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206)화 (206/348)

#206

“자개함… 어디, 어디로 갔느냐.”

“아아… 그거…?”

소년이 흐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내다 버렸어.”

멱살을 쥐고 있던 묘정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묘정의 손길에서 풀려난 소년이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묘정은 눈을 크게 뜬 채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허망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 이내 양팔을 축 늘어트리며 고개를 숙이고 눈가를 감싸 쥐었다.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묘정을 향해, 소년이 물었다.

“말해 봐. 정말 나를 속인 거야?”

“…….”

“정말로 묘정이 내 부모를 죽였어?”

“…….”

“정말로 나를 죽일 생각이었어?”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묘정에게선 그 어떤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소년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대답해, 대답해 보란 말이야!”

소년은 언젠가 자신이 손수 바느질하여 꿰매주었던 묘정의 검은 장포를 움켜쥐었다. 떼를 쓰듯이 옷을 마구 잡아당기다가, 주먹을 쥐고 묘정의 가슴팍을 때리기 시작했다.

“말해! 전부 다 거짓말이라고…….”

그때, 줄곧 침묵으로 일관하던 묘정이 소년의 손목을 붙잡았다. 소년을 차갑게 뿌리치며 묘정이 말했다.

“아니, 네 말이 옳다. 전부 참이다.”

묘정의 손에 의해 바닥에 패대기쳐진 소년이 불을 밝혀놓은 촛대를 건드리며 벽에 처박혔다. 기름이 담긴 등잔불이 바닥으로 엎어지며 불꽃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년도, 묘정도 불이 번지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소년의 어깨가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눈물이 맺힌 눈으로 묘정을 노려보다가, 소년이 말했다.

“그럼… 한 번도… 내게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어?”

바보같이 자꾸만 목소리가 떨렸다. 감정이 북받쳤다. 그때였다. 묘정이 이마를 짚고 큭큭 웃기 시작했다.

“이 버러지 같은 것이 기어코 모든 것을 망쳤구나.”

버러지 같은 것.

정확히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으나, 소년은 상처를 입었다.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소년은 멍하니 묘정을 올려다보았다. 눈앞의 묘정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실성한 사람처럼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바닥에 엎어진 등잔불은 어느덧 이불까지 옮겨붙으며 커다란 불길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래, 언젠가는 이리 될 일이었지.”

묘정이 자조적인 어조로 혼잣말을 뱉었다. 얼굴을 감싸 쥔 채 웃던 묘정은, 어느새 이를 데 없이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묘정은 소년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내 묘정은 소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뒷덜미를 확 잡아채더니, 창호지 문을 발로 걷어차듯 열고 소년을 짐짝처럼 내팽개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당에 나동그라졌던 소년이 몸을 일으킬 때였다. 방에서 일어난 불길을 등지고 툇마루로 걸어 나온 묘정이 소년을 향하여 무언가를 휙 집어 던졌다. 소년은 철그럭, 소리를 내며 제 앞에 떨어진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래, 나는 네 부모를 죽였다.”

묘정이 제게 던진 것은 다름 아닌 검 한 자루였다.

“…….”

소년이 흔들리는 눈으로 묘정을 응시할 때였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어느샌가 묘정의 손에도 검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나자의 눈에 띄지 말라.”

묘정이 마루에서 성큼 내려왔다.

“나자를 만나거든 그때는 반드시 도망쳐라.”

묘정이 비정한 눈동자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기회를 주겠다. 도망칠 테냐?”

지금 이 순간, 소년은 비로소 깨달았다.

눈앞의 묘정은 더이상 제가 알던 스승이 아니었다. 부모를 죽인 원수이자, 저를 죽이려고 거둔 악한이었다. 언제나 다정하던 스승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악인이 되었다.

냉혹한 얼굴을 한 묘정은 완전히 다른 인간이었다.

‘묘정은 네 부모를 증오했다. 너는 그 증오의 씨앗이다.’

마침내 소년의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오늘은 묘정에 대해서도, 그리고 저 자신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은 날이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가 않다. 소년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서글퍼졌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땅바닥의 흙을 손아귀에 움켜쥐었으나 끝내 손안에 남은 것은 없었다. 남은 것은 분노. 배신. 상실. 슬픔….

그리고 미련.

‘나자를 만나거든 그때는 반드시 도망쳐야 한다. 만에 하나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절대로 용서하지 말거라.’

“내가 왜 도망쳐야 하는데?”

소년은 옷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나는 도망치지 않아. 그리고….”

소년이 붉어진 눈으로 묘정을 노려보았다.

“용서하지도 않아.”

눈물을 닦아낸 소년이 앞에 떨어져 있는 검을 주워들었다.

“하하하! 옳지, 그렇지. 그렇게 나와야지.”

묘정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바탕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내 제자로다.”

묘정이 즐거운 표정으로 검집을 빼서 내던졌다. 형형한 안광을 번득이며 소년을 향해 칼끝을 겨눴다.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소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등잔불에서 번진 불길은 어느새 거대한 화마가 되어 초가집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허공에 불씨가 흩날리고, 화염에 휩싸인 지붕과 서까래가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물어볼게.”

소년이 눈가를 훔치며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왜 내 부모를 죽였어?”

“네 부모는 잡귀만도 못한 인간들이었지.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해악이었다.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여도 나는 네 부모의 목을 벨 것이다.”

“정말 나를 죽이려고 데려왔어?”

“그래.”

“그럼, 왜 여태껏 죽이지 않고 살려둔 거야?”

“…….”

