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12)화 (212/348)

#212

“그래서, 네 조건은 뭔데?”

윤태희가 빙그레 웃으며 모래성 앞에 앉았다.

“비밀. 이기면 말할래.”

“그런 게 어딨냐? 미리 말을 해줘야지.”

재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따져 물을 때였다.

“일단 네가 이기면 내 전 재산 반절 줄게.”

재겸의 눈동자에 번뜩 총기가 돌았다.

“진짜?”

“응. 그럼 누가 먼저 해?”

윤태희가 아주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먼저 하실래요?”

“알겠어.”

재겸은 윤태희의 양보를 마다치 않고, 덥썩 모래성 위에 손을 얹었다. 양팔을 넓게 벌려서 한 번에 모래성의 절반을 가져갔다. 초장부터 모래성은 거덜이 났다.

“이제 너 해.”

욕심이 철철 흐르는 눈으로, 재겸이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아니… 아니, 뭘 그렇게 왕창….”

윤태희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내 맘이야. 빨리 하기나 해.”

당당하게 채근하는 재겸의 낯은 매우 진지했다.

“알았어요.”

윤태희가 큭큭 웃으며 양손으로 모래를 긁어모았다. 이 승부의 핵심은 나뭇가지가 무너지지 않게 모래를 차지하는 것이다. 차례가 돌아갈수록 큼지막한 모래성의 부피가 점점 작아졌다. 어느덧 또다시 재겸의 차례였다. 푸짐하던 모래성은 이제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아주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다. 재겸이 몹시 심각한 낯으로 이마를 긁었다.

“한다.”

손대는 순간 무너질 것 같았으나 재겸은 용감하게 손을 뻗었다. 나뭇가지가 넘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뭇가지를 지탱하고 있던 모래를 야금, 긁어냈다.

다행히 나뭇가지는 무사했다. 이제 더는 손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윤태희가 손을 댄다면 나뭇가지가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승리를 예감한 재겸이 신나서 왁, 소리를 질렀다.

허공에 팔을 뻗으며 호쾌하게 함성을 내지르던 순간이었다.

툭….

그와 동시에 나뭇가지가 옆으로 스르륵, 힘없이 쓰러졌다.

“…….”

“…….”

재겸이 눈을 크게 뜬 채 쓰러진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뭐야.”

윤태희가 코를 찡그리며 “어? 내가 이겼네.” 하고 웃었다.

“야! 방금 봤잖어! 서 있었어.”

“응, 봤어. 서 있었어.”

“내가 건드려서 쓰러진 게 아니야.”

당황한 재겸이 황급히 뒷수습에 나섰으나,

“그러게. 기합으로 쓰러트릴 줄은 몰랐는데.”

윤태희가 능숙하게 여지를 없앴다.

“야, 손 떼고 나서는 멀쩡히 서 있었잖아.”

그에 재겸은 지지 않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그래서, 마지막에 손댄 사람이 누군데?”

어림도 없었다. 정확한 지적에, 재겸은 말문이 막혔다. 듣고 보니 윤태희의 말이 맞기 때문이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윤태희도 재겸도 승부에 있어서는 칼 같은 편이었다.

“…….”

결국, 재겸은 침묵으로 패배를 인정했다. 쓰러진 건 모래성이었으나, 날아간 건 일확천금이었다. 승부는 정정당당해야 하고, 구차하게 우기지 않아야 한다. 재겸은 승부의 세계에서는 성숙했다. 대신에, 승부 바깥에서 구차하게 윤태희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너는 역시 그릇이 작고, 속이 좁은 소인이야.”

“…….”

“계속 찔끔찔끔 가져가면서 기회만 엿봤잖어.”

“…….”

“정면 승부도 안 하고, 겁만 많아서 옹졸하기는.”

“…….”

“차라리 땅콩만 한 메산이가 너보다 배포가 클 거다.”

“…….”

비난이 쇄도하자, 윤태희가 눈썹 한쪽을 슥 들어올렸다.

“대인배답게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 아주 보기 좋아요.”

