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84)화 (184/348)

#184

재겸은 차창 너머로 쏜살같이 흘러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번 정류소는 종로3가, 종묘입니다. 다음 정류소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재겸은 익숙한 손길로 하차 벨을 눌렀다.

날이 화창한 오후, 3일 만의 출근이었다.

어젯밤 재겸은 유남생과 함께 비빔밥을 먹으며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오랜 세월을 알고 지낸 정주와 메산이에게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고민을 토로하지 못했지만,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인 유남생에게는 오히려 속에 담긴 진솔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재겸은 어젯밤, 많은 생각을 했다.

유남생은 앞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이유가 아니라, 그냥 ‘살고 싶다’라는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나 재겸은 여전히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다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변함없는 사실은 이러나저러나 저를 죽여줄 수 있는 건 윤태희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이렇게 끝낼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든 윤태희를 만나서 제대로 담판을 지어야 했다. 본청에 도착한 재겸은 사무실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이틀 무단결근을 하고 사무실에 들어가려니 왜인지 살짝 긴장되었다. 출입키를 찍고 사무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강이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겸이!”

강이빈은 화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무시무시한 얼굴에 재겸은 기가 팍 죽었다. 그에 강이빈은 재겸을 붙잡고 왜 이틀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느냐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무섭게 다그치기 시작했다. 강이빈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니, 화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재겸을 걱정하고 있었다.

강이빈은 오늘도 재겸이 본청에 오지 않으면, 재겸의 집에 찾아가 보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강이빈의 기세에 위축된 재겸은 우물쭈물하며 몸이 좀 안 좋았다고 핑계를 댔다.

“그럼 연락이라도 해줬어야지! 누나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느에….”

“재겸아, 너도 알겠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이렇다 보니 연락이 안 되면 가슴이 철렁해서!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귀신이 해코지라도 했나, 오만 생각이 다 든단 말이야!”

“느에….”

재겸은 공손한 자세로 두 손을 모으고 서서 한참을 혼났다.

“어쨌든 재겸아, 어쨌든 별일 없었다니 정말 다행이야.”

계속되는 야단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표지호가 슬쩍 끼어들어서 정리에 나섰다. 다음부터 몸이 아프거나 사정이 생기면 미리 말하라고, 팀원들이 애정 어린 당부를 했다.

재겸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한참 만에 풀려난 재겸은 휘청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갔다. 크게 혼나긴 했지만 왜인지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살짝 싱숭생숭했다. 재겸은 이마를 긁적이며 힐끔, 수석실에 시선을 던졌다. 수석실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을 보니 윤태희는 아직 출근 전이거나 잠시 자리를 비운 듯했다. 재겸은 일단 제 할 일을 하며 윤태희가 올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벌써 저녁 8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그때까지도 윤태희는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재겸은 옆자리에 앉은 고 주임에게 말을 붙였다.

“고 주임님, 수석님은요?”

고 주임이 “아. 수석님?” 하더니 수석실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아, 재겸이 넌 모르겠구나. 수석님 일주일 휴가 내셨어.”

뭐? 재겸의 낯이 흠칫 굳었다.

“휴가를 왜… 언, 언제부터요?”

“너 회사 빠진 첫날에. 그때 사무실 오시자마자 급한 일 생겼다고 며칠 연차 쓰신댔거든. 이번 주는 안 오실 거야. 서류 올리거나 보고할 거 있으면 표 선임님한테 말하면 돼.”

즉, 윤태희도 이틀 전부터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겸은 낭패감에 휩싸였다.

그렇다면 윤태희는 지금 집에 있다는 건가? 재겸은 인상을 썼다. 윤태희가 휴가를 썼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정확히 무슨 이유로 휴가를 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그날 심하게 싸워서 그런 건가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물어볼 것을 그랬다.

어쩌지? 만나서 담판을 지어야 하는데…….

이번 주 내내 출근하지 않으면 어떻게 만나야 하는 거지? 윤태희 집에 가봐야 하나? 집이 어디라고 그랬더라? 아니면 그냥 먼저 연락을 해볼까? 재겸이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어?”

그때,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김세민이 건너편에서 외마디 소리를 냈다.

“왜 그래?”

그에 팀원들이 파티션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관심을 보였다.

“이거 수석님 아니에요?”

김세민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저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팀원들이 김세민의 자리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중에는 당연히 재겸도 끼어 있었다.

“어디 봐봐.”

김세민이 휴대폰을 내밀자, 팀원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네! 수석님 맞는 것 같은데?”

김세민은 평소 SNS를 즐겨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SNS 계정을 탐방하는 과정에서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너무나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것이었다.

장소는 어느 카페로 보였다. 정중앙에서 어떤 여성이 브이 자를 한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 주인공은 혼자가 아니었다. 주인공 옆에는 앞머리를 내리고 사복 차림을 한 윤태희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휴대폰을 하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

사진 속의 윤태희를 보는 순간, 재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 뭐야! 이거 누가 올린 사진이야?”

