔치기한 뒤, 지하 3층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도주 경로에 관해서 설명이 이어졌다. 재겸은 윤태희가 동선을 따라 볼펜으로 그린 궤적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머릿속으로 미리 동선을 외워 뒀으면 해.”

긴 세월 동안 공들여온 계획의 첫 단추가 될 중대한 일을 앞에 두고도 윤태희는 초연했으며,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혹시나 계획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서 비롯된 두려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재겸도 진지한 얼굴로 윤태희의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다.

“응. 알았어.”

변수와 오차 범위까지 고려하여 설계한 계획이었다. 연습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떠올리며 시뮬레이션을 거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지막 주 토요일까지 남은 시간은 어느덧 보름 남짓이었다.

“그럼… 이밖에, 혹시 더 궁금한 거?”

작전 설명을 끝낸 윤태희가 서류를 챙기며 말했다. 윤태희의 설명이 충분했다. 목패를 되찾는 일에 관해서는 더 물어볼 것이 없었다. 다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재겸이 물었다.

“석주련이랑 얘기해봤어?”

펼쳐 놓았던 서류를 정리하던 윤태희의 손이 멈칫했다.

“뭐를?”

“저번에, 내가 석주련이 이상하다고 했었잖아.”

“아, 그거… 뭐, 워낙에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윤태희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챈 거 같긴 해.”

뭐? 재겸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했으나 역시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석주련이 뭔가를 눈치챘다면 틀림없이 무슨 사달이 날 거라 생각했다. 그에 재겸이 덜컥하여 물었다.

“그럼 큰일이잖아, 그래도 괜찮은 거야?”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조금 더 지켜보려고.”

그런데, 윤태희는 생각보다 태평해 보였다.

“왜?”

“생각보다 훨씬 시시한 인간이었던 모양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재겸의 물음에, 윤태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석주련은 저를 의심하는 한편, 그게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인지 그 이상 파고들지 않았고, 어떻게든 최대한 덮어두려는 것 같았다.

“당장 어떻게 움직일 생각은 없어 보였어.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없는 상태니까 그쪽에서도 섣불리 행동하는 건 어려울 거야. 게다가 함께 지낸 시간도 있으니 더더욱 그럴 거고.”

재겸의 눈이 가라앉았다. 만약 석주련이 뭔가를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윤태희는 그런 석주련의 심리가 어디서 기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도 윤태희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놀라울 정도로 매정한 반응이었다. 재겸은 왜인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석주련이 윤태희를 아끼고 있다는 걸 알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윤태희가 여상한 어조로 대답했다.

“운이 좋다면 이대로 내 손에 죽어줄지도 모르지.”

“…….”

냉정한 말에,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쳐다볼 때였다.

“어쨌든, 그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윤태희는 석주련에게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것 같았다. 문득 마음이 저렸다. 석주련이 안타까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누구와도 진정으로 마음 한 톨 주고받지 못한 채,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온 윤태희의 지난 생애가 너무도 쓸쓸하고 고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재겸은 저도 모르게 휑하니 넓은 거실을 바라보았다.

혼자 쓰기엔 넓은 집이었다.

재겸은 윤태희의 외로움을 생각했다. 자신이 외로운 줄도 모르는 인간의 외로움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 넓은 집에 윤태희가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저에게는 정주와 메산이가 있었다. 그러나 윤태희에게는 아무도 없다. 그 사실이 가시처럼 아프게 박혔다.

윤태희는 말했다. 석주련은 어쩌면 제 손에 죽어줄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재겸은 묻고 싶었다. 너는 그래도 정말 괜찮은 거냐고.

그러나, 재겸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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