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윤태희의 눈가 한쪽이 일그러졌다.
거여도에 다녀온 것이 결과적으로는 실책이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윤태희였다. 윤태희는 섬에 다녀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나 재겸은 후회하고 있었다.
“너랑 그 섬에 가는 게 아니었어…….”
섬에서 함께했던 시간을 통째로 부정하는 말이었다.
“…….”
윤태희는 말없이 병실 벽면의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울컥 치받쳐 오르는 감정이 사그라지기를 기다렸다. 왜인지 눈이 시렸다. 자꾸만 눈가 한쪽이 경련했다.
사실, 재겸이 한 말 가운데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 영생환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내 저주는 인어와 연관도 없었어. 그런데 넌 그 먼 섬까지 가서 죽을 뻔했어. 그런데도 잘못됐다는 생각이 안 들어?
머릿속에 떠오른 나쁜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사람처럼, 윤태희는 두 눈을 감았다. 앞머리를 헝클어트리듯 손에 움켜쥔 채 숨을 크게 들이쉬던 윤태희가 불현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이해는 해. 너도, 나도 많이 놀랐으니까.”
긴 정적을 깨고 흘러나온 목소리에, 재겸이 고개를 들고 윤태희를 응시할 때였다.
윤태희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 약 기운 때문에 어지럽네.”
윤태희는 제 손목에 꽂힌 링거 주사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꾸벅꾸벅 조는 것처럼 말없이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재겸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 밑에서 정주 씨 기다릴 텐데.”
윤태희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태연해 보였다. 나를 죽여달라는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윤태희는 그 결심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넘기고 있었다.
“…….”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입을 열었다.
“윤태희.”
“약수 고마워. 동자님한테도 고맙다고 전해 줘.”
재겸은 평소와 다름없이 여상한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분명히 말했어. 원래대로 약속 지켜.”
윤태희는 듣는 둥 마는 둥 그저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더는 너랑 있을 이유가 없어.”
그 순간이었다. 윤태희가 갑자기 손목에 붙은 링겔 주사를 확 잡아 뜯었다. 반창고에 고정되어 있던 주삿바늘을 마구잡이로 뜯어낸 윤태희는 그대로 연결된 관을 확 잡아챘다. 그러자 병상 근처에 매달려 있던 링거 병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한순간에 와장창 박살 났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재겸은 저도 모르게 피가 흐르는 윤태희의 손목을 확 움켜쥐었다.
“너 말귀 못 알아들어?”
그러자 윤태희는 재겸의 손길을 확 뿌리치며 이마를 틀어쥐었다.
“듣기 싫다잖아.”
피가 줄줄 새는 손을 들어 이마를 감싸 쥔 윤태희가 낮게 중얼거렸다.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가라잖아.”
양손으로 이마를 움켜쥐고 있던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틀어 재겸을 바라보았다. 크게 뜨인 눈에는 희미한 광기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재겸은 여기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럼 약속 지키겠다고 말해.”
“그래, 씨발, 계속해.”
윤태희가 피식 웃는가 싶더니 고개를 저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것뿐이야.”
“나 미칠 때까지 어디 한 번 계속해봐.”
“너도, 나도 이만하면 충분히 한눈팔았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고.”
그 순간, 윤태희가 손을 뻗어 재겸의 멱살을 확 잡아 쥐었다.
“……그만해?”
멱살을 잡고 우악스레 끌어당기는 힘에 재겸의 상체가 앞으로 확 고꾸라졌다. 병상에 처박힐 뻔했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은 재겸이 이를 악물고 윤태희의 손목을 움켜쥘 때였다.
윤태희가 얼굴을 확 들이밀더니,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만해? 뭘? 뭘 그만해?”
재겸이 제 멱살을 쥔 윤태희의 손을 떨쳐내려고 했다. 그러나 어림도 없었다.
“이거 놔!”
윤태희가 멱살을 확 잡아당겼다. 둘의 코끝이 부딪쳤다.
“재겸아, 씨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재겸이 씩씩거리며 윤태희를 노려볼 때였다.
“시작도 안 했는데, 뭘, 뭘 그만해?”
윤태희의 얼굴이 확 흐트러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벌한 표정을 하고 있던 윤태희는 갑자기 어깨를 떨며 웃고 있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은 희게 질려 뼈대가 불거져 있었다.
“전부 없던 일로 하고, 네 복수에만 집중하란 말이야!”
재겸이 이를 악물고 찢어발기듯 말을 뱉었다.
“없던 일로 해? 어떻게?”
윤태희가 헛웃음을 흘리며 잡고 있던 재겸의 멱살을 확 풀었다.
“지금 여기서 창문 열고 뛰어내리면 돼?”
그 순간, 재겸의 낯이 무섭게 굳었다.
“그럼 되겠네, 전부 없던 일이 될 테니까.”
안 그래? 윤태희의 뒷말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짜악—
윤태희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
한발 늦게 윤태희가 손을 들었다. 천천히 자신의 뺨을 쓸어볼 때였다.
