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강이빈은 석주련의 명령에 따라 재겸을 데리고 아트센터 밖으로 나왔다. 행사가 취소되자 아트센터 주변은 귀가하는 방문객들로 인해 아주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강이빈은 윤태희의 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향했다.
윤 수석 대신 운전석에 오른 강이빈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차의 시동을 켰다. 강이빈이 이끄는대로 따라온 재겸도 말없이 조수석에 올랐다.
강이빈은 차의 시동을 걸어놓고도 좀처럼 차를 출발시키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낯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강이빈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강이빈은 아까 전부터 넋이 나간 상태였다.
석주련과 통화를 나눈 이후로 확실하게 깨닫게 된 사실 하나는, 최 부장이 지시한 임무가 축역부 나자를 빼돌리기 위하여 나례청 내부에서 누군가가 일부러 꾸며낸 일이라는 것이었다.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덫인지 함정인지 분간도 못 해? 등신같이 귀기도 틀어막힌 새끼들이 거기서 뭘 하겠다는 거야! 잡힌 놈은 내버려 두고 남은 놈들이라도 나와.’
물론 석주련은 강이빈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석주련도 이번 임무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는 것, 암행부 부장이 중간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것, 그리고 귀기를 쓸 수 없는 몸 상태가 된 것을 미루어볼 때 여러가지로 석연치 않은 지점이 있었다. 일부러 덫을 쳐놓고 유인한 것이 틀림없었다.
“윤 수석님이 지금까지 본청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셨는데…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버리고 오라는 게 말이 돼?”
핸들을 붙잡은 강이빈의 손에 부들부들 힘이 들어갔다.
축역부 수석씩이나 되는 사람을 이렇게 팽할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기만 했다. 아니, 애초에 나례청이 이런 식으로 뒷통수를 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례청을 위해 일하는 같은 나자를 상대로 본청에서 음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나례청에 충성하던 강이빈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균열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석주련이 워낙 강경하게 복귀를 명령했기 때문에, 강이빈은 차마 석주련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러나 분노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세 명 중 두 명이라도 돌아오라는 상관의 명령을 머리로는 이해했다. 그러나 가슴 한 켠에서는 엄청난 반발심과 실망감이 횃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내부에서 꾸민 일이면, 제구부에서 만든 귀기 마비 스프레이를 웰컴 드링크에 섞어 넣은 게 분명해. 왜 그땐 생각을 못 했지?”
대체 윗선에서 뭐라고 명령을 한 건지는 몰라도 석주련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도 화가 났다. 일방적인 명령과 함께 통화가 끊긴 이후로 석주련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간 나자로서 가져온 가치관 일체가 전면으로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석주련도 어쩌지 못하는 것을 보면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일 가능성이 컸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강이빈이 차를 출발시켰다.
원래대로라면 혼자 출동했어야 할 강이빈이 윤태희와 동행하게 된 계기는 아주 단순했다. 강이빈의 차는 현재 카센터에 맡겨 수리 중이었다. 때문에 누구라도 좋으니 오늘 하루만 자차를 빌려달라 부탁했더니, 사정을 전해들은 윤태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빌려주는 것은 물론이요, 함께 출동하자고 한 것이었다.
윤태희는 늘 부하 직원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상관이었다.
생각해보면 모친의 병원비를 부담해 주었을 때도 그랬고, 얼마 전에 모친이 쓰러져 병원에서 연락을 받았을 때도 그랬다. 윤태희는 선뜻 자신이 다녀올 테니 어서 병원에 가보라며 강이빈이 배정받은 사건에 출동하여 대신 일을 해결해 주었고, 그 임무로 인해 윤태희는 호된 감기에 걸려 며칠간 병가를 냈었다.
강이빈은 그런 윤태희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죄책감이 무거운 바위처럼 가슴을 아프게 짓눌렀다. 이 모든 일이 저로 인해서 벌어진 일인 것만 같았다.
“이번 일은 원래 나 혼자만 출동하는 건이었는데, 괜히 수석님한테 말을 꺼냈어… 원래 내가 왔어야 하는 건데… 내가 붙잡혔어야 하는 건데….”
분개하던 강이빈은 결국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나 때문이야. 수석님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어떡해….”
강이빈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과격하게 윤태희의 세단을 몰았다.
마음만 같아선 지금 당장 건물 안으로 돌아가서 윤 수석을 꺼내오고 싶었다. 그러나 귀기를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귀신을 상대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윤 수석은 따로 챙겨온 무기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귀기까지 마비되었으니 범인과 진배없는 상태였다. 그렇게나 경호 인력이 많은 곳을 맨몸으로 뚫고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이빈이 스스로를 자책하는 동안, 재겸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재겸이 알고 있는 것은 앞뒤 상황이야 어찌됐건간에 현재 윤태희가 제발로 함정에 빠져서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 정도였다.
사실 재겸은 원래 나례청을 불신했으므로 이 상황이 딱히 놀랍진 않았다. 나례청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정한 집단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강 주임님. 걱정하지 마세요. 윤 수석님은 멀쩡히 돌아올 거예요.”
