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이른 아침, 단주 윤태희는 아침 일찍부터 누각을 찾았다.
“오셨습니까?”
산 초입에서부터 단주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대기하고 있던 패현은, 머리를 조아리며 단주를 맞이했다. 단주는 으레 누각에 올 때면 그러하듯이 언제나처럼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단주는 큼지막한 검은색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면으로 된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단주가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일찍 일어났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누각이 조용했다. 술을 좋아하는 형운은 곤드레만드레 만취하여 잠에 빠져 있었고, 새로와 흑제는 도시의 밤을 만끽하러 내려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다가와 연옥은 일찌감치 아침 산책을 나갔다고 했다.
단주는 오늘 오후 출근이었다. 누각에 들러서 일을 처리하고 곧바로 본청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집을 나섰지만, 운전하고 오는 도중에 대충 말라 있었다. 단주는 덜 마른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며 걸음을 옮기자 패현이 곧바로 따라붙었다. 단주에게선 향수 냄새와 샴푸 냄새가 풍겼다.
“약속일 한참 지났는데. 장 회장이 돈 줬어?”
단주가 물었다. 패현이 천을 덮어둔 사과 상자를 가리켰다. 천을 걷어내자 흙 묻은 상자 네 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정해진 날짜에 지정한 장소로 가보니 정말로 돈이 묻혀 있었다. 단주의 예상대로였다. 자존심을 한껏 뭉개 놨기에 의뢰를 무르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아쉬운 쪽이 지는 거라는 단주의 말이 맞았다.
“어, 새 돈이네.”
상자를 열어보니 지폐 다발이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손에 잡아 보니 아주 빳빳했다. 돈다발을 들고 탁탁 두드리며 개수를 세던 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액수는 얼추 맞는 것 같네.”
선금을 치렀다면 의뢰를 해결해 줄 차례였다. 살을 날리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단주는 제웅(짚인형)을 매개로 살을 날리는 방식을 선호했다.
“제웅 좀 가져다 줄래?”
패현이 다른 방으로 제웅을 가지러 간 사이, 단주는 탁자 앞에 앉아 작업을 준비했다. 손끝에 상처를 내고 조그마한 종지 위에 피를 몇 방울 떨어트렸다. 거기에 경면주사를 섞고, 닥나무로 만든 괴황지를 펼쳤다. 단주는 자신의 피와 경면주사를 섞은 새빨간 물감으로 괴황지에 의뢰인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었다.
조그마한 붓으로 바르게 획을 긋고 한자를 적어 내려갈 때였다. 후드티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단주는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김재겸 님이 하트를 보냈습니다. (방금 전)
“…….”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액정을 바라보던 윤태희가 어느 순간, 탁자 위에 스르륵 엎어졌다. 윤태희는 한쪽 팔에 턱을 대고 엎드렸다. 마치 잘 간직한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속눈썹을 내리깔고 액정에 떠오른 문장을 꼭꼭 씹어 읽었다.
“하트를 보냈습니다….”
오전 7시 23분. 지금 일어났구나.
재겸은 매일같이 성실하게 프렌즈팡을 하고 있었다. 하트를 보내온 시간 간격을 보면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재겸은 자기 전에도 프렌즈팡을 하고, 눈을 뜨자마자 프렌즈팡을 했다. 한 시간마다 친구에게 하트를 보낼 수 있는데,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못해도 하루에 열 개 이상의 하트가 날아왔다.
재겸이 보내준 하트를 들여다보다가, 윤태희도 하트를 돌려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윤태희가 손에 든 휴대폰을 움켜쥐며 팔에 이마를 묻었다.
“…….”
갑자기 위가 쥐어짜듯이 아팠다.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에 뼈대가 불툭 솟아올랐다. 격렬한 통증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윤태희는 다른 손으로 윗배를 감싸 쥐며 탁자 위에 상체를 엎드렸다. 제웅을 갖고 오던 패현이 빠르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따듯한 차 한 잔만 갖다 줄래.”
“어디가 아프십니까?”
“속이 아파….”
꽉꽉 감정을 가둬 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열고 난 이후로, 윤태희는 이를 데 없이 유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종종 이렇게 나락으로 처박히는 기분이 든다.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온몸을 휘감기 시작하고, 갈급한 심정을 삼키면 위가 쥐어짜듯이 아팠다. 단주는 허리를 숙이고 고통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충만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결핍된 오늘이 이어진다.
