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재겸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괴리감에 휩싸여 있었다.
- 이 세상에 흉화를 내려주마.
그 말을 듣는 순간, 재겸은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고,
흉화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되물으려는 찰나, 암흑이 찾아왔다. 소년이 던진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마치 스위치를 끈 것처럼 시야가 한순간에 암전되는가 싶더니, 온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그 무엇도 체감할 수 없었지만, 의식은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그것은 아주 기이한 느낌이었다. 의식은 있으나 의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재겸은 불현듯 자신이 나무에 묶여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당황한 재겸은 고개를 꺾어 나무를 살펴 보았다. 나무는 아주 거대했으며, 온통 검은색이었다. 이파리 없이 하나 시커멓게 썩어서 말라 죽은 나무의 기운은 몹시 무거웠고 음산했다.
이 나무는 뭐야? 그리고 왜 여기에 묶여 있는 거지…….
- 이건 내 본연이야.
그때, 어디선가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내리자, 소년이 무릎을 세워 앉은 채 재겸을 멀뚱멀뚱 올려다보고 있었다. 묶여 있는 재겸과 달리 소년은 자유로워 보였다.
-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네가 몸의 주도권을 넘겨줬잖어.
나무에 묶여 있는 것은 바로 재겸의 의식이었다.
- 그, 그럼 너는 지금 바깥에 있는 거야?
바깥이라고 말하니 뭔가 이상했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 응. 맞어. 이건 내 의식의 조각이고.
재겸의 의식은 내면 속 소년의 힘으로 결박된 상태였다.
거대한 나무에 묶인 재겸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모든 움직임이 봉쇄된 상태였다. 겨우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갑자기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암흑이 횡으로 열렸다. 암흑 사이로 펼쳐진 것은 현실의 ‘재겸’이 두 눈에 담고 있는 시야 그 자체였다.
- 저, 저게 뭐야?
- 네 눈에 보이는 바깥 풍경이야.
재겸은 얼떨떨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유하자면 두 눈으로 현장을 직접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언젠가 영화관에 갔을 때처럼 스크린을 통해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면서 거리감이 생긴 탓이었다. 시야가 묘하게 갑갑하면서도 아득했다.
소년에게 몸의 주도권을 내어준 재겸은 구경꾼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으나, 소년이 말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다른 건 다 제쳐 두더라도 일단 몸을 일으켰음에 깊이 안도했으나, 잠시뿐이었다.
‘재겸’이 만들어 낸 붉은 폭풍은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먹구름이 불러일으켰다. 자연을 압도하는, 그야말로 신의 권능이었다.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고, 바다가 뒤집히기 시작하더니 벼락이 내리쳤다. 산천초목이 메마르고 쿠구궁, 소리와 함께 땅이 갈라졌다.
흡사 ‘재해(災害)’와도 같은, 괴물 같은 힘이었다.
- 저, 저게 무슨…….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재겸은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재겸’이 붉은 귀기를 두르고 땅을 박차며 총알같이 튀어나갔다. 합의한 적 없는 돌발 행동에 재겸은 당황했다.
윤태희의 곁을 지나친 ‘재겸’은 그대로 인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몸의 주도권을 내어준 재겸의 의지와는 무관한 행동이었다.‘재겸’은 인어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았다. 길가에 핀 꽃을 꺾듯이 무심하면서도 가벼운 손길이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시커멓게 말라 비틀어진 인어를 휙 집어 던진 ‘재겸’이 양팔을 확 벌렸다.
“역시, 끝내주는 그릇이야…….”
몸을 차지한 ‘재겸’은 옷 태를 살피듯이, 제 몸 구석구석을 내려다보다가 조그맣게 혼잣말을 뱉었다. 그릇을 감상하는 목소리에는 감탄이 묻어났다. 비로소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넘치고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때, 몸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재겸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 너, 방금 그게 뭐 하는 짓이야?
- 엉? 왜?
내면에 남아 있던 소년이 의아한 낯으로 재겸을 올려다보았다.
- 왜냐니? 방금 네 멋대로 굴었잖아.
- 보면 몰라? 널 도와주는 거잖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던 소년이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 너희 인간들 손으로는 여간해서 죽이기 힘들걸? 그러니까 내가 대신 죽여줄게.
그와 동시에 ‘재겸’이 바다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안개처럼 늘어져 있던 사악한 귀기가 투창 같은 형태로 바다에 내리꽂혔다. 머지않아 바위틈에서 누가 물감이라도 푼 것처럼 진한 녹색으로 된 핏물이 번져 나왔다. ‘재겸’은 무표정한 낯으로 바위 사이에 몸을 숨겼던 인어의 시체에 가까이 다가갔다. 투창에 관통 당한 인어의 육신이 축 늘어져 있었다. 저 너머 눈앞에 펼쳐진 참혹하고도 끔찍한 광경에, 재겸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 이제 그만 해.
