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키쓰해 볼래….”
서랍장 앞에 앉아있던 윤태희는 서랍 문을 열던 자세 그대로 우뚝 굳었다.
“…….”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재겸의 귀는 어느새 빨갛게 변해 있었다. 윤태희의 침묵에, 재겸은 온돌 바닥에 그을린 자국을 괜히 손으로 긁적거렸다.
“언제? 지금?”
그때, 등을 내보이고 있던 윤태희가 한참 만에야 느릿느릿 물었다.
“응.”
재겸이 발가락을 꿈질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겸은 처음 찾아온 낯선 충동 앞에서도 제법 솔직한 편이었다. 다만 충동의 이유는 불분명했다. 왜 입을 맞추고 싶은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혹시 나도 몰랐던 남색가 기질이 있었던 걸까? 충동은 확실했지만, 이 충동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아직 헷갈렸다.
“…….”
윤태희는 재겸에게 등을 내보인 자세 그대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탁, 소리가 나도록 서랍장을 닫았다.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틀더니, 재겸을 바라보았다.
“그래.”
키스를 해보겠다는 재겸의 말에, 윤태희는 왜냐고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사람 간에 입을 맞춘다는 행위는 어찌 보면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일이었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이거나,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행위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입을 맞추고 키스를 한다. 윤태희는 이제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해도 돼, 키스.”
윤태희가 몸을 훌쩍 일으키더니, 재겸 앞에 다가와 앉았다. 재겸은 한 두걸음 떨어진 거리에 저와 마주보고 앉은 윤태희를 바라보다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재겸은 네 발로 걷는 듯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머뭇거리다가, 이내 팔을 쭉 뻗고 윤태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먼저 하겠노라 말을 꺼내긴 했지만, 재겸의 낯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재겸은 마침내 제 코앞에 있는 윤태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경계심이 강한 고양이처럼 제 코끝으로 윤태희의 코끝을 톡,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윤태희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둘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그 순간, 재겸의 머릿속으로 언젠가 윤태희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너한테 키스하고 나서 매일 후회했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래야 할 이유보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어. 전부 납득했고, 인정했고, 수긍했어. 그런데 막상 널 보면 그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았어.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해가 안 돼서, 내가 씨발 드디어 미쳐가고 있구나 생각했어.’
저에게 처음으로 고백하던 날, 윤태희가 했던 말이었다.
스쳐 지나가듯 떠오른 말에 재겸이 멈칫했다. 그때는 윤태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어제는 술김에 그랬다고 쳐도, 지금은 제정신이었다. 그런데도 윤태희와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미쳐가고 있는 걸까?
왜 키쓰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키쓰를 하고 싶다니, 재겸은 이런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분명한 것은, 윤태희와 입을 맞추고 싶다는 것이다. 그날 윤태희는 저에게 키스하고 나서 매일 후회를 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윤태희는 대체 뭘 후회한 걸까?
어쩌면 나도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까…….
아, 이 섬은 참으로 이상한 섬이다.
그리고 이 섬에서 제일 이상한 건 저일 것이라고, 재겸은 불현듯 생각했다. 그러나 딴생각은 찰나일 뿐이었다. 재겸은 꽃에 이끌리는 벌처럼, 향기에 취해 쫓아가는 나비처럼, 이내 홀린 듯이 윤태희에게 다가갔다. 누가 빚어놓은 듯한 얼굴이 시야에 가득히 들어찼다.
마침내 천천히 입술이 맞닿았다.
“…….”
“…….”
쪽, 소리와 함께 닿았던 입술이 느리게 떨어졌다. 재겸과 윤태희는 눈을 뜬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태희는 천천히 속눈썹을 내리깔더니 속삭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됐니?”
윤태희가 조용히 묻자, 재겸이 말했다.
“아니…….”
이번에는 윤태희의 양 귀를 부여잡았다. 고개 각도를 조심스레 기울여 보았다. 살금 혀를 내밀어 윤태희의 입술을 슬쩍 핥아먹어 보았다. 윗니와 아랫니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보기도 했다. 윤태희는 눈을 반쯤 내리뜬 채 재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입술을 야금거리다가 다시 입을 맞추려는데, 윤태희의 손이 어느 순간 재겸의 허리춤을 쓸더니, 티셔츠 자락을 걷고 기어 들어왔다.
서늘한 손이 기립근을 따라 맨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재겸은 움찔하며 고개를 확 떼고, 윤태희의 얼굴을 노려보며 말했다.
“만지지 마.”
재겸이 경고하듯 윤태희의 머리채를 잡았다. 머리칼을 손아귀에 꽉 움켜쥐었다.
“내가 하는 거니까 움직이지 마.”
그렇게 말하는 재겸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윤태희가 멍한 눈으로 재겸을 올려다 보았다. 재겸에게 머리끄덩이가 잡혀 있는 윤태희의 눈가 주변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너는 가만히 있어.”
재겸이 숨결을 가다듬으며 다시 윤태희의 양쪽 귀를 부여잡았다.
“응…….”
윤태희는 말을 아주 잘 들었다. 티셔츠 안쪽으로 들어왔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재겸은 다시 입술을 갖다 댔다. 취기에 휩쓸렸던 어제의 키스는 과격했지만, 오늘은 소심했다.
