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다시 원점이었다.
“그러니까 내 저주는 영생환 때문이 아니었다는 거네.”
재겸은 무표정한 얼굴로 신지혜 모친의 손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바닥 안에는 인어의 피와 재겸의 피가 섞여 작은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다.
영생환을 취한 인간의 피와 인어의 피가 섞이면 초록색으로 변해야 했다. 그러나 재겸과 인어의 피가 만들어낸 색깔은 어두운 갈색이었다.
“이제 됐어.”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재겸은 뻗었던 손을 거둬들이며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표정은 일견 무덤덤해 보였으나, 윤태희는 그런 재겸의 뒷모습에서 실망과 체념을 읽었다.
재겸은 불현듯 생각했다.
아, 나는 기대를 하고 있었구나.
“내가 죽여줄게, 널.”
윤태희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 날 이후, 재겸의 일상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죽음을 향한 열망은 역설적이게도 늘 무기력으로 점철되어 있던 재겸의 일상에 기이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삶을 끝내고 영원한 안식에 잠드는 것, 이 지긋지긋하고 피로한 불멸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재겸에게 있어 기대라는 것은 ‘헛된 희망’의 다른 말이었다. 그랬던 재겸은 어느 샌가부터 저도 모르게 내일을 기대하고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낯선 장소에 가고, 생전 겪어보지 못한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삶의 생명력은 ‘싹’을 틔워냈다.
“네 죽음을 유예해.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사람은 누구나 죽어. 너도 언젠가는 죽을 거야.”
“하지만 그게 두 달 뒤는 아니야. 넌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늙어서 평범하게 죽을 거야.”
멋대로 말을 바꿨던 윤태희에게 분노했던 것이 고작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러나 저주를 풀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선택지가 생긴 순간, 재겸은 은연중에 기대하고 있었다.
저주를 풀고 평범한 인간으로 살 수 있다면, 으로 시작하는 가정이 자꾸만 마음속을 헤집었다. 이것은 재겸에게도, 윤태희에게도 뼈아픈 결과였다.
세월의 타성에 젖어 무기력하게 살아왔던 일상에 삶의 활력이 깃들던 순간을 기억한다. 유유히 아름답게 지나가던, 스쳐 지나가던 별똥별과 같던 장면들이 있었다. 그 순간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만큼, 재겸은 문득 이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졌다.
재겸은 어느샌가 저도 모르게 욕심을 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평범하게 죽을 수 있다면, 앞으로 살아갈 여생이 조금이라도 소중해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섬에 온 이후로 줄곧 재겸의 눈에 실려있던 생기가 흐려졌다. 눈동자는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
재겸이 신지혜의 모친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
문득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 아래 어깨까지 몸을 담그고 있는 신지혜의 모친을 바라보던 재겸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뒤에 선 윤태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만 가자.”
신지혜의 모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재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윤태희에게 다가가려는데, 어느 순간 어깨가 멈칫했다. 신지혜의 모친이 재겸을 붙잡은 탓이었다. 차갑고 물에 젖은 손이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재겸이 뒤를 돌아보았다.
“…….”
재겸이 신지혜의 모친을 내려다보았다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신지혜에게 눈길을 주었다. 내내 아무 말 없이 상황을 관망하던 신지혜의 낯은 어느덧 희게 질려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재겸의 물음에, 신지혜의 모친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우리 인어들만 억울해졌구나.”
“뭐?”
“너희 인간들은 기어이 방법을 찾아낸 거야. 기어코 우리 인어들 없이도 불로불사를 이뤄냈구나. 그렇다면 나의 부모와 형제와 벗은 대체 무엇 때문에 죽어 나갔는가.”
아리송한 말에, 재겸이 멈칫하며 눈가를 좁힐 때였다.
“지난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인간이 영생을 꿈꿨다. 덕분에 무수한 인어들이 그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지. 바로, 너희 인간들의 추악한 욕심 때문에 말이야.”
신지혜의 모친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정말 안타까워. 모두가 꿈꾸는 영생이건만, 네겐 ‘저주’가 되는구나. 참으로 재밌지 않니? 누군가에겐 축복이지만 누군가에겐 저주가 되다니….”
재겸의 발목을 움켜쥔 무례한 손에 점점 힘이 실렸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인어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재겸의 낯이 서서히 굳었다. 시선을 돌려 신지혜를 쳐다보자, 신지혜가 괴로운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란 듯이, 낭패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약속과는 다르잖아….”
결국, 신지혜가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뭐?”
약속이라니?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재겸이 눈가를 구길 때였다.
“영생환과 관계가 없으면 그냥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그에 줄곧 친절하던 인어가 돌변하더니, 신지혜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입 닥쳐, 이 더러운 것!”
재겸의 낯이 대번에 굳었다. 더러운 것? 설마 딸에게 저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안절부절못하던 신지혜가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도망쳐! 그 인어, 우리 엄마 아니야!”
뭐? 재겸이 멈칫하며 신지혜의 모친, 아니, 낯선 인어에게 시선을 줄 때였다.
“우리 엄마를 인질로 붙잡아서 날 협박했어!”
그 순간, 인어의 눈이 흰자위가 검게 변하는가 싶더니, 검은색 동공이 짙은 파란색을 띠기 시작했다. 마침내 파란색 동공이 재겸을 응시했다. 물고기와 같은 눈이었다.
