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정 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굴지 마. 기분 개 같으니까.”
윤태희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는 재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재겸은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냉랭해져 있었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채로 모질게 굴고 있었다.
“너야말로 애새끼처럼 굴지 마.”
그러나 재겸은 간파당한 입장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동요를 보이지도 않았고 흔들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기색이었다. 지금의 재겸은 윤태희가 이제까지 봐온 모습 중에서 가장 이성적이었고, 침착했으며, 매정했다.
어차피 이런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잠잠했을 뿐이지, 윤태희는 원래 이런 식이었다. 뭐 하나 수틀리면 곧잘 돌변하여 사람 치부를 후벼 파고 상처를 주는 인간이었으므로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재겸은 사력을 다해 윤태희를 밀어낼 생각이었다. 복수를 위해 살아온 윤태희가 망설임 없이 창밖으로 뛰어내리겠다고 말하던 그 순간, 재겸은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분명히 말했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더는 네 곁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나한테 할 말이 있으면 그 전에 네가 처음에 했던 약속부터 살려내. 그러기 전엔 너랑 얘기 안 해.”
말을 마친 재겸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집이야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으니 일단은 이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윤태희는 대화를 거부하고 떠나려는 재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재겸이 살벌한 얼굴로 말했다.
“놔.”
윤태희는 언젠가 저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사서 선생과 학생의 탈을 쓰고 서로를 엿보던 시절의 일이었다. 자신이 나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재겸은 이런 눈을 했었다.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걸어 잠근 눈이었다.
“나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여유가 없는 쪽은 오히려 윤태희였다.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 재겸은 마치 딱딱한 껍데기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더라도 그 껍데기를 깨뜨릴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이 윤태희를 점점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놓으라고 했어.”
“그건 안 되겠는데.”
“그럼 약속 지키겠다고 말해.”
“그렇게도 안 되겠는데.”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아, 이건 벌이다.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너의 마음이 자라나도록 방치하고, 나를 좋아한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담아둬서 받게 된 벌이다. 너와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네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네가 건넨 꽃을 뿌리치지 못한 대가다. 그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약점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렇게 된 것은 전부 제 탓이었다.
자신은 좀 더 윤태희에게 모질었어야 했다. 좀 더 매몰차게 밀어냈어야 했다. 생전 처음 겪은 감정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니고 말았다. 무언가에 취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윤태희에게 빠져든 상태였다. 그러니 이제라도 헤어나야만 했다. 서로를 위해서라도.
그리하여 재겸은 해결책을 떠올렸다.
버릴 수 없다면 지킬 것, 지킬 수 없다면 버릴 것.
약점이 생겼다면 그 약점은 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이 길에 네가 나의 약점이 된다면, 복수를 행하는 너에게 내가 약점이 된다면, 그렇다면, 전부 끊어내고 잘라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게 서로를 위한 길이었다.
“그래, 갈 데까지 가 보자.”
재겸은 싸늘한 낯으로 윤태희의 손을 확 뿌리치더니, 그대로 윤태희의 멱살을 틀어쥐고 가차 없이 주먹을 날렸다. 고작 몇 번의 주먹질로 윤태희의 얼굴은 금세 엉망이 되었다.
재겸은 한이 맺힌 사람처럼 윤태희를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윤태희에게 빠져든 스스로를 징벌하듯이, 마음을 도려내는 듯이, 헤어나려 발버둥을 치듯이 몇 번이고 주먹을 날렸다.
윤태희를 흠씬 두들겨 패다 어느 순간 윤태희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코끝이 닿을 것처럼 얼굴이 가까워졌다. 여과 없이 힘을 실어 가며 때린 탓에 숨결이 거칠었다. 재겸은 흐트러진 숨을 씨근거리며 윤태희의 얼굴을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계속 기어오를래?”
재겸이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
윤태희가 엉망이 된 얼굴로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작게 시작된 웃음이 차츰 번져나갔다. 피범벅이 된 얼굴로 힘없이 큭큭거리는 윤태희의 모습은 어딘지 애처롭게만 보였다.
“재겸아, 너무 애쓰지 마.”
윤태희가 상처가 난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그거 떼어낼게.”
뜬금없는 말에, 재겸이 멈칫할 때였다.
“……뭐?”
“불로불사의 저주 같은 건 애초에 없었어.”
그 순간, 재겸이 처음으로 동요를 보였다.
