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불 (169)화 (169/348)

#169

“잡힌 놈은 내버려 두고, 남은 놈들이라도 나와. 이건 명령이야.”

축역부장실로 돌아온 석주련은 굳은 얼굴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너른 축역부장실은 적막했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묘하게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석주련은 마른 세수를 하며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주련아. 청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다.’

최원영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머릿속이 멍했다.

‘왜 나한테 미리 얘기하지 않았지?’

‘청장님이 너 모르게 일 진행하라고 하셨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석주련은 뒤통수를 맞은 듯한 큰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나례청장은 저 몰래 최원영에게 축역부 나자 한 명을 바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에 최원영은 가짜 임무를 꾸며서 축역부 나자를 함정에 빠뜨리고, 빼돌리려고 했다. 그 목적은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그제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내부에서 처리하지 않고, 바깥으로 유인하여 나자가 아닌 외부인의 손에 맡긴 이유는 단순했다. 같은 나자들끼리 위해를 가할 수 없다는 금기 때문이리라.

석주련은 최원영이 사적 목적을 추구하여 일을 꾸몄을 거라고 생각했지, 이 일에 청장이 엮여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만큼 충격이 컸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 석주련을 패닉에 빠트린 것은, 현재 함정에 빠져서 제물이 될 위기에 처한 사람이 다름 아닌 ‘윤태희’라는 사실이었다.

‘지금 덫에 걸린 먹잇감이 누군지나 알고 하는 얘기야?’

‘뭐?’

‘윤태희야. 넌 ‘제물’이랍시고 수석을 갖다 바친 거야!’

최원영은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례청장의 명령에 따라 축역부 나자를 궁지로 몰아넣긴 했지만, 설마 그 타겟이 윤태희가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물로 삼기엔 너무나 큰 거물이었다.

그에 최원영은, 자신이 원래 표적으로 삼았던 대상은 강이빈이라고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혼자서 출동하라고 했건만 강이빈은 윤 수석과 함께 현장에 나갔고, 결국 원래 계획과는 달리 틀어지고 만 것이었다.

석주련에겐 그 어느 쪽이라도 불행이었다. 청장이 내린 명령이라면 석주련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 이건 청장님 지시다. 누구 한 명 제물로 바쳤어야 하는 일이다. 윤태희가 아니더라도, 꼭 태희가 아니었어도 누구라도….

“…….”

축역부장실에 멍하니 앉아있던 석주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꾸 현기증이 났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주련은 휘청거리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석주련은 그 누구와도 동행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홀로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정해진 층수 버튼 몇 개를 동시에 눌렀다.

그러자 숫자 계기판에 의미불명의 알파벳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그 어느 층에서도 멈춰 서지 않고 한참을 올라갔다.

어느 순간이 되자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불 꺼진 어두컴컴한 복도가 펼쳐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석주련은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마치 터널 속에 있는 것처럼 어두운 와중에, 유일하게 조명을 밝혀둔 것은 저 기나긴 복도 끝에 보이는 문 하나가 전부였다.

청장실로 통하는 문이었다.

석주련은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마침내 청장실 앞에 도착한 석주련은 노크도 없이 문고리를 느리게 잡아 돌렸다. 청장실 안은 여느 중역실과 다를 바 없는 모양새였다. 축역부장실과 비교하면 약간 더 넓었다.

그러나 청장실은 온기 없이 그저 텅 비어 있었다.

석주련은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청장실 안에는 서재로 이어지는 문 하나가 더 있었고, 서재 안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옛스럽고 두꺼운 나무문이었다. 서재 안 나무문을 열자마자 너른 마당이 펼쳐졌다.

햇살이 내리쬐는, 푸른 잔디가 깔린 멋진 정원이 나왔다. 고궁의 한 건물처럼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커다랗고 장엄한 한옥이 한 채 서 있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아늑하고 푸근한 풍경이었다.

석주련은 정원을 가로질러 안채로 향했다.

“밖에 누구 왔니?”

그때, 창호지 문 안쪽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장님… 주련입니다.”

“으음, 주련이구나. 어쩐 일로 왔니?”

석주련은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섰다.

“최원영 부장에게 명령을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창호지 문을 바라보던 석주련이 고개를 숙였다.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이내 하하, 소탈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랬지. 너 몰래 움직이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결국 꼬리를 밟혔구나. 하긴, 원영이는 언제나 주련이 너를 당해낸 적이 없었지.”

