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43)화 (243/348)

#243

재겸은 지금껏 벽사단의 존재를 뚜렷하게 의식해본 적이 없었다. 벽사단의 출현으로 나례청은 노골적으로 위기감을 드러내며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재겸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재겸에게 벽사단이란 의뭉스러운 귀신들의 집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벽사단에 한 번 찾아가 보는 건 어떻소?’

적어도 비마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듣자 하니 오래 묵은 영귀들이라고 하던데, 그 힘이 꽤 걸출한 데다 인간 문명에 맛을 들였는지 아주 수전노라더군. 돈만 쥐여주면 어떤 부탁이든지 들어준다고 하지 않소.’

비마의 입에서 벽사단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비마는 발이 넓은 편이었다. 소문에 밝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비마가 벽사단을 언급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재앙신을 떼어낼 방법이 정말 있기는 한 건지 단순히 알아보려는 마음에서 불러낸 것이었다.

‘정 그렇게 생에 미련이 없다면, 봉인해 달라는 건 어떻소?’

그러나 뜻밖에도 새로운 선택지가 생겨났다.

이 생을 봉인한다.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는 방법이었다. 행복하고 좋은 기억만 남겨놓고 영영 잠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그저 박제된 상태로 이 땅에 존재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죽음과는 또 다른 형태의 안식일 수도 있었다.

이제는 쉬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 육신과 정신을 통째로 봉인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는 의구심이 들긴 했다. 그러나 비마의 말대로 벽사단은 오래 묵은 영귀들의 집단이라고 했으니 무슨 수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직접 벽사단에 찾아가서 물어보는 편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재겸은 벽사단에 손을 뻗는 일을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길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봉인을 의뢰하는 것은 최후의 방편이었다.

윤태희가 뜻을 굽히지 않았으면 모를까, 둘의 약속은 다시 유효한 상황이었다. 윤태희뿐만 아니라 재겸에게도 이 계획을 완수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벽사단에 봉인을 의뢰하는 건 윤태희가 약속을 깨거나 모든 일이 어그러졌을 때,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이었다.

재겸은 비마에게 몸속에 귀신을 봉인하는 일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알아봐 달라 부탁했다. 재겸이 처한 상황과 견주었을 때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마의 말에 따르면 육신을 그릇으로 삼아 귀신을 봉인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고 했다. 봉인이란 대개 없애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택하는 방법이었다.

본래의 혼이 남아 있을 때 죽음에 이르면, 귀신의 혼이 달라붙어 있는 상태에서 하늘로 승천하게 되니, 덩달아 귀신도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귀신의 혼과 생혼이 완전히 하나가 되면, 그때는 봉인의 효력이 사라진다. 봉인이 풀리면 마치 알이 부화하듯이 알맹이가 껍데기를 깨고 바깥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비마가 말한 봉인에서는 혼을 담은 그릇, 즉 육신의 죽음이 전제로 깔려 있었다. 그 말인즉슨 귀신의 혼을 봉인한다고 해서 모두가 불로불사가 된다는 건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늙거나 병들어서 죽든,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든, 어쨌든 죽을 수는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재겸은 죽지도, 늙지도 않는 몸이었다.

‘불로불사의 저주 같은 건 애초에 없었어.’

윤태희는 재겸이 악신의 그릇이기에 불로불사가 된 것이라고 반쯤 확신하는 듯했다. 재겸도 그 말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재앙신과 조우했을 때 직접 물어보기도 했으나 대답은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재겸도 마음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재앙신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히려 혼란이 가중되었다.

결국, 불로불사의 원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또, 비마가 말한 예시는 일반적인 ‘귀신’의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재겸의 안에 든 것은 사람이 죽어서 된 잡귀, 귀신 정도로 간단히 치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악신 혹은 재앙신이라 불리는 이 존재는 말 그대로 ‘신격’이었다.

