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85)화 (185/348)

#185

밤 10시를 넘긴 시각, 재겸은 불야성 같은 번화가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한 재겸은 본청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재겸이 정한 행선지는 집이 아니라 김세민이 알려준 술집이었다. 택시는 정확히 김세민이 말한 위치에 재겸을 데려다주었다. 재겸은 짤짤이를 털어 택시비를 지불한 뒤 택시에서 내렸다.

목적지에 도착한 재겸은 커다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건물 입구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건물 전체가 술집이어서 입구를 찾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입구에는 발레파킹을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술집이었다. 외관도 꽤나 세련되어 보였다.

건물을 살피던 재겸은 휴대폰을 꺼내 윤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만약 윤태희가 전화를 받는다면, 지금 가게 앞에 와 있으니 잠깐 나와서 얘기 좀 하자고 할 생각이었으나 예상대로 윤태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받을 거라고 기대도 안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쳐들어가서 직접 잡아 오는 수밖엔 없겠다.

재겸은 싸늘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한참 손님이 많을 시각이라 가게 입구에는 몇몇 무리가 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쭉 빼고서 은밀하게 정찰을 해 보니, 사람들이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직원에게 일일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아 신분증 검사를 하는 것 같았다. 신분증이 없는 재겸은 곧장 뒤돌아 나왔다.

썅, 어쩌지.

재겸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건물 근처를 서성거렸다.

적당한 개구멍 같은 건 없나?

고민하던 재겸은 건물 뒤쪽으로 슬그머니 향했다. 빌딩 뒤편에는 어두컴컴한 주차장이 있었고, 한쪽에는 커다란 쓰레기봉투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뒷문이 열리며 누군가 납작한 손수레를 끌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마침 쓰레기를 내다 버리러 나온 모양이었다. 직원이 쓰레기를 버리러 간 사이, 재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은밀히 건물 안으로 들어온 재겸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내부를 살펴보았다. 직원만 출입할 수 있는 이상한 창고 같은 곳이었다. 재겸은 기척을 죽이고 재빨리 다른 문을 찾았다. 문을 열고 나오자 조명이 밝은 복도가 펼쳐졌다. 손님처럼 보이는 이들이 꺄르르 웃으며 재겸의 곁을 지나갔다. 무사히 술집 출입에 성공한 재겸은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술집 내부에는 커다란 라운지가 있었고, 개별 룸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개방된 공간이 아니었으므로 윤태희를 찾기 위해서는 하나씩 문을 열어서 안에 누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수밖엔 없었다. 재겸은 복도를 돌아다니며 문을 열고 윤태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응? 뭐야?”

문을 벌컥 열어젖힐 때마다 적게는 서너 명, 많게는 대여섯 명의 인원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신나게 부어라 마셔라 술자리를 벌이고 있던 사람들은 노크도 없이 들어온 재겸을 보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누구세요?” 그때마다 재겸은 재빨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았고, 윤태희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뒤늦게 잘못 들어온 척 “죄송….” 말을 흐리며 후다닥 문을 닫았다. 그렇게 몇 군데나 들락날락했으나 죄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열 번쯤 문을 열었을까, 슬슬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

딱 세 곳만 더 보고 가자. 화를 억누르던 재겸은 씨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제일 안쪽에 있는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이번에 열어본 문 너머는 지금껏 살펴본 내부와는 다른 풍경이었다. 지금까지 봤던 곳 중에서 제일 넓었고, 사람도 많았다.

안에는 혼성으로 섞인 젊은 남녀가 열 명 넘게 있었다.

재겸이 들어간 곳은 이 가게에서 가장 좋은 VIP 룸이었다.

넓은 방 안에는 엄청나게 큰 테이블이 있었는데, 벽면을 따라 디귿 형태로 된 커다란 붙박이 소파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온갖 값비싼 양주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아름답게 세공된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한쪽에는 카드 게임을 하는 원형 테이블과 포켓볼을 할 수 있는 당구대도 있었다. 또 벽면에는 다트 게임을 할 수 있는 기계가 붙어있었는데, 마침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는지 대여섯 명 정도가 손에 술잔을 든 채 다트판 앞에 모여 있고 나머지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뭐야?”

