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재겸은 오늘부터 다시 나례청에 출근하기로 했다. 윤태희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재겸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약속을 사수했으니 이젠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재겸은 와이셔츠를 찾아 입었다. 다시 출근하겠다는 말에 된 정주와 메산이는 반색을 했다. 재겸이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출근 준비를 하는 와중에 초인종이 울렸다.
“재겸아, 태희 씨 오셨어.”
때마침 윤태희가 왔다. 재겸이 미리 연락해서 데리러 온 줄 알았는지, 정주는 아주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사실, 재겸은 윤태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응. 문 열어 줘.”
재겸은 별말 없이 와이셔츠 단추를 채웠다. 예기치 못한 방문이었으나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윤태희는 별다른 연락 없이도 재겸이 다시 출근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재겸 또한 오늘쯤 윤태희에게서 어떤 식으로든 제스쳐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희 씨,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재겸이 지금 준비 거의 다 했어요.”
현관에서 두런두런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던 재겸이 반쯤 열린 방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거실을 내다보았다.
“안녕.”
말끔한 슈트 차림을 한 윤태희와 눈이 마주쳤다.
“출근하셔야죠.”
“응. 옷만 입으면 돼.”
둘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사람들처럼 태연히 말을 주고받았다.
“태희 씨,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얼굴에 아직 멍이 안 빠지셨나 봐요.”
정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엊그제 재겸에게 호되게 얻어맞았던 윤태희의 얼굴에는 곳곳에 멍이 남아 있었다. 정화부의 약수를 마신 덕분에 눈에 띄게 멍이 흐려져 있긴 했으나, 아직까지는 얼룩덜룩한 상태였다. 정주는 그걸 섬에서 다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잘못 알고 있다고 정정해줄 이유는 없었다. 윤태희는 별말 없이 옅게 웃어보였다.
“메산아, 태희 씨 상처 좀 봐 드려.”
“네에.”
출근 준비를 하는 사이, 메산이는 벼르던 대로 윤태희를 치유해 주기로 했다. 방 안에서 이야기를 엿들은 재겸은 일부러 평소보다 천천히 옷을 입었다. 옷을 다 입고 거실로 나가자, 윤태희가 마룻바닥에 정좌하고 앉아서 메산이에게 얼굴에 난 상처를 치유 받고 있었다.
메산이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무리가 윤태희의 얼굴에 햇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멍이 남아 얼룩덜룩하던 얼굴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말끔해졌다. 빛무리를 내보내던 메산이는 이제 됐다 싶었는지, 윤태희의 얼굴 앞으로 활짝 펼쳤던 손을 거두며 물었다.
“어어, 좀 어떠세요?”
얌전히 얼굴을 맡기고 있던 윤태희가 스르륵 눈꺼풀을 말아 올렸다. 그에 정주가 작은 거울을 가져와서 얼굴을 비춰 주었다. 거울을 보던 윤태희가 큼지막한 손으로 제 얼굴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보았다. 통증이 전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윤태희가 빙그레 웃었다.
“감쪽같이 다 나았는데?”
윤태희는 쑥스러운 얼굴로 서 있는 메산이의 손을 가져가더니, 고사리 같은 손을 펼쳐 신기하다는 듯이 들여다보았다. “고마워요.” 내심 뿌듯해진 메산이는 헤헤 웃었다.
“어떻게 한 거예요?”
메산이가 손을 펼치며 “어어… 마음속으로요, 집중하고… 나아라, 나아라, 하고 생각하면은요….” 웅얼웅얼 설명하기 시작했다. 윤태희는 메산이의 말을 경청했다.
재겸은 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재겸은 윤태희에게 가자고 말하는 대신에 메산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잘 놀고 있어. 다녀올게.”
눈치가 빠른 정주는 재겸이 윤태희에게 말을 붙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의아한 눈으로 재겸과 윤태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윤태희가 별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메산이와 정주의 배웅을 받으며 두 사람은 태연하게 집을 나섰다.
그런데,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재겸은 그대로 쌩하니 등을 돌렸다. 재겸은 골목 앞에 주차된 윤태희의 차를 보고도 그대로 곁을 지나쳤다. 그에 윤태희가 재겸을 불러세웠다.
“어디 가?”
“용건 있는 거 아니면 앞으로 출퇴근은 혼자서 할 거야.”
윤태희는 차 키를 꺼내 버튼을 누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불편한 건 알겠는데, 어차피 가는 길도 같으니까 그냥 타.”
