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저기 누군가 서 있었다.
“묘정?”
소리 내어 이름을 부르자, 묘정이 천천히 고개를 틀더니 재겸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재겸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강렬한 감정에 휩싸였다. 동시에 붉은 귀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날것의 감정은 재겸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복수. 파괴. 증오. 분노. 그리고 슬픔.
자아와 이성을 잃고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진, 진정한 폭주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죽였는데? 틀림없이 이 손으로 죽였는데….
재겸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비틀거리며 묘정에게 다가갔다.
“묘정, 왜 아직 살아 있어?”
눈앞에 서 있는 것은 틀림없이 묘정이다. 제 앞에 등을 보이고 선 묘정은 한 손에 기다란 장검을 쥐고 있었다. 묘정은 비스듬히 고개를 틀고 스산한 얼굴로 재겸을 보고 있었다.
“말 해, 왜 아직도 살아 있느냔 말이야…….”
재겸은 어느샌가 기묘한 광기와 살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를 죽이러 온 거구나. 그렇지?”
붉은색 귀기가 재겸의 손에 무기를 쥐어 주었다.
귀기가 극단적으로 치달으며 생겨난 무기는 묘정의 손에 들린 칼의 형태를 빼닮아 있었다. 재겸은 묘정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검이 맞붙으며 엄청난 폭풍을 만들어 냈다.
“너는 원수를 상대로 망설이는 것이냐?”
그때, 귓가에 묘정이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적의에 사로잡힌 재겸은 묘정을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몇 번이고 검이 맞붙었다. 과연 묘정의 검기는 가공할 만한 실력이었다.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도 묘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격돌하듯 부딪친 귀기가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묘정과 함께한 순간순간들이 머릿속에 뒤섞였다. 조각조각 짜 맞춘 조각보처럼 자연스럽게 하나의 장면으로 성기어 갔다. 환상에 사로잡힌 재겸은 어느샌가 묘정을 죽였던 아주 오래전의 어느 날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 원수를 갚으러 온 것이냐? 어디 한번 보자꾸나.”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잔뜩 이죽거리며 저를 농락하는 목소리와는 달리, 묘정의 검은 몇 번이고 재겸을 밀어 내기만 했다. 공격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묘정의 검은 그 틈을 파고들지 않고 방어하는 데만 급급했다. 게다가 평소 묘정의 검기라고 하기엔 이상하게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하고 틈이 생긴 순간, 재겸은 망설임 없이 검을 찔러 넣었다.
재겸의 눈가에 붉은 피가 팍 튀었다. 그와 동시에 묘정의 움직임이 일시에 멎었다. 재겸은 묘정의 가슴에 찔러 넣은 칼을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를 바라보는 묘정의 눈가가 일그러져 있었다.
“하… 하하… 하!”
재겸의 입가가 작게 경련했다. 통쾌하고 홀가분했다. 오랜 목줄을 풀어낸 것처럼 속 시원하고 후련했다. 다시 한번 복수를 이뤄 낸 재겸은 우는 듯 웃는 듯, 서글프게 웃었다.
“나를 배신한 대가야.”
그 순간, 묘정이 천천히 팔을 들었다. 묘정은 재겸의 어깨 위에 팔을 걸치더니 그대로 재겸의 목을 끌어안았다. 묘정이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재겸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었다.
“겸아.”
재겸의 웃음기가 차츰 사그라들었다.
“재겸아.”
재겸은 멈칫하며 제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묘정을 바라보았다. 묘정에게 복수를 하던 그날, 이런 장면은 없었다. 묘정은 이대로 쓰러져서 제 발치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런데 묘정은 양팔로 재겸의 목을 감고, 온 힘을 다해 꽉 끌어안고 있었다.
“재겸아.”
넓은 어깨, 단단한 팔, 언제나 의지가 되어 주었던 온기가 선명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늘상 크게 느껴졌던 품은 묘정의 품과 비슷한 듯했으나 이상하게도 향기가 났다.
“…….”
어느 순간 기묘한 위화감을 느낀 재겸은, 저도 모르게 묘정의 양어깨를 잡고 몸을 떼어 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묵직하게 기대 오던 몸은 종잇장처럼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재겸은 방금 전까지 저와 검을 겨루던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다시 봐도 분명 묘정의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묘정의 얼굴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시야에 찬 얼굴이 마구 어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다른 이의 얼굴로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묘정으로 보였던 얼굴에 다른 이의 얼굴이 겹치더니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눈앞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재겸의 낯이 천천히 굳었다.
