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나랑 데이트할까?”
늦은 오전, 두 사람은 ‘데이트’라는 이름의 산책을 나섰다.
재겸은 불퉁한 표정으로 윤태희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고 있었다. 바닷가로 나가보자는 윤태희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좁은 집에 둘이 있느니 차라리 밖으로 나가는 게 나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바깥에는 사람들도 있고, 환한 대낮이니 남사스러운 일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다. 마지못해 산책에 따라나선 재겸은 슬리퍼를 찍찍 끌며 윤태희를 뒤를 쫓았다.
그때, 몇 걸음 앞서 걷던 윤태희가 발을 멈추고 재겸을 돌아보았다.
“왜.”
왜 그렇게 보느냐고, 재겸이 까칠하게 물었다. 윤태희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재겸과 나란히 걷고 싶어서 잠시 기다린 것뿐이다. 재겸이 곁에 서자 윤태희가 다시 발길을 뗐다.
그렇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골목길을 내려갈 때였다. 어느 순간, 윤태희의 손등과 재겸의 손등이 스쳤다. 그에 재겸이 움찔하는가 싶더니, 슬쩍 옆으로 몸을 물려 거리를 벌렸다.
아, 방금 너무 티 났나?
제 발 저린 재겸은 은밀히 윤태희의 눈치를 살폈다.
“…….”
정면을 바라보며 걷던 윤태희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안 잡아먹어요.”
하여튼 씨발, 눈치는 귀신같이 빨라 가지고…….
속내를 들킨 재겸은 왠지 약이 올랐다. 나를 좋아하는 건 쟤고, 어젯밤에 그런 짓을 한 것도 쟤인데, 왜 내가 이렇게 낯을 붉히는 거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입장이 바뀐 것 같다.
“야.”
윤태희의 얄미운 행태를 곱씹던 재겸은 문득 열이 뻗쳤다.
“네가 뭔데 날 잡아먹어?”
윤태희가 고개를 돌려 재겸을 바라보았다.
“네?”
발끈한 재겸이 벌컥 목소리를 냈다.
“네가 뭔데 날 잡아먹고 말고를 결정하냐고.”
윤태희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이 새끼가 오냐오냐하니까 건방지게….”
“…….”
재겸이 명심하라는 듯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너는 애초에 날 잡아먹을 수가 없어.”
“…….”
윤태희는 말없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겹쳐 물었다.
“내가 널 봐주는 거고, 가만히 놔두는 거야.”
재겸이 눈에 불을 켜고 윤태희를 노려보았다.
“대답 안 해?”
조용히 웃음을 참던 윤태희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네… 네….”
윤태희가 재겸의 성질머리를 받아주며 살랑살랑 걸음을 옮겼다.
한적한 오전의 선착장은 나른하고도 평화로웠다. 항구 근처에 도착하자 생생한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겼다. 방파제 위로 갈매기가 총총 걸어 다니고 있었다.
“이번엔 저쪽으로 가 볼까?”
재겸과 윤태희는 어제 신지혜와 갔었던 절벽과는 반대편 길로 걸음을 옮겼다. 이왕 산책에 나선 김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편한 차림으로 설렁설렁 해안선을 따라 걸을 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모래가 펼쳐진 너른 백사장이 나왔다.
심드렁한 낯으로 걷고 있던 재겸이 걸음을 멈추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탁 트인 바다, 푸르른 하늘, 깨끗한 해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아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해수욕장이 있었네.”
눈부신 정경 앞에서, 윤태희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려가 볼래?”
“응.”
재겸과 윤태희는 경사로 밑으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모래사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슬리퍼를 꿰어신은 맨발이 모래 속에 푹 박히며, 발등 위로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이 느껴졌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재겸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자 두 개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좋으니?”
그때, 재겸이 웃는 것을 본 윤태희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에 재겸은 곧바로 웃음을 싹 지우고 무뚝뚝한 얼굴을 했다.
“야, 너는 저어기, 저쪽으로 가서 산책해.”
“왜?”
