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56)화 (256/348)

#256

재겸은 눈앞에 있는 윤태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설마 윤태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두려웠었다. 어쩌면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멀쩡히 집에 있었고, 별일 없이 아주 무사해 보였다.

재겸을 응시하던 윤태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너, 왜….”

샤워 가운을 걸친 채 물을 뚝뚝 흘리며 나타난 윤태희는 살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뜬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윤태희를 보자마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감이 차올랐다. 한순간에 맥이 탁 풀리며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때, 재겸의 낯빛을 본 윤태희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 무슨 일이냐고?

“그야, 네가….”

순간 저도 모르게 울컥한 재겸은 무어라 쏘아붙일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내 제풀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잠시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던 재겸이 말을 더듬거리며 궤도를 틀었다.

“너, 오늘… 오, 오전 출근이잖아. 근데 왜 이러고 있어?”

“휴대폰 알람이 없어서 늦게 일어났어.”

혹시나 하였으나, 결국은 평소와 같은 지각이었다.

“…….”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걸로 다행이었다.

“너 어제 휴대폰 놓고 갔어.”

재겸은 고개를 푹 숙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강 주임이 갖다 주래서 내가 가지고 있어.”

물기를 뚝뚝 흘리며 재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태희가 물었다.

“그럼, 휴대폰 돌려주려고 온 거야?”

윤태희의 물음에, 재겸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별생각 없이 너를 걱정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래선 안 됐다. 게다가 어제 윤태희에게 한심하게 굴지 말라며 매몰찬 말을 늘어놓은 참이다. 그런데 대뜸 나타나 혹시 네가 사라졌을까 봐 미친 사람처럼 달려왔노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출, 출근할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안 와서, 팀원들이 가보라고 했어.”

“왜? 원래도 종종 늦는데….”

굳이 그럴 필요 있냐는 듯, 윤태희가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윤태희는 확실히 무심한 면이 있었다. 누가 저를 걱정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별 감흥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주변의 걱정을 산다는 자각 자체가 없는 듯했다.

“…….”

윤태희는 얼마간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이어지자, 윤태희와 마주 보고 서 있던 재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평소 윤태희의 눈을 보기 힘들 때는 지금처럼 시선을 내리고 어깨 언저리를 쳐다보고는 했다. 그런데, 시선을 내리자 가운 사이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윤태희가 가운 하나만 걸치고 있다는 걸 뒤늦게 의식한 재겸은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윤태희가 탈의한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윤태희가 팔을 뻗더니, 문을 활짝 열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윤태희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짓을 했다.

“샤워하던 중이라, 우선 씻고 나올게.”

잠시 멈칫했던 재겸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윤태희는 금방 나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욕실로 향했다. 거실에 홀로 남은 재겸은 소파에 앉아서 윤태희가 샤워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간 멀뚱히 앉아 윤태희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차츰 정신이 들었다.

안 그래도 지난밤에 꾼 악몽의 여파로 불안함을 느끼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팀원들이 허튼소리를 늘어놓는 바람에, 제대로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고 뭐에 씐 것처럼 달려와 버렸다. 윤태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갑자기 이유도 없이 찾아와서 초인종을 마구 눌러대고, 문을 부서져라 두들겨 대며 문 열어라, 난리를 부린 꼴이 됐다.

“…….”

숨긴다고 숨겼는데, 꽁꽁 묻어둔 마음의 끄트머리를 들켜버린 것 같았다.

윤태희는 눈치가 빠르니까 어쩌면 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로 모질게 밀어내놓고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때, 닫혔던 욕실 문이 열렸다.

재겸의 시선이 윤태희 꽁무니를 졸졸 따라갔다. 샤워를 끝낸 윤태희는 가운을 걸치고 방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더니, 나올 때는 8부로 된 검은 니트에 면바지를 입고 나왔다.

“뭐 좀 마실래?”

윤태희가 넌지시 말을 건네며 주방으로 향했다.

“바나나 우유랑 블랙 티… 아니, 홍차 있는데.”

냉장고 안을 찬찬히 확인하던 윤태희가 탄산수도 있어, 하고 덧붙이며 고개를 돌려 재겸을 바라보았다. 이 중에 무엇을 마시고 싶냐고 묻는 듯했다.

윤태희는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했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태연해 보였다.

“그냥 냉수면 돼.”

“냉수….”

작게 중얼거리던 윤태희가 냉장고 문을 닫더니 개수대로 갔다. 커다란 유리컵을 꺼내 개수대에 연결된 정수기에서 물을 따랐다. 냉수가 없다면 그냥 미지근한 채로 줘도 딱히 상관없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냉동고에서 얼음을 꺼냈다.

