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오랜만이다, 크크.”
시시가 혀를 날름거리며 다 큰 선오를 올려다보았다.
“너…….”
선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시시를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실 팔찌처럼 손목을 감싼 검은 뱀이 몸을 뒤척이자 손목이 간질거렸다. 시시는 석류알처럼 붉은 눈으로 선오를 응시했다.
“많이 컸구나, 선오야.”
작고 앙상하던 선오는 어느새 장성하여 완성된 성인 남성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선오를 빤히 바라보던 시시가 어느 순간 고개를 빼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문신처럼 밋밋하게 새겨져 있던 뱀의 머리가 생생한 입체가 되어 선오의 손목 밖으로 슥 튀어나왔다.
시시는 고개를 들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시커먼 바다가 사납게 포효하고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던 시시가 눈을 납작하게 뜨더니, 다시 선오의 손목 속으로 들어갔다.
선오는 고개를 돌려 닫힌 미닫이문을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췄다.
“시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시시와 말을 섞는 건 몇 년 만의 일이었다.
십여년 전, 무신도 속에서 갑자기 나타났던 시시는 선오의 유일한 말동무이자 친구가 되어주었다. 시시는 부적을 파훼하는 법조차 몰랐던 어린 선오에게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정신을 놓은 윤원중이 패악을 부릴 때마다 선오를 위로하며 달래주기도 했다.
시시는 선오를 세상으로 꺼내놓았다. 그렇게 선오의 세계는 무너졌다. 그것은 재앙인 동시에 해방이었다. 시시는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집에 갇혀 살던 선오에게 자유를 주었고,
‘네가… 나한테 부적을 깨는 법을 알려 주지만 않았어도….’
그와 동시에 복수심과 증오라는 감정을 일깨워준 존재이기도 했다.
‘내 탓을 하는 거냐?’
눈보라가 치던 그 날. 선오는 제 손목을, 시시를 칼로 사정없이 난도질하며 처음으로 증오라는 감정을 배웠다. 시시와 흉터. 시시는 ‘선오’라는 이름이 짊어진 흉터 그 자체였다.
‘다 너 때문이라는 거다.’
어린 선오를 비웃던 시시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시는 허물만 남긴 채 십여 년의 세월을 침묵했다.
“아직 내 몸 안에 있었어?”
“그래, 나는 항상 이곳에 있었다.”
“나를 떠난 줄 알았는데….”
선오는 시시가 껍데기만 남겨놓고 떠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거야?”
“얘, 선오야. 지금은 말을 나눌 시간이 없어.”
시시가 붉은 눈으로 선오를 또렷하게 응시했다.
“도망가라, 선오야.”
다짜고짜 날아든 갑작스러운 말에, 선오가 멈칫할 때였다.
“어서! 당장 이 섬에서 떠나야 해.”
시시가 채근하듯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자 손목에 둘린 검은 실 팔찌가 배배 꼬이며 모양을 바꾸었다. 시시가 움직일 때마다 손목 부근이 간지러웠다. 선오가 차분히 되물었다.
“이 섬을 떠나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너는 물가에 가면 늘 해를 입는다. 윤원중이 언젠가 말해주지 않았어? 저번에도 그랬지. 동굴에 들어갔다가 호수에 사는 물귀신에게 홀려서 그대로 빠져 죽을 뻔했었잖아!”
시시의 말에, 선오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이 바보 천치야! 멍청아!”
시시가 눈을 납작하게 뜨며 선오에게 꾸중을 퍼부었다.
“너, 다 보고 있었구나.”
“그래. 다 보고 있었다.”
시시가 혀를 날름거리며 선오를 응시했다.
“나는 네가 보고 듣는 것 전부 다 안다.”
선오의 몸속에 자리를 잡은 뒤로, 시시는 언젠가부터 선오의 마음과 생각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시는 어느덧 선오의 몸에 기생하는 듯이 선오와 반쯤 동화되어 있었다.
유년으로 돌아갔던 선오는 자신이 환상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시시가 끼어들면서 환상에 균열이 생겼다. 생각해보니 실제로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선오야. 네 말처럼 놈이 온 걸지도 몰라. 그래, 문밖에 서 있는 것은 어쩌면 너의 운명. 너의 불행. 너의 나락.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무서운 거지?’