“나는 이쪽으로 갈 테니까 침범하지 마.”
“우리가 무슨 짐승도 아니고 영역 다툼할 필요가 있나요?”
윤태희가 공손하게 말대꾸를 했다.
“…….”
재겸이 가자미눈을 뜨고 윤태희를 흘겨보았다. 쟤는 말을 꼭 저따구로 하네. 이러니까 너랑 떨어지려는 것이다. 네 주둥이가 아주 싸가지 없고 건방져서 산책에 방해가 된다.
“아무튼, 너는 저쪽으로 가.”
재겸이 까칠한 얼굴로 팔을 들어 먼 곳을 가리킬 때였다.
“왜? 어제 일 때문에 나랑 같이 있는 게 불편해?”
윤태희가 태연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
뼈아프게 날아든 직구에 재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사, 사람은 누구나 혼자만의 사색이 필요한 법이야.”
이내 오기로 똘똘 뭉친 엉성한 대답을 꺼내놓았다. 그러자 윤태희가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고 소리 내서 웃기 시작했다. 재겸은 일부러 몸을 홱 틀어서 걷던 방향과는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도 윤태희는 갈매기처럼 졸졸 따라왔다.
“야, 그만 좀 쫓아 와. 너는 저기로 가라고.”
“싫어요. 제 갈 길은 제가 정해요.”
윤태희가 능청스레 말을 되받아쳤다.
아니 이 새끼가, 지금 한번 해 보자는 거지?
재겸은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꾹 삭였다.
“알겠어. 그럼 같이 걷든지.”
잠시 심기를 다스리던 재겸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윤태희를 향해 털레털레 다가갔다. 그에 윤태희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뜰 때였다. 재겸이 돌변하여 윤태희에게 몸통 박치기를 했다. 윽, 소리와 함께 발이 꼬인 윤태희가 휘청하며 철푸덕 엉덩방아를 찧었다.
“너는 혼 좀 나야 돼.”
재겸은 넘어져 있는 윤태희에게 다가가더니, 윤태희가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슬리퍼를 뺏긴 윤태희가 황당한 표정으로 해변의 약탈자를 바라볼 때였다.
재겸은 슬리퍼 한 짝으로 모래사장 위에 선을 삭 긋더니,
“선 넘어오지 마.”
이내 양손에 슬리퍼를 들고 사마귀처럼 자세를 잡았다.
“…….”
손을 뒤로 뻗고 넘어져 있던 윤태희가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윤태희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고, 재겸도 이 상황이 웃긴지 킥킥 웃고 있었다. 윤태희가 장난스레 물었다.
“선 넘으면?”
윤태희의 도발에, 재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뒤지고 싶으면 넘어 봐.”
윤태희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선을 넘었다.
“넌 이제 죽었다.”
옳거니, 내심 선을 넘기를 기다린 재겸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손에 쥔 슬리퍼를 쥐더니 그대로 훠이, 밀려오는 파도에 내던졌다. 윤태희가 눈을 깜빡이며 맹한 얼굴을 했다.
“어?”
기습 공격에 윤태희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재겸이 크하하 웃으며 잽싸게 도망을 쳤다. 그러다 제 발에 걸려서 모래사장에 발이 푹 들어갔다. 앞으로 쿠당탕 굴러 넘어졌다.
“재겸아!”
재겸이 고꾸라지자, 놀라서 목소리를 내던 윤태희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물러나는 파도에 윤태희가 신고 있던 슬리퍼가 파도 너울에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그렇게 윤태희는 슬리퍼 두 짝을 눈 뜨고 잃어버렸다….
“등신아, 띨빵하게 있지 말고 바로 뛰어들어서 쓰레빠 한 짝이라도 건졌어야지.”
얼굴을 찌그러트리고 킥킥 웃는 재겸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나 수영할 줄 몰라서….”
재겸은 모래사장 위에 엎어져 한참을 웃었다. 윤태희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피식 웃었다. 슬리퍼로 매타작을 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슬리퍼를 바다로 내던져버릴 줄은 몰랐다.