성급하면 일을 그르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윤태희는 자꾸만 초조해졌다. 매일 문헌실을 드나들며 불로불사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 헤매고 있었으나 아직은 요원했다.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쯤 지나자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계속 엎드려 있던 단주가 덜 마른 머리를 뒤적거렸다. 그때, 패현이 따뜻한 차를 내왔다. 단주가 패현에게 물었다.
“뭐 좀 알아냈니?”
차를 탁자 위에 내려놓던 패현이 멈칫하며 단주를 바라보았다. 단주는 드물게 초조해하고 답답해하는 기색이었다. 불로불사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라고 명령을 내린 그 날 이후로, 단주는 이삼일에 한 번씩 패현을 불러서 진척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그마저도 인내한 결과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행히 오늘은 나름의 수확이 있었다.
“전설 속의 인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어?”
단주가 설핏 인상을 구겼다.
“예, 아주 오래전에 거문도 근처에 서식하던 인어 무리가 있었는데, 영물인 인어의 고기와 피를 마시면 불로불사의 몸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반쯤 엎드려 있던 단주가 패현을 응시했다.
“전설뿐일지도 모릅니다만, 인간들이 인어를 무차별적인 포획하여 지금은 거의 절멸한 상태라고 합니다. 당시 마지막으로 어린 인어 두 세 마리를 봤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인어를 조사하면 ‘불로불사’에 관한 실마리가 있을 듯합니다.”
인어? 인어라…….
생각에 잠겨 있던 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속해 줘. 인어를 추적해.”
단주가 탁자 한쪽에 올려두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윤선오의 동화책이었다. 책갈피처럼 끼워두었던 폴라로이드 사진을 꺼냈다. 단주는 언제부터인가 누각에 올 때마다 저 사진을 꼭 꺼내 보곤 했다. 사진을 들여다보던 단주가 말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앞으로 두 달이야.”
팔에 뺨을 묻고 있던 단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즉, 서두르라는 의미였다. 언제나 느긋하고 태평하던 단주가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아주 낯선 일이었다. 패현이 아는 단주는 귀신보다도 귀신 같은 인간이었고, 오로지 복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소년의 저주를 푸는 일을 복수와 같은 선상에 올려두었다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자를 사랑하십니까?”
패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단주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즉답에 패현이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년은 복수를 위한 도구이자 단주의 장기 말일뿐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친구로도 남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이더니,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말없이 서 있던 패현이 놀라워하며 입을 열었다.
“만약 기간 안에 방법을 못 찾는다면 그때는 어떡하실 겁니까?”
“약속을 깨뜨려야겠지.”
패현은 단주와 소년이 한 약속을 알고 있었다.
“그자와의 약속을 어기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겠다는 얘기야.”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패현이 의아한 눈을 할 때였다.
“방상시의 탈이 없으면 애초에 약속을 지킬 수 없으니까.”
잠시 말을 멈춘 단주가 무미건조한 어투로 덧붙였다.
“방법을 못 찾으면 탈을 중간에 훔칠 거야. 벽사단의 단주로서.”
패현이 멈칫하며 단주를 바라보았다. 단주는 소년에게 자신이 단주라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소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게 아니면 곁에 둘 방법이 없어.”
단주가 팔에 이마를 뭉개며 중얼거렸다.
“…….”
잠시 고민하던 패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자의 마음을 얻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단주가 패현을 쳐다보았다.
“불로불사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아보고 있다고, 곁에서 떠나지 말고 오래도록 함께하자고 솔직히 말하는 것은 어떨는지요? 아니면 그 아이가 자신 본인 의지로 이 땅에 남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으니까.”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단주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패현은 새삼스레 깨달았다. 윤태희는 마음이 고장 난 인간이었다. 보란 듯이 약속을 어기고 번복한다면 소년과의 사이가 틀어질 것이 뻔하니 일부러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혹여 그러다가 미움을 받는 한이 있어도 상관없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곁에 붙들어 놓겠다는 욕심. 그리고….
마음을 얻을 자신이 없으시군요.
단주는 보통의 인간과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평범한 보통의 인간이라면 애초에 강제로 붙들어 놓는 것을 방법이랍시고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 스스로가 자신의 곁에 남기로 결심하게끔,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단주는 그 가능성 자체를 일절 생각지 않는 듯했다. 복수를 위해 언제나 목적에만 충실했던 인간이 가질 법한, 어둡고도 메마른 발상이었다.
패현은 처음으로 눈앞에 있는 제 주인을 향해 ‘가엾음’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귀신인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을 이 인간은 모르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인간을 손쉽게 다루지만 정작 마음을 얻는 법은 떠올리지 못하는, 망가진 인간이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패현이 빙그레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태희 님께서는 항상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분이셨지요.”
윤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