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 잠시 후 본 선박은 거여도에 입항합니다… 거여도에 내리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잊으신 물건 없이 하선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거여도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오후 무렵이었다.
2시간여의 항해 끝에 페리호가 선착장에 정박하자 재겸, 윤태희, 신지혜 세 사람은 하선할 준비를 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난 윤태희는 컨디션을 꽤 회복했는지 안색이 한결 나아져 있었다.
입도와 동시에 산산이 부서지는 햇살이 세 사람을 마중 나왔다.
섬에 발을 내딛자마자 비릿하고 짭조름한 특유의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겼다. 거여도는 다도해 최남단에 있는 섬으로, 아는 사람만 안다는 자그마한 섬이었다. 섬에 사는 주민은 사십여 가구 남짓이었다.
선착장에는 고기잡이배 몇 척이 정박해 있었고, 주변에는 잔뜩 뒤엉킨 그물과 망가진 부표, 폐타이어 등이 널려 있었다. 갈매기들이 통통거리는 걸음으로 방파제 위를 돌아다니는 풍경은 고즈넉하면서도 평화로웠다.
한적하고 아름다운 섬이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해?”
신지혜는 이번이 거여도 두 번째 방문이었다. 이전에도 한 번 모친을 따라 거여도에 와본 적이 있는 신지혜는 기억을 더듬어서 길 안내를 했다.
“저쪽으로 빙 돌아서, 섬 뒤편으로 갔던 것 같아.”
신지혜가 손가락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신지혜는 설렘이 묻어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재겸과 윤태희는 신지혜의 휠체어를 밀어주며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옷차림만 봐도 외지인일 것이 분명해 보이는 세 사람이 지나가자 작업 중이던 어민들이 힐끗 시선을 주었다.
한참을 걷고 걸어 도착한 장소는 섬 끄트머리였다.
“이제 기억났어! 여기 맞아!”
섬 뒤편에 이르자 바닷바람에 깎여나간 기암절벽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따스한 인상의 선착장과는 달리 볕이 잘 들지 않아 음지의 기운이 강했다. 또한, 잔잔하던 앞바다에 비해 파도가 사납고, 거세게 해풍이 불었다. 바닥에는 자갈이 잔뜩 깔려 있어 길이 험하고 울퉁불퉁했다. 크고 작은 바위 사이로 파도가 몰아쳤다가 달아나길 반복했다.
묘하게 들뜬 낯으로 바다를 바라보던 신지혜가 말했다.
“저기! 저기야!”
신지혜가 가리킨 방향에는 갈라진 기암절벽과 바위섬 사이로 해협과 같은 비좁은 골짜기가 나 있었다. 오래전 용이 지나갔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여 섬사람들 사이에서는 ‘용소골’이라고 불렸다.
용소골은 수시로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데다 조류가 빨라서, 낚시꾼은 물론이고 이 섬의 어민들도 거의 가지 않는 장소였다.
“예전에 엄마랑 고향에 갔을 때 저 절벽 사이로 잠수해서 소용돌이를 뚫고 들어갔었거든. 인어가 아니면 절대로 뚫을 수 없다고 그랬어.”
고로 여기서부터는 동행할 수 없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럼 바로 출발할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신지혜는 다리를 감싸고 있던 담요를 치웠다. 담요 속에 감춰져 있던 두 다리는 어느새 완전히 붙어 있었고, 양쪽 발 또한 하나로 이어져서 흡사 물고기의 꼬리와 같은 형태로 변해 있었다.
“당장 출발해도 괜찮겠어? 피곤하지 않겠어?”
“괜찮아.”
장거리 이동으로 인해 재겸도 윤태희도 살짝 지친 상태였지만, 신지혜는 오히려 기운이 넘쳐 보였다. “반쪽 인어라도 인어는 인어인가 봐.” 그렇게 말하며 신지혜가 흐흐 웃었다. 늘 도시에서 지내다 보니 잘 몰랐는데,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힘이 펄펄 솟아났고 기분도 좋았다.