“네, 네가 왜….”
묘정의 얼굴 속에 겹쳐 있던 것은 윤태희의 얼굴이었다.
“…윤태희?”
그 순간, 재겸의 손에 들려 있던 칼이 기화하듯 흩어졌다.
재겸의 눈동자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왔다. 재겸은 시야에 꽉 찬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윤태희의 얼굴은 붉은 선혈과 대비되어 아주 섬뜩해 보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윤태희가 왜 여기에?
재겸은 황망한 낯으로 윤태희의 양어깨를 부여잡았다.
“왜… 왜 네가… 왜….”
눈앞에 있는 것은 묘정이 아니라 피투성이가 된 윤태희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새하얗게 질린 손은 윤태희의 어깨며 팔을 잡아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며 허망하게 배회했다. 어느 순간, 시선을 내리깐 윤태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재겸아. 나 좀 안아 줘….”
꺼져 가는 불씨처럼 힘없는 목소리였다.
윤태희가 쓰러질 것처럼 몸을 푹 기대 왔다. 재겸은 홀린 듯이 제 몸에 기대 오는 윤태희의 등을 둘러 안았다. 손에 닿는 윤태희의 날갯죽지 부근이 축축했다. 칼에 찔린 탓이었다. 그에 재겸은 넋이 나간 얼굴로 윤태희의 피로 젖은 제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 누구야?”
그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윤태희가 중얼거렸다.
“너? 태, 태… 태희….”
재겸이 멍하니 대꾸하자, 윤태희가 힘없이 픽 웃었다.
“맞아, 나 태희야.”
“…….”
“그럼 넌 누구야?”
그때부터였다. 재겸은 겁에 질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나, 나는… 나는….”
재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눈가는 파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헌데, 이 무게감만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나 겸이….”
한참 만에야, 재겸이 겨우 대답을 쥐어 짜냈다.
“맞아.”
윤태희는 재겸의 어깨에 이마를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태희고, 너는 재겸이야.”
“…….”
“그리고…”
윤태희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좋아하고….”
겨우 입술을 달싹이던 윤태희가 비틀거리며 몸을 바로 세웠다. 힘겹게 고개를 든 윤태희는 재겸의 뺨 한쪽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잠에서 깬 사람처럼 비몽사몽한 얼굴이었다.
“너를 좋아하고….”
꼭 기억하라는 듯이, 윤태희가 말을 꼭꼭 씹었다.
“널 너무너무 좋아해.”
그 말을 끝으로, 윤태희의 무릎이 푹 꺾이며 상체가 무너져 내렸다. 윤태희는 미끄러지듯 재겸의 몸에 어깨를 툭 박았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
재겸은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며 자신의 양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제 발치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재겸의 호흡이 엉망으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는 광경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뭐야….”
재겸은 황망한 얼굴로 무릎을 털썩 꿇었다.
“아니야.”
언젠가 이 상황과 똑같은 악몽을 꾼 적이 있다.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을 누군가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그때도 꿈에서 묘정을 보았다. 묘정을 칼로 찌르자, 갑자기 묘정이 윤태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이상한 악몽은 현실이 되어 있었다.
“거봐, 넌 그 애를 죽이고 싶었던 거야.”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폭주의 여파로 앞뒤 상황을 둘러싼 기억들이 휘발된 것처럼 흐릿해져 있었다. 선명한 것은 묘정, 아니 윤태희를 찔렀을 때의 감각뿐이었다. 이곳은 어디이며,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생각해, 생각하란 말이야….”
그리고, 윤태희는 지금 죽어 가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재겸은 제 머리를 감싸 쥔 채 고개를 저었다.
“메산이가… 준 거… 약, 약… 약수… 약수가 있어….”
