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30)화 (230/348)

#230

눈을 떴을 때 윤태희는 너른 들판 위에 서 있었다.

머리 위에 드리운 맑은 하늘, 한적하게 흐르는 강, 푸르게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던 윤태희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으며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윤태희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한없이 평화로우면서도 따스한 정경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 멀리 나무로 지은 오두막 한 채가 보였다.

꽃에 이끌리는 나비처럼 윤태희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오두막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자, 오두막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선오야.”

선오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시시?”

그에 선오는 목소리의 행방을 찾아 자신의 왼쪽 손목으로 시선을 주었다. 옷 소매를 슬쩍 걷어 보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손목이 깨끗했다. 팔찌처럼 제자리에 감겨 있어야 할 검은 뱀 시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어디, 어디서 말하고 있는 거야?”

선오는 고개를 이리저리 꺾어 가며 시시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시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선오의 낯이 점차 기이해질 때였다.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시시가 갑자기 타박하듯 말을 건넸다.

“분명히 말했지. 그 아이를 구하면 네가 죽는다고. 그런데 너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어. 그래서 너는 이곳에 오게 된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선오의 눈앞에 일생이 펼쳐졌다.

쓰레기와 고물이 가득 쌓여 있던 유년 시절의 집, 멍청하고 사랑스럽던 잡귀들, 마음 놓고 사랑할 수도 증오할 수도 없었던 할아버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지던 순간이 한데 뒤엉켜 흐릿하게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던 선오는 불현듯 손을 들어 제 가슴팍을 매만져 보았다. 칼에 찔렸던 가슴은 상처 없이 멀쩡했다. 다만,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그 눈동자만은 여전히 가슴에 박혀 있었다. 그것이 선오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면이었다.

선오는 그 얼굴이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했다.

어느 날 갑자기 별똥별처럼 찾아온 소년이 있었다.

선오는 그 소년을 앓듯이 사랑했다.

“나 죽었어?”

제 죽음을 묻는 선오는 동요 없이 평온해 보였다.

“그렇다고 하면 어쩔 건데?”

시시가 날이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선오는 사실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서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만약 이 삶의 기한이 다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은 죽음의 형태가 아니라 나례청을 무너뜨리고 일생의 복수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살아온 인생이었다.

“이렇게 끝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선오가 고개를 뒤로 꺾으며 중얼거릴 때였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마침내 시시가 노기 섞인 음성을 뱉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표시를 남겨 뒀어. 그리고 넌 틀림없이 그걸 알아봤을 거다. 하지만 넌 모른 척했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얼마나 더 헛수고하게 만들 셈이야?”

시시가 잔뜩 화가 난 기색으로 말을 쏘아붙였다.

“대체 내가 언제까지 널 봐줘야 하지? 그 애와 이 이상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는 걸 너도 이미 알고 있었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너와 그 애가 만나도록 하지 않았을 거야.”

시시는 왜인지 분노하고 있었다. 선오는 시시가 왜 화가 난 건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당연히 시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 의미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라고 너희 둘을 만나게 한 게 아니란 말이야!”

이어진 말에, 선오의 눈매가 단숨에 가늘어졌다.

“……만나게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네게는 주어진 사명이 있고 너는 그걸 받들어야만 해.”

선오의 질문에도 시시는 아랑곳없이 제 할 말만을 이어 나갔다.

“언제까지고 본향이 너의 편으로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마.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한 번만 더 정해 준 길 밖으로 벗어나면, 너는 이제까지 쌓아 온 모든 걸 잃게 될 거야.”

시시는 잠시 말을 멈추는가 싶더니, 최후통첩을 보냈다.

“돌려보내는 건 이번이 끝이다.”

궁극적으로 시시가 하고자 했던 말은 이것이었다.

“더는 그 애를 가까이하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시야가 암전되었다. 마치 누가 불을 끈 것처럼 온 사방이 암흑에 잠긴 순간이었다. 암흑 속에서 눈이 생겨났다. 흡사 공작새가 깃을 펼친 것처럼, 수백 수천 개의 눈이 어둠 속에 깨어나 선오를 노려보았다. 몹시 기괴한 광경에 선오의 낯이 굳었다.

어둠 속의 눈들이 하나둘씩 닫히기 시작하더니, 단 한 쌍의 눈이 남았다.

이 눈은……,

자세히 보니, 본 적이 있는 눈이다.

“…….”

선오는 숨을 들이켰다. 검은 복면 사이로 보이는 핏자국이 튄 눈매. 선오는 그제야 저 눈의 주인이 누군지 알았다. 시시는 선오를 단숨에 ‘그날’로 되돌려 놓았다.

나자들에게 발각되어 할아버지가 죽었던, 모든 것을 잃었던 날이었다.