다정한 반어법에 재겸이 윤태희를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제가 원래 승기 없는 싸움은 안 하거든요.”

개코나. 재겸이 불만이 역력한 낯으로 귀를 툴툴 털었다.

“됐고. 조건이나 말해.”

그러자 윤태희가 생각에 잠긴 눈을 했다.

“음….”

윤태희는 턱을 매만지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재겸은 불현듯 긴장이 되었다. 이상한 걸 들어달라 하면 어쩌나 뒤늦게 걱정이 들었다. 왜냐하면 윤태희는 협잡에 능하고, 남색가인 데다, 속도 좁으므로 괴상한 조건을 말할 법도 했다.

윤태희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재겸은 내심 긴장이 되었다.

어쩌면 어제처럼 키쓰를 해달라고 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망측한 요구를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쪽에서 전 재산의 반절을 달라고 했듯이 금전적인 요구를 할 수도 있다. 만약 돈을 달라고 한다면 내가 가진 건 전부 정주가 번 것이고, 내 것이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먹고 죽을래도 돈 한 푼 없다고 해야지… 재겸이 열심히 머리를 굴릴 때였다.

윤태희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진 찍어 줘.”

뭐? 재겸이 미간을 모으며 되물었다.

“사진?”

“응. 사진 한 장 찍었으면 해.”

“…….”

재겸이 멀뚱한 낯으로 윤태희를 바라보았다. 윤태희의 조건은 생각외로 아주 소박했고, 시시했다.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각오를 다지고 있던 재겸은 왠지 살짝 머쓱해졌다.

“흠. 뭐, 알겠어.”

재겸은 흔쾌히 조건을 수락했다. 사진쯤이야,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사진 찍는 법 알아?”

“알아.”

재겸도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본 적이 있었다. 정주는 계절마다 새 옷을 사서 집구석 패션쇼를 열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재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던 것이다. 때문에 재겸도 액정에 떠오른 동그라미를 누르면 사진이 찍힌다는 것쯤은 알았다. 물론, 실력은 변변치 않아서 정주로부터 툭하면 사진이 흔들렸네, 다리가 짧아 보이네, 하고 지적받았지만.

재겸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휴대폰 이리 주고, 바다 앞에 가서 서봐.”

재겸의 지시에, 윤태희가 어리둥절한 눈을 할 때였다.

“왜? 사진 찍어 달라며.”

상황을 이해한 윤태희의 얼굴이 확 흐트러졌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내가 설마 내 독사진 찍으려고 했겠니….

“그럼 뭐, 나를 찍는다고?”

“응, 너랑 나랑 같이.”

그렇게 말한 윤태희는 재겸에게 “여기 잠깐 있어.” 하더니, 어디론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해안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커다란 구조물로 가서, 제 휴대폰을 눕혀 세웠다.

“조금 더 옆으로.”

휴대폰 카메라에 저 멀리 서 있는 재겸이 나오도록 초점을 잡았다.

“이렇게?”

“살짝 왼쪽으로.”

“여기?”

“응. 됐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재겸이 중앙에 오도록 각도를 잘 맞춘 다음, 타이머를 맞췄다. 재겸에게로 돌아온 윤태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멀뚱히 서 있던 재겸이 물었다.

“된 거야?”

“응, 움직이지 말고 앞을 보세요.”

윤태희는 찰칵, 소리가 날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재겸은 윤태희의 지시에 따라, 차렷 자세로 앞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각 잡고 사진 찍는 것은 처음이라 어색했다. 굳은 낯으로 앞을 보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찰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직 안 찍혔어?”

“응, 아직이에요.”

끼룩, 끼룩, 끼룩….

“…….”

“…….”

뻘쭘한 기다림 속에 갈매기가 날아다녔다.

“야, 대체 언제 찍혀?”

결국, 답답해진 재겸이 입을 열었다. 앞을 본 상태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윤태희의 지시를 어기고, 고개를 홱 틀어서 윤태희를 올려다볼 때였다. 그와 동시에 윤태희의 손이 재겸의 손목을 스르륵 덩굴처럼 휘감았다. 윤태희가 고개를 내려 재겸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금.”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눈에 담는 순간,

찰칵!