“너는 이 씨발새끼야… 고작 나 하나 때문에….”
재겸은 이를 악물고 윤태희의 멱살을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환자복이 쑥 올라가며 윤태희의 마른 배가 훌쩍 드러났다. 목이 조르는 듯한 힘에, 윤태희는 한껏 미간을 구길 때였다.
“…….”
윤태희는 숨을 멈췄다. 재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10년을… 10년을 기다렸다며…….”
윤태희가 눈앞의 재겸을 멍하니 바라볼 때였다.
“눈앞에서 전부를 잃었다며.”
순간, 윤선오의 두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럼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눈물 맺힌 눈으로, 재겸은 거친 숨을 뱉으며 씨근거렸다.
“우리가 왜 손을 잡았는지 잊었어?”
불안, 공포, 두려움, 모든 감정이 뒤엉켜 윤태희는 점점 망가지고 있었다. 재겸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윤태희의 약점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에게 윤태희가 그러하듯이.
서로가 서로의 약점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정신 차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란 말이야!”
멍하니 굳어 있던 윤태희의 눈가가 짧게 경련하는 순간이었다.
“석주련이 이상해.”
정말이지 난데없는 말에, 윤태희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뭐?”
“아무것도 묻지 않고 뒷수습을 했어.”
눈물이 흘러내리기 전에, 재겸은 옷소매로 눈가를 험하게 문질러 닦았다.
“나한테 아무것도 묻질 않았어.”
섬에서 빠져나온 그 날, 병원에 혼자 남겨져 있던 재겸은 수술실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소식을 들은 팀원들이 달려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 수술에 들어간 윤태희가 생사의 고비에 있다는 것, 현재 위급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 팀원들은 하나같이 낯을 굳히더니 재겸을 붙잡고 대체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고 물었다.
석주련이 나타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때마침 도착한 석주련은 손을 들어 팀원들을 제지하더니, 재겸에게 잠시 따라오라고 했다. 석주련이 재겸을 데리고 향한 곳은 병원 건물 밖, 사람이 아무도 없는 구석진 장소였다.
석주련은 재겸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디선가 생수 한 병을 사서 돌아왔다.
“윤 수석이 죽을까 봐 두렵나?”
재겸에게 생수를 건네며, 석주련이 한 말이었다.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제 발을 바라보고 있던 재겸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내밀린 생수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녀석은 죽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아.”
그 말에, 처음으로 정신이 들었다. 석주련은 눈높이를 맞추듯 재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재겸의 손에 생수를 쥐어주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재겸이 입술을 달싹이려 할 때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낼 테니.”
석주련이 말했다. 재겸은 그 말에 담긴 무게를 알아차렸다. 막연한 낙관에 의지해서 재겸을 위로하기 위해 건넨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석주련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짐’이었다.
“…….”
재겸은 그 순간 현실감을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뺨에 와닿는 서늘한 밤공기, 생수병에 맺혀 있는 찬 기운, 슬리퍼도 없이 맨바닥을 딛고 있는 지저분한 발의 감촉이 차츰 생생해졌다.
석주련은 아무런 말 없이 재겸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그래, 이제 정신을 좀 차렸나?”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재겸은 말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그럼…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석주련의 물음에, 재겸은 눈을 꾹 감았다. 머릿속이 정지한 와중에도 인어와 영생환에 대해서 함구해야 한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낼 여력은 없었다. 만약 윤태희라면 이 상황에서 뭐라고 했을까. 잠시 고민해봤으나 머릿속은 여전히 백지상태였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이 재겸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애썼군.”
그저 면피하려고 꺼낸 말이라는 것을 석주련은 단숨에 꿰뚫어 보았다.
“누구처럼 사기꾼은 못 되겠어.”
석주련이 고개를 저으며 조소했으나, 재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재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던 석주련이 어느 순간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재겸의 하관을 잡아 쥐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재겸은 당황하여 석주련을 올려다보았다. 더 묻지 않기에 이대로 지나가려는 줄 알았으나, 석주련이 싸늘한 낯으로 뇌까렸다.
“네가 한 짓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어.”
생각지 못한 말에, 재겸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유감이야.”
석주련은 그런 재겸의 낯을 샅샅이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잘 기억해 봐. 그 녀석이 널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윤 수석이 팀의 말단인 너를 데리고 섬에 기어들어 간 건, 개인적으로 훈련을 도와주기 위해서였어.”
“…….”
“무기에 귀기를 싣는 법을 알려주다가 네가 실수로 그 녀석을 찌른 거야.”
“…….”
재겸은 숨도 쉬지 못하고 멍하니 석주련을 바라보았다.
“어때, 이제 좀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나?”
석주련은 무표정한 눈으로 물었다.
“…….”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리가 없었다. 석주련은 지금 저 대신에 보란 듯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런 대책이 없는 재겸을 위해서 아귀가 맞는 핑계를 건네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어째서?
그 순간, 재겸은 알아차렸다.
석주련은 어떤 진실을 손에 쥐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