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42)화 (242/348)

#242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침대에 웅크리고 있던 재겸이 몸을 일으켰다. 사방이 조용하였고 열어놓은 창문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 왔다. 재겸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하나 없는 밤하늘에는 예쁜 반달이 떠 있었다.

어쩐지 잠이 오지를 않는다. 어제 오후, 윤태희를 홀로 내버려 둔 채 집에 돌아왔던 재겸은 그대로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그리고 오늘 낮에 윤태희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재겸은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을 열어 확인해 보았다.

[그래]

[네가 이겼어]

결국 물러선 것은 윤태희였다. 그러나 기쁘고 후련하다기보다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재겸은 윤태희가 보낸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아직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어제는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윤태희를 그렇게 내버려 두고 집에 돌아왔던 재겸은 어제 하루종일 마음앓이를 했다. 그렇게 모질게 굴고 상처를 주었으니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런 와중에 윤태희로부터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그에 재겸은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만에 하나 이대로 윤태희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던 차에 윤태희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문자를 읽는 순간 신경이 곤두서 있던 상태에서 맥이 탁,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가 이겼어. 윤태희의 대답인즉슨 자신이 하자는 대로, 원래 했던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뜻으로 읽어도 무방한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재겸을 둘러싼 희미한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불현듯, 윤태희가 또다시 약속을 번복할지도 모른다는 불신이 든 탓이다.

재겸은 왜인지 윤태희의 말을 곧이곧대로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이미 윤태희에게는 저와 한 약속을 뒤흔들고 어그러트린 전례가 있는데, 다음에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윤태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정말 이 약속을 믿어도 될까?

문득 의구심을 느낀 재겸은 여러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다. 윤태희가 약속을 지키겠다는 식으로 나오긴 했으나, 나중에 시간이 흘러 마음이 바뀌었다고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아니면 지금 당장은 협조를 위해 말만 그렇게 했을 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을 해도 알 수 없는 윤태희의 속내를 추측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럴 때는 윤태희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세워놓고, 그에 따른 방안을 마련해놓는 편이 옳다. 그러나 한참 고민해 보아도 마땅히 떠오르는 뾰족한 수는 없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살아서든지 죽어서든지 윤태희의 곁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힘든 이유는 너한테 나쁜 게 붙어 있어서 그랬던 거야.’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던 재겸이 불현듯 고개를 숙였다.

“야.”

제 가슴에 대고 입술을 달싹여 보았다.

- …….

혹시나 하였으나 역시나였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재겸은 한참을 고개 숙인 상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재겸이 어느 순간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온 재겸은 조용히 2층으로 향했다. 어둠에 잠긴 집 안은 적막했다. 집이 워낙 넓다 보니 2층에도 방이 몇 개 있었지만, 세 식구는 주로 1층에서 생활했기에 이사를 오던 당시부터 2층에 잘 왕래하지 않았고, 거의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재겸은 복도 모퉁이를 돌아 2층 제일 구석에 있는 작은 방으로 갔다. 굳게 잠긴 문에는 새끼줄로 만든 밧줄이 꽁꽁 묶여 있었다. 이전에 살던 집에서도 그랬듯이, 재겸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잡동사니들을 방 하나에 모아놓고 귀기로 문을 잠가두었다.

손에 귀기를 싣고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밧줄이 스르르 풀렸다.

어둠 속에서 원하는 물건을 찾아낸 재겸은 1층으로 내려왔다. 재겸이 가져온 물건은 비마를 불러내는 마패였다. 조용히 거실 미닫이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온 재겸은 뒷마당으로 향했다. 주위를 한번 살펴본 후, 식구들이 전부 잠든 것을 재차 확인한 뒤 발로 흙을 파헤쳤다.

마패를 땅에 묻은 재겸은 검지 끝을 깨물고 흙에 피를 주르륵 흘렸다.

“비마의 갈기는 방황을 멈추고 부름을 받으라.”