“인어 때문도 영생환 때문도 아니었어. 그런데 너는 상처가 낫지도 않고, 늙지도 죽지도 않아.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야. 네 안에 있는, 그 악신(惡神) 때문이지.”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태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날 거여도에서 보았던 재겸은 재겸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위험한 한계에 몰릴 때마다 재겸을 지키려는 것처럼 몸속에서 붉은 귀기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곤 했다.
재겸의 몸에서 붉은 귀기가 흘러나오는 모습은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윤태희는 그 귀기가 재겸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속에 재겸의 기운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맞닥뜨린 붉은 귀기는 불순물 없이 완전하게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재겸의 기운과는 달랐다. 그 압도적인 귀기 속에서 재겸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문헌에는 그 존재를 ‘악신’이라고 언급했으나 정확하게는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어떻게 해서 몸속에 그런 게 있는지는 몰라도, 그 존재의 영향을 받아서 재겸의 신체가 성장을 멈추고, 늙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가 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재겸아.”
윤태희가 제 멱살을 움켜쥔 재겸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힘든 이유는, 너한테 나쁜 게 붙어 있어서 그랬던 거야.”
그 순간, 재겸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받쳐 올랐다.
“그러니까 나한테 시간을 줘.”
결국, 냉연함으로 일관하던 재겸의 낯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럼 내가 전부 원래대로 돌려놓을게.”
재겸은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
재겸은 치밀어 오른 것을 꾹 삼켜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불덩이 같은 감정은 그대로 목 끝에 걸려서 넘어가질 않았다. 재겸의 숨결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윤태희.”
마침내 윤태희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그때 병원에서 분명히 말했지.”
재겸이 이를 악물고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저주 풀 방법 같은 건 더 이상 관심 없다고.”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
“내가 그거 떼어낼게. 어떻게든.”
“입 닥쳐,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어느새 평정을 잃은 재겸은 벌컥 악을 썼다.
“네가 뭘 아는데?”
“…….”
내 안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너는 아무것도 몰라.”
“…….”
재겸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아주 슬퍼 보이기도 했다.
“하루하루 사는 이유가 없어. 왜 사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거야, 나는 계속 여기 있는데, 정신 차리고 주변 돌아보면 아무도… 아무도 없어. 그 기분이 어떤지 네가 알아?”
해야 할 일도 없다. 하고 싶은 일도 없다. 세월의 이빨은 그리움도 추억도 전부 갉아먹고 빛나던 순간은 전부 희미해진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결국은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가고, 남은 것은 결국 나 혼자뿐이다.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는 사실만 남아 있다.
“대답해, 이 씨발 새끼야. 네가 뭘 아는데.”
재겸이 윤태희의 멱살을 움켜쥔 손에 힘을 쥐었다.
“이 기분을 네가 알아?”
“…….”
“네가 아냐고.”
“…….”
윤태희가 한참 만에,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몰라.”
눈앞에서 할아버지와 잡귀들을 잃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재겸처럼 무기력 속에 있지는 않았다. 윤태희에게는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윤태희를 일으켜 세운 건 복수심과 증오였다. 윤태희를 아프게 한 것은 전부 잃었다는 증오와 분노였지, 홀로 남았다는 고독함이 아니었다.
윤태희는 스스로 겪어보지 않는 한 재겸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근데 넌 알잖아.”
윤태희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재겸의 눈을 쳐다보았다.
“너는, 너는 알고 있잖아.”
그 순간, 재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너는 그런 걸 겪어봤으니, 이후에 남겨질 내가 어떨지 이미 알고 있지 않으냐는 대답이었다. 비수처럼 가슴에 박히는 대답이었다. 윤태희는 나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묘정이 내게 그러했듯이 나는 죽어서도 윤태희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윤태희는 나를 그리워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하고 그저 한때 함께한 순간들을 짐처럼 짊어진 채 살아갈 것이다.
“…….”
재겸은 이를 악물었다. 왜인지 자꾸만 숨이 찼다. 목 끝에서 울컥거리는 감정에 코가 쓰리고, 눈이 매웠다. 재겸이 어깨를 가파르게 들썩이며 씨근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뭐?”
재겸은 제 마음속에 있던 그 울창하던 숲이 그저 신기루이기를 바랐다.
“네가 남겨지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재겸이 붉어진 눈시울로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나 너한테 관심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