모래 위에 넘어졌던 재겸이 머리통을 툴툴 털어낼 때였다.
“다친 데는 없니?”
슬리퍼는 안중에도 없는지, 윤태희가 다가와서 물었다.
“응. 안 다쳤어.”
재겸이 팔을 대자로 뻗으며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러자 윤태희가 허락도 없이 재겸의 팔베개를 벴다. 그때까지 큭큭 웃고 있던 재겸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걷혔다.
“…….”
재겸이 힐끗, 고개를 젖히며 무심한 낯으로 물었다.
“너 뭐 하냐?”
재겸의 팔을 베고 누운 윤태희가 얌전히 재겸을 바라보았다.
“그냥. 내 얼굴 보라고.”
“왜 그래야 되는데?”
윤태희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뒤지게 잘생겼으니까.”
재겸은 말문이 막혔다. 윤태희가 뒤지게 잘생긴 건 사실이었으므로.
“…….”
눈을 감고 있는 윤태희의 얼굴은 정말이지 누가 빚어놓은 것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윤태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재겸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흠, 너 이거 해봤냐?”
재겸이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모래를 쌓기 시작했다. 표정은 태연해 보였지만, 귀 끝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분위기만 잡혔다 하면 부리나케 도망가는 꼴이 웃겨서 윤태희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하관을 감싸 쥐었다. 재겸이 흠, 헛기침하며 모래를 잔뜩 끌어모았다.
“이거나 한 판 하고 집에 가자.”
“어떻게 하는 건데?”
모래로 둔덕을 쌓아 놓은 재겸은 근처에 버려진 나뭇가지 하나를 집더니, 모래성 한가운데에 쿡 찔러넣었다. 이것은 메산이와 마당에서 가끔 하던 놀이로, 모래나 흙을 이용해 고깔 모양의 성을 쌓은 다음 그 정중앙에 막대기 하나 꽂고, 차례대로 주거니 받거니 모래를 야금야금 덜어낸다. 그러다 최후의 순간에 막대기를 무너트리는 사람이 지는 것이었다.
“조건을 걸고, 진 사람이 이긴 사람 부탁 들어주는 거야.”
재겸은 평소 메산이에게 등허리를 꾹꾹 밟으라는 주문을 내리곤 했다….
“그래? 그럼 내가 뭐 해줬으면 좋겠어?”
룰을 이해한 윤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잠시 고민에 빠졌던 재겸이 이내 턱을 치켜들었다.
“네 전 재산 반절 줘.”
재겸은 매우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짜로?”
황당해하던 윤태희가 눈썹 한쪽을 슥 들었다.
“너 날강도야?”
재겸은 진심이었다. 윤태희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살다 살다 모래성 싸움에 전 재산의 반을 달라고 할 줄은 몰랐다. 건전한 놀이가 한순간에 도박판이 되었다….
“너 어차피 돈 썩어나잖어. 좀 베풀어.”
재겸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혹시 집안 사정이 많이 궁핍하세요?”
윤태희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장난스레 물었다.
“안 궁핍해도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어.”
“전 재산의 반을 노리다니 화끈한데.”
윤태희가 이마를 짚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재겸은 승부사 기질이 있었다. 가끔 밑도 끝도 없이 무모할 정도로 달려드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그때, 재겸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야, 인생은 한 방이야.”
그에 윤태희가 흔쾌히 동의를 표했다.
“그렇죠, 그러다 패가망신하는 거고.”
아니, 동의를 표하는 척하며 조용히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주식이나 투자 같은 거 함부로 하지 마세요.”
“뭐?”
“갑자기 누가 와서 돈 준다고 도장 찍으라 그러면 주먹 쥐고 얼굴 갈겨요.”
“얼굴은 왜 갈겨?”
“차라리 깽값 물어주고 끝나는 게 훨씬 이득일 것 같아서.”
뭔 소리야….
재겸이 심드렁한 얼굴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됐고, 그래서 네 조건은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