비로소 기다림이 끝났다.

***

한판 대결이 끝나고, 재겸은 모래사장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편하게 세워 앉은 무릎을 가볍게 둘러 안고서 잔잔하게 파도가 부서지는 푸르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먼바다를 바라보던 재겸이 옆에 앉은 윤태희를 힐끗, 곁눈질했다.

“…….”

윤태희는 아까 전부터 둘이 찍은 사진을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재겸은 액정이 닳도록 사진을 보고 있는 윤태희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인지 기분이 오묘해졌다.

같이 사진 한 장 찍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저렇게 들여다보는지….

“야.”

어느 순간, 재겸이 바다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응.”

재겸의 부름에, 윤태희가 곧바로 고개를 들 때였다. 재겸이 기지개를 켜듯이 팔을 위로 쭉 뻗더니, 그대로 뒤로 드러누웠다. 그러자 윤태희의 고개가 재겸의 시선을 따라 이동했다.

“…….”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재겸이 입을 열었다.

“넌 지금까지 어디서, 뭐 하고 살았어?”

뜬금없는 질문에 윤태희가 짧게 멈칫할 때였다.

“집에 테레비도 없으면 평소에 쉴 때는 뭐 해?”

“…….”

“절에서 지낼 때는 무슨 생각 하면서 살았어?”

“…….”

“가족들 잃고 나서 너도 하루하루가 힘들었어?”

“…….”

윤태희가 재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재겸은 평소 사사로운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 남에게 무언가를 묻지도, 그렇다고 본인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왜?”

무릎에 팔을 걸치고 앉아 있던 윤태희가 재겸을 따라서 뒤로 털썩 누웠다. 윤태희가 눕자 서로의 어깨가 맞닿았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재겸이 윤태희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갑자기가 아니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윤태희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재겸은 입을 다물더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

머릿속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기억이 있다. 언젠가 폭주에서 깨어나 며칠 만에 학교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날 학교에 갔던 이유는 조영우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지만, 등굣길에 윤태희와 딱 마주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방과 후에 도서실로 올라갔었다.

‘넌 내가 궁금해졌어. 그래서 여기에 온 거야.’

그 날의 윤태희는 오만했고, 여유로웠으며, 재겸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미쳤냐? 너 같은 거 관심도 없어.’

‘그래? 그럼 궁금하게 만들어 줄게.’

그렇게 말하며, 허락도 없이 목덜미를 감싸오던 손바닥의 온기를 기억한다.

“사실 그때 그거 거짓말이었어.”

한참 만에야 재겸이 입술을 달싹였다.

“뭐가?”

“네가 궁금해서 도서실 올라간 거 맞아.”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재겸이 천천히 눈동자를 들었다.

“나는 예전부터 네가 궁금했어.”

또렷한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윤태희의 시야가 어그러졌다. 윤태희는 배 위에 손을 겹쳐 올리고 고개를 튼 채 멍하니 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나도….”

어느 순간, 윤태희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나도, 네가 언제나 궁금해…….”

두 사람의 시선은 한 치의 빈틈없이 맞물려 있었다. 윤태희와 재겸은 한참 동안 그렇게 서로를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제일 잘 알고 있는데도, 서로를 끊임없이 궁금해한다.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왜인지 서로를 완전히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그렇게 두 사람은 졸린 소년들처럼 서로를 마주 보고 누워 있었다.

윤태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재겸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단정하고 짙은 눈썹, 옅은 쌍꺼풀이 진 눈매와 위로 올라가 있는 눈꼬리, 부드럽게 뻗은 코, 살짝 부푼 인중, 특유의 강단과 호기가 느껴지는 입술, 한 손에 담을 수 있는 뺨 언저리…

윤태희는 불현듯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문득 코끝이 시큰하고, 속에서 무언가 치받쳐 오르는 듯했다. 심장이 욱씬 조여드는 것처럼 타격감이 가슴을 쳤다. 윤태희가 낯을 무너트리며 재겸의 품에 안기듯 고개를 묻었다.

