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파란색으로 된 피 웅덩이가 있었어.”
신지혜의 말에, 윤태희의 눈이 크게 뜨였다.
“파란색 피라니…….”
말을 곱씹어 보던 윤태희의 낯이 서서히 굳었다.
당시 섬에서 만난 인어의 말에 따르면, ‘영생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영생환을 먹어봤자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인어는 불로불사가 아니라 불로장생하는 존재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고, 인어의 평균 수명은 200년에서 300년 사이라고 했다.
인어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체 재생 능력과 치유력을 지니고 있었다. 인어는 성체가 되어 성장이 멈추고, 어느 기점에 도달하면 그때부터 더는 늙지 않는다. 인어의 살과 피를 먹은 인간은 인어와 마찬가지로 수명이 늘어나고, 상처가 저절로 나으며, 노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어의 살과 피를 먹는다고 모두가 불로장생을 전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인어가 진심으로 사랑한 대상에게 직접, 본인 의지로 살과 피를 내어준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든 것이 바로 ‘영생환’이라고 했다.
인어가 지닌 특질을 그대로 추출하여 만든 이 환약을 인간이 먹으면, 인어의 피와 살을 취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불로장생의 몸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인어환의 유효 기간은 인어의 수명과 비례한다고 했다. 예컨대 환약의 재료가 된 인어의 본래 타고난 수명이 200년이라면, 환약을 먹고 200년 동안은 노화하지 않고, 상처를 입어도 저절로 낫는다고 했다.
그러나 원료로 삼은 인어의 수명이 끝나면, 환약이 지닌 효력 또한 끝나게 된다. 인어환의 효력이 끝나면 인어환을 섭취하기 전의 상태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게 된다고 했다.
인어환의 효력이 다하면 치유력과 재생 능력이 사라지며,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게 된다. 언제든 다쳐서 죽을 수 있고, 세월에 따라 늙고 병드는 평범한 신체가 되는 것이다.
낯을 굳힌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윤태희가 입을 열었다.
“정말 제대로 본 게 맞아?”
윤태희는 신지혜의 말을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럼 내가 헛것 봤겠니?”
“하지만 말이 안 되는데.”
인어는 동족의 피와 살을 먹은 인간으로부터 특유의 악취를 맡는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인어는 재겸에게서 이렇다 할 냄새를 맡지 못했다. 따라서 인어를 직접 취한 적은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또한, 인어환을 섭취했는지 그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서로의 피를 섞어보았으나, 그 결과 피가 갈색으로 변하면서 결론적으로 재겸의 불로불사는 인어와는 연관이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재겸은 상처가 낫지 않는 몸이라는 점도 그 증거인 셈이었다.
그런데, 신지혜는 그곳에서 파란색 피 웅덩이를 보았다고 한다.
정말이지 난데없는 이야기였다. 인어와 연관이 있다고 하기엔 그날 제대로 확인을 했고, 윤태희는 재겸의 불로불사가 안에 깃든 악신 때문일 것이라고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나도 처음엔 내가 잘못 봤구나 싶었어.”
신지혜가 설핏 눈가를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아무리 봐도 파란색이 맞았어.”
잠시 조용히 있던 윤태희가 차분히 물었다.
“그래서, 재겸이가 인어와 연관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나는 그냥 다 떠나서, 내가 본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거야.”
윤태희는 이 화제가 정말이지 유쾌하지 않았다. 이미 끝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물론, 꺼진 불로 다시 보자는 마음으로 재차 확실하게 확인해 보는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다시 인어를 찾아가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이제는 그럴 시간도, 의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거여도에서 있었던 일은 재겸과 윤태희, 두 사람에게 있어 너무도 큰 실패의 경험이었다.
재겸의 저주를 풀고 싶었던 이유는, 재겸이 죽고 싶어하는 이유가 불로불사에 지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영영 끝나지 않는 무한한 삶이 아니라 평범하고 유한한 삶이라면, 어쩌면 계속해서 살아가 보겠다는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윤태희는 불로불사의 저주를 풀 수 있다면 재겸의 죽고자 하는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윤태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재겸은 기대와 희망이 완전히 꺾였고, 전보다 더 강렬하게 죽음을 원하게 되었으며, 훨씬 더 완강하게 삶을 거부하고 있었다.
윤태희가 말했다.
“하지만 재겸이가 죽지 않는 이유는 인어와 연관 없는 건 확실해.”
“뭐? 그럼 뭔데? 다른 이유라도 알아낸 거야?”
“그래. 짐작 가는 건 있는데, 아마 그거 때문인 게 맞을 거야.”
