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뭐 해.”
재겸이 눈을 반쯤 내리뜬 채 말했다.
“키쓰해 달라며.”
윤태희는 눈을 크게 뜬 채 홀린 듯이 재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로의 코끝이 맞닿을 때였다. 재겸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윤태희는 숨을 멈춘 채 멍하니 재겸을 응시했다.
재겸은 언제나 여유롭던 윤태희의 평정심이 박살 나는 광경을 코끝에서 내려다보았다. 문득, 등골에서 오싹한 희열이 퍼져나갔다.
“눈 감아.”
그 순간, 윤태희는 질식할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끔찍한 전율이 일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재겸을 바라보던 윤태희가 눈을 감았다.
코끝을 맞대고 있던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술에 취해 몽롱한 감각 속에서 입술이 닿았다. 재겸의 입술이 닿는 순간, 윤태희의 눈가 한쪽이 가늘게 떨렸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서로의 입술이 빈틈없이 겹쳐졌다. 재겸은 윤태희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서투르게 입을 맞췄다. 윤태희가 한 대로 흉내를 냈으나, 마음처럼 잘되지 않았다.
윤태희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재겸의 키스를 받았다. 재겸의 숨결이 윤태희의 뺨에 뭉개졌다. 윤태희는 재겸의 서투른 키스를 따라갔다. 서로의 숨결이 조금씩 흐트러졌다.
어느 순간, 재겸이 천천히 입을 뗐다. 입술의 여린 점막이 진득하게 떨어졌다. 윤태희가 스르륵 눈을 떴다. 윤태희는 뭐에 홀린 듯한 멍한 표정으로 재겸을 올려다 보았다.
눈 주위가 살짝 붉어진 채로, 재겸은 눈을 반쯤 내리뜨고 윤태희를 내려다보았다. 피부가 하얀 윤태희는 목까지 시뻘게져 있었다.
“…….”
“…….”
둘은 한참 동안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서로의 시선에 올가미처럼 꽉 붙들린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렇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바라볼 때였다.
윤태희를 양팔 아래 가둔 채 내려다보던 재겸이 어느 순간, 고개를 힘없이 푹 떨궜다. 취기가 올라 머리가 멍했다. 윤태희의 뺨 언저리에 박치기를 하듯이 이마를 쿡 박았다.
“나도….”
그러다 어느 순간, 재겸이 희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나도 네가 꿈에 나왔어….”
그 순간, 윤태희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아,
나를 나로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것….
아찔한 타격감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이 짧게 경련했다. 재겸의 밑에 깔려 있던 윤태희가 결국 상체를 일으켰다. 윤태희의 허리춤에 앉아있던 재겸이 작게 휘청했다. 윤태희가 상체를 일으켜 앉은 덕분에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안은 자세가 되었다.
난데없이 바뀐 자세에, 재겸이 멈칫하며 중심을 잡을 때였다. 재겸을 제 허벅지 위에 앉힌 윤태희가 재겸의 뺨을 감싸 쥐더니, 얼굴을 확 끌어당기며 곧바로 고개를 기울였다.
주도권을 빼앗기는 건 순식간이었다.
멈췄던 키스가 다시 시작되었다. 재겸의 입맞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농밀한 입맞춤이었다. 윤태희는 재겸의 손을 잡고 제 목을 둘러 안게 했다. 살짝 마른 듯한 재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올리며 깊숙이 입을 맞췄다. 재겸은 홀린 듯이 윤태희의 키스를 따라갔다.
“우, 으….”
척추를 따라 손길이 느리게 움직였다. 날갯죽지를 지나는 순간, 윤태희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재겸은 저도 모르게 윤태희의 머리채를 꽉 움켜쥐었다.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호흡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열기 섞인 숨결이 마구잡이로 뒤엉켰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점점 진해지는 키스에 열중하고 있던 재겸은, 불현듯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찔하더니 갑자기 발버둥을 쳤다. 입술을 확 떼며 몸을 뒤로 뺐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재겸이 달아나자, 윤태희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왜…?”
재겸의 허리를 둘러 안은 윤태희가 손깍지를 끼고 물었다. 왜인지 재겸은 몹시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겸은 윤태희의 어깨를 밀어내며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어느덧 재겸의 귀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자, 자, 잠깐만. 놔, 놔 봐….”
“왜…?”
“비, 비켜 봐… 잠, 잠깐만….”
아무리 술을 마셨다고 해도 이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재겸은 매우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필사적으로 윤태희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에 윤태희가 재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어느 순간, 윤태희가 저에게서 달아나려는 재겸의 팔을 붙잡더니 뒤로 넘어트렸다. 반대로 자세가 바뀌었다. 뒤통수가 평상에 쿵, 하고 부딪쳤으나 재겸은 아픈 줄도 몰랐다.
“잠깐만… 비, 비켜 보라고…….”
윤태희의 팔 사이에 갇힌 재겸은 윤태희를 발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한쪽 발로 걷어차다시피 정신없이 윤태희를 밀어냈다. 그때였다. 윤태희가 제 어깨를 밟은 재겸의 발목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제 가슴 언저리에 가져다 댔다.
“재겸아.”