아, 나는 아마

평생 이 순간을 그리워하며 살겠지.

윤태희는 지금 이 순간 깨달았다. 나의 지난 삶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오로지 복수만을 바라보며 경주마처럼 달려온 삶이었다. 저를 둘러싼 모든 풍경에 무관심했고, 어디에도 시선이 머무른 적 없었다. 그렇게 10년을 기다려 왔다. 마음을 죽이고 또 죽이며 비로소 여기까지 왔다. 그 메마름으로, 그 공허함으로, 그 날카로움으로 강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섬에 온 이후로 윤태희는 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이 찬란한 순간 속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졌다.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고통스러웠다. 무너진 모래성, 찬란히 부서지는 햇볕. 너울대는 파도, 머나먼 수평선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너와 내가 있다.

……테오는 바다에 가고 싶었습니다. 에메랄드빛 물결이 햇살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섬에 가고 싶었습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수 있도록, 외로운 테오는 외로운 바다로 가서 외롭지 않고 싶었습니다…….

윤태희가 마주한 고통, 그것은 바로 ‘삶의 경이’였다.

“그래, 나는 이런 걸 원했던 거야.”

너와 모래성을 쌓는 일,

함께 쌓아 올리고 함께 무너트리고

이토록 아름답고 무의미한 일을 위해서

나는 너를 만나게 된 거야…….

인간은 어째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연약해지는가. 윤태희는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약해져 있었다. 윤태희가 얼굴을 감싸 쥐며 품에 안기자, 재겸이 놀란 눈을 했다.

“왜, 왜 그래.”

재겸의 품에 고개를 묻고 있는 윤태희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윤태희의 심상찮은 반응에, 재겸의 눈빛이 일변했다. 재겸이 상체를 일으키며 윤태희의 어깨를 잡았다.

“너 괜찮아? 어디 아파?”

그러나 윤태희는 말이 없었다.

“태희야.”

재겸이 윤태희의 양 뺨을 붙잡아 올릴 때였다. 윤태희는 쓰고 떫은 것을 삼킨 사람처럼 미간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윤태희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제 하관을 움켜쥐며 말했다.

“우리 도망갈까?”

그렇게 말하는 윤태희는 아주 위태로워 보였다.

“뭐?”

“나랑 도망가자.”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의 얼굴을 쳐다볼 때였다. 윤태희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재겸의 무릎에 제 이마를 짓이겼다. 부드럽고 풍성한 머리칼이 다리 위에 비단처럼 쏟아졌다.

“전부, 전부 없었던 일로 하고,”

복수도, 나례청도, 전부 다 없었던 일로 하고,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가자. 아무도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 곳으로 가자. 아무도 우리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자.

“도망가자, 재겸아…….”

재겸의 낯이 서서히 굳었다. 재겸은 지금 이 순간, 윤태희가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윤태희는 겨울날의 여린 나뭇가지처럼 떨고 있었다.

“…….”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윤태희를 바라보고 있던 재겸이 손을 뻗었다.

“윤태희.”

재겸의 손이 윤태희의 뒤통수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조심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윤태희의 어깨가 멈칫 굳을 때였다. 재겸의 손이 뒤통수를 지나 윤태희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있었던 일을 어떻게 없었던 일로 해?”

재겸의 말에, 윤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흔들림 없이 단단한 눈동자가 윤태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뭘 겁내.”

목덜미를 감싸 쥔 재겸의 손아귀에 천천히 힘이 실렸다.

“널 이기게 해주겠다고 했잖아.”

소년은 윤태희를 단숨에 이 풍경 속으로 돌려놓았다.

“전부 끝내고, 그때 다시 여기에 오자.”

정처 없이 흔들리던 윤태희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내가 너의 10년을 지켜줄게.”

아, 나를 살게 하고, 나를 죽게 만드는 것…….

“이제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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