끙끙거리던 재겸은 어느 순간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재겸은 윤태희를 들쳐 업으며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괘,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재겸은 넋이 나간 얼굴로 윤태희를 등에 업고 정신없이 내달렸다. 하늘에서 비가 퍼붓고 있었다. 쏟아붓는 비에 얼굴이 온통 축축했다. 이토록 퍼붓는 것이 빗물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올 때는 분명 신발을 신고 있었건만 지금 재겸은 맨발로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힘없이 축 늘어진 윤태희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폭우 속에 황토집에 도착한 재겸은 평상 위에 윤태희를 내던지다시피 눕혔다. 문을 벌컥 열고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뒤집어엎었다.
“어, 어딨어… 어딨어! 어딨어! 어딨어!”
재겸은 혹한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정신없이 떨고 있었다.
가방 속의 물건을 내던지다시피 짐을 뒤졌다.
약수를 담은 생수통이 보였다. 약수를 챙긴 재겸은 헐레벌떡 평상에 눕혀 둔 윤태희에게 달려갔다. 어찌나 경황이 없는지 마루에서 굴러떨어지다시피 넘어져 발목을 푹 접질리며 우당탕 굴러떨어졌다.
앞으로 고꾸라졌던 재겸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약수 뚜껑을 열었다. 자신의 손으로 칼을 쑤셔 넣은 상처에 약수를 쏟아부었다. 그러자 피가 멎는 것처럼 보였다.
허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상처가 워낙에 컸고 출혈이 많았다. 아무리 메산이의 약수라고 해도 이렇게 큰 상처에 이 정도의 양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 정도로는 죽어 가는 이 아이를 되돌려 놓기에 부족했다.
재겸은 점점 숨이 가빠졌다.
재겸은 꺼져 가는 불씨를 잡는 사람처럼 절박하게 윤태희를 흔들어 깨웠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놀랐어?’ 하고 웃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윤태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윤태희를 흔들어 대던 재겸은 제 가슴팍의 옷을 쥐어짜듯이 잡아당겼다.
“야… 도, 도와줘….”
“…….”
“도, 도와줘, 도와줘… 제발.”
“…….”
“어떻게 좀 해 달란 말이야-!”
재겸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러나 제 안에 있는 녀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재겸은 제 분에 못 이겨 숨을 씩씩 몰아쉬며 윤태희의 목을 콱 움켜쥐었다. 그러자 목덜미 안쪽에서 펄떡거리는 맥박이 점점 잦아드는 느낌이 손바닥 안에 고스란히 전이되어 왔다. 마침내 재겸의 얼굴이 엉망으로 무너졌다.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빼자 윤태희의 몸이 축 늘어졌다.
“…….”
윤태희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와 하늘에서 퍼붓는 비. 을씨년스러운 바람.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지금 이 순간, 재겸은 비로소 ‘재앙’이 무엇인지 알았다.
이것이 재앙이었다.
윤태희는 미동조차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퍼붓는 비가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핏기를 씻어 내고 있었다. 재겸은 깨달았다. 이대로 윤태희는 죽을 것이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재겸이 문득 상체를 수그렸다. 심장이 아팠다. 상처가 재생하여 원래대로 돌아왔는데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옥죄듯이 아팠다.
재겸의 얼굴이 아이처럼 일그러졌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재겸은 끙끙거리며 윤태희를 내려다보았다. 윤태희의 고요한 얼굴을 보니 왜인지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됐다. 내내 알아보지 못했던, 감춰 두었던 감정들이 재겸을 덮쳐 왔다. 재겸은 윤태희의 양 뺨을 쥐었다. 붙잡고 놔주지 않으며 떼를 쓰는 아이처럼, 재겸은 윤태희를 코앞에서 내려다보며 더듬더듬 두서없이 말을 뱉기 시작했다.
“이, 있잖어. 있잖어. 태, 태희야. 나, 나도, 나도….”
떨리는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뭉개졌다.
“나도 너를….”
자꾸, 자꾸만 무슨 말이 하고 싶었다.
“나, 나, 나도 네가 꿈에 나왔고….”
그래,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재겸의 어깨가 숨가쁘게 들썩거렸다.
“나도 너를… 으으… 으….”
뒤이어 떠오른 말에 재겸이 어느 순간, 덜컥 숨을 멈췄다.
‘괜찮아, 아직은 혼란스럽고 헷갈릴 수 있어. 하지만 각오는 해 둬. 언젠가는 반드시 헷갈리지 않는 순간이 올 테니까.’
헷갈리지 않는 순간,
그 순간은 잔혹하게도 바로 지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