윤태희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정주 씨한테 한 번은 얼굴 비춰야 할 것 같아서 온 거야.”
윤태희가 무감한 얼굴로 말했다. 노골적으로 저를 피하는 재겸을 향해 오늘 이렇게 집까지 찾아온 건 불가피한 일이었으니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재겸은 말없이 윤태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뒷좌석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그제야 윤태희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침묵 속에서 차가 미끄러지듯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다시 약속이 유효하게 되었다는 전제 안에서 겨우 재겸과 동승할 수 있었다. 그것도 조수석이 아니라 뒷좌석에 태우는 게 고작이었으나 윤태희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제 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차창을 응시하던 재겸이 입을 열었다.
“목패는 언제 되찾으면 돼?”
잠시 말이 없던 윤태희가 전방을 주시한 채 대꾸했다.
“일정이 좀 틀어졌어. 원래 지금쯤이면 빼돌려야 했는데.”
처음부터 디데이를 확실하게 정해둔 것은 아니었다. 당분간 나례청의 분위기를 살펴보는 것으로 하되 단,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유사시에 대비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재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둘의 대화는 정확하게 필요한 용건 안에서만 맴돌았다. 분위기는 무겁고 싸늘했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재겸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윤태희는 운전에 집중했다.
오늘따라 도로에 차가 많았다. 본청 앞 지하 주차장 입구에 도착하고 보니 주차를 하려는 차량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윤태희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대신 종묘 건너편에 있는 한산한 상가 골목에 차를 댔다. 어차피 코앞이라 조금만 걸으면 되었다.
윤태희가 먼저 차에서 내리자, 재겸도 따라서 내렸다. 재겸은 천천히 윤태희의 곁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약간 떨어져서 걸었다. 그 이상 가까워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지지도 못하는 사람들처럼. 그러나 서로의 걸음을 확인할 수 있는 애매한 거리였다.
둘은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본청에 가려면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종묘 공원을 가로질러야 했다. 많은 인파 속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은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자 동시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도로 한복판에 이르러 인파가 뒤섞일 때였다.
……어?
정면을 보며 걸어 나가던 재겸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재겸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에 맞은편에 있던 행인들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아는 얼굴을 보았다.
“…조영우?”
눈을 크게 뜨고 인파 속에 섞여드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그새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재겸이 놀란 눈으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하얀 피부에 머리가 조금 덥수룩했고, 모자를 눌러 쓰고 있어서 긴가민가했다. 워낙 순식간이라 자세히 보지 못했다. 재겸이 횡단보도를 건너다 말고 멈춰 서 있으니, 몇 걸음 앞서 걷던 윤태희가 재겸을 돌아보았다.
“왜 그래?”
윤태희가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보았다가, 행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다시 시선을 던졌다.
“방금 전에 조….”
조영우를 봤어, 라고 말하려던 재겸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여기는 서울 한복판인 데다, 지금은 평일 대낮이므로 조영우는 지금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시간이었다. 하물며 이곳은 나례청 인근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조영우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까 물건을 정리하면서 교복을 보고 조영우 생각을 했는데, 하필이면 태가 비슷한 사람을 봐서 순간적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재겸은, 이내 별거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윤태희는 그런 재겸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별말 없이 다시 본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종묘 공원을 가로질렀다.
외대문을 지나 종묘 내부에 들어서자 특유의 분위기가 두 사람을 반겼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한 느낌이었다. 살갗에 와닿는 공기는 서늘했으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정전에 이르러 출입부를 꽂고 로비에 들어섰다. 그런데 오늘따라 나례청 로비가 수선스러웠다. 나자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무슨 일 있나? 재겸이 의아한 눈으로 주변을 살필 때였다. 때마침 별관 쪽에서 정신없이 달려오는 표지호의 모습이 보였다.
“표 선임님.”
윤태희가 목소리를 내자, 표지호가 놀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수석님!”
멈칫하며 발길을 멈춘 표지호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수석님, 호출 못 받으셨어요?”
표지호가 상체를 숙이고 숨을 헉헉 들이켜며 말했다. 그러자 윤태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재킷 안주머니에서 호출기를 꺼냈다. 호출기의 전원을 켜둔다는 것을 깜빡했다.
“호출 떴어요? 왜?”
“헉, 지금…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인데?”
“어제… 새벽에… 지부 건설 현장에….”
표지호가 사색이 된 낯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재겸과 윤태희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때였다. 표지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을 뱉었다.
“어제 새벽에, 벽사단이 나례청 지부 건설 현장을 습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