“입… 입 벌려 봐.”
재겸의 명령에 윤태희가 천천히 입을 반쯤 벌렸다. 이렇게 맨정신에 입을 맞추는 건 처음이었다. 매우 부끄럽기도 했고, 또 아주 감각이 선명해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윤태희의 입술을 물고 빨던 재겸은 어느 순간 길을 잃었다. 뭔가 더, 더 하고 싶은데 키스에 서툰 재겸은 이 이상 뭐를 더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재겸의 입술이 윤태희의 입술 언저리를 배회했다. 어영부영 방황하던 재겸이 에라, 윤태희의 턱을 꽉 깨물었다.
“아.”
윤태희가 저도 모르게 눈 한쪽을 찡그렸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윤태희의 턱에는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윤태희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있던 재겸이 주춤하며 손을 내렸다.
“이, 이번엔 네가 해 봐.”
재겸의 입술을 따라가던 윤태희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윤태희는 잠에서 덜 깬 사람처럼 몽롱한 눈으로, 재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재겸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덧붙였다.
“하기 싫음 말고. 난 이제 다 했어.”
재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뒤로 몸을 확 물리며 양반다리를 했다.
“…….”
윤태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몸을 훌쩍 일으켰다. 그대로 방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그에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재겸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뭐지? 갑자기 왜 나간 거야?
재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활짝 열린 문을 바라볼 때였다. 잠시 희미한 물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윤태희가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다. 그에 재겸이 고개를 훽 돌려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윤태희의 손끝에서는 물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재겸 앞으로 다가온 윤태희가 몸을 굽혔다. 재겸의 목에 둘러져 있던 수건을 스르륵 빼내더니, 손의 물기를 꼼꼼히 닦았다.
“손 씻었어?”
“응.”
“갑, 갑자기 왜?”
“…….”
윤태희는 대답 없이 수건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더니, 손을 뒤로 뻗어 안방 문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철컥,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성큼성큼 다가온 윤태희가 재겸의 앞에 앉더니, 재겸의 등 뒤에 있던 벽으로 손을 짚었다. 고개를 기울여 재겸에게 입을 맞췄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재겸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윤태희가 재겸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워넣더니 그대로 훌쩍 들어 올렸다. 불시에 윤태희의 허벅지 위에 앉게 된 재겸이 윤태희의 가슴팍을 손으로 짚을 때였다. 큼직한 손아귀가 재겸의 양 뺨을 확 잡아당겼다.
“우으…….”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 서로가 서로를 탐미하는 키스였다.
***
날이 어두워지자 비가 내렸다. 주인집에 내려가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차츰 빗줄기가 굵어졌다. 이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센 폭우였다.
어느덧 섬 주변을 둘러싼 바다는 거칠게 포효하고 있었다.
세찬 폭우 속에 발이 묶인 두 사람은 안온한 황토집에 틀어박히는 수밖에 없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온 두 사람은 따끈한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리모콘의 권한은 재겸에게 있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보니 때마침 평소 즐겨보던 일일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윤태희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기에 드라마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재겸은 그런 윤태희를 위해 간략한 줄거리를 설명해 주었다. 시시콜콜한 내용이었다. 마침내 드라마가 끝났을 때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서로 다리를 얽은 채 선잠에 빠져 있었다.
깜빡 잠이 들었던 윤태희는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에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니 재겸이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윤태희는 한쪽에 이불을 깔고 재겸을 조심히 안아 들었다.
잠든 재겸을 바르게 눕힌 윤태희는 재겸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동그란 뒤통수를 들어 베개도 받쳐주고, 이불까지 덮어준 뒤 눈썹뼈, 뺨, 눈꼬리, 코, 입술, 턱, 여기저기를 입술로 눌렀다. 재겸은 잠에서 깰 듯 말 듯 얼굴을 찡그렸다가 다시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윤태희는 조용히 미닫이문을 닫고 마루로 나왔다.
윤태희는 비가 들치지 않는 마루에 털썩 앉아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처마 끝에서 물이 똑똑 떨어졌다. 손등을 갖다 대자 차가운 빗방울이 눈물처럼 톡 떨어져 내렸다.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자 축축하고 청량한 비 냄새,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났다. 멍하니 앉아있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고개를 힘없이 푹 떨어트리더니, 자신의 가슴 부근에 손을 갖다 댔다.
하루종일 심장이 두서없이 뛰고 있었다.
섬에 온 지 오늘로 이틀째, 신지혜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
윤태희는 저 멀리 너울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문득 윤태희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기꺼워졌다. 이렇게 거센 폭풍우가 부는 날, 따듯한 방 안에는 재겸이 잠들어 있었다. 불현듯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치는 감정에 윤태희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했다. 어서 신지혜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와 동시에 연락이 영영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얘, 선오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윤태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윤태희가 고개를 확 들었다.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시계 스트랩을 풀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뱀 문신이 보였다. 검은 실 팔찌처럼 손목에 잠들어 있던 시시였다. 늘 굳게 닫혀있던 시시의 눈꺼풀이 열려있었다. 붉은 눈을 마주한 윤태희가 눈을 커다랗게 뜰 때였다.
“오랜만이다, 크크.”
시시가 혀를 날름거리며 다 큰 선오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