묘정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을 내려다보던 묘정이 어느 순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묘정이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제법 쓸만한 재목이기에 그냥 죽이자니 아깝더구나. 혹, 어디 써먹을 만한 데가 있을까 싶었지. 어쨌든 내가 거둔 삶이니 언제 죽이든지 내 마음 아니겠느냐?”

그 순간, 수향의 조롱 어린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너를 길러서 제물로 쓰려고 그랬는지도 모르지. 묘정의 말대로 나자는 자기 자식마저 제물로 바치는 간악하고 사특한 존재이니까 말이야.’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마침내 소년은 독기에 가득 찬 눈으로 검을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스승과 제자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과 검이 부딪쳤다. 한바탕 거센 광풍이 휘몰아쳤다.

묘정의 검이 쉴 새 없이 쇄도하였다.

묘정의 검에는 전에 경험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귀기가 실려 있었다. 묘정의 귀기는 묵직했고, 냉혹했으며, 슬펐다. 묘정은 진심으로 나를 죽일 생각이구나. 소년은 결심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도 당신을 따라 죽으리라.

한순간에 삶의 의미가 사라졌다. 소년은 이제 더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몇 번이고 검이 맞부딪쳤다. 비정한 스승과 절망한 제자는 호각을 이루었다.

“과연 가르친 보람이 있구나.”

묘정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묘정에게 짧은 빈틈이 생겼다. 소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을 찔러넣었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에 손이 멈칫하고 말았다.

그에 묘정이 곧바로 소년의 검을 저 멀리 쳐냈다.

“원수를 상대로 머뭇거리지 말라, 내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니.”

묘정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소년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검이 허공을 몇 바퀴 돌았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푹 꽂혔다. 묘정의 검이 망설임 없이 소년의 몸을 파고들었다.

아. 아. 아아….

묘정의 검에 옆구리를 관통당한 소년은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멍하니 제 옆구리를 내려다보는데, 뒤늦게서야 극악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소년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소년이 흙바닥에 이마를 짓뭉개며 악을 썼다.

“아, 아아, 아아악—!”

칼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가 콸콸 흘러나왔다.

“이래서야, 생각보다 시시하게 끝이 났구나.”

서슬 퍼런 칼날이 다가와 소년의 목을 겨누었다.

“너는 살아서는 안 될 운명이었다.”

피 웅덩이를 깔고 누운 소년은 악에 받친 눈으로 묘정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나를 먹이지도, 재우지도 말았어야 한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일도 없었어야 한다. 영영 온기라고는 알 도리가 없게끔 숨통을 끊었어야 한다. 참으로 잘 태어났다고,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

“그… 래, 죽여….”

묘정의 검은 금방이라도 목을 꿰뚫을 듯했다.

“애원도 하지 않는 것이냐?”

묘정은 상처 입은 소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손에 든 검을 옆으로 휙 내팽개쳤다. 묘정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망설이지 않게 되거든, 그때 다시 나를 찾아오거라.”

소년이 손에 잡히는 대로 흙을 움켜쥐며 신음했다.

“그냥, 지금 죽여버리란 말이야….”

“어차피 모든 생명은 때가 되면 죽는단다. 헌데 이대로 쓸모없이 죽이자니 퍽 아쉬운 마음이 드는구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이 세상에 남겨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생각에 잠긴 눈을 하던 묘정이 삐뚜름히 입술을 끌어올렸다.

“너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알리는 증표가 될 것이다.”

사지가 벌벌 떨리고, 자꾸만 눈이 감겼다.

“가엾은 나의 제자야. 부디 운명을 거슬러 보거라.”

그것이 묘정이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이었다. 묘정은 입고 있던 흑색 장포를 벗더니, 소년의 몸에 덮어주고 등을 돌렸다. 옷에 묻어있던 묘정의 온기가 따스하게 몸을 휘감아 왔다. 소년은 가물거리는 눈을 힘겹게 뜨고, 저를 버리고 떠나는 스승의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아니, 너는 이미 나를 죽였어….”

소년은 부르튼 입술을 힘없이 달싹였다.

“당신은 내 마음을 죽인 거야….”

멀어지는 묘정의 등을 바라보며, 소년은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이건 배신이야….”

소년은 초점이 흐린 눈으로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쏟아질 듯한 무수한 별과 떠돌아다니는 불씨, 그리고 잿더미로 변한 우리들의 집. 모두가 소년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다정하고도 잔혹한 밤이었다. 소년은 묘정을 붙잡지도, 따라가지도 못했다. 묘정에게 가닿지 않는 목소리가 하염없이 맴돌았다.

“배신자.”

‘배신자.’

“배신자….”

앳되고 늙은 소년은 빛나는 별빛을 노려보았다.

“배신자…….”

그렇게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마침내 재겸은 이곳에 있었다.

물먹은 별이 빛난다. 멀리서 풀벌레가 울고, 희미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이제는 완전히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술 때문인지 무언가 울컥 북받쳐 올랐다.

미간을 모은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재겸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묘정은 나를 배신한 거야.”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던 재겸은 윤태희를 등지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윤태희는 재겸에게 위로를 건네지도 않았고, 재겸의 상처를 헤아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밤벌레처럼 웅크린 소년의 등을 말없이 바라볼 따름이었다. 살짝 마른 등에 날개뼈가 불툭 튀어나왔다. 윤태희는 저를 등지고 누운 재겸에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윤태희.”

어느 순간, 돌아누운 등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나 속이지 마.”

재겸의 등에 닿으려던 손끝이 우뚝 멈췄다.

“아니, 속여도 상관없어. 속일 거면 들키지만 마.”

이어진 말에, 윤태희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

윤태희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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