“찬물이 없어서.”

윤태희가 다가와 컵을 건넸다.

“…….”

재겸은 말없이 컵을 받아 물을 들이켰다. 소파 근처에 서 있던 윤태희는 재겸에게서 살짝 떨어진 위치에 털썩 앉았다. 아주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였다. 머리를 덜 말렸는지 축축한 샴푸 향이 났다.

재겸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윤태희에게 건넸다.

“여, 여기. 네 휴대폰.”

“고마워.”

윤태희가 휴대폰을 받아들 때였다.

“술 먹고 어디서 잃어버렸나 했어.”

재겸이 어색하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넌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 나는 먼저 사무실에 가 있을게.”

어쨌든 휴대폰을 전해 주었으니 용건은 끝났다. 혹여라도 윤태희가 어제 있었던 일을 언급하거나, 저의 감정을 파고들기 전에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잠깐만.”

그때, 윤태희가 손목을 붙잡아 왔다.

“할 얘기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김없이 붙잡아 오는 손에, 재겸은 살짝 긴장했다.

“뭔데.”

“마지막 주 토요일. 그날 목패를 훔칠 거야.”

그 말과 함께, 윤태희는 곧바로 재겸의 손목을 놔주었다.

“…….”

담백한 용건에,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어제 윤태희와 목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회식에 참여하느라 흐지부지되었다. 단둘만 있게 되었으니 이 기회에 얘기하려는 모양이었다. 재겸은 윤태희가 그냥 평소처럼 저를 붙잡은 줄 알았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자세하게 설명해줄게.”

재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마지막 주 토요일이야?”

“그날이 길일이거든.”

윤태희가 어디선가 서류 봉투를 가져오더니 식탁으로 향했다. 뒤따라온 재겸이 윤태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윤태희가 봉투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렸다.

본청 건물 내부가 담긴 안내도였다.

“우선은, 명부실 위치부터 알아야 해.”

윤태희가 안경을 쓰더니 볼펜으로 안내도를 가리키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명부실은 지하 3층에 있어.”

윤태희는 재겸에게 명부실로 접근하는 방법과 그 경로를 설명해주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거야.

설명을 해 주는 동안, 윤태희는 안내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재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제야 재겸은 깨달았다. 드디어 윤태희는, 어제부로 저에 대한 마음을 잘라내기로 확실히 결심한 모양이다. 윤태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해 보이기만 했다. 일상적인 대화나 잡담 같은 것도 없었고, 윤태희에게서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신경 써야 하는 건 복수뿐이야.

재겸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다.

“엘리베이터에는 감시카메라가 달려 있으니까, 비상계단을 통해서 가야 해. 중앙 관제실에서 지켜보고 있을 거고. 그래서 지하 3층으로 내려가면…….”

윤태희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매는 냉철했으며 이성적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머릿속에는 완성된 시나리오가 있고, 그걸 말로 옮기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계획을 설명하는 모습을, 윤태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날을 구상해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

그런데, 어째선지 재겸은 윤태희가 하는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윤태희는 볼펜 돌리는 것이 습관인지, 볼펜을 쓰지 않을 때는 손가락으로 볼펜을 휘휘 돌리고 있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의 움직임에 자꾸만 시선이 빼앗겼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재겸아.”

딴생각하고 있는 걸 들켰는지 윤태희가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그에 멍하니 정신이 팔린 상태였던 재겸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듣고 있어?”

“아, 어….”

윤태희가 봉투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건 위조한 목패야.”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목패였다.

“훔친 목패가 있던 자리에 이걸 갖다두면 돼.”

“알았어.”

재겸은 윤태희가 건넨 목패를 살펴보았다.

부적과 비슷한 크기로 된 길쭉한 목패에는 붉은색 글씨로 한자가 적혀 있었는데, 윤태희 이름 석 자가 획을 따라서 음각되어 있었다.

尹兌熙

재겸은 목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바꿀 태에 빛날 희를 쓰는구나.

바꿀 태는 빛날 태로도 쓸 수 있었다. 어느 쪽이라도 반짝거리는 예쁜 이름이었다. 재겸이 목패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윤태희가 넌지시 물었다.

“왜? 무슨 문제 있니?”

“아니. 그냥 보는 거야.”

재겸이 고개를 저었다.

“너랑 잘 어울리네.”

혼잣말처럼 툭, 뱉은 말에 건너편이 조용해졌다. 목패를 내려다보던 재겸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윤태희가 턱을 괸 채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 순간, 재겸은 자신이 실언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돼?”

재겸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서둘러 화제를 돌리자, 윤태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설명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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