윤태희는 이미 한 번 결론을 내리고 정리한 일을 다시 들추어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인어와 관련된 일에 재겸이 다시 협조할 리도 만무했다. 저주를 풀겠다는 결심은 이미 꺾여버린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윤태희는 평소 자신이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믿는 편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날은 비가 왔었다.
신지혜가 잘못 보았거나, 혹은 시간이 흘러서 피에 빗물이 섞이며 다른 색깔로 변한 것일 수도 있었다. 재겸이 인어환을 먹었을 가능성보다 차라리 이쪽이 훨씬 더 말이 될 법했다.
“어쨌든, 끝까지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윤태희는 정중하게 화제를 정리했다. 이제는 전부 다 지난 이야기다. 결국 재겸의 마음을 돌리는 데는 실패했고, 윤태희는 궤도를 틀었다. 방상시의 탈을 선취하여 재겸이 죽을 수 없게 만드는 것. 그러니 이제 인어와 관련된 이야기에 더 이상 신경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처음에 했던 약속은 지킬게. 약속대로 섬까지 안내해 줬고, 인어를 만나게 해줬으니까. 쓸 만한 브로커를 구해서 조만간 연결해 줄 테니 당분간은 몸 추스르면서 지내도록 해.”
신지혜는 눈앞의 윤태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근데. 얼굴이 왜 그렇게 죽상이야?”
윤태희는 섬에서 봤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떨어져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으리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재겸이가 죽지 않는 이유를 알아냈다며. 그럼 잘된 일이잖아.”
섬에 가서 인어를 만난 건 결국 쓸모없는 일이 되었고, 양쪽 다 큰 고생을 했다. 그러나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윤태희가 바란 건 재겸이 죽지 않는 원인을 알아내고자 했던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그런데, 윤태희는 지금 한눈에 보기에도 많이 힘들어 보였다.
“자기, 혹시 차였니?”
역시 신지혜는 눈치가 빨랐다. 윤태희가 픽 웃었다.
“어디 쓰여 있어?”
윤태희가 제 뺨을 슥 매만지며 태연하게 받아쳤다.
“결국은 그렇게 됐구나.”
신지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바다 위에서 재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생각났다. 재겸 또한 윤태희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재겸은 결국 윤태희를 떠나기로 한 모양이었다. 스스로의 사랑에 인색하던 소년은 끝내 솔직해지지 못했다.
***
오늘도 나례청 분위기는 살얼음판과도 같았다.
특히 제1팀 사무실 분위기는 초상집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악재가 연이어 겹친 탓이었다. 막내와 윤 수석이 함께 휴가를 떠났다가 크게 다쳤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런데 나례청 경주 지부에 벽사단이 기습하여 쑥대밭이 되었고, 거기다 석주련이 그 충격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지며 제1팀 사무실은 매우 침중한 분위기였다.
평소 이런저런 일상을 이야기하며 수다와 잡담이 끊이질 않던 사무실은 언젠가부터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알 수 없는 기묘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2주가 넘도록 자리를 비웠다가 며칠 전 복귀한 재겸은 오늘도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사무실에 출근했다.
적막한 와중에 강 주임이 입을 열었다.
“지난주 일지 누구한테 있어?”
“제가 가지고 있어요.”
마우스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재겸이 대답했다.
“응, 그거 수석님한테 사인받아서 갖다 줄래?”
“네.”
재겸은 일지를 챙겨 들고 수석실로 향했다. 데스크 앞으로 가서 일지를 건네자,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윤태희가 말없이 일지를 받아 들었다. 둘의 분위기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일지를 건네받은 윤태희가 서류 맨 위에 적힌 서명란에 만년필로 가볍게 서명을 했다. 재겸은 애매하게 시선을 내린 채 윤태희가 서명을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서명을 하던 윤태희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에 뭐 해요?”
그제야 재겸은 고개를 들고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잠깐 시간 좀 냈으면 하는데.”
윤태희와 눈이 마주쳤을 때였다. 그와 동시에 재겸은 힐끗 고개를 돌려 등 뒤를 확인했다. 수석실 문은 열려 있는 상태였다. 재겸은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왜?”
“할 얘기가 있어서.”
그 말과 함께 윤태희가 대뜸 손을 들더니, 데스크 앞에 놓인 자신의 명패를 톡톡 건드렸다. 그에 재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무광으로 된 검은색 명패에 하얀색으로 각인된 글자를 바라볼 때였다.
<수석 윤태희>
재겸을 빤히 응시하던 윤태희가 턱을 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 주 토요일.”
순간, 명패를 내려다보던 재겸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윤태희의 눈매는 웃음기 하나 없이 날카로웠다. 그리고, 재겸은 윤태희가 방금 전에 건넨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마지막 주 토요일에 목패를 훔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