만약 이것이 퍼즐이라면 아직 몇 군데가 비어 있는 상태와 같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윤곽은 잡힌 셈이었다. 봉인에 관한 정보를 더 알아봐달라는 비마는 그러겠노라,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윤태희 몰래 움직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은 비마가 쓸 만한 이야기를 물어올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무엇이 되었든 시간이 지나면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 달빛에 물든 밤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비마를 바라보던 재겸은 문득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삶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었다.

***

비마를 보내고 홀로 방 안에 남은 재겸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둠이 걷히며 동이 트고 있었다. 간밤에 비마를 불러낸 뒤로 그대로 아침을 맞이한 재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부터라도 미리 물건을 정리해둘 생각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정주가 거실로 나왔다.

“재겸아, 뭐 해?”

정주는 반쯤 열린 방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재겸은 커다란 봉투 안에 옷가지를 담는 중이었다. 방바닥에 앉아 물건을 정리하던 재겸이 고개를 돌려 정주를 바라보았다.

“버릴 거 버리고, 방 좀 치워두려고.”

“갑자기 왜? 이렇게 아침부터?”

커다란 비닐봉지 안에는 쓰지 않는 물건과 온갖 잡동사니가 담겨 있었다.

“그냥. 필요 없는 게 많은 것 같아서.”

2층 다락에 모아 두었던, 오래전부터 버리지 못하고 간직해온 물품들도 이미 정리를 마친 뒤였다. 정주는 봉투 안에 담긴 물건을 들춰보며 내용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 교복도 버리게?”

그때, 정주는 한 쪽에 깔려 있던 교복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끄집어냈다.

“응, 이제 입을 일 없잖어.”

재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에 정주는 교복을 하나씩 펼치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몇 달 전 잠깐 학교에 다닐 때 입었던 교복은 아직 새 옷 같았다. 깨끗하고 멀쩡했다. 게다가 기성품도 아니고 맞춤 주문을 한 것이라 오로지 재겸을 위한 옷이었다.

“그렇긴 한데….”

괜히 섭섭하네. 정주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근데 넥타이는 안 버려도 되잖아. 그냥 정장 입을 때 매도 되고….”

말을 흐리던 정주는 미련이 남았는지 자꾸 교복을 뒤적거렸다.

“아니, 그냥 버릴 거야.”

그러나 재겸은 단호했다. 재겸은 정주의 손에 들린 교복 넥타이를 빼앗아 다시 봉투 안에 욱여넣었다. 그런데 넥타이를 보고 있으려니,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윤태희와 본격적으로 엮이게 된 계기는 바로 이 넥타이를 빌리게 되면서부터였다. 벌써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조영우를 쫓아다니던 원귀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몸에 지니고 있던 넥타이를 넘겨주었다가, 다음날 등굣길에 윤태희에게서 넥타이를 빌리게 되었다.

과거의 일을 떠올리자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으면 윤태희와 엮일 일도 없었을까?

재겸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생각해봤자 무의미한 가정일 뿐이었다. 어쨌든 그때 넥타이를 넘겨주었던 원귀는 지금쯤 원을 풀고 이 땅을 떠났거나, 아니면 잡귀가 되어 아픈 기억으로부터 해방되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잘된 일이었다. 조영우도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몇 달이나 지났으니 어쩌면 저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휑해진 방을 둘러보던 정주가 입을 열었다.

“오르골 어디 갔어?”

정주가 허전해진 협탁을 가리키며 물었다. 협탁 위에 있던 오르골이 보이지 않았다. 시골집에 있을 때 윤태희가 와서 전해 주었던 오르골은 언제나 재겸의 머리맡에 있었다.

“버렸어.”

재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왜? 고장 났어?”

“아니.”

“근데 왜 버려?”

정주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태희 씨가 선물해 준 거라면서.”

“응.”

“그거 아끼지 않았어?”

재겸은 잊을 만하면 오르골의 태엽을 감고 귀를 기울이곤 했다.

“아직 망가진 것도 아닌데 왜 버리겠다는 거야?”

정주가 물음에, 재겸은 한참 만에 조용히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망가질 테니까.”