“인간의 피를 이어받은 잡것 아니랄까 봐, 기어코….”
인어가 칫, 혀를 차더니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거센 파도가 신지혜를 덮쳤다. 해일처럼 몰려온 파도가 신지혜를 물속으로 처박아 넣었다. 신지혜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이거 놔—!”
그와 동시에, 신지혜가 알 수 없는 인력에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마침내 상황을 파악한 재겸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재겸은 인어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인어의 손에는 어느덧 새파란 비늘이 돋아 있었다. 줄곧 친절하고 부드럽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적의가 흘러넘쳤다.
인어는 재겸의 발목을 천천히 놓았다. 그와 동시에 인어의 상체가 쑥 올라왔다. 하체는 바다 전체를 커다란 치마폭 삼아 수면과 이어져 있었다. 재겸의 눈높이까지 일어선 인어가 재겸의 목을 졸랐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재겸아—!”
난데없는 공격에, 윤태희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반사적으로 재겸을 향하여 손을 뻗을 때였다. 인어가 또다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갑자기 바람이 몰아쳤다. 난데없는 돌풍에 튕겨 나간 윤태희가 절벽에 쾅, 부딪혔다. 돌풍처럼 날아든 바람에 파도가 사납게 너울대기 시작했다. 불시에 목을 졸린 재겸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큭….”
미처 공격에 대비하지 못하고 절벽으로 튕겨 나간 윤태희가 몸을 일으켰다. 윤태희는 줄곧 온몸을 휘어 감고 있던, 끈적하고 불쾌한 위화감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시시의 경고가 머릿속을 스쳤다.
‘도망쳐라, 선오야. 당장 이 섬에서 나가!’
윤태희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섬에 들어온 것부터가 잘못이었음을. 애초에 신지혜를 만난 일부터가 잘못되었다. 아니, 재겸의 저주를 풀 방법을 수소문하다 인어를 알게 된 그 시점부터일지도 몰랐다. 인어는 처음부터 앙갚음할 생각으로 신지혜와 동행하여 온 것이었다. 아마도 신지혜는 협박을 당했거나 인질이 된 듯했다.
“너희 인간들이 우리 인어들을 핍박하고 전부 죽였다. 우리는 너희 인간들에게 친구를 잃고, 형제자매를 잃고, 부모를 잃었다. 이 원한은 너희 인간이 안겨준 것이다.”
재겸이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힘을 쥐어 짜냈다.
“우리… 랑은… 관…계 없는 일… 이야….”
“아니, 너희는 반드시 그 죗값을 치러야만 해.”
“나더러… 대신… 죽기라도 하라는… 셈이야…?”
인어는 대답 없이 살의 어린 눈으로 재겸을 노려보았다.
“이거 놔…….”
점점 숨이 모자랐다. 재겸의 미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두 번 말… 하는 거 싫어해… 그만, 하라고… 했어….”
그때였다. 인어가 난데없이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다 사납게 울부짖던 해수면이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바닷속에서 은빛 물고기 떼가 일시에 튀어 올랐다.
푸드덕, 수백 수천 마리의 날치들이 재겸과 윤태희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절벽과 충돌하여 몸을 휘청이던 윤태희가 재빨리 초점을 되찾았다. 들고 있던 우산을 펼쳐 귀기를 실었다. 우산에 귀기를 실어 날치 떼를 쳐내려는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윤태희는 어느 순간 주저하며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윤태희는 재겸의 뒤쪽에 있었기 때문에, 정면을 향해 귀기를 휘두르면 재겸이 다칠지도 몰랐다.
잠시 머뭇거린 사이, 날치 떼가 재겸과 윤태희에게 돌진했다.
“윽!”
핏, 핏, 날치가 스치며 온몸에 칼날에 베인 듯 무수한 상처가 생겼다.
“이 씨, 발….”
고통은 잠시였다. 재겸은 뒤에 있을 윤태희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인어에게 목을 졸린 탓에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재겸이 손을 들어 인어의 손목을 붙잡았다.
“야… 누, 굴… 건드려….”
어느 순간, 인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제 손목을 붙잡은 인간의 손에는 어마어마한 귀기가 실려있었다. 재겸은 어느 샌가 광기 어린 눈으로 인어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을… 우습… 게… 보고….”
재겸이 안광 번득이는 눈으로 인어를 죽일 듯이 쳐다보았다. 손에 실린 귀기가 점점 강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인어의 완력을 넘어섰다. 인어의 손목이 우득, 꺾였다.
“아아악!”
인어가 비명을 지르며 손목을 움켜쥐었다. 인어의 손길에서 풀려난 재겸이 쿨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몸을 숙인 윤태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쿨, 럭… 야! 괜찮아?”
재겸이 상처투성이가 된 윤태희의 뺨을 확 잡아쥘 때였다.
뿌우우——
어디선가 뱃고동 소리를 닮은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어두운 바다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바닷속에서 여러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강건한 반라, 형형히 빛나는 녹색 눈동자, 잠복해 있던 인어들이었다. 남성의 신체를 지닌 인어는 다섯이었다. 재겸과 윤태희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면 위에 넓게 포진한 인어들이 눈을 번쩍이며 무언가를 독경(讀經)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인어들의 포진 중심에서 거센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더니, 바닷속에서 커다란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하늘 끝까지 솟구쳐 오른 거대한 물기둥이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소용돌이에서 태어난 것, 그것은 거대한 해룡(海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