재겸이 문을 반쯤 열고 고개를 들이밀자,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모두의 시선이 문간으로 꽂혔다. 그에 재겸이 내부를 빠르게 스캔하며 사람들의 얼굴을 살필 때였다.

불현듯 사람들 틈 속에 끼어 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다트를 던지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던 윤태희가 뒤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내 둘의 눈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

“…….”

재겸이 입술을 달싹였다.

“너….”

너 이 씹새끼 드디어 찾았다!

눈이 마주치자 재겸이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야 이 씹새끼야 너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라는 눈빛을 담아서, 눈매에 잔뜩 힘을 주고 윤태희를 쳐다볼 때였다.

“뭐야, 자기야. 누구야?”

그때였다. 곁에 있던 누군가가 윤태희의 어깨에 턱을 얹으며 재겸을 바라보았다. 아까 낮에 김세민의 보여준 사진 속에서 보았던 얼굴로, 윤태희에게 ‘우리 자기’라는 호칭을 썼다는 사람이었다. 신지혜는 긴 웨이브 머리에, 발등을 덮을 정도로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재겸이 멈칫하며 윤태희와 신지혜를 번갈아 바라볼 때였다.

“자기야, 아는 사람이야?”

재겸의 시선이 윤태희에게 고정되어 있음을 알아차린 단발머리가 윤태희에게 재차 물었다. 그러자 무표정한 눈으로 재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윤태희가 시선을 떼며 말했다.

“아니, 처음 보는데.”

윤태희의 대답에, 재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뭐? 처음 본다고?

잠시 굳어있던 재겸이 당황하여 입을 열었다.

“윤….”

그때, 윤태희가 느릿느릿한 음성으로 재겸의 말을 가로막았다.

“착각하고 방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마침내 재겸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그 말은 명백하게 재겸을 불청객 취급을 하는 말이었다. 한 마디로 나가라는 뜻이었다. 생면부지 사이처럼 구는 태도에 재겸은 당황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으니 뭐라 따져 물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재겸이 말을 잃고 멍하니 있을 때였다.

“얘, 너 몇 살이야?”

그때, 누군가 재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네?”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사고가 정지한 채 그대로 얼어있던 재겸이 제 곁에 다가온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재겸에게 질문을 던진 사람은 단발머리를 한 여성이었다. 다짜고짜 나이를 물으니 재겸은 당황했다. 남들에게 어린 사람 취급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스, 스, 스물 두 살요.”

말을 어물거리던 재겸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뭐야, 완전 애기네. 일행 찾아다니는 거야?”

“예? 예….”

“방 어딘지 못 찾는구나? 카운터 가서 물어보면 바로 알려줄 거야.”

단발머리가 친절하게 말했다. 그에 재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윤태희에게 시선을 주었다. 술잔을 들고 신지혜와 뭐라 대화를 나누던 윤태희는 재겸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재겸을 바라보았다. 눈짓을 보낸 재겸은 문을 닫고 다시 복도로 나왔다.

복도로 나온 재겸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윤태희를 기다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윤태희는 제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 이대로 자리를 뜨면 뒤이어 윤태희도 뭐라 핑계를 대고 뒤따라 나올 것이라고 재겸은 생각했다. 그런데…….

“…….”

아니 이 씹새끼 왜 안 나와?

아무리 기다려도 윤태희는 나오지 않았다. 그에 재겸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다가,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윤태희와 신지혜가 마주 서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응?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재겸이 다시 찾아오자,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게….”

재겸은 주춤하며 윤태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윤태희는 재겸과 정말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소 닭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윤태희는 평소 눈치가 귀신같이 빨랐다. 재겸이 왜 여기에 왔으며 뭐 때문에 왔는지, 눈으로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윤태희라면 이럴 리가 없는데…….

그때, 단발머리가 문득 짓궂게 웃더니 재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아, 알겠다.”

초면의 여성에게 손목을 붙잡힌 재겸은 흠칫했다.

“너 지혜 팬이구나?”

“…네?”

“사실대로 불어, 너 사실은 지혜 보러온 거지?”

“…예?”