그러니까 그때 대화를 나누었던 상대는, 현실에 있던 진짜 시시였던 것이다.
“왜 이 섬에서 떠나라는 거야?”
“이대로 가다간 틀림없이 네 일신(一身)이 위험해진다.”
선오의 낯이 기묘하게 변했다. 나자로 살았던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위험에 처했던 적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시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앞일을 언질해준 적이 없었다.
“위험하다니? 어째서?”
“네 곁에 저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저 아이, 라는 말에 선오가 닫힌 미닫이문을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선오가 마침내 싸늘한 얼굴로 시시를 응시했다.
“난 분명히 경고했어. 느낌이 좋지 않아.”
“그렇다면 정확하게 말을 해. 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그리고 지금은 배가 뜨지 않아서 이 섬을 나갈 수도 없고, 다 알고 있다면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알고 있을 텐데.”
시시는 말없이 혀를 날름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그래, 선오야. 네가 저 아이를 사랑한다는 걸 안다.”
선오가 멈칫하며 눈을 가느다랗게 좁혀 떴다.
“하지만 선오야, 무엇이 더 중요한지 생각해라. 넌 영리하잖아. 네겐 해야 할 일이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닌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반드시 네가 해야만 하는 일이야.”
“…….”
선오는 말없이 시시를 내려다보다가,
“지금까지 늘 방관하고 참견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너의 길잡이다.”
“뭐?”
“이 길은 틀린 길이야.”
시시가 혀를 날름거리며 분명한 어조로 덧붙였다.
“이대로 가다간 너는 여태까지 쌓아온 모든 걸 잃고 말 거다.”
그러나 선오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그 날 모든 걸 잃었어.”
결국, 시시가 답답하다는 듯이 벌컥 목소리를 냈다.
“모르겠어? 너는 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멍청아!”
……너는 저 아이를 가질 수 없다?
마침내 선오의 낯이 매섭게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분명히 경고했어.”
“시시.”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은 걸 영영 후회하게 될 거다.”
석류알처럼 붉은 시시의 눈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후회….”
선오는 혼잣말을 하듯이 시시의 말을 곱씹다가,
“상관없어.”
이내 싸늘한 눈으로 시시를 내려다보았다.
“원래 ‘후회’라는 건 그런 거니까.”
비웃음이 묻어나는 말에, 시시가 눈을 납작하게 떴다.
“너는 문을 연 것을 평생 후회하며 살 수도 있어. 그때 문을 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반대도 똑같아. 넌 오늘 문을 열어보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평생 후회할 거다. 문을 열고 나가지 않는 한, 넌 문밖에 서 있는 게 뭐였는지 영영 알 수 없을 거야. 알겠어? 원래 ‘후회’라는 건 그런 거야.”
더 이상 어리지 않은 선오는 시시의 조언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
마침내 시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축 늘어트렸다. 역시 인간은 제멋대로에 말을 안 듣는다. 왜 다들 운명을 거스르려고 하는지… 참으로 사랑스럽고,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였다.
“칫,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너를 거기로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붉은 눈을 끔뻑이던 시시가 한스러운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선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을 때였다. 갑자기 석류알처럼 빛나던 시시의 눈이 꺼멓게 죽었다. 선오의 등 뒤로 미닫이문이 확 열리며 누군가 나타났다.
“윤태희.”
윤태희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너 뭐 해?”
윤태희가 재빨리 손목을 휙 내리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별안간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딱히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시시의 존재를 알릴 생각은 없었다.
“누구랑 얘기했어?”
“뭐가?”
윤태희가 태연하게 되물었다.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아니야?”
잠시 침묵하던 윤태희가 손목에 시계를 차며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더 자도 되는데, 왜 일어났어?”
재겸은 대답 없이 마루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빗줄기는 조금 약해져 있었으나, 저 멀리 보이는 바다는 여전히 사납게 울부짖고 있었다. 재겸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마음을 다스리듯이, 혹은 무언가를 각오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마침내 재겸이 고개를 내려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재겸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윤태희의 휴대폰이었다.
액정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본 윤태희의 낯이 서서히 굳었다.
신지혜
애타게 기다리면서도, 영영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던 발신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