“왜… 제게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네가 얼마나 아이들을 아끼고 좋아하는지 알고 있는데, 어떻게 직접 말을 하겠니. 속상할 것이 뻔한데. 너 대신 원영이한테 부탁했지.”

창호지 문 너머에서, 청장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을 했다.

“축역부 나자 한 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고요.”

“그래.”

“어째서 제물이 필요하신 건가요?”

“주련이 너도 알다시피, 선생님께서는 몇 해 전부터 몸이 예전 같지 않으셨잖니. 그래서 선생님께서 보양이 필요하다고 하신다.”

석주련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창호지를 향하던 눈이 일순 거세게 흔들렸다. 한참을 말없이 침묵하던 석주련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청장님, 지금 붙잡힌 사람은….”

석주련은 하얗게 질린 손으로 제 무릎을 움켜쥐었다.

“지금 붙잡혀 있는 아이가….”

어느 샌가부터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몇 번을 주저하던 석주련은 눈을 질끈 감는가 싶더니, 고개를 숙이며 작게 입을 달싹였다.

“태희입니다…….”

마침내 창호지 너머가 조용해졌다.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째서 석주련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청장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태희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전력이고, 아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아이입니다.”

그때였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창호지로 덧댄 문이 열렸다. 마침내 청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체구에, 삼베로 지은 한복을 입고 있는 늙은 여성이었다. 새하얀 백발을 짧게 잘라서 넘긴 청장은 아주 날카로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석주련을 바라보던 청장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저런. 하필이면 태희가 걸렸니. 운이 나쁘기도 하지.”

“그 아이가 사라진다면 너무나 큰 손해입니다. 현 상황에서 그 아이의 빈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본청 내에 아무도 없습니다.”

석주련이 엎드려 빌 듯이 머리를 바닥에 푹 숙였다.

“어릴 적부터 십 년도 넘게 곁에서 지켜봤던 아이입니다…….”

청장이 석주련을 혼내듯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련아. 일어나거라. 함부로 몸을 낮추지 말라고 얘기했잖니.”

청장의 꾸중에도 석주련은 계속 바닥에 머리를 붙이고 있었다.

“그래. 태희는 제물로 바치기엔 아까운 아이야. 네가 늘 얘기하지 않았니. 그리고 주련이 네가 그 누구보다도 아끼는 아이라는 것도 안다.”

잠시 말을 멈췄던 청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그 아이를 잃기 싫을 테지. 태희가 제물이 된다는 건 내게도 참 유감스러운 일이야. 그러나 주련아, 내가 예전부터 늘 말하지 않았니?”

잠시 말을 멈춘 청장이 석주련의 고개 숙인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석주련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있느라 마루에 코가 닿을 듯했다.

“꽃잎 한 장조차 정확하게 제자리를 찾아서 떨어진다.”

“…….”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것이지.”

“…….”

“하필이면 태희가 그곳에 가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지 않겠니.”

석주련의 얼굴 아래, 마루 위에 물방울이 툭, 툭, 떨어졌다.

“주련아, 너 우는 거니?”

결국 청장이 허허 웃으며 석주련의 뺨을 잡아서 고개를 들게 했다. 석주련은 입술을 꽉 깨문 채 표정없이 조용히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청장은 석주련의 뺨에 손바닥을 갖다대며, 따듯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었다. 허리를 굽혀 석주련의 눈물을 닦아준 청장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가, 일어나거라.”

석주련은 제 얼굴 앞에 내밀린 주름진 손을 바라보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살갗이 에일 듯한 혹한의 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날에도 이 손을 본 적이 있었다. 무당의 집에 팔려가 빛 한점 들지 않는 광에 갇혀 있다가 도망쳐 나왔을 때의 일이다.

어린 석주련은 어둡고 추운 밤거리를 달리고 달려 쓰레기로 가득한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그때 석주련의 눈앞에 나타난 청장은 근사한 한복 위에 멋진 누빔 코트를 입고서, 쪼그려 앉아 떨고 있던 석주련을 향해서 이렇게 손을 내밀었었다.

‘아가. 일어나거라.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

“주련아. 명심해라.”

주련아. 너는 함부로 고개 숙이지 말 것이며, 너는 늘 내려다보아야 한다. 그 누구에게도 머리를 조아리지 마라. 누구 앞에서든 당당 하라. 언제나 싸워서 이겨라. 남의 말을 뒤따르지 말고, 남이 네 말을 따라오도록 하라. 그리고…….

“세상의 섭리를 거스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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