“지혜 팬이라서 괜히 핑계 대고 지혜 보러 온 거잖아.”

단발머리의 말에, 신지혜가 꺄르르 웃었다.

“뭐야, 그런 거였어? 그런 거였으면 진작 말을 하지!”

“네? 아… 그, 그게…”

재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리저리 시선을 굴릴 때였다.

“맞네, 내 눈도 잘 못 쳐다보네.”

재겸이 다시 등장하자, 사람들은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신지혜의 팬이라며 사인을 받으러 오거나 주변을 맴도는 이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테지만, 하는 꼴이 영 숙맥인 데다가 어려 보여서 신지혜는 재겸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뭘 원해? 사인? 아니면 사진?”

가까이 다가온 신지혜가 재겸의 머리를 마구 비비적거리며 물었다.

“얼굴 빨개진 거 봐. 귀여워.”

신지혜를 비롯한 여성들이 키득거리며 재겸에게 관심을 보였다. 윤태희를 찾기 위해 호기롭게 온 방을 뒤지고 다녔던 재겸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닥치자, 식은땀이 뻘뻘 났다.

“아, 아니면 같이 놀래? 대신,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재겸은 당황한 얼굴로 윤태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남자들 무리에 끼어 있는 윤태희는 벽에 몸을 기댄 채 다른 사람과 뭐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재겸이 끼든지 말든지 윤태희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우리 게임 하고 있었는데 너도 같이하자.”

“네?”

“다트 내기하고 있었거든.”

“예? 저 이거 할 줄 모르는데….”

난데없이 게임에 끼게 된 재겸은 이 상황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냥 여기서 나가고 싶었지만, 단발머리가 다트 핀을 가져와서 재겸에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게임 룰은 제일 높은 점수를 얻는 팀이 이기는 것이라고 했다. 단발머리는 어디에 맞추면 점수가 제일 높은지 알려주었다. 10점부터 60점까지 얻을 수 있고, 높은 점수를 받을수록 유리하다고 했다.

“한 번 던져 봐.”

단발머리가 다트 핀을 쥐여주며 재촉했다. 재겸은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싶었지만 일단 다트를 들었다. 팔을 반쯤 접었다가 폈다가 눈 한쪽을 감고 거리를 가늠한 뒤, 대충 다트를 날렸다. 과녁에 다트가 꽂히자, 다트판 테두리에 현란한 조명이 번쩍거리며 효과음이 났다.

60점. 가장 얻기 어려운 점수였다.

“세상에.”

술을 마시며 정신없이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와, 하며 환호가 쏟아졌다. 윤태희는 팔짱을 끼고 술을 마시며 무료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재겸이 두 번째 다트 핀을 손에 쥐었다.

또 60점이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와, 뭐야? 왜 이렇게 잘해?”

칭찬이 쏟아지자 재겸은 저도 모르게 윤태희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다트판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윤태희가 신지혜에게 뭐라 귓속말을 하는 것이 보였다. 신지혜가 웃으며 윤태희의 팔을 때렸다. 둘이 상체를 숙이고 웃는 두 사람은 매우 즐거워 보였다.

“…….”

잠시 침묵하던 재겸이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태희야.

그 순간, 윤태희의 기척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겸은 마지막 남은 다트 핀의 각도를 슬쩍 틀어서 던졌다. 다트 핀이 쏜살같이 윤태희의 귓가 부근으로 날아들었다. 그러자 윤태희가 고개를 옆으로 확 기울이며 다트를 피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

시간이 멈춘 것처럼 싸한 정적이 흘렀다. 고개를 확 젖혀서 다트를 피한 윤태희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초면에 이러시면 곤란한데.” 윤태희가 희미하게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자기야! 괜찮아?”

굳어있던 신지혜가 깜짝 놀라며 윤태희에게 달려갔다. 신지혜가 인상을 쓰며 윤태희의 뺨을 확 붙잡았다. 놀라서 윤태희의 얼굴을 살펴보던 신지혜가 홱 재겸을 돌아보았다.

“뭐 하는 거야? 다칠 뻔했잖아!”

재겸이 또렷한 눈으로 윤태희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죄송… 제가 밤눈이 어두워서요.”

방금 건 시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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