오두막은 어느새 화염이 휩싸여 있었다. 사방에서 조여 오는 암흑이 선오를 무겁게 짓눌렀다. 커다란 함에 숨어 무력하게 숨을 죽이고 있던 그 날의 감각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코앞에서 검은 복면인을 마주한 선오가 헉, 거세게 발작하며 몸을 일으킬 때였다.

그 순간, 철제로 된 병상이 덜컥거리며 그 반동으로 인해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선오는 짧게 신음을 흘리며 곧장 상체를 수그렸다. 현실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선오는 하얗게 질린 낯으로 이마를 짚었다.

씨발, 시시…….

의도가 무엇이든 시시가 꺼내 든 방법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세월에 빛바래듯 다소 흐릿해졌던 감정이 날붙이처럼 시퍼렇게 목을 겨눴다. 이따위로 엿을 먹일 줄은 몰랐다.

그때, 눈동자의 주인이 말을 건넸다.

“정신이 드나?”

그에 선오가 흠칫하며 눈앞의 상대를 바라볼 때였다.

“날 알아보겠어?”

냉정한 눈매였지만, 그 눈빛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던 선오는 시선을 내려 제 몸을 살펴보았다. 언제 갈아입었는지 모를 환자복 차림이었다. 손등에는 링거를 연결한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고, 가슴엔 넓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 안쪽에서 불쾌한 둔통이 느껴졌다.

“……석 부장님?”

윤태희가 깨어난 곳은 병원이었다.

***

석주련은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때는 늦은 밤이었고, 평소와 다름없이 축역부장실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조용하던 축역부장실의 고요가 깨진 것은 희미한 진동음이 울렸을 때였다.

축역부 윤태희

개인 휴대전화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발신인을 확인한 석주련은 곧장 전화를 받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휴대전화 너머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윤 수석.”

정적이 이어졌다. 처음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잘못 걸었나 싶었지만, 이내 석주련은 여태껏 윤태희가 단 한 번도 전화를 잘못 건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그러다 휴대전화 너머에 낮게 깔린 숨소리를 알아차린 석주련은 불현듯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윤 수석?”

마침내 무언가를 직감한 석주련이 휴대폰을 고쳐 쥘 때였다.

- 윤… 수석, 님이….

그 순간, 석주련은 선득한 추락감을 느꼈다.

- 눈을 안 떠요.

한참 만에야 들려온 음성은 떨리고 있었으며 윤태희의 것이 아니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석주련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도 전에 다그치듯 위치를 물었다.

그러나 석주련은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 아무리 불러도 눈을 안 떠요…….

전화를 건 이는 재겸이었다. 멍한 음성에 피가 차게 식는 듯했다. 휴대폰 너머로 전해 듣는 그 음성만으로도 석주련은 재겸이 현재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석주련은 통화를 끊고 경찰과 연계하여 휴대폰 위치를 추적했다. 전파가 잡힌 곳은 남해 끝자락에 있는 ‘거여도’라는 섬이었다.

석주련은 그 즉시 본청 안에서 대기 중이던 치유 담당 정화부 나자들을 집합시켰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의 구조 헬기를 띄워 윤태희를 병원에 이송하라 명령을 내렸다.

헬기가 발견했을 때 윤태희는 이미 중태에 빠져 있었다. 워낙 피를 많이 흘린 탓에 맥박은 희미했으며 생사가 위중한 상태였다. 그렇게 윤태희는 의료 헬기에 실려 섬에서 거리가 가장 가까운 지역 거점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도착한 즉시 응급 수술에 들어갔다.

천만다행으로 심장을 비롯한 다른 장기를 비껴갔지만, 내상이 아주 깊었다. 나례청이 인계한 병원 의료진뿐만 아니라 정화부 나자들도 여덟 명이나 투입되었다. 극심한 출혈로 인해 피를 몇 팩이나 수혈받아야 했고, 신체의 회복력을 최대한 증폭시켜야 했기에 나례청에서 공수해 온 약수를 전부 쏟아붓고 나서야 수술이 끝났으나, 예후가 매우 좋지 않았다.

수술이 끝난 이후 윤태희는 서울에 있는 한 대학 병원으로 옮겨졌고, 외부와 격리되어 병원 의료진과 정화부 나자들의 집중 치료를 받았다. 쉽게 소생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정화부가 없었다면 아예 가망이 없었을 것이었다. 구조가 조금이라도 더 늦어졌더라면 숨을 붙여 놓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거라고 나례청 담당 주치의는 거듭 강조했다.

현재 윤태희가 입원해 있는 곳은 병원 제일 꼭대기 층에 있는 VIP 병동의 1인실이었다. 석주련은 출근길과 퇴근길, 하루에 두 번씩 병원에 드나들며 윤태희의 경과를 살펴보았다.

윤태희가 깨어난 것을 확인한 석주련은 곧바로 의료진을 호출했다.

“곧 의사가 올 거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손끝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이마를 감싸 쥐고 있던 윤태희가 고개를 들었다.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된 석주련을 바라볼 때였다.

“너, 2주 동안 의식이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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