“나 이 사람 알아. 연예인 맞지?”

팀원들이 웅성거리자, 김세민이 설명을 했다.

“신지혜라고, 모델 출신인데 꽤 유명한 사람이에요.”

신지혜는 SNS에서 화제성이 높은 인플루언서였다.

“와, 대박.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지?”

윤 수석이 유명인과 함께 카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라 이렇게 유명인의 SNS를 통해서 사진으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팀원들이 매우 신기해하며 사진을 들여다볼 때였다. 고준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허어, 그럼 내가 아까 본 사람이 수석님 맞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저 아까 낮에 가로수길 갔었는데, 수석님이랑 비슷하게 생긴 어떤 남자가 여자랑 팔짱 끼고 지나가는 거 봤거든요. 근데 얼핏 봐서 수석님이랑 닮은 사람이겠지, 하고 넘겼는데 이 사진 보니까 수석님 맞는 것 같은데요? 팔짱 끼고 있던 여자도 이 사람 맞는 듯.”

다시 보니 인상착의도 비슷하다며 고준형이 덧붙였다.

“뭐? 진짜야?”

팀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헐! 여기 카페 위치도 가로수길 맞아요.”

“팔짱 끼고 있었으면 백퍼 아니야?”

“대박, 진짜 둘이 사귀나 봐.”

재겸은 굳은 얼굴로 가만히 서 있다가,

“그, 그런 건 아닐걸요….”

순간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그러자 사귀네, 아니네,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던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재겸을 향해 쏠렸다. 이목이 쏠리자 재겸이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왜냐면 윤태희는 남색가다. 그리고 그 새끼는 나를 좋아한다고 그랬는데….

재겸이 어물어물 말을 흐리자, 표지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보탰다.

“하긴, 사진 한 장만으로는 모르지. 진짜 엄청 친한 친구면 사귀지 않아도 팔짱 끼고 다니더라. 그리고 사귀는 사이면 더 다정하게 찍지 않았을까? 그냥 아는 사이일 수도 있지.”

그 말에 다들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어? 지금 사진 또 올라왔다!”

그때, 김세민이 휴대폰을 들고 있던 놀란 얼굴로 말을 뱉었다.

카페에서 찍은 사진은 오늘 낮에 올라온 것이었다. 늦은 저녁이 되어 자리를 옮겼는지, 술집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찍은 새로운 사진이 올라왔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온갖 값비싼 술이 쫙 깔려 있었는데, 턱을 괴고 어딘가를 보고 있는 윤태희의 옆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진만 달랑 올라온 게 아니라 아래에 글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우리 자기는 옆얼굴이 잘생겼어]

우리 자기!

확신의 단어에, 팀원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

“…….”

잠시 정적이 흘렀고,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귀네.”

재겸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자기’라는 호칭은 재겸도 알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으레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 서로를 ‘자기’라고 부르는 장면이 자주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강이빈이 인상을 쓰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씨. 짜증 나. 알고 싶지 않았어. 괜히 봤어.”

“뭐야, 강이빈. 네가 왜 짜증을 내냐?”

표지호가 놀리듯이 묻자, 강이빈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아, 그런 게 있다고! 말해봤자 네가 알아?”

“맞아요. 저도 짜증 나요.”

그러자 김세민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민아. 넌 또 왜 그래? 넌 애인 있잖아.”

“뭐랄까, 만인의 연인 같은 그런 느낌 있잖아요.”

“역시, 세민아! 정확해.”

강이빈이 격렬하게 동의를 표하며 말을 보탰다.

“내 것도 아닌데 왠지 뭔가 뺏긴 것 같은 느낌.”

순간, 재겸은 왜인지 강이빈의 표현이 마음에 금세 와닿았다.

“…….”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임에도 윤태희의 사생활은 베일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팀원들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대는 가운데서 재겸은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재겸의 마음속에 가득 차오른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그런데 이 배신감은 윤태희가 말을 바꿨을 때 느꼈던 배신감하고는 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뭔가 더 끈적끈적하고, 어둡고, 불쾌했다.

재겸은 지난 이틀 동안 틀어박혀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째서 이 삶을 이어가야 하는지, 이 약속을 깨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고민하고 있었다. 윤태희도 며칠째 출근을 하지 않았다기에 혹시 저처럼 힘들어하고 있는 건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은 재겸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힘들어하기는커녕 윤태희가 다른 사람과 함께 차를 마시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나도 너 좋아하고 싶지 않았어.’

윤태희와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어쩌면 윤태희도 스스로의 마음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리고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렸다.

모두가 왁자지껄한 사이, 재겸은 김세민에게 다가가 공손히 물었다.

“지금 여기 사진에 나온 술집이요, 어디에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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