“빠르면 하루, 늦으면 이삼일까지 걸릴 수도 있어. 그래도 최대한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당부의 말을 마친 신지혜는 겉옷을 훌러덩 벗었다. 겉옷 속에는 미리 래시가드를 입어 두었다. 신지혜는 이미 출발할 때부터 만반의 준비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순식간에 환복을 끝낸 신지혜는 윤태희에게 자신의 캐리어를 달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몸에 지니고 있던 휴대폰의 전원을 끄고 방수 지퍼백 속에 넣은 뒤 단단히 밀봉했다. 뭍에 올라왔을 때 두 사람에게 연락할 수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인어의 몸으로는 거동할 수 없으므로 재겸과 윤태희를 다시 이곳으로 불러야 했다.
“캐리어랑 휠체어는 남들 눈에 안 보이게 바위틈에 잘 숨겨놓아 줘. 지나가는 사람이 봤다가 괜히 의심하면 곤란하니까. 아, 특히 캐리어 안에 갈아입을 옷이랑 태블릿이랑 블루투스 이어폰 다 들어있으니까 조심하고. 침수돼서 물에 젖기만 해봐. 망가지면 전부 너희 탓이야.”
신지혜가 팔짱을 끼며 새침하게 지시를 내렸다.
“…….”
“…….”
윤태희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망가지면 전부 새 걸로 사줄게.”
흔쾌히 후처리를 약속한 윤태희는 파도가 들이치지 않는 적당한 바위를 찾더니, 신지혜의 휴대폰이 든 지퍼백을 바위틈에 끼워놓았다.
“일단 휴대폰은 여기에 둘게. 돌아오면 바로 연락 부탁해.”
“알았어.”
그 말을 끝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던 신지혜는 질끈 동여 묶었던 머리를 풀더니 바위 아래로 냅다 몸을 던졌다. 화끈한 입수에 재겸이 살짝 당황한 얼굴을 했다. 풍덩, 소리와 함께 한 차례 물보라가 일었다.
재겸과 윤태희는 신지혜가 뛰어든 지점에 시선을 주었다. 바닷속에 뛰어들었던 신지혜가 머지않아 얼굴을 내밀었다. 신지혜는 물에 젖은 긴 머리를 쓸어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해방감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그럼 갔다 올게!”
신지혜가 두 사람을 향해 팔을 훠이훠이 흔들었다.
“조심히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마침내 인어 신지혜가 용소골을 향해서 유영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비늘이 물에 반사되어 무지개처럼 시시각각 빛을 뿜었다.
그렇게 신지혜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닷속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신지혜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잔잔한 파도뿐이었다. 재겸은 신지혜가 남겨놓고 간 궤적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신기해. 인어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이제 재겸과 윤태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남은 것은 신지혜가 인어를 데려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뿐이다. 재겸이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이 순간, 재겸은 자신이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 이틀만 지나면 불로불사라는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손에 쥐게 될지도 모른다. 저주에서 풀려나면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는데, 이 족쇄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재겸은 은연중에 기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재겸은 불현듯 신지혜가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영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된 감정을 느꼈다.
“…….”
재겸의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래서 기대하기가 싫은 것이다. 기대로 부풀었던 마음이 푹 꺼지면 그 여백에는 공허함과 무력감만 남는다. 한없이 팽창했던 마음은 그대로 초라하게 쪼그라든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고 실망할 일도 없는데, 그걸 알면서도 매번 바보같이 기대한다.
문득 마음이 초조해졌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 저주가 인어와 관련이 없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걸까? 그래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이 저주를 풀 수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만을 깨우치게 된다면…….
그때, 큼지막한 온기가 재겸의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괜찮아, 전부다.”
재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윤태희가 말했다.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윤태희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괜찮아, 전부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신기하게도 불안하게 널뛰던 마음이 한순간에 차분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칠칠아, 뭔가를 기대하는 건 잘못이 아니야. 뭐, 물론 기대를 안 하면 실망할 일도 없긴 해. 나는 그래도 계속 뭔가를 기대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불현듯, 언젠가 임효문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뭔가를 기대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임효문은 말했었다. 재겸은 문득 고개를 돌려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윤태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갈까?”
“…응.”
신지혜를 무사히 배웅한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윤태희는 신지혜의 당부대로 휠체어를 접어서 캐리어와 함께 구석진 절벽 틈에 보이지 않도록 세워두었다. 두 사람은 다시 섬을 반 바퀴 돌아서 선착장 근처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신지혜가 돌아오려면 며칠이 걸릴 테니, 우선은 묵을 만한 숙소부터 찾아야 했다.