평소대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재겸이 발을 딛고 선 땅은 요지부동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부름을 받은 비마가 땅속에서 흙을 박차고 나와야 했다. 재겸이 의아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뭔가 잘못됐나? 마패를 파헤치려는데, 문득 땅 위에 넘실넘실 큰 그림자가 졌다. 그에 재겸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맑은 밤하늘에서 비마가 내려오고 있었다.

“공자, 오랜만이오. 잘 지냈소?”

하늘에서 사뿐사뿐 걸어 내려온 비마가 재겸을 쳐다보았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고 있었지.”

그래서 한달음에 달려올 수 있었노라고, 비마가 말했다. 몇 달 만에 만난 비마는 여전했다. 갈기는 언제나처럼 윤기가 흘렀고, 매한가지로 잠을 못 자는지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재겸과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던 비마가 말했다.

“헌데, 나는 이제 곧 잘 시간이오. 달이 뜨지 않았소?”

비마가 푸르르, 투레질을 하며 생색을 냈다.

“미안.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볼 데가 너밖에 없어.”

“무엇이 궁금하오?”

“귀신을 인간의 몸에 봉인했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

“그건 왜 묻는 것이오?”

“설명은 나중에 하고. 일단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줘.”

앞발로 땅을 툭툭 차며, 비마가 잠시 생각에 잠긴 눈을 했다.

“꼭 인간이어야만 하오? 내가 아는 것은 인간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생물의 육신을 그릇으로 삼아 귀신을 봉인하는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소.”

뭐? 재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게 정말이야?”

“그렇소.”

“살아있는 육신에 귀신의 혼을 봉인하면 어떻게 되는데?”

“생혼에 귀신의 혼이 들러붙으며 서서히 하나가 된다 들었소.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로 합쳐져 하나의 혼만 남게 된다지.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은 가능해도, 죽었던 것이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니, 육신의 원래 주인이었던 생혼은 그대로 시들어 버리고, 그대로 귀신의 혼에 잡아먹혀 버린다고 하더군. 그러니 결국에는 단 하나, 귀신의 혼만 남게 될 테지.”

재겸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귀신의 혼이 생혼을 잡아먹고 완전히 육신을 차지하게 되면 그땐 그릇이 깨진다고 들었소. 그릇이 깨졌으니 봉인도 깨지면서 귀신이 다시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이지.”

“몸이 버티질 못한다는 거야?”

“그렇소.”

“그러면… 그러니까 네 말은,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반드시 귀신의 혼만 남게 되고, 그릇이 깨지게 된다는 건데, 그럼 언젠가는 그 귀신은 반드시 풀려나게 된다는 거잖아.”

“그렇소.”

“그럼 굳이 봉인을 하는 이유가 있어? 언젠가는 자유롭게 풀려나게 되는데?”

“귀신의 혼과 생혼이 완전히 섞이기 전, 그러니까 육신을 완전히 빼앗지 못한 상태에서 그릇이 먼저 죽으면, 생혼에 붙어 있던 귀신의 혼까지 이 땅에서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오.”

비마의 설명에 따르면, 두 개의 혼이 완전히 합쳐지기 전에 육신의 생명이 다하면, 혼불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는 생혼에 귀신의 혼이 들러붙은 채로 함께 떠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

잠시 말이 없던 재겸이 한참 만에 물었다.

“그럼… 안에 든 걸 그냥 떼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야?”

혹시 모를 기대감을 품지 않으려 노력하며, 재겸이 물었다.

“봉인하자마자 당장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힘들 것이오. 봉인할 당시에 그 그릇이 되는 육신의 나이가 어릴수록, 그리고 함께한 세월이 길어질수록 떼어내기가 힘들다고 들었소.”

재겸이 피식 웃었다. 윤태희는 이걸 떼어내겠다 했으나, 비마의 말을 듣고 보니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안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2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상태다. 비마의 말대로라면 재겸은 재앙신을 떼어내기에 최악으로 어려운 경우였다.

“헌데, 그건 왜 묻는 것이오?”

비마의 대답에 재겸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냥, 내 안에 뭐가 있더라고.”

“그게 무슨 말이오?”