***

오전 내내 버려야 할 물건과 남겨둘 물건을 구분했다. 케케묵은 먼지를 마셔가며 정리를 마친 재겸은 몸에 묻은 먼지를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욕실 앞에 서서 옷을 훌훌 벗는데, 마당에 나가 있던 메산이가 다다다, 달려 왔다. 품에는 유남생을 안고 있었다.

“어어, 나리. 씻으시려고요?”

메산이가 재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

그런데, 메산이는 답변을 들었음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런 메산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재겸은 메산이의 속내를 알아채고는 피식 웃었다.

“들어와. 같이 씻게.”

메산이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해졌다. 메산이는 재빨리 유남생을 바닥에 내려놓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빨가벗은 메산이가 냉큼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유남생도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가 헛기침을 하며 어기적어기적 욕실로 기어 들어오고 있었다. 뭐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목욕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인 듯했다.

무심한 낯으로 유남생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던 재겸은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원래는 가볍게 샤워만 할 생각이었으나 아무렴 상관없었다. 재겸은 물을 받은 욕조 안에 유남생과 메산이를 넣어주었다. 유남생이 물갈퀴를 푸드덕거리며 물장구를 쳤다.

재겸은 유남생과 메산이가 목욕을 빙자한 물놀이를 하도록 잠시 내버려 두고, 일부러 천천히 샤워를 했다. 그렇게 샤워를 마친 재겸은 메산이를 욕조에서 꺼내 올렸다.

“앉아 봐. 머리 감게.”

“네에!”

메산이를 좌식 의자에 앉히고 물을 끼얹었다. 샴푸를 몇 번 짜서 머리에 거품 칠을 하니 메산이가 주먹을 꽉 쥐었다. 눈도 질끈 감았다. 눈에 거품이 들어갈까 봐 무서운 듯했다.

“나리, 저는 뭔가 할 일이 없을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 메산이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뭐? 무슨 할 일.”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나 생각이 들어서요.”

“너 할 일 많어.”

재겸은 거품이 묻은 메산이의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며 말했다.

“정주 말 잘 들어야지, 밥 남기지 말고 싹싹 긁어먹어야지, 밥 먹고 낮잠 자야지, 나무에 물 줘야지, 깽알이 여기저기 옮겨다 줘야지, 할 일이 태산이구만 뭘 더 하려고 하냐.”

원하는 답변이 아니었는지 메산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리.”

“왜.”

“윤 도령님은 언제 오세요?”

메산이가 실눈을 뜨며 화제를 돌렸다.

“…….”

갑작스러운 질문에 재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왜?”

“어어, 아직도 몸이 아프시면 제가 낫게 해 드리려고요.”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이 피식 웃었다. 재겸은 샤워기에 물을 틀어 메산이의 머리를 헹궈주었다. 물줄기에 거품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메산이가 눈을 말똥말똥 떴다.

“넌 걔가 그렇게 좋냐?”

재겸은 손에 든 샤워기로 메산이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메산이가 소리 내서 웃더니 어푸푸, 소리를 내며 얼굴을 감쌌다. 재겸의 장난에 신난 메산이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힘들어하시니까요.”

메산이는 윤태희가 다쳤을 때부터 줄곧 신경을 쓰고 있었다.

“걔 퇴원했어. 이제 괜찮을 거야.”

“아니요, 윤 도령님 말구요, 나리께서요.”

그 순간, 샤워기를 들고 있던 손이 멈칫했다.

“윤 도령님이 눈을 뜨지 못하실까 봐 많이 속상하셨지요?”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던 메산이가 맑은 눈으로 재겸을 올려다보았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있으니까요! 이번에는 병원에 계셔서 제가 도와드리지 못했지만… 만약에 다음에도 또 많이 다치시는 일이 있으시면요, 그때는 제가 전부 낫게 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셔요. 오래오래 나리 곁에 계실 수 있도록 제가 지켜 드릴게요.”

눈이 마주치자, 메산이가 해맑은 표정으로 헤헤 웃었다.

“…….”

그러나 재겸은 끝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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