***
거여도는 생각보다 훨씬 자그마한 섬이었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한적한 섬이다 보니 웬만한 가게들은 대부분 선착장 주변에 몰려 있었다. 선착장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줄지어 늘어선 가게를 바라보았다. 낚시 도구를 파는 가게와 횟집 그리고 평범한 양옥집과 다름없어 보이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그런데 구멍가게에서 민박집을 겸하고 있는지 낡은 간판에 ‘민박 됩니다’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윤태희는 고민 없이 구멍가게로 향했다. 재겸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는 윤태희를 졸레졸레 따라갔다. 자신이 딱히 나서지 않아도 윤태희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싶었다.
“계세요?”
그러나 가게 안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계십니까.”
그에 윤태희가 한 번 더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가게 내부에 있던 미닫이문이 열리며, 평범한 가정집에서 머리를 빠글빠글 볶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허리가 반쯤 굽은 노인의 등 뒤에서는 웬 어린아이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재겸과 윤태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루 이틀 신세를 지고 싶은데….”
윤태희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며 용건을 말했다.
“그려, 그려.”
숙박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노인이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남는 방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노인의 뒤에 서 있던 아이가 제 할머니의 몸빼바지를 잡아당기며 뭐라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다. 앞니가 빠진 아이는 예닐곱 살 정도로 보였다.
“으응, 육지서 온 양반들인디 며칠 묵고 간디야.”
노인의 대답으로 미루어볼 때 저희가 누군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에 빙그레 웃던 윤태희가 허리를 굽히며 아이에게 눈을 맞췄다.
“안녕하세요?”
윤태희가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아이가 부끄러운 듯 노인의 등 뒤에 슬쩍 얼굴을 숨기는가 싶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몇 살이에요?”
“일곱 살….”
“일곱 살? 내년에 학교 가겠네.”
윤태희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머리 쓰다듬어도 되니?”
아이는 몸을 배배 꼬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윤태희가 미소를 지으며 큼지막한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머리 핀이 귀엽네. 이름이 뭐예요?”
“김 시우….”
“시우? 이름도 멋지다.”
유치가 빠진 탓인지 아이는 말을 할 때마다 발음이 조금씩 샜다. 윤태희는 시우를 보며 연옥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재겸은 메산이를 떠올리는 와중에,
너는 늘 아이에게 다정하구나.
불현듯 생각이 미끄러졌다.
“…….”
재겸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은 윤태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야가 내 손주여.”
노인은 시우가 자신의 손주라고 말하며 아들 부부는 현재 도시에서 사는데, 사정이 생겨서 몇 달 동안 아이를 이곳에 맡겨 두었다고 했다.
그렇군… 재겸은 직접 대화에 끼지 않고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그란디 이 섬엔 뭐더러 왔는가? 낚시허는 영감태기들이나 가끔 오는 섬인디 젊은 총각 둘이 여기 머 볼 것이 있다고.”
노인의 말에, 윤태희는 그냥 한적하게 쉬고 싶어서 여행을 왔다는 식으로 적당히 질문을 무마했다. 다행히 노인은 뭐라 더 묻지 않았다.
“그럼 여기 어르신 댁에서 묵으면 될까요?”
윤태희가 예의 바르게 묻자, 노인이 말했다.
“우리 집에도 남는 방은 있는디 등치 큰 양반들 둘이 한 방서 지내기에 거시기허면은 저짝에 빈집 하나 통째루 있응게 글루 가도 돼야.”
“빈집이요?”
노인이 뒷짐을 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에서 위로 조금 더 올라가면 경사진 골목에 황토집 한 채가 있는데,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집에서 살았으나 세월이 흘러서 이곳에 새로 양옥집을 지었다고 했다.
“옛날집잉게 낡긴 혔는디 방은 두 개여.”
이곳 양옥집에서 둘이 한방을 쓰느냐, 아니면 이 집과 동떨어져 있는 낡은 황토집을 통째로 빌려서 방 두 개를 쓰느냐. 그에 재겸이 잠시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그때, 재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윤태희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독채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