비마는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에 재겸은 가타부타 말을 얹는 대신 저의 존재에 대해서 묘정으로부터 들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비마는 그제야 재겸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정녕 안에 무엇이 있단 말이오? 무엇이기에?” 하며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재겸은 대답 대신, 묘정으로부터 뭔가 들은 것이 있느냐고 재차 물었다.

“애석하게도 묘정에게서 어떤 언질도 받은 적 없소.”

비마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재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해서, 공자의 안에 든 그것을 떼어낼 방법을 찾는 것이오?”

“아직 결정한 건 없어. 그냥 방법이 있나 해서 물어본 거야.”

“헌데, 만에 하나 운 좋게 떼어낸다고 해도 문제가 아니겠소?”

“그게 무슨 말이야?”

비마가 푸르르, 투레질하더니 지나가듯 가볍게 물었다.

“공자 안에 있는 그것이, 과연 세상에 내보낼 만한 것이오?”

재겸은 대답 없이 침묵했다. 하긴 듣고 보니 비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떼어낼 수 있다고 해도 문제, 그렇다고 안 떼어내도 문제였다. 게다가 제 안에 든 것은 재앙신이었다.

“그래, 그 말도 맞아.”

안에 있는 것을 떼어내 주겠다는 윤태희의 말에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떼어내는 방법이 정말로 있기는 한 건지 싶은 마음에 궁금했을 뿐이고, 비마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단순히 확인만 해 본 것이었다. 더 희망을 갖기에는 재겸은 많이 지쳐있었다.

“그냥 농담 삼아 해본 말이오, 그런 표정 하지 마시오.”

어느새 재겸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재겸의 무거운 반응에,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던졌던 비마는 살짝 멋쩍어졌다. 푸르르, 헛기침하던 비마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허면, 벽사단을 찾아가 의뢰를 해 보는 것은 어떻겠소?”

뜬금없는 비마의 말에, 재겸이 멈칫했다.

“벽사단? 네가 벽사단을 어떻게 알아?”

“왜 모르겠소.”

비마는 정말이지 소문에 밝은 모양이었다. 비마의 입에서 벽사단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례청에서나 시끄러운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던 듯했다.

“요즈음 어딜 가나 벽사단에 대한 이야기뿐이라오.”

그렇게 말하며, 비마는 귀신들 사이에서 ‘이제야 저희들 편이 생겼다’하며 벽사단을 추앙하는 모양새가 생겨났다는 말도 덧붙였다.

“듣자니 오래 묵은 영귀들이라고 하던데, 그 힘이 꽤 걸출한 데다 인간 문명에 맛을 들였는지 아주 수전노라더군. 돈만 쥐여 주면 그 어떤 부탁이든지 들어준다고 하지 않소.”

그러면서 비마는 요새 자신도 돈을 모으고 있다고 하며 “혹시 내 악몽을 거둬가 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소?” 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 공자도 내킨다면 벽사단에 한 번 찾아가 보시오.”

비마는 진심인 듯했다. 혹시 벽사단에 갈 생각 있으면 저를 부르라는 말을 덧붙이더니, 직접 데려다주겠다는 말까지 했다. 비마는 겨우겨우 어렵게 가는 길을 알아두었다고 했다.

“벽사단에 가서 뭘, 어떻게 의뢰를 하라는 건데?”

그에 재겸이 물었다.

“뭐긴, 안에 있는 것을 떼어내 달라고 하시오.”

“하지만 그건 방금 네 입으로 어렵다고 했잖아.”

“그렇다고 해도, 벽사단에 무슨 수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 않소.”

지나치게 낙관적인 말에 재겸이 미간을 구길 때였다.

“혹, 이건 어떠시오?”

잠시 궁리를 하던 비마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공자는 죽고 싶어 하나, 죽지 못하는 몸이지 않소.”

비마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정 그렇게 생에 미련이 없다면, 봉인해달라 하는 것은 어떻소?”

재겸이 멈칫하며 비마를 쳐다보았다.

“…봉인?”

“그렇소. 허면 공자의 안에 있는 것도 안전할 터이니.”

비마가 푸르르, 투레질하며 재겸의 눈을 쳐다보았다.

“뭐, 이 또한 방법이라면 방법이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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