물론, 몸을 회복해서 현실로 돌아간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인어를 상대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치유력이 뛰어난 인어들은 공격을 해도 금방 재생하니 이 상황을 돌파하고 무사히 거여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손을 쓰기는 써야만 했다.
- 왜? 아직 한 마리 남았어.
따라서 인어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재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재겸은 왜인지 현실 속 ‘재겸’의 행동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저것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인어의 목을 비틀어 죽이는 데 있어서 일말의 주저함이나 망설임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 내가 부탁한 건 몸을 낫게 해주는 것까지였어.
재겸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을 쏘아붙였다.
- 이제 풀어 줘. 내 몸에서 비켜.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잠시 말이 없던 소년이 몸을 훌쩍 일으키며 대꾸했다.
- 싫어.
- …뭐?
- 이 몸, 그냥 내가 가지면 안 되냐?
- …….
소년의 진지한 물음에, 재겸은 잠시 침묵했다.
재겸은 소년이 일부러 저를 속인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소년은 분명 재겸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그 호의와는 별개로, 솔직하고 뚜렷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소년은 감정에 순수한 만큼 변덕이 심했다. 막상 몸을 차지하고 나니 욕심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 너, 이 씹새끼가…….
재겸은 젖먹던 힘을 다해 간신히 팔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어떤 힘을 거스르는 것처럼, 팔 관절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나갔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사지에 육중한 바위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무형의 권능이 재겸의 의식과 의지를 결박하고 있었다.
- 좋은 말로 할 때 비켜. 약속하고 다르잖아.
- 완전한 내 그릇이 되는 건 어때? 이대로 내게 종속된다면, 너는 모든 걸 다 잊고 살 수 있어. 내가 그렇게 해줄게.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그랬잖아. 내가 네 삶을 거둘게.
소년은 재겸의 지난 시절을 지켜보았고, 재겸이 삶을 끝내고 싶어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의식을 완전히 집어삼킨다면 죽음은 아니더라도 재겸이 바라는 안식의 형태와 비슷할 터였다. 그러나 재겸은 나무에 묶인 몸을 뒤틀며 마구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 웃기지 마, 네가 뭔데.
그와 동시에 소년이 이마를 틀어쥐더니,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 아, 윽….
서로의 의식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몸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다툼을 벌였다. 그 영향은 현실의 ‘재겸’에게도 미치고 있었다. ‘재겸’이 울컥, 피를 토했다. 재겸이 몸 안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한쪽 눈알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지금 당장 몸의 주도권을 손에 쥐고 있는 만큼 고통을 겪는 건 ‘재겸’, 그러니까 재겸의 몸을 차지한 소년이었다.
- 썅,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소년이 작게 뇌까리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재겸의 몸을 결박하고 있던 밧줄이 뚝 끊어졌다. 재겸이 순수한 제 의지로 밧줄을 끊어버릴 줄 몰랐던 소년은 당황했다. 소년의 눈이 크게 뜨이는 순간이었다. 재겸은 그대로 소년의 몸에 올라타더니 멱살을 움켜쥐었다.
퍼억---
소년의 얼굴을 거세게 후려치는 순간, 재겸은 번쩍 눈을 떴다.
마침내 재겸은 익숙한 현실감을 느꼈다. 온몸의 감각이 되살아나며 빗방울 섞인 바람결이 뺨에 선명하게 와 닿았다. 소년의 의식을 밀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눈앞에 붉은색 유리창이라도 덧댄 것처럼 세상이 온통 붉게 보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형체가 어그러지고 뭉개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어지러웠고 엄청난 분노가 몰아닥쳤다. 감정이 파도처럼 널을 뛰었다. 이것은 재겸의 것이 아닌, 소년의 감정이었다.
재겸에게 밀려난 소년이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씨발… 작작 좀 해….”
재겸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엄청난 두통이 몰아닥쳤다.
소년은 재겸이 간직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잔뜩 헤집어 놓았고, 우물을 퍼 올리듯 재겸의 마음속 가장 밑바닥에 고여 있던 깊숙한 감정을 꺼내 올렸다. 그것은 바로 ‘증오’였다.
재겸은 머리를 감싸 쥔 채 처절한 감정 속에서 괴로워했다.
“그만 좀 하라고!”
그 순간, 재겸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저기 누군가 서 있었다.
“묘정?”
소리 내어 이름을 부르자, 묘정이 천천히 고개를 틀더니 재겸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