윤태희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
윤태희가 제 가슴을 짓밟은 발등에 쪽, 입을 맞췄다. 그에 윤태희의 밑에서 발버둥을 치던 재겸이 멈칫하며 굳었다. 덫에 걸린 것처럼, 멍하니 윤태희를 올려다볼 때였다.
쿵, 쿵, 쿵….
군림하는 소년의 맨발 아래, 윤태희의 심장이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언젠가, 지금처럼 윤태희의 살아 있음을 직접적으로 느꼈던 적이 있었다.
“재겸아,”
재겸의 발끝이 움찔할 때였다.
“해도 돼? 키스….”
그와 동시에 윤태희가 손에 쥐고 있던 발목을 놓았다. 윤태희의 가슴을 밟고 있던 재겸의 다리 한쪽이 스르르, 힘없이 미끄러졌다.
“…….”
대답은 필요 없었다.
***
재겸이 눈을 떴을 때는 환한 아침이었다.
“…….”
몽롱한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면 재겸이 어느 순간 숨을 들이켰다. 저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시야가 빙빙 돌았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셨다.
재겸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 뭐였지? 방금….
방금 전까지 평상에서 술을 마셨다. 그런데 재겸이 깨어난 곳은 딱딱한 평상 위가 아니라, 푹신한 이부자리가 깔린 황토집의 안방이었다. 뚱뚱한 텔레비전과 학이 그려진 검은 장롱이 보였다.
기억을 되짚어 보려는데, 재겸이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 썅….”
불현듯 두통이 엄습했다. 재겸이 끙끙거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담금주와 맥주가 만들어낸 숙취는 아주 위력적이었다. 저번에 양주를 마셨을 때보다 훨씬 덜 취한 것 같은데도 숙취가 심했다.
목이 마르고,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끔찍한 숙취에 신음하던 재겸은 짐가방 안에 메산이가 챙겨 준 약수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반쯤 죽어가던 재겸은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가방에 손을 뻗었다. 재빨리 메산이가 싸 준 약수를 꺼냈다.
생수통 안에 담긴 약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메산이가 싸 준 귀한 약수는 한순간에 숙취해소제로 전락하고 말았으나, 재겸은 개의치 않았다. 한 모금만 마셔도 충분할 테지만 갈증이 심하던 참이라 반절 넘게 마셔 버렸다. 관자놀이를 때리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약수 안 받아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숙취를 털어 버린 재겸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번뜩 떠오른 생각에, 서둘러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시선을 내렸더니 어제 샤워하고 갈아입은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 그대로였다.
뭐지? 꿈, 꿈인가…?
재겸이 황망한 표정으로 방 안을 살펴 보았다. 옆을 보니 반듯하게 개어 둔 이불 한 채와 베개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저 말고 누군가 이 방에서 잔 흔적이었다. 윤태희는 일찌감치 잠에서 깬 듯했다. 현실의 기억인지 꿈인지, 장면이 뒤엉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설마 이 방에서 윤태희와 함께 잔 건가?
어제 평상에서 술을 마셨고, 키쓰를 했는데… 기억을 되짚던 재겸이 입고 있던 고무줄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허리춤을 슬쩍 당겨 보았다. 안을 확인했다.
“…….”
다행히 우려하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그리하여 재겸은 간밤에 아주 해괴망측한 꿈을 꿨다는 결론을 내렸다. 재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상체를 철푸덕 엎드렸다.
왜 그런 꿈을 꾼 거지?
“아, 썅….”
욕을 내뱉는 재겸은 어느새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미쳤나 보다. 제정신이 아니다. 그저 꿈일 뿐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어떻게 내가 남색을….
용납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저번에도 비슷한 꿈을 꾸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그때보다 더 망측한 꿈이었다. 기가 막혔다. 이게 다 술 때문이다. 앞으로 술을 먹질 말아야지.
어쨌든 꿈이라서 다행이다. 잠에서 깬 순간,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안 되어 눈앞이 깜깜했었다.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재겸은 머리를 감싸 쥐고 놀란 마음을 다스렸다.
한참 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재겸은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윤태희는 어디로 간 거지?
하필 그런 꿈을 꾸고 난 직후라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으나, 재겸은 일단 까치집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건넛방으로 가 보았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슬쩍 방 안을 살펴보았지만, 윤태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당에 있나? 재겸은 마루로 걸음을 옮겼다.
마루에 서니, 아침 햇볕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마당이 한눈에 보였다. 화창하고 푸른 하늘, 돌담 너머로 탁 트인 바다가 눈에 띄었다.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는, 평상 위에 걸터앉아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책을 읽고 있는 윤태희가 있었다.
윤태희의 옷차림 역시 재겸과 마찬가지로 어제 갈아입은 그대로였다. 흰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윤태희는 여느 때처럼 안경을 쓰고 있었다. 서울에서부터 챙겨 온 모양이었다.
재겸은 아침 풍경 속에 있는 윤태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손에 책날개를 겹쳐 쥐고, 긴 다리를 까딱일 때마다 발끝에 걸린 슬리퍼가 대롱거렸다.
그때, 윤태희가 시선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윤태희가 안경을 콧대로 슥 내리더니, 책을 탁 덮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