정면을 응시하던 재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이빈을 바라보았다. 재겸은 눈에 띄게 침착했고,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강 주임님, 저 칼 좀 빌려주세요.”
“…응? 갑자기 칼은 왜….”
“그냥요. 잠깐 쓸 데가 있어서요.”
경황없이 눈물을 닦던 강이빈이 잭나이프를 꺼내 재겸에게 건넸다. 재겸은 받아든 칼을 허리춤에 끼워 넣고 운전석과 조수석 가운데 놓인 콘솔박스를 벌컥 열어젖히고 안에 담긴 잡동사니를 마구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왜… 왜 그래? 뭐 찾아?”
강이빈이 눈물을 닦으며 불안한 눈빛으로 재겸을 바라볼 때였다. 마침내 원하는 물건을 찾아낸 재겸은 대답 대신 콘솔박스를 콱 닫더니, 운전 중인 강이빈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당황한 강이빈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뭐 하는 거야!”
그와 동시에 핸들이 꺾이며 차가 옆으로 크게 휘청였다. 끼이익, 소리가 나며 바퀴의 궤적을 따라서 도로 위에는 검게 탄 타이어 자국이 났다. 강이빈이 몰던 차가 갑자기 멈춰선 탓에 줄줄이 뒤따라오던 차도 멈춰 있었다.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뒤차의 운전자들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고 뭐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차가 잠시 멈춰 섰을 때였다.
재겸은 안전 벨트를 풀더니 그대로 조수석 문을 확 열어젖혔다.
“먼저 가세요!”
조수석에서 뛰쳐나온 재겸은 도로 위를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재겸이! 어디 가!”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면하고 경황없이 핸들을 쥐고 있던 강이빈이 뒤늦게 재겸을 돌아보았다. 강이빈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그럼에도 재겸은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아트센터 앞에 도착한 재겸은 숨을 몰아쉬며 입구를 살펴보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서, 아까와는 다르게 입구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행사가 취소되면서 입구를 지키던 경호원들 역시 철수한 상태였다. 울타리처럼 생긴 철제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재겸은 철제문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강 주임이랑 본청으로 복귀해. 이건 함정이니까.’
사실, 재겸은 아까 전부터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어쩌면 윤태희는 이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무슨 생각에서 혼자 그 안에 남은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제풀에 함정에 빠져서 위험해진 윤태희를 생각하니 자꾸만 화가 났다.
그러나 아무리 죽지 않는 재겸이라 할지라도 귀기가 틀어막힌 상태에서 맨몸으로 뛰어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일단은 마비된 귀기를 되돌려놔야 했다. 다행히 재겸은 귀기를 되돌리기 위해 생각해둔 방법이 있었다.
만약 강이빈의 추측대로 무언가를 마시고 난 후로 귀기를 쓸 수 없는 것이라면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무언가를 마신 것이 체내에 남아서 그 시간 동안 귀기를 쓸 수 없는 거라면, 그만큼 피를 뽑아내면 그만이다. 죽지 않는 재겸만이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제 팔 언저리에 칼을 갖다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면 폭주를 하게 된다. 폭주는 곤란했다. 이곳은 그때처럼 동떨어진 야산도 아닌 데다가, 한동안 사경을 헤매야 하니 뒷수습도 골치 아팠다. 잠시 고민하던 재겸은 동맥이 있는 자리를 피해서 적당한 곳에 칼을 갖다 댔다. 그러나 재겸은 불현듯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재겸은 자신의 손끝이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자상으로 인한 통증 때문도 아니었고, 분노 때문도 아니었다. 떨리는 손끝을 내려다보던 재겸은 불현듯 깨달았다.
아, 나는 윤태희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운 거다…….
만약 윤태희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나 이미 늦었으면 어떡하지. 모든 일이 어그러진다면. 그래서 나는 끝내 죽지 못하고, 윤태희는 영영 떠나고,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달라진 것 없이 예전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스멀스멀 떠오르는 불길한 상념에 잠겨 있던 재겸은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슈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응, 재겸아.
연결음 몇 번 만에 정주가 전화를 받았다.
- 웬일이야? 지금 근무 중 아니야?
“어. 나 일하는 중인데 할 말 있어서.”
- 어어, 그래. 뭔데?
“나 오늘 많이 다칠 것 같아.”
다짜고짜 던진 말에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 …다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잠시 침묵하던 정주가 경직된 목소리로 말했다.
“미리 말했으니까 이따가 놀라지 말란 소리야.”
- 잠깐만. 잠깐만… 재겸아! 너 지금 어딘데…!
“걱정하지 마. 이따 보자. 메산이한테도 말해줘.”
재겸은 정주의 다급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전화를 끊었다. 다시 손에 나이프를 쥐었다. 나중에 정주랑 메산이가 화는 좀 내겠지만, 어쨌든 미리 이야기했으니 된 거겠지.
휴대폰을 응시하던 재겸은 무감한 얼굴로 아트센터 건물을 바라보았다. 여기 어딘가에 윤태희가 있다. 네가 죽으면 전부 끝이니까, 나는 너를 지켜줘야만 한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번엔 뒷생각 하지 말고 확실하게 하자.
재